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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원불사(源佛寺) 원문보기 글쓴이: 단현
번역의 중요성과 어려움 무아윤회의 올바른 이해
1. 무아와 윤회문제
초기불교를 연구함에 있어서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는 주제가 ‘무아(無我) · 윤회(輪廻)’에 관한 것이다. 무아와 윤회문제를 다룬 국내의 대표적인 저서는 尹浩眞, 『無我 · 輪廻問題의 硏究』(서울: 민족사, 1992)이다. 이 책은 저자가 1981년 프랑스의 소르본느 대학에서 박사학위논문으로 제출했던 것을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無我理論은 불교의 핵심교리로서 고유한 것이다. 그 반면 輪廻理論은 바깥에서 도입된 것이다. 이 두 이론은 다른 바탕에서 이루어져 한자리에 모였다. 무아이론과 윤회이론은 양립할 수가 없다. 그러나 불교는 이 두 이론을 양립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불교가 시작된 이래 이 두 이론은 계속해서 불교 사상가들을 괴롭혀 왔다. 그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온갖 상상력을 동원시켜야 했다. 그 덕택으로 윤회이론은 다른 어느 종파에서보다도 불교에서 가장 많이 발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이 문제는 완전히 해결된 것이 아니다. 無我 · 輪廻問題는 지금도 우리에게 보다 좋은 설명을 요구하고 있다. 이 요구에 대한 답은 무엇인가. 우리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 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尹浩眞, 『無我 · 輪廻問題의 硏究』(서울: 민족사, 1992), 머리말]
위 인용문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무아 · 윤회문제는 붓다시대에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논의되어 왔다. 지금까지 전 세계적으로 무아 · 윤회문제를 다룬 단행본과 논문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필자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단행본과 논문의 목록만 A4용지 300 페이지가 넘었다. 그 많은 자료들을 찾아 읽는다는 것은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매달리는 까닭은 그만큼 이 주제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무아 · 윤회문제를 논함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주제가 ‘자아가 없다면 누가 업(業)의 결과를 받을 것인가?’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많은 학자들이 자신들의 견해를 내놓았다. 그 중에서 월폴라 라훌라는 그의 저서 What the Buddha Taught (붓다의 가르침)에서 이 주제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매우 간략하게 서술했다.
Here naturally a question arises: If there is no ?tman or Self, who gets the results of karma (actions)? No one can answer this question better than the Buddha himself. When this question was raised by a bhikkhu the Buddha said: 'I have taught you, O bhikkhus, to see conditionality everywhere in all things.'* [Walpola Rahula, What the Buddha Taught, (London: Gordon Fraser, 1959), p.66] * M Ⅲ (PTS), p.19; S Ⅲ, p.103.
그런데 이 부분의 한글 번역이 오류임을 며칠 전에서야 알게 되었다. 어떤 네티즌이 이 부분의 증거로 제시한 빨리 원전(M Ⅲ, p.19; S Ⅲ, p.103)이 전재성 박사가 번역한 니까야와 각묵 스님이 번역한 니까야의 어느 페이지에 해당되는지 확인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요청에 답하기 위해 우선 월폴라 라훌라의 영문과 한글 번역을 대조해 보았다. 그런데 필자가 번역하여 블로그에 올린 내용이 잘못된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고 나서 빨리 원전의 내용을 월폴라 라훌라 스님이 영어로 번역한 것이 정확한 것인지 다시 확인해 보았다. 그 결과,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최초의 필사본(Manuscript)에서부터 다르게 번역될 소지가 있었다는 것이다. 필자가 이러한 확인 과정을 거치면서 이 문장과 관련된 번역들을 검토하면서 역경(譯經) 작업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다시 한 번 더 생각해 볼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래서 이러한 필자의 생각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기 위해 이 글 쓰게 되었다.
