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tTNjQ-2-5XU
본문 욥기 42:1-6 제목 :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욥기 42:1-6> 1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2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3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4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6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먼저 두 개의 이야기를 말씀드리려 합니다. 첫 번째 이야기는 지금 방영되는 드라마 중에 ‘지옥에서 온 판사’라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드라마 제목도 내용도 기독교적인 시각에서는 좋은 게 아닌데 지금 방영되는 드라마 중에는 꽤 시청률이 높게 나온다더군요. 지난 10회차 방영된 내용 중에 교회에 열심히 다니던 동네 아주머니가 남편도 없이, 온갖 고생을 해가며 공부하는 두 남매를 키우는데 특히 아들은 보배처럼 소중했지요. 그러던 어느 날 식당에서 일하다가 그만 아들이 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장례식장에 교회 목사와 성도들이 조문을 왔는데 이 아주머니가 떨리는 목소리로 목사에게 묻습니다. ‘목사님, 제가 헌금을 너무 적게 냈나요? 왜 하필 하나님께서 내 아들을 내려가셨을까요?’ 목사가 난처한 표정으로 ‘하나님의 크신 섭리가 있을 겁니다.’ 그랬더니 이 아주머니가 온 몸으로 절규하면서 말합니다. ‘도대체 그 섭리가 얼마나 크길래 남편 복도 없는 나에게서 이 아들마저 뺏어간단 말입니까? 그 애는 내 뱃속에서부터 하나님을 믿었던 애란 말입니다.’ 그러면서 ‘다 소용 없으니까 모두 나가세요!’ 하면서 목사와 모든 교회 사람들을 다 쫓아내 버리더군요.
또 하나의 이야기는 제가 어릴 때 교회에서 선생님에게 들었던 얘깁니다. 아빠도 없고, 얼굴과 온 몸에 심한 화상을 입은 엄마와 둘이 사는 아이가 있는데 사는 건 당연히 가난했고, 이 아이는 화상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한 엄마가 늘 부끄러웠지요. 엄마 얼굴 때문에 친구들에게 놀림을 당하는 것도 싫고, 엄마가 다른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는 것도 너무 싫었습니다. 어느 날은 너무 화가 나서 ‘엄마! 나는 엄마가 너무 싫고 창피해. 엄마가 내 엄마가 아니었으면 좋겠어. 나 엄마 바꿔줘.’ 그러자 엄마는 서랍에서 예쁜 여인의 사진 한 장을 꺼내면서 ‘얘야. 이 사람이 네 엄마였으면 좋겠니?’ ‘와 예쁘다. 이 사람이 내 엄마였으면 좋겠어.’ 엄마는 말합니다. ‘네가 두 살 때 아빠와 네가 잠든 사이에 밖에 볼일이 있어 나갔는데 그 때 집에 불이 났었단다. 집에 와보니 집이 불타고 있는데 아빠와 네가 아직 집안에 있어서 불길 속인데도 뛰어 들어가 보니까 아빠는 불 속에서 너를 껴안은 채 이미 죽었고, 그래서 나는 황급히 너를 안고 뛰어나오다가 얼굴을 커다란 불덩이에 얻어 맞아서 이 상태가 되어버렸단다.’ 이 두 이야기가 오늘의 본문인 욥기 전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겁니다.
귀한 아들을 잃었던 첫 번째 이야기의 아주머니처럼 욥이라는 사람도 성실하게 믿음의 길을 가던 의인이었지요.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시련이 몰아닥칩니다. 강도떼들이 두 차례나 몰려와 많은 재물을 탈취해 갔고, 하늘에서 불덩이가 떨어져서 또 많은 재산이 불타 버렸지요. 무엇보다 기가 막힌 것은 한명의 자녀만 죽어도 억장이 무너지는데 자그만치 아들 일곱에 딸 셋, 이렇게 열 명이나 되는 자녀들이 갑작스런 돌풍에 집이 무너지면서 모두 깔려 죽어버리고 맙니다.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욥의 온 몸에는 심한 종기가 퍼져서 손으로 긁는 것도 감당이 되지 않아 기왓조각으로 긁어대야 했고, 이런 처참한 광경을 보던 욥의 아내는 욥을 버리고 떠나 버렸지요.
이런 상황에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큰 뜻이 계셔서 이런 비극을 겪는다고 말하면 과연 답이 되거나 위로가 될까요? 이런 욥에게 세 친구들이 와서 위로한답시고 말을 건네는데 위로는커녕 욥을 더 힘들게 합니다. 친구들의 주장은 두 가지로 요약되지요. 하나는 욥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당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회개하라고 다그쳤지요. 또 하나는 이런 시련과 재난은 영적인 훈련의 의미가 있으니까 그냥 참고 견디며 받아드리라는 겁니다. 아까 첫 번째 이야기에서 아들의 죽음을 아무리 하나님의 큰 뜻이라고 말해도 받아드릴 수 없는 아주머니처럼 욥도 친구들의 이런 말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은 이런 고통을 당할만큼 큰 죄를 짓지도 않았고, 나 한 사람 영적인 훈련을 위해서 내 자식을 모두 죽이는 게 상식적으로 이해되겠습니까?
