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거룩하고 복된 주의 날에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사랑하는 성도님께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말씀의 제목은 “오늘 우리에게 주신 계명”입니다.
성경을 크게 구약과 신약으로 나눕니다. 구약은 오실 메시야에 대한 약속이고 신약은 다시 오실 예수님에 대한 약속입니다. 구약도, 신약도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니 모두가 은혜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약속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계명도 있습니다. 계명은 하나님이 반드시 지키라고 명한 율례와 법도입니다. 예수님은 계명을 옛 계명과 새 계명으로 나누었습니다. 즉 구약은 옛 계명이고 신약은 새 계명입니다. 새 계명을 주시면서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비교하면 서로 사랑하데 옛 계명은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했고 새 계명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옛 계명은 자기 몸을 아끼듯 서로 아끼라고 했다면 새 계명은 예수님이 우리 위해 자기 몸을 아끼지 않고 내어준 것처럼 너희도 그렇게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더 큰 사랑(아가페 사랑)으로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의 신명기는 말 그대로 신의 명령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라’, ‘하지 말라’라고 주신 명령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직접 받은 계명입니다. 본문 5절에 보시면 모세의 역할이 나옵니다. “그 때에 너희가 불을 두려워하여 산에 오르지 못하므로 내가 여호와와 너희 중간에 서서 여호와의 말씀을 너희에게 전하였노라” 모세가 하나님과 사람의 중간에 서서 계명을 받아온 것입니다. 이때 받은 계명이 7절 이하에 나오는 십계명입니다. 그런데 신명기에 나오는 계명은 모두 육백여가지가 넘습니다. 그 육백여 가지의 계명을 파일처럼 묶어 놓은 것이 십계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신명기는 십계명을 풀어 놓은 것입니다.
흔히 계명, 율법이라고 하면 어떤 느낌이 듭니까? 대체로 엄하고 두려운 느낌을 받게 됩니다. 계명은 ‘하라, 하지 말라’이니까요. 이렇게 명령한 것은 단지 하면 좋고 안 해도 그만인 정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해야 한다, 절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계명입니다. 적어도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길 원한다면 마땅히 따르고 지켜야 하는 것이 계명입니다. 그러니 계명은 두렵고 엄한 것이 당연합니다.
십계명을 두 가지로 크게 나누면 하나님께 대한 것과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것입니다. 첫 번째에서 네 번째 계명은 하나님께 대한 것이고 다섯 번째부터 열 번째까지는 사람에 대한 계명입니다. 하나님께 대하여는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고 만들거나 절하지 말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고 안식일을 기억하고 거룩히 지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에 대해서는 먼저 부모를 공경하고 살인, 간음, 도둑질, 거짓말, 탐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에 대해서는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일을 하지 말라는 것이고 인간에 대해서는 윤리도덕법과 사회법을 잘 지켜 바르고 정의로운 사회가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십계명은 이러한 것이 죄가 되니 그리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것을 두 가지로 요약해서 말씀했습니다. 첫째는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해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했습니다(마22:37~40). 십계명은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지금 신약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가 구약의 십계명을 꼭 지켜야 하느냐는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반대로 지금 우리가 십계명을 안 지켜야 할 이유는 무엇인지 묻고 싶습니다. 십계명을 지키고 싶지 않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십계명에 어떤 문제가 있습니까. 열 가지 계명 중에 안 지키고 싶은 것이 혹 있다면 무엇입니까.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고 우상 만들지 말라는데, 우상 만들고 싶어서입니까. 부모를 공경하지 않고 싶어서 입니까. 살인하고 간음하고 싶기 때문인가요. 이러한 계명도 안 지키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이 아무리 자유로운 세상에서 살아간다 해도 기본적인 윤리 도덕, 상식과 도리를 저버릴 수 없는 것처럼 복음 안에서, 은혜 가운데 사는 성도라 할지라도 이러한 기본적인 계명들을 가벼이 여기거나 버릴 수는 없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해 지켜야 합니다. 다만 당시는 계명 중 한 번만, 하나라도 어기면 돌로 치라 했고, 하나라도 어기지 않고 반드시 지켜야만 의로운 자로 인정받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비록 우리가 지키다가 다 지키지 못하여 혹 넘어지고 실패해도 다시 돌이키고 회개하면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약시대처럼 이 계명들을 다 지킴으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보혈로 우리의 죄가 사함 받았다는 것을 믿음으로 의로워지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제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법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계명을 몰라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 그렇다면 구약 성경을 읽을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왜 십계명을 주셨을까요. 우리가 계명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 수 있도록 함입니다. 학교에서 새 학년이 되면 담임선생님이 정해집니다. 이번 선생님은 어떤 분일까 알고 싶은데 올해 처음 정근 오셔서 알 길이 없습니다. 첫 조회시간에 선생님이 몇 가지 당부를 하며 우리 반은 이것만은 꼭 지키자고 합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담임선생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와, 대게 깐깐한 분이시구나.’ 십계명이 이와 같습니다. 십계명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우리에게 알게 합니다.