2. 오역(誤譯)의 사례
앞에서 잠시 언급한 바와 같이, 월폴라 라훌라의 책에서 인용한 빨리 원전 부분은 ‘자아가 없다면 누가 업(業)의 결과를 받을 것인가?’라는 어느 비구의 질문에 붓다가 직접 답변한 것이다. 따라서 이 부분은 ‘무아(無我)’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중요한 내용이다. 그런데 이처럼 중요한 부분을 깊이 생각해 보지도 않고, 앞서 번역한 전재성과 진철승의 잘못된 번역을 그대로 답습한 것에 대해 매우 부끄럽게 생각한다. 필자의 초고가 아직 출판되기 전에 이것을 발견하게 되어서 오히려 기쁘다. 그러면 앞에서 인용한 월폴라 라훌라의 책을 국내에서는 어떻게 번역했는가? 그 발행 순서대로 살펴보기로 한다.
그렇다면 저절로 다음과 같은 의문이 일어날 것이다. 자아나 아트만이 없다면 누가 업의 결과를 받을 것인가? 붓다보다도 이 문제에 관하여 적절하게 대답한 사람은 없다. 어떤 수행승이 이러한 질문을 던졌을 때 붓다는 대답했다. [붓다] “수행승이여, 나는 모든 것 속에서 연기의 법칙을 보라고 가르쳤다.” (M. Ⅲ (PTS), p.19; S. Ⅲ, p.103) [월폴라 라훌라 원저, 전재성 역저, 『붓다의 가르침과 팔정도』(서울: 한국빠알리성전협회, 2002), pp.171-172]
여기에 하나의 의문이 자연스럽게 제기된다. 즉 아트만이나 자아가 없다면 누가 업의 결과를 받을 것인가? 누구도 붓다보다 이 의문에 더 잘 대답할 수 없을 것이다. 한 비구가 이 질문을 했을 때 붓다는 말했다. “오, 비구여, 나는 너에게 모든 사물 어디에서나 연기의 법칙을 보라고 가르치지 않았느냐.” [월폴라 라훌라 지음, 진철승 옮김, 『붓다의 가르침』(서울: 대원정사, 1988), pp.98-99]
여기서 자연스레 한 의문이 일어난다. “아뜨만이나 자아가 없다면 누가 업(작용)의 결과를 받게 될까?” 아무도 이 질문에 부처자신보다 나은 대답을 할 수 없을 것이다. 한 비구에게 이 의문이 일었을 때 부처가 말하였다. ‘나는 너희들을 이렇게 가르쳐왔다. 오! 비구들이여, 모든 것이 그 어디서나 조건에 따라 있음을 보아라.’* [월뽈라 라훌라 지음, 이승훈 옮김,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사실이 있다』(서울: 경서원, 1995), p.163]
* M. Ⅲ (PTS), p.19; S. Ⅲ, p.103 역주: 과거에 만들어진 조건에 따라서 현재의 상태가 존재한다. 현재의 조건에 따라서 미래의 상태가 존재하게 된다. 사물은 단지 원인에 의한 결과로서 존재할 따름이고 존재를 결정하거나 부여받는 근본실체란 없다. 즉, 사람에게 있어서 업의 결과를 받는 실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 그 사람의 존재 자체가 과거에 지은 업의 결과이다.
위 세 사람 중에서 전재성이 가장 먼저 이 책을 번역했다. 그의 최초 번역은 『현대사회와 불교』(서울: 한길사, 1981)라는 단행본 속에 편집되었다. 그 뒤 별도로 『불타의 가르침』(서울: 한길사, 1993)이라는 단행본으로 출판되었다. 그리고 다시 수정 보완하여 『붓다의 가르침과 팔정도』(서울: 한국빠알리성전협회, 2002)라는 책으로 발행되었다. 여기서는 그의 가장 최근의 책인 『붓다의 가르침과 팔정도』에서 인용했다. 동일한 저자의 저서일 경우, 가장 최근의 책에서 인용하는 것이 관례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위에서 인용한 월폴라 라훌라의 글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은 붓다가 직접 설한 것으로 되어 있는 “I have taught you, O bhikkhus, to see conditionality everywhere in all things.”이다. 이 부분을 전재성은 “수행승이여, 나는 모든 것 속에서 연기의 법칙을 보라고 가르쳤다.”라고 옮겼고, 진철승은 “오, 비구여, 나는 너에게 모든 사물 어디에서나 연기의 법칙을 보라고 가르치지 않았느냐.”라고 옮겼다. 한편 이승훈은 “나는 너희들을 이렇게 가르쳐왔다. 오! 비구들이여, 모든 것이 그 어디서나 조건에 따라 있음을 보아라.”라고 옮겼다.
