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영 展
백두대간의 사계四季 2
백두대간白頭大幹 :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우리나라 땅의 근골을 이루는 거대한 산줄기
악휘봉망희양산_73x144cm_한지에 수묵_2019
2021. 7. 14(수) ▶ 2021. 7. 19(월)
서울특별시 종로구 우정국로 68 동덕빌딩 | T.02-732-6458
www.gallerydongduk.com
이화령 비단길_74x48cm_한지에 수묵담채_2019
산속의 맑은소리를 화폭에 담다
1.
전통적인 남종문인화에 대해 논하다 보면 꼭 나오는 말 중의 하나가 자연합일(自然合一)이니 물아일체(物我一體)니 하는 말이다. 화가가 자연과 한데 어우러져 한 몸처럼 되어야만 제대로 자연을 재현해낼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러한 말은 매우 추상적이어서 그 의미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그나마 쉽게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한 말이 중국의 대문호 소동파(蘇東坡, 1037-1101)가 왕유(王維, 699?-759)의 그림을 보고 평했다는 '시중유화 화중유시(詩中有畵 畵中有詩)'라는 말이다. 문인화 풍의 그림을 보고 그 속에서 한 편의 서정시를 떠올리고, 또 아름다운 시를 읽으며 그림 같은 풍경을 떠올리는 것은 누구나 한 번쯤은 경험했을 법한 일이다.
이러한 두 가지 예술 갈래 사이의 관계는 음악으로 확장해도 비슷한 상황이 된다. 좋은 그림을 보면 자연 속의 울림이 들리는 듯하고, 자연 속에 조용히 침잠하여 소리를 들으면 아름다운 장면을 느낄 수 있다. 이런 느낌을 잘 표현한 말로 산수청음(山水淸音)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중국의 시인 좌사(左思)가 <초은시(招隱詩)>에서 "꼭 거문고와 피리 소리 아니라도, 자연에 맑은소리 가득하네.(非必絲與竹, 山水有淸音)"라고 한 데서 나온 것이다. 자연의 모습을 시각과 청각을 혼성하여 표현한 것이 절묘하다. 이 유명한 구절은 후대에 영향을 끼쳐 많은 문인과 화가들이 사용한다.
청나라의 석도(石濤, 1630-1724)에서부터 근대의 이가염(李可染, 1907-1989)에 이르기까지 여러 화가가 <산수청음도(山水淸音圖)>라는 제목의 그림을 그렸다. 모두 기운생동(氣運生動)하는 자연의 속성을 잘 표현하려고 노력한 작품들이다. 이렇듯 자연을 담은 예술은 그것이 그림이든, 시든, 음악이든 모두 시각과 청각 등 여러 감각이 한데 어우러져야만 최상의 작품을 만들어낸다. 특히 산수화는 화가의 시각을 통하여 자연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는 데 온 힘을 쏟는다. 그래서 예전 화가들이 자연에 들어가 자연과 호흡하며 그림을 그리고자 한 것이다. 조선 후기에 실경을 그린 화가들의 그림이 많은 감동을 주는 것도 바로 이런 자연과의 교감이 극치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928봉 직벽_112x73cm_한지에 수묵담채_2019
2.
백범영은 오래 전부터 한국의 중심 산줄기를 따라 실경을 사생하며 작업하는 화가다. 그가 산사람처럼 산주름을 잡기 시작한 지는 꽤 오래 전의 일이다.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그의 발길은 쉬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백범영은 참 부지런한 화가다. 그의 미술세계는 그동안 제법 먼 길을 걸어왔지만 시작한 지점에서 그리 먼 곳에 있진 않다. 다른 양식을 못 해서도 아니고, 새로운 것에 대한 욕심이 없어서도 아니다. 그보다는 그동안 견지해온 미술을 갈고 다듬어 자신만의 색채를 더욱 견고하게 하고자 하는 목적이 있어서다. 올해는 화가 백범영에게 특별한 해다. 어느새 인생의 한 바퀴를 돌아 지난 생을 정리하고 새로운 생을 시작해야 할 때다. 예전 같으면 잔치라도 했겠지만, 화가답게 그동안 그려온 그림들을 세상에 보이며 함께 즐거움을 나누고자 한다.
이번 전시는 오랜 시간 작업을 하며 이제는 그를 대표하는 상징적 경향이 된 백두대간의 굽이굽이를 속속들이 담아낸 작품들이다. 2019년에 같은 장소에서 있었던 전시를 잇는 종합편이다. 70여 점의 산수화와 또 그만큼의 야생화 꽃그림을 준비하였다. 정성을 담아 그린 산이나 계곡, 소나무와 꽃 한 점 한 점에 모두 그의 정신이 오롯이 담겨 있다. 오랜 시간 자연을 그리다 보니 이제 그의 손도 자연에 익숙해진 듯 자연스럽다. 또한 잘 알려진 장소보다는 언제나 늘 마주하는 친숙한 풍경을 그리려는 경향도 나타난다. 구태여 화려한 것을 찾지 않으려는 원숙한 사고의 표현으로 보인다.
