|
<사띠(念, pali. sati, 영어 mindfulness)란>
빠알리어 사띠(sati)는 불교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단어이다.
원래 의미는 주의, 조심, 조심스러움, 주의 깊음, 잊지 않음, 기억 등
여러 의미가 있고, 마음의 기능으로 이해할 경우에도
여러 가지 의미로 번역돼 혼선을 빚기도 한다.
사띠(sati)는 인식대상이 마음의 거울에 이미지(象)로 비치는데,
그 반영된 상을 알아차리는 기능을 말한다.
그래서 위빠사나 명상법에서는 ‘보다(있는 그대로 쳐다보기)’,
‘마음이 대상을 잘 알고 있는 상태’, 혹은 ‘관찰하다’ 등을 의미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마음챙김(초기불전연구원), 마음집중(거해 스님),
깨어있음(혜천 스님), 주의집중, 마음새김, 알아차림, 정념(正念),
염처(念處), 기억, 관찰 등 다양하게 번역되고 있어서 혼선을 주고 있다.
그러나 이 말들 중에서도 ‘마음챙김’으로 가장 많이 쓰고 있다.
그런데 ‘마음챙김’이라는 번역이 잘못됐다고 강력히 이의를
제기하는 분도 있다.
특히 인경 스님은 “‘마음챙김’은 정체불명 수행법”이라고 한다. 들어보자.
영어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의 번역 문제는
불교정신과 심리치료에 대한 기본적인 철학과 취지와 관련된
중요한 사안인데, ‘마음챙김’이란 용어는 불교의 근본정신과
심리치료의 의미에 대해 심각하게 왜곡시킬 수 있는 위험이 많다.
마인드풀니스는 ‘사티(sati, 念)’에서 유래된 번역어지만
최근 방한했던 미국 하버드대 크리스토퍼 거머 교수처럼
‘통찰명상’으로 번역되는 위빠사나에 더 가까운 의미로 사용한다.
그리고 위빠사나란 심리현상을 거리를 두고 ‘존재하는 그대로’
지켜봄을 의미하는 것이지 마음을 챙긴다는 의미가 결코 아니다.
따라서 마인드풀니스를 마음챙김으로 번역하는 것은
불교명상과 심리치료의 근본정신에 명백하게 어긋난다.
마음챙김이 무상(無常)과 무아(無我)설과도 어긋나는 정체불명의 수행법이다.
우리는 순간순간 생멸하는 심리현상을 챙겨서 가져지닐 수가 없고,
다만 그것을 ‘알아차리고’ 본래 존재하지 않음을 ‘통찰’하는 게
바로 불교의 수행정신이다.
그런데 마음챙김이란 번역어는 심리현상을 수용하고 허용하기보다는
반복적으로 챙김을 강조함으로써 결국은 자기를 관리하고
통제하는 방식을 강화시키는 것으로, 자기 몫을 챙기고 관리하는
소유양식을 부추기는 현대 자본주의의 병폐와 크게 다르지 않다.
때문에 ‘챙김’은 명상의 기술이 아니라 번뇌의 일부이고
심리치료가 아닌 환자의 증상에 해당한다.
불교명상은 어둠(無明) 속에서 마음현상이 일어나면
곧 ‘알아차리고’ 그것을 조작하지 않는 채로 어떤 판단도 없이
지켜봄으로써 그것들이 본래 존재하지 않음을 통찰하고
경험적으로 내려놓게 되는 것이며, 챙기는 게 아니라 내려놓는 것,
이것이 불교명상과 동양적 심리치료의 본질이다.
이러한 반론이 있음을 마음에 담아 논의를 계속해보자.
sati란 ‘지금의 순간에 알아차리고 있는 것’이므로 망상하지 않고,
잡념에 빠지지 않고, 할 일에 제대로 몰두한다.
그것만을 집중해서 알아차림 하는 것이다.
내일의 일이나 잡다한 것은 생각하지 않고 지금 접시를 씻고 있으면,
일단 접시를 씻는 일에만 집중해서 철저하게 그것을 행한다.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지금의 순간, 지금의 상황, 자신이 놓여있는 현재의 상황을 알아차림하고 있는 것이다.
제대로 알아차림하고 있는 것이다. 깨어있는 것이다. 그것이 사띠다.
그렇게 집중해서 알아차림하고 있으면 거기에서 지혜가 솟아 나온다.
즉, sati가 있다면 항상 언제나 갖가지 지혜가 솟아 나온다.
지혜가 솟아나면 날수록 인간은 원기가 왕성해지고, 인간 그 자체가 성장한다.
그러므로 sati로 살아가면 무엇을 보든 어떤 새로운 발견이 있게 된다.
