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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Victor-Marie Hugo (빅토르 위고)
1802년- 1885년
다양한 인간 군상과
생생하고 사실적인 묘사를 토대로
방대한 문학 작품을 남겼다.
프랑스의 가장 위대하고 대중적인 작가 빅토로 위고.
그는 19세기 프랑스 낭만주의의 지도자이자
프랑스 혁명과 공화주의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다.
프랑스 제3공화국은
그를 국부로 기렸으며,
1885년 83세를 일기로 사망하자
국장이 치러지고 개선문에 빈소가 세워졌다.
빅토르 위고는
19세기 프랑스의 국가 정신과 시대 정신을 구체화하면서
국가와 문학, 시대를 지배한 인물이다.
빅토르 위고는
1802년 2월 26일 프랑스 브장송에서 태어났다.
나폴레옹 군의 장군이던
아버지 레오폴 위고를 따라
어린 시절 마르세유, 엘바 섬, 코르시카 섬, 나폴리 등지를 옮겨 다니며 자랐다.
어린 시절은 불행했다.
부모는 각각 애인이 있었으며,
불화가 끊이지 않았고,
빅토르가 9세 되던 해 별거에 들어가
어머니 소피 트레부셰는 아이들을 데리고 파리에 정착했다.
이에 아버지 레오폴은
아들들을 소피로부터 떼어 내고자
장남 외젠과 빅토르를 코르디에 기숙학교에 보냈다.
학창 시절 빅토르는
시와 문학에 관심이 많았으나
수학과 과학 등에도 우수했다.
아버지는 그를 파리 에콜 폴리테크닉에 보내려고 했지만,
어린 시절부터 작가가 되고 싶었던 빅토르는 꾸준히 습작을 했다.
아카데미 프랑세즈가 주최한 시 창작 대회에서 입상하기도 한다.
그러나 일단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형과 함께 파리 법과대학에 들어갔다.
1821년 6월,
어머니 소피가 사망했다.
아버지는 몇 주 후 애인이었던 카트린 토마와 재혼했으며,
형 외젠과 함께 빅토르는
고모 집에서 더부살이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이듬해 10월 12일
빅토르는 어린 시절부터 좋아했던 아델 푸세와 결혼했다.
아버지는 집안이 빈한하다는 이유로 반대했던
아델과 끝내 결혼한 빅토르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결혼식에 참석조차 하지 않았다.
결혼 초기 아무것도 없던 빅토르는 처갓집에 얹혀살면서 작품을 집필했다.
둘 사이에서는 4남매가 태어났지만,
세 아이는 일찍 죽고 살아남은 한 아이는 정신병을 앓는 등 불행을 겪었다.
1822년,
위고는 시집 《오드와 그 밖의 시들》을 펴냈으며,
이듬해 소설 《아이슬란드의 한》을 발표하면서 젊은 작가들의 주목을 받았다.
1824년에는
왕정복고를 노래하는 시를 지어
샤를 10세로부터 연금을 하사받고,
이듬해에 레종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젊은 시절 위고는 보수주의적 성향을 띠었는데,
이는 어머니가 공포정치를 겪으면서
자유주의자에 대한 공포를 지니고
왕당파를 지지했던 영향이 컸다.
그러나 정치 상황이 변화하고
나폴레옹파였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으면서
점점 정치적으로 방향을 전환하게 된다.
1827년,
위고는 희곡 〈크롬웰〉을 발표했다.
이 작품은 고전주의 연극의 법칙을 깨트리면서
프랑스 문단에 낭만주의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고전주의 연극의 법칙이란
소위 '삼일치의 법칙'이라 불리는 것으로,
하나의 장소에서 하루 동안 하나의 플롯으로 진행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말한다.