고통당한 자를 위로한다면서 함부로 하나님의 섭리나 하나님의 뜻을 들이대는 것은 조심하셔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뭘 얼마나 알기에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쉽게 말합니까? 그냥 아무 말 없이 고통당한 자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공감하면서 함께 아파하고 함께 울어주는 게 더 필요하지요.
욥과 친구들 사이에 해답도 없는 이런 식의 논쟁이 욥기 4장에서부터 37장까지 꽤나 길게 이어집니다. 그러다가 38장에 하나님이 등장하시지요. 하나님께서는 답을 주신 게 아니라 오히려 욥에게 많은 질문들을 퍼부으십니다. 그 질문은 38장에서 41장에 이르기까지 역시 많은 내용으로 질문을 하시는데 모두 세상의 근원적인 것들에 대한 질문이지요. 이 세상이 어떻게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창조되었는지, 우주만물이 어떻게 움직여지고 운영되어가는지, 그 원동력은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특히 생명체들의 그 생명의 근원이 어디이고, 무엇이 각자 독특한 생명현상을 나타나게 하고, 그 생명으로 살아가는 과정을 주관하는지, 그 외에도 지금까지 여전히 신비의 영역 속에 있는 만물의 근원과 궁극적인 깊이에 대해서 질문하십니다.
아무리 과학이 많은 것을 파헤쳤어도 세상은 여전히 신비덩어리고 내 몸도 작은 세포 하나에 이르기까지 과학이 설명한 것보다는 여전히 설명되지 않는 신비가 가득하지요. 지금 내가 여기서 왜 이렇게 존재하고 있는지 과학은 어디까지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고, 철학은 어디까지 그 근원을 밝혀낼까요? 빙산의 일각이라는 말이 있지요. 눈에 보이는 빙산은 1~2% 정도이고, 그 1~2%의 빙산이 보이기 위해서 98~9%의 보이지 않는 얼음덩어리가 물밑에 있는 겁니다.
욥이라는 한 사람의 입장에서만 본다면 지금 욥이 겪고 있는 상황은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천지만물을 지으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입장과 안목으로 넓혀가면 좀 더 이해의 폭이 넓어질 수 있지요. 아까 말씀드린 두 번째 이야기, 화상 입은 엄마의 이야기처럼 이 아이는 눈 앞에 보이는 가난한 현실이 불행하고 못생긴 엄마가 미울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내가 너무 어려서 기억하지 못해도 내가 지금 존재하고 있는 것에는 아빠가 죽어가면서 나를 안고 보호해 준 희생과 엄마가 불 속에서 얼굴을 망가뜨리면서까지 나를 살렸던 것을 알고 깨닫는데도 엄마가 계속 밉고 창피하겠습니까?
왜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와 사랑과 은혜를 알아야 할까요? 왜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을 깊이 알아야 하고 죽음을 이기신 부활의 권능을 확실히 알아야 할까요? 성경에는 상황이 좋아지고 개선되어서 행복해졌다는 얘기가 별로 없습니다. 그보다는 하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제대로 알고 깨닫게 되면서 하나님께서 지니신 뜻이 선하고 정의롭고, 궁극적으로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확신하면서 가지게 되는 기쁨과 평안과 용기에 대해서 더 많이 말하지요. 그러니까 성경의 초점은 병이 낫고 부자가 되고 소원을 이루어져서 행복해졌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세상 모든 것을 주권적으로 주관하시는 선하신 하나님, 그래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에게 초점이 있고, 그 하나님을 알고 이해하고 믿음으로 인해 내가 어떤 상황에서든 감사와 선한 삶을 지켜갈 수 있음을 성경은 말하고 있지요.
오늘 욥도 2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깨닫는 고백이지요. 좁은 나의 안목이 아니라 절대주권을 가지신 하나님, 그러나 그 절대주권으로 우리를 영원한 비극과 치유되지 못할 시련의 아픔을 주시는 게 아니라 궁극적으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심을 깨닫는 것을 보여 줍니다.
3절을 보면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마치 엄마 얼굴의 화상자국만 보고 엄마를 미워했던 철없는 아이처럼 욥도 자신이 살아왔던 삶, 그리고 자신이 당한 비극의 시각에서만 보고 자기 판단과 고집을 꺾지 않았던 무지함과 어리석음을 고백하고 있지요.
그럴 때에 마지막으로 나오는 고백이 무엇일까요? 6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회개하게 되었다는 것은 단지 뉘우치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이해했고, 그 절대주권으로 세상을 움직여가시고, 우리 각자의 모든 인생의 여정을 선하신 뜻대로 주관해 가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지금 자신의 비참한 현실을 내 안목이 아니라 하나님의 안목으로 보면서 인내하고 견딜 수 있는 힘을 얻었다는 얘깁니다. 자기주장과 판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알고 이해했을 때,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의 능력을 알고 믿고 받아드렸을 때에 어떤 처지에서도 그 상황에 굴복당하지 않고 더 풍성한 생명의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삶의 힘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본문은 말해 줍니다.
그래서 욥은 4절 후반부에서 이렇게 간구하지요.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하나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하고 믿는 것이 모든 상황을 이기고 극복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향한 참된 구원의 길을 가게 하는 강한 힘입니다. ‘내가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4절) 묻겠다는 것은 배우겠다는 말이지요. 주님을 배우기를 힘쓰고, 그래서 더욱 바르게 알아가고 깨달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