위 세 사람의 번역 중에서 이승훈의 번역이 가장 원문의 뜻에 가깝다. 또한 이승훈은 이 부분을 번역함에 있어서 원저에는 없는 역주를 삽입하면서까지 고심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반면 전재성과 진철승은 이 부분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영문의 ‘conditionality’를 ‘연기의 법칙’으로 번역했다. 그러나 이것은 명백한 오역이다. 왜냐하면 ‘conditionality’는 ‘연기의 법칙’이 아니라 ‘조건부, 조건부 제한’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위 영어 문장을 우리말로 옮기면, “오! 비구들이여, 나는 너희들에게 모든 사물 어디에서나 조건 있음을 보라고 가르치지 않았느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조건부’는 이승훈이 지적한 바와 같이, 어떤 사람이 업(業)의 결과를 받는 것은 어떤 고정 불변하는 자아(自我, ?tman)가 별도로 있어서 받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 자체가 과거에 지은 업의 조건에 따라 그 결과인 과보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조건부’는 ‘연기의 법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3. 오역의 원인
그러면 월폴라 라훌라는 빨리 원전(M Ⅲ, p.19; S Ⅲ, p.103)에 나오는 위 인용문을 정확히 영어로 옮긴 것인가? 위 영문에 인용한 빨리 원전, 즉 『맛지마 니까야』와 『상윳따 니까야』는 원래 같은 내용이다. 그러나 필사본(manuscript)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나타난다. 특히 여기서 번역상의 오류의 원인은 필사본의 내용이 약간 다르기 때문이다. 우선 『맛지마 니까야』의 제109 Mah?pu??ama-sutta(滿月大經)에 나오는 대목과 『상윳따 니까야』제22 칸다상윳따 제82 Pu??am?-sutta(滿月經)에 나오는 대목을 비교해 보자.
Atha kho Bhagav? tassa bhikkuno cetas? ceto parivitakka? a???ya bhikkh? ?mantesi: - ?h?na? kho pan' eta?, bhikkhave, vijjati ya? idh' ekacco moghapuriso avidv? avijj?gato ta?h?dhipateyyena cetas? Satthu s?sana? atidhavitabba? ma??eyya: Iti kira, bho, r?pa? anatt?, vedan? anatt?, sa??? anatt? sa?kh?r? anatt? vi????a? anatt? anattakat?ni kamm?ni kam att?na? phusissant?ti? Pa?icca* vin?t? kho me tumhe, bhikkhave, tatra tatra tesu tesu dhammesu. (MN Ⅲ, p.19)
* So Sky; Si pa?ipucch?, with note that the Si?halese reading is pa?icca.
15. Atha kho Bhagav? tassa bhikkhuno cetas? ceto parivitakkama???ya bhikkhu ?mantesi: "?h?na? kho paneta? bhikkhave, vijjati: ya? idhekacco moghapuriso avidv? avijj?gato ta?h?dhigatena1 cetas? satthus?sana? atidh?vitabba? ma??eyya: "iti kira bho r?pa? anatt?, vedan? anatt?, sa??? anatt?, sa?kh?r? anatt?, vi????a? anatt?, anattakat?ni kamm?ni kathamatt?na? phusissanant?"ti. Pa?ipucch? vin?t? kho me tumhe bhikkhave, tatra tatra tesu tesu dhammesu." (SN Ⅲ, pp.103-104)
위 빨리문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pa?icca’로 읽을 것이냐 아니면 ‘pa?ipucch?’로 