〈크롬웰〉의 서문은
낭만주의 작품에 대한 선언문으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대립은
위고가 1830년 희곡 〈에르나니〉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에르나니〉가 초연되던 극장에서
두 파는 대놓고 서로에게 야유를 퍼붓고 물건을 집어던졌으며,
이로써 결투가 벌어져
죽는 사람까지 나왔다고 한다.
이후 위고는
낭만주의의 기수로 여겨졌고,
문학에 있어 표현의 자유와 감정 및 영감의 자유로운 표출을 부르짖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은
위고가 왕당파에서 등을 돌리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이런 변모로 왕당파 및 문인들로부터
변절자, 기회주의자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1830년, 7월 혁명이 일어났다.
위고는 시민들의 가두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샤를 10세가 쫓겨나자
〈젊은 프랑스에 바치는 시〉를 써서 이 일을 기렸다.
그러나 이후 루이 필리프가 왕위에 오르자
다소 회의를 느꼈으며,
새 왕정을 지지하지 않았다.
결국 1832년
희곡 〈왕은 즐긴다〉를 발표하고 상
연 금지 조치를 당했으며,
이에 대해 언론 검열에 관한 논고를 발표했다.
위고의 대표작 중 하나로,
그를 민중 작가의 반열에 올려놓은 《파리의 노트르담》은
1831년에 출간되었다.
노트르담 대성당의 종지기 콰지모도와 아름다운 집시처녀 에스메랄다,
그녀에 대한 뒤틀린 연정에 사로잡힌 노트르담의 부주교 프롤로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복잡한 구성,
살아 숨 쉬는 듯한 인물 묘사,
격정적인 문장, 미
와 추의 강렬한 대립 등
낭만주의 소설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15세기 파리에 관한 우리의 고정관념은 모두 이 작품에 근거한다'라는
평을 들을 만큼 파리의 뒷골목 정경까지 세밀하게 묘사된 대표적인 역사소설이다.
위고는 이 작품을 통해
마녀재판, 공개 처형 등 당대 사법 및 형벌 제도를 통렬히 비판했다.
이 작품은 발표 즉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고,
이로써 위고는 완전히 급진적인 자유주의자로 변모하면서 민중의 추앙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사후에까지 프랑스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가 되었다.
1833년경,
위고는 자신이 집필한 희곡 〈뤼크레스 보르지아〉의 연극 연습에 들렀다가
여배우 쥘리에트 드루에와 사랑에 빠졌다.
두 사람의 관계는 1883년 쥘리에트가 사망할 때까지 지속된다.
당시 위고의 아내 아델은 바쁜 남편에게 지쳐
집에 드나들던 위고의 친구이자 비평가인 생트 뵈브와 불륜 관계에 빠져 있었다.
위고는 1830년대 희곡
〈마리 튀도르〉, 〈앙젤로〉, 〈루이 블라스〉, 시집 《황혼의 노래》,
《내면의 목소리》, 《빛과 그림자》 등을 집필하며 활발하게 활동했으며,
1841년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1843년,
위고는 희곡 〈성주들〉이 실패하고,
딸 레오폴딘이 익사하면서 우울증에 빠져 잠시 작품 활동을 중단했다.
대신 정치로 관심을 돌리고 루이 필리프와 가깝게 지내면서
1845년에 귀족원 의원에 선출되었다.
그해 다시 펜을 잡고 소설 《레 미제르》 집필을 시작했는데,
이것이 후일의 《레 미제라블》이다.
1848년에 2월 혁명이 일어나
루이 필리프가 왕위에서 물러났다.
위고는 새로 수립된 입헌의회에서 의원으로 당선되었으며,
대통령 선거에서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지지했다.
그러나 루이 나폴레옹은 언론 탄압 및 집회의 자유를 금지하는 조치 등을 시행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일삼는 등 전제 군주적인 행보를 이어 갔으며,
마침내 1851년 12월 2일 밤 국회를 해산한다.
그날 위고는
"한 사람이 막 의회를 무너뜨렸다.