새로운 발견이 있으면 인생은 지극히 즐겁고 밝으며 활발해진다.
그러한 이유로 sati는 대단히 중요한 기능이다.
그리고 사띠는 눈(육안)으로 보는 것이 아닌 마음으로 보는 것을 의미한다.
즉, 육안(肉眼)이 아닌 심안(心眼)을 뜨기 위해 행하는 연습이다.
예를 들면, 내가 꽃을 보려고 하는데, 갑자기 애국가가 울려 나와
마음이 그 소리 쪽으로 향해버리면, 이때 마노(mano, 意根)가
귀를 지원해서 애국가라는 소리에 주목하게 한다.
즉, 마노가 눈을 지원해서 꽃을 보게 하지 않고 귀를 지원해서
소리에 주목하게 한 것이다. 이때 마노란 몸과 더불어
대상과 직접 만나는 마음을 말한다.
사띠는 이렇게 내 마노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알아차리는 것,
그것을 말하는데, 그걸 알아차림, 마음챙김… 이라고 부른다.
즉, 내 마노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알아차리는 것,
마음을 챙기는 것, 마음에 새기는 것, 그것이 바로 사띠이다.
여기 김철수가 스트레스로 불만이 가득해 있다고 하자.
그때 갑자기 강아지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그 강아지에게 화풀이하려고 다가가서
발길로 걷어차려고 하는 순간, 그 때 그 마음을 알아차리면,
즉 내가 화가 나서 강아지를 걷어차려고 한다는 그 순간의 마음을 알아차리면, 그것이 바로 사띠이다.
이렇게 사띠는 마노(mano)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래서 알아차리는 것, 마음을 챙기는 것, 마음을 새기는 것, 발견하는 것이라고 번역한다.
그런데 내가 강아지를 걷어차려는 그 순간 이 마음을 알아차렸다고 해도,
강아지를 걷어차고 나서는, ‘아, 내가 살상이라는 악업을 지었구나,
남을 해치고 괴롭히는 악업을 지었구나.’라고 후회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사띠의 힘이 약하기 때문이다.
사띠가 덜 단련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띠는 일종의 기능이라고 할 수 있다.
기능은 닦아 익혀서 강하게 할 수 있다. 마치 팔에 알통을 생기게 하고 싶다면
아령을 계속 들어 올리는 훈련을 해야 하듯이, 마노를 제어하는
사띠의 힘을 기르기 위해서는 계속 닦아 익혀야 한다.
‘이것은 악행이다. 이것은 선행이다’라고 분별한 것을 알아차려서,
바르지 않은 것은 버리고 바른 것으로 돌아가려 하고,
바른 것은 유지하고 지속하게 하는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
마치 아령을 계속 들어 올리는 것을 통해서 마침내 팔의 알통이 생겨나듯이,
그렇게 마노를 제어하는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
그리하여 마노가 더 이상 그릇된 짓을 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수행이다.
그런 수행을 계속해야 사띠가 강화된다.
사띠(sati)의 이해는 sati 단독의 이해만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sati가 현상을 바르게 기억하고 대상에 다가가서 집중하기 위해서는
장애의 요소로부터 벗어나야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장애를 물리치는 명상수행을 함께 해야 한다.
이러한 조건들이 구비됐을 때, sati는 현상의 바른 앎,
즉 조건에 의해 생멸하는 현상의 법들을 삿된 견해 없이
있는 그대로 인지해 낼 수가 있다.
이렇게 복잡한 의미를 내포해 있으므로 사띠의 정확한 개념을
확보하려면 전문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다음은 단현 님의 글을 중심으로 정리한 것이다.
사띠(sati)란 = 사념처 수행으로 마노(마음 정신) 길들이기이다.
마노가 잘 단련돼 있는 상태,
마노가 잘 훈련돼 흔들림 없는 상태를 말한다.
아직 우리나라에는 사띠의 개념이 바르게 정립되지 못해
이해함에 어려움이 있다.
알아차림, 마음챙김, 마음새김, 깨어있음, 주의깊음, 주의집중 등
많은 번역어가 있지만 그 어느 것도 바른 번역이라 할 수 없다.
이 모든 번역어는 사띠를 “또 다른 하나의 마음”으로 보고 있으므로
잘못된 것이다. 사띠는 결코 “또 다른 하나의 마음”이 아니다.
부처님은 마음을 3가지 심ㆍ의ㆍ식(心意識)이라고 정의하셨고
잠재의식 같은 상(想, 산냐, 잔상)까지 더해도 4가지일 뿐인데,
사띠를 마노를 좌지우지하는 또 다른 마음으로 번역해서는 안 된다.
“사띠는 사념처수행으로 ‘마노(意. 정신)가 단단히 훈련된 상태’를 말한다.”