참 신기하게도 그림은 작가를 닮는다. 화가가 인물을 그리면 본능적으로 자신과 닮은 얼굴을 그린다고 한다. 그래서 그림 속 인물은 대부분 자화상이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인물화뿐만 아니라 산수화나 화조화도 작가를 닮는다. 백범영의 그림도 참 사람을 닮았다. 그의 성격은 겉으로 보기에는 살짝 직선적이면서 투박한 면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그와 일을 해보면 매우 치밀하고 섬세한 면이 많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예민한 미술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그는 질박함과 섬세함의 양극적인 성향이 있다. 그의 그림 속에 나오는 산이나 나무, 꽃 등 사생 대상들이 그런 그의 성격을 많이 닮았다.
산을 그릴 때는 산줄기를 대범하게 그리면서도 산면을 다룰 때는 보통 섬세하게 다루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인지 그의 산은 굳건한 듯하지만 크게 위압적이지 않고 친근하다. 또한 그의 특장인 소나무를 그릴 때도 굳이 오래된 큰 소나무를 찾아 그리지만, 세부적인 묘사는 부드럽고 경쾌한 붓질을 보인다. 근래에는 야생화를 중심으로 꽃을 많이 그리는데, 식물의 작은 특징까지 고려하는 모습은 큰 산을 그리던 모습과는 큰 대조를 이룬다. 서로 다른 듯하나 사실 모두 그의 본성에 충실한 그림들이다.
사실 예전에 그를 처음 만났을 때 필자는 그의 그림이 좀 더 대범하고 강한 필선을 갖길 바랐다. 산세도 훨씬 더 강렬하게 포치하고, 붓도 자유롭게 휘갈기고, 먹도 두텁게 막 뿌리는 위압적인 그림을 그리기를 원했다. 모름지기 화가는 붓을 소심하게 가지고 놀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서였다. 게다가 당시 눈에 보이는 그의 외양은 산을 들쳐 업고 다녀도 될 것 같은 기세였다. 그러나 오랜 세월 그의 모습을 지켜보며 그의 품성이 그런 성향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광기 어린 화사보다는 선비 화가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그의 성격을 이해할 수 있게 되자 그의 그림이 편하게 다가왔다.
국망봉망소백산_70x72cm_한지에 수묵담채_2019
3.
한때 가깝게 지내 자주 보던 때도 있었지만, 언제부턴가 그를 만나기 어렵게 되었다. 혹 어느 날 말동무가 그리워 그를 찾으면 어느새 백두대간 어느 산중에서 산과 씨름하거나 소나무와 마주 대하고 있곤 하였다. 이럴 때면 속세의 친구를 잃은 듯한 아쉬움이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산속에서 얻어 온 산야의 풍경과 자연물을 그린 것들이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 자연과 소통하며 얻은 자연 속에 숨어 있는 맑은소리들이라는 것을 확인한 다음에는 나의 아쉬움이 부끄러워졌다.
산길을 걷는 백범영의 모습을 생각하면 근대기에 금강산을 너무 좋아한 한 화가가 떠오른다. 그는 금강산에 매료돼 사계절을 모두 화폭에 담을 요량으로 산속에 움막을 짓고, 밥을 지어 먹으며 3년간을 살며 오로지 그림만 그렸다고 한다. 그만치 백두대간의 자연은 금강산 못지않게 놓칠 수 없는 미술의 자양분이 가득한 보고이다. 부디 산길을 걷는 그의 진득한 발길이 지치지 않길 바란다. 더 나아가 그림을 그리는 그의 숨소리와 자연의 맑은소리가 한데 어우러진 백범영의 <산수청음도>가 완성되기를 바란다.
황정수(미술평론가)
옥돌봉망선달산_70x70cm_한지에 수묵담채_2019
바람의 언덕_56.5x70cm_한지에 수묵담채_2019
자병산_70x72cm_한지에 수묵담채_2019
큰새봉과 나한봉_70x72cm_한지에 수묵_2020
백범영 | 重山 白凡瑛 | Baek, Beom-Young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 및 대학원 졸업 | 성균관대학교 일반대학원 동양철학과 박사과정 수료
개인전 | 13회 | 백악예원 1993 | 서남미술전시관 | 공평아트센타 1995 | 공평아트센타 1997 | 한국미술관, 용인 2007 | 橋畫廊, 북경 2008 | 한벽원갤러리 2008 | 스페이스이노 2011 | 갤러리한옥 2013 | 亞瑟畫廊, 북경 · 백송화랑 2015 | 한벽원갤러리 2017 | 동덕아트갤러리 | 장은선갤러리 2019 | 나우리아트갤러리 2020
단체전 | 200여회
현재 | 용인대학교 문화예술대학 교수
E-mail | baekmyo@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