스스로 국민에게 한 서약을 깨뜨리고, 법을 없애고,
권리를 억압하고, 공화국을 배반했다."라는 요지의 연설을 통해
루이 나폴레옹의 행보를 격렬하게 비판했다.
결국 위고는 반정부 인사로 낙인 찍혀 망명길에 올랐다.
그는 벨기에, 영국의 저지 섬 등으로 옮겨 다니면서
《꼬마 나폴레옹》,
시집 《징벌》 등을 발표하고 루
이 나폴레옹 제정에 대한 반대운동을 계속했다.
1859년,
루이 나폴레옹은 위고에게 사면령을 내렸으나
위고는 이를 거부하고,
중단했던 《레 미제라블》 집필에 착수했다.
또한 망명 생활을 하면서
《정관 시집》, 《세기의 전설》, 《바다의 노동자》, 《웃는 남자》 등을 집필했다.
1862년에 발표한 《레 미제라블》은
굶주림 때문에 빵 한 조각을 훔쳐
전과자가 되었다가
속죄와 자기희생을 통해
성인으로 거듭나는 장 발장의 일생을 그리고 있다.
위고는
'한 저주받은 비천한 인간이 어떻게 성인이 되고,
예수가 되고, 하느님이 되는지'
를 그려 내려 했다고 말했다.
장 발장의 일생은
워털루 전쟁, 왕정복고, 폭동 등
19세기 프랑스의 역사적 격변을 배경으로 이루어지는데,
이 속에서 19세기 프랑스 민중의 삶이
생생하고도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간 군상들은 인간의 갖가지 전형을 이룬다.
이 작품은 유례없는 대중적 성공을 거두었으며,
위고는 프랑스 민주주의의 선봉자로,
프랑스의 국가 정신과 예술의 살아 있는 화신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1870년,
프랑스는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루이 나폴레옹의 제2제정이 무너졌다.
위고는 파리로 돌아왔으며,
기차역에서 민중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고 한다.
위고는 공화정부에서 다시 국회의원이 되었으나,
프로이센과의 모욕적인 평화협정을 반대하고
새로운 정부에도 실망한 나머지 의원직을 사퇴했다.
1871년 3월,
파리에서는 민중과 노동자들에 의해 코뮌 정부가 수립되었으나
채 석 달도 되지 않아 무너졌다.
코뮌 당시 실패를 예감하고 벨기에로 떠났던 위고는
코뮌 해체 후 망명자들을 돕다가
이를 탐탁지 않게 여긴 벨기에 정부에 의해 추방당했다.
위고는 다시 파리로 돌아왔으나
파리에서의 생활에 실망하고 저지 섬으로 떠났으며,
그곳에서 말년의 대표작인 《93년》을 집필한다.
1876년에는
다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건강이 악화되었고,
1878년에
뇌출혈로 정계에서 은퇴했다.
이후 1885년 5월 22일
폐렴으로 사망했다.
그의 장례는 국장으로 치러졌으며,
장례식이 열리던 6월 1일
그의 영구 행렬이 팡테옹으로 향하는 거리에 들어서자
200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운집하여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고 한다.
10. Oscar Fingal O'Flahertie Wills Wilds(오스카 와일드)
1854- 1900년
19세기 말 대표적인 유미주의자로 뛰어난 재기와 날카로운 재치,
자유분방한 생활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오스카 핑걸 오플라허티 윌스 와일드는
1854년 10월 16일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윌리엄 와일드 경은
영국 최초의 안과병원을 설립한 의사이자 저명한 민속학자이며,
어머니 제인 프란체스카 엘지 와일드 역시
'스페란차(Speranza, 이탈리아어로 '희망'이라는 의미)'라는 필명으로 활동하던
저명한 시인이었다.
어머니는 오스카 와일드의 작품 세계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오스카 와일드는
9세 때
북아일랜드의 포토라 왕립학교에 입학했는데,
공상을 좋아하고 책만 읽던 소년이라 선생들이 다루기 힘든 아이였다고 한다.