불교수행은 3가지 - 위빠사나, 사마타, 사념처수행이고,
반야, 사마디, 사띠는 이들 수행의 결과물이다.
심ㆍ의ㆍ식(心意識) 마음의 기능에 대해 모르면서
수행이나 교학을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각 마음이 수행의 과정과 결과에 어떻게 작용하는지 모르면
수행이 제대로 될 수가 없다.
사띠는 수행의 과정이 아니라 결과를 말하는 것이다.
과정은 사념처수행이다.
위빠사나 수행으로 반야(지혜)라는 결과가 생기고,
사마타 수행으로 사마디(삼매)라는 결과가 생기고,
사념처 수행으로 사띠라는 결과물이 생긴다.
위빠사나(vipassanā) 수행을 하면 반야(panna) 기능이 강화되고,
사마타(śamatha) 수행을 하면 사마디(samadhi) 기능이 강화되고,
사념처수행(四念處修行)을 하면 사띠(sati)의 기능이 강화된다.
반야가 강화되면 의식(윈냐나/vinnana)이 단단해지고(정화돼 맑아져 바른 성향으로 다져짐),
사마디가 강화되면 마음(찌따/citta)이 단단해지고(마음작용이 바르고 흔들림 없이 굳건해짐),
사띠가 강화되면 정신(마노/mano)이 단단해진다(분주하지 않고 안정됨).
이것은 마음과 수행(단련 훈련)의 공식이다.
"반야 수행하자" "사마디 수행하자" "사띠 수행하자"라는 말은 성립할 수 없다.
"위빠사나 수행하자" "사마타 수행하자" "사념처 수행하자"라고 말해야 한다.
위빠사나 수행(여실지견)으로 나에게 ‘제법은 「무상ㆍ고ㆍ무아」’라는 반야지혜가 생겨났다.
사마타 수행으로 나에게 ‘지극한 평정과 평안’이라는 사마디(삼매)의
행복이 생겨났다.
사념처 수행으로 나에게 ‘부처님의 가르침과 사유, 대상과 나의 현재를
꿰뚫어 알아 흔들림 없는 상태에 머묾’이라는 사띠가 생겨났다.
이렇게 말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여실지견) 위빠사나 수행으로
제법은 「무상⋅고⋅무아」라는 진리를 깨달아 탐욕과 악의를 버려야겠다는 반야지혜를 강화했다.
호흡을 보거나 한 대상에 몰입 집중하는 등의 사마타 수행으로 마음이 고요해지고
흔들림 없이 평정한 상태인 사마디를 강화했다.
신수심법(身受心法)의 사념처수행으로 무상ㆍ무아 해서 집착ㆍ탐욕ㆍ
악의를 일으킬 필요가 없다는 가르침을 마음 깊이 뼛속 깊이 새기는
사띠를 강화했다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
"강화하다"라는 말은 "튼튼하게 다짐" "단련됨" "훈련됨"이라는 말이다.
사념처수행이라는 과정을 통해 사띠라는 결과가 단단하게 굳어진다.
사띠는 단순한 기억이 아니라 마노에게 단단하게 새겨져 있는 기억,
즉 새김이다.
사띠(sati)라는 말의 뜻에는, 강아지가 주인에게 이미 잘 훈련돼,
향긋한 불고기 앞에서 침조차 흘리지 않고 의연하기만 한 것처럼,
주인의 말을 잘 배워 기억하고, 자기의 단련과정도 기억하며,
자기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잘 알아차리고,
주위를 잘 관찰해서 주의 깊게 마음을 챙기고 지켜서,
그 어떤 자극에도 정신(마노)이 흔들리지 않고(제어하고),
마음(찌따)이 괴롭지 않고, 의식(윈냐나, 성향)이 평안하고
한결 같아서 단단한 상태에 머문다는 뜻이다.
즉, 단순히 주인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있다는 간단한 의미가 아니라
마음 깊이 뼛속 깊이 새겨져 있다는 말이다.
이 ‘사띠’라는 단어 하나에 불교명상의 모든 것이 함축돼 있다.
즉, 위빠사나와 반야, 사마타와 사마디, 사념처수행과 사띠가
모두 함축돼 있는 명상과 동의어이다.
자신의 심ㆍ의ㆍ식을 잘 단련하는 과정과 잘 훈련된 상태(결과)를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띠는 불교수행의 최종점이고 모든 것이고 결과이다.
그래서 훈련의 결과를 의미하는 사띠(sati)라는 말을 그저
기억이나, 알아차림, 마음 챙김, 마음 지킴, 주의 깊음, 주의 집중,
잊지 않음, 깨어 있음 등의 단편적인 용어로 번역해서는 곤란하다.