십계명을 통해 하나님은 먼저 거룩한 분임을 알게 합니다. ‘거룩’이란 ‘죄와 구별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는 것은 하나님은 죄와 도무지 상관없으신 분임을 뜻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입니다. 하나님만이 죄와 상관이 없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절대 거룩’하신 분입니다. 즉 상대적으로, 거룩한 분이 아니라 ‘절대 거룩’입니다. 우리는 누구와 비교해서 그 사람에 비해 누가 좀 더 정의롭고 좀 더 선하고 좀 더 착하다고 하지만 하나님은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절대자입니다. 비교 자체가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모독하는 것이고 죄가 될 뿐입니다. 하나님은 다른 신들보다 상대적으로 거룩한 분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거룩한 분입니다.
이처럼 거룩하신 하나님이 죄인인 우리에게 십계명을 주신 것은 ‘내가 거룩하니 내 백성인 너희도 거룩하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거룩한 분이지만 사람은 어떻게 거룩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들을 따르고 지킴으로 거룩하게 됩니다. 그래서 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모든 계명들을 다 지켜야만 거룩하게 되지만, 이것이 옛 약속이라면 이제 새 약속은 예수님을 믿는 자를 거룩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거룩하게 되는 법, 의롭게 되는 법, 즉 은혜의 법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구약(율법)은 ‘계명들을 지키라’는 명령이지만 이제 신약(복음)은 ‘예수님을 믿으라’는 명령이고 그 명령을 따를 때 영생이 있고 구원을 약속하셨습니다. 할렐루야! ‘지키지 않으면’ 형벌이 따르듯 ‘믿지 않으면’ 심판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믿으라’고 하신 명령, 새 계명을 지키고 순종하길 축복합니다.
십계명은 법입니다. 주의 백성이 지켜야 할 법도입니다. 법을 제정하는 것은 법 안에서 살아가라는 것이고 이 법을 벗어나면 죄가 됨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스쿨 존’ 어린이 보호구역이 없었습니다. 학교 주변 도로를 지날 때 삼십 킬로 이내로 서행해야 한다는 법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2019년 10월 13일에 이 법이 제정되고 시행되고부터는 어기면 범칙금이 부과됩니다. 조금 불편하지만 지킬 수밖에 없습니다.
때로는 법이 형편과 이치에 안 맞아 불편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그 법을 정할 때는 선한 의도로 정한 것입니다. 이 법도 운전자들에게는 대단히 불편하지만 아이들의 안전을 보호하려는 선한 법입니다. 대부분의 법은 선한 의도로 제정됩니다. 정상적인 국가에서는 여론을 모으고 많은 토론 끝에 선한 목적으로 법이 제정됩니다. 그러나 독재국가에서는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국민들을 억압하고 통제하려고 무시무시한 악법을 제정합니다. 이사야32장 7절에 말씀합니다. “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러함이거니와 존귀한 자는 존귀한 일을 계획하나니 그는 항상 존귀한 일에 서리라” 이 말씀을 통해 유추할 수 있는 것은 악한 지도자는 악한 법을 제정하고 선한 지도자는 선한 법을 제정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악한 지도자라도 국민을 위하는 척하고 선한 척합니다. 다 국가와 국민을 위해서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물어보겠습니다. 십계명은 선한 법일까요? 악한 법일까요? 부모를 공경하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는 것이 선한 명령이지 악한 명령은 아닙니다. 십계명은 선한 법입니다. 무엇보다 선한 법입니다. 그러니까 십계명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이 법을 주신 하나님은 선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리고 법이 공포된 후에 그 법을 어기면 반드시 처벌이 있습니다. 법을 지키지 않았는데 아무 형벌이 따르지 않는다면 법을 제정할 이유가 없습니다. 즉 법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법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반드시 심판하겠다는 의지가 있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심판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키지 않아도 처벌도 못하는 청문회 법처럼 그런 법을 만들어 놓지 않았습니다. 반드시 심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심판주이시기 때문입니다. 십계명은 이것을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반드시 마지막 날에 심판이 있다는 것, 행한 대로 갚아주는 심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심판자는 공의로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명을 주신 또 다른 이유는 이 계명들을 다 지켜야 구원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누구나 이 계명들을 다 지킬 수 없는 죄인임을 깨달으라고,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죄인임을 깨달으라고 주셨습니다. 롬 3:20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롬7:7에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라고 했습니다. 지금도 계명이 있어야 죄를 죄인줄 알게 되고 그 죄에서 돌이켜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명들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명을 주신 목적은 계명을 통해 하나님은 이런 분임을 알려주는 것과 또한 계명들을 다 지킬 수 없는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자인 줄 깨닫고 죄인에게도 은혜를 베푸시고 용서해주시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끝으로 본문 3절을 보시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 언약은 여호와께서 우리 조상들과 세우신 것이 아니요 오늘 여기 살아있는 우리 곧 우리와 세우신 것이라”고 합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오늘 여기 살아 있는 우리’는 지금의 우리가 아니라 모세 시대의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십계명은 우리에게도 유효합니다. 십계명은 결코 과거의 법이 아닙니다. 십계명은 현재와 미래에도 적용되어야 할 법입니다. 율법시대만 아니라 은혜시대에도 적용되어야 합니다. 지금도 이 계명들을 통해 우리는 자신의 죄를 발견하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계명을 주신 하나님을 알고 더 사랑하고 가까이 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을 더 잘 섬겨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