17세 때는
더블린 트리니티 대학에 들어가 고전문학을 전공했다.
이곳에서 교수였던 존 마하피의 영향으로 그리스 문학에 심취했으며,
최우등상인 버클리 골드 메달을 받고 졸업했다.
20세 때
옥스퍼드 대학교 맥덜런 칼리지에 진학했으며,
이곳 교수였던 존 러스킨과 월터 페이퍼의 영향으로
유미주의와 데카당스 운동에 빠졌다.
재학 중에 쓴 시 〈라벤나〉로
뉴디게이트상을 수상했고,
대학을 졸업한 후
런던으로 가서 본격적으로 작가 생활을 시작했다.
런던으로 향하면서
"나는 시인, 소설가, 극작가가 될 거다. 어떻게 해서든 유명해질 것이다.
만약 작가로 명성을 떨치지 못한다면 악명이라도 떨칠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예술가란
아름다운 것을 창조하는 사람이라고 여겼던 오스카 와일드는
런던에서도 유미주의 운동,
빅토리아 시대의 인습에 도전하는 젊은 예술가 그룹과 교류했다.
이들은 예술의 기준을 도덕이 아닌 '미'에 두었고,
예술을 위한 예술을 주장했다.
1881년에
첫 시집 《시편들》을 펴낸 이후로
희곡 〈베라 혹은 니힐리스트〉, 〈파두아 공작부인〉 등을 써서 무대에 올렸다.
그러나 이 작품들은 큰 반향은 일으키지 못했다.
오히려 《시편들》은 옥스퍼드 대학의 토론 학회인 옥스퍼드 유니언으로부터
표절 시비에 올랐다.
그런 한편 오스카 와일드는
작품보다는 긴 머리에 공작 깃털, 벨벳 바지 같은 괴상한 옷차림,
사회와 종교의 위선에 대한 재치 있는 독설들로 먼저 이름을 떨쳤다.
이는 그가 런던에 올 때 처음 선언한 대로 악명이었다.
1880년대에 유미주의는
런던 문단에서는 크게 유행했을지 몰라도
여타의 사람들에게는 조롱거리에 지나지 않았는데,
오스카 와일드는 유미주의의 대표적인 인물로 많은 풍자의 대상이 되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극작가 윌리엄 S. 길버트와
작곡가 아서 설리번의 오페라 〈인내〉에 등장하는 레지널드 번손이라는 인물이
와일드를 모델로 삼았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인물은 어두운 벨벳 양복을 입고, 긴 곱슬머리를 하고,
한 손에 백합 한 송이를 들고 다니며,
재치 있는 말투로 기존 질서를 대담하게 풍자한다.
재미있게도 〈인내〉의 성공으로 오스카 와일드의 이름은 미국에까지 알려졌다.
그는 1882년 유미주의에 대한 미국 순회 강연에 나섰고,
강연을 통해 거침없는 언변과 풍부한 교양을 드러냈다.
이 일로 오스카 와일드는 시대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1880년대 중반까지
그는 대중 잡지 〈숙녀의 세계〉 편집자로 일하면서 예술과 인생에 대한 에세이,
시, 희곡, 단편소설들을 근근이 발표했다.
그러다가 1888년
창작 동화집 《행복한 왕자와 그 밖의 이야기들》을 펴내면서
소설가로 대중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흔히 '어른들을 위한 동화'라고 일컬어지는 이 작품집에서
와일드는
영국 귀족 사회에 대한 모순과
예술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우아한 문체와 날카로운 위트로 써 내려갔다.
그런 한편 와일드는 1885년
더블린 왕실 변호사의 딸인 콘스탄스 로이드와 결혼해 두 아들을 두었는데,
아들들에게 동화를 들려주면서 동화를 구상했다고도 한다.