따라서 ‘사띠’의 번역어로 ‘새김(모든 것이 잘 기억되고 지켜지고
집중 단련된 상태)’이 가장 적합하지 않을까 한다.
‘새김’으로 번역하면 모든 문장이 충분히 원활하게 소통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빠알리어 <아나빠나사띠(Anapanassati) 수따(sutta)>를
중국에서 <안반수의경(安般守意經)으로 번역했다.
여기에서 사띠(sati)를 수의(守意-마음지킴)로 번역하고 있다.
AD 2세기 후한(後漢)시대 안세고(安世高)가 한역했는데,
그 시대에 아주 적절한 번역을 한 것 같다. ‘마음지킴’이 ‘새김’과 같은 어감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다시 한 번 비유하자면 “주인 식탁의 음식을 먹지 않아야 한다.”라고
잘 훈련받은 강아지가, 한 순간 음식을 먹으려다가
평소 훈련받은 대로 ‘먹어서는 안 된다’고 기억(사띠)하고,
‘지금 내가 먹으려고 했구나’라고 자기 행동을 알아차림(삼빠자노) 하고,
갈등 없이 평온하게 마노를 제어하며 앉아 있는 것과 같다.
그렇다고 위처럼 마디마디 끊어서 단계적으로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이 한꺼번에 자동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잘 훈련되면 그렇게 된다.
이 비유를 통해 보면, 기억해야 알아차림 할 수 있고,
알아차린 다음 마음 챙김하고, 마음 챙겨야 마음 지킴 할 수 있고,
마음 지켜야 흔들림 없이 주의집중하고 초연할 수 있다.
평소에 항상 사띠가 확립돼 있다는 것은 기억하고 주의집중이 되는 것이고,
알아차리는 과정에 있는 것이고, 마음 챙기는 중이고, 마음 지키고 있는 것이고,
흐리멍덩한 것이 아니라 깨어 있는 것이고,
좋은 느낌과 탐욕에 흔들리는 마노를 잘 제어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한 번 사띠와 마노에 대한 개념을 정립하자.
흔히 사띠가 마노나 외부 대상의 현재 상태를 알아차리거나 파악해,
좋은 것은 유지하고 나쁜 것은 제어해, 바르게 수행하고 생활하게 하는 기능으로 알고 있지만,
이 지식은 아주 잘못된 것이다.
사띠의 기능은 조금도 그렇지 않다.
사람에게 심ㆍ의ㆍ식(心意識) 외에 ‘사띠’라는 또 다른 마음이 있어서
마노에게 이래라 저래라 명령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사념처수행으로 마노가 잘 훈련 단련 된 상태를
‘사띠’라고 한다.
사띠가 덜 된 마노는 노상 흔들린다. 사띠가 잘 된 마노는 항상 굳건하다.
알아차리고 챙기고 기억하고 유지하고 버리고 제어하는 것은
마노가 하는 것이다.
이렇게 모든 현상을 잘 처리하는 것은 사띠가 잘 돼 단단해진
마노가 하는 것이다.
사띠는 사념처수행으로 마노를 단단히 훈련시키는 과정을 말하는 것이다.
또 다른 인격을 지닌 사띠라는 것이 마노를 좌지우지 하는 것이 아니다.
마노가 단단히 기억하고 있는 상태가 사띠가 잘 된 상태이다.
마노가 단단히 알아차림하고 있는 상태가 사띠가 잘 된 상태이다.
마노가 단단히 마음 챙기고 있는 상태가 사띠가 잘 된 상태이다.
마노가 단단히 마음 지키고 있는 상태가 사띠가 잘 된 상태이다.
마노가 단단히 주의 집중하고 있는 상태가 사띠가 잘 된 상태이다.
그 어느 것도 사띠가 하는 것이 아니라 마노가 하는 것이다.
사념처수행이라는 것은 마노를 잘 단련시키는 수행이다.
잘 단련된 마노는 기억을 잘하고 알아차림도 잘하고 마음 챙김도 잘한다.
사띠는 마음이 아니기 때문에 기억할 수 없다. 알아차리지도 마음 챙기지도 못한다.
마노가 잘 수행된 상태를 일러 사띠가 됐다고 말하는 것이다.
기억하고 알아차리는 것은 마노가 하지
사띠라는 또 다른 마음이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니다.
사띠로 인해서 마노의 기억기능이 강화된다.
사띠로 인해서 마노의 알아차림 기능이 강화된다.
사띠로 인해서 마노의 마음 챙김 기능이 강화된다.
사띠로 인해서 마노의 주의집중 기능이 강화된다는 말이다.
사띠가 잘 됐다는 말은 마노의 여러 기능이 잘 작용하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출처] 블로그 아미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