《행복한 왕자와 그 밖의 이야기들》로 명성을 얻은 와일드는
이듬해 〈숙녀의 세계〉를 그만두고,
작품 활동에 집중해 풍자적 에세이 〈펜, 연필 그리고 독〉,
유일한 장편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발표했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은
자신의 외모를 영원히 간직하고 싶은 아름다운 청년 도리언 그레이의 이야기로,
악마와의 거래, 불가사의한 주술 등
낭만주의적 고딕 호러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주인공이 쾌락과 욕망에 허우적대다 살인까지 저지르는 등
〈리핀코트 매거진〉에 연재되던 초기부터 퇴폐적인 요소로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으며,
단행본으로는 지나치게 퇴폐적이거나 동성애적 묘사가 있는 부분은
수정, 삭제되어 출간됐다.
1892년에는
빅토리아 시대 상류층의 결혼 생활을 풍자하는 희극 〈윈더미어 부인의 부채〉를 발표해
큰 성공을 거두었고,
계속해서 〈하찮은 여인〉, 〈이상적인 남편〉, 〈진지함의 중요성〉 등
상류층의 허례나 부정부패 등을 다룬 사회희극을 썼다.
프랑스어로 희곡 〈살로메〉를 쓰기도 했으나
성서의 인물을 극화한 작품을 무대에 올릴 수 없다는 이유로
런던에서 상연이 금지되었으며, 후일 작품집으로 출간되었다.
작가로서 전성기를 누리던 중인 1890년대 중반
와일드는 스캔들에 휩싸이면서 급격히 몰락했다.
그는 1891년 퀸즈베리 후작의 아들로
옥스퍼드 출신인 22세의 앨프레드 더글러스와 친분을 나누게 되었다.
앨프레드는 도리언 그레이가 현실 세계에 나타났다고 할 만큼 아름다운 남자였고,
와일드는 이 청년에게 매료된 나머지
희곡을 써서 번 돈을 모두 청년의 사치스러운 생활에 쏟아부었다고 한다.
결국 두 사람의 관계를 의심한 퀸즈베리 후작은
1895년 와일드의 문인 클럽을 방문하여
자신의 명함에 '남색가를 자처하는 와일드 씨에게'라고 적어 두고 나왔고,
이 문제는 공공연한 가십거리가 되었다.
와일드는 퀸즈베리 후작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했으나,
조사 과정에서 와일드가 앨프레드에게 쓴 연애편지와
와일드가 관계를 맺었다고 추정되는 남성 매춘부들의 증언이 나오면서
동성애자 혐의를 받고 2년간 수감되었다.
와일드는 그해 11월에 파산했다.
아내는 두 아들을 데리고 그를 떠났고,
아들들은 '와일드'라는 성을 버렸으며,
이듬해에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는 등 불운이 계속되었다.
레딩 교도소에서 중노동을 하며 힘들게 살아가는 동안
그는 앨프레드에게 꾸준히 편지를 보냈는데,
이 편지들은 후일 《옥중기》로 출간되었다.
한편 수감 생활을 하던 중
아내를 살해하고 처형된 기병대원 샤를 올리즈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출옥 후 이를 소재로 장시 〈레딩 감옥의 발라드〉를 썼다.
1897년에 출소한 와일드는
곧바로 영국을 떠나 프랑스로 갔다.
한동안 프랑스에서 지내던 그는
이탈리아 여행을 갔다가
나폴리에서 앨프레드와 재회했다.
그러나 앨프레드는 2년간의 수감 생활로 외모가 망가지고, 파산 후 돈 한 푼 없던 와일드에게
매력을 느끼지 못했고, 결국 두 사람은 헤어졌다.
다시 파리로 돌아온 그는
가난과 외로움 속에서 몇몇 지인들의 도움으로 근근이 연명하다가
1900년 11월 30일 파리의 한 초라한 호텔 방에서 뇌막염으로 세상을 떠났다.
- 청아출판사(이한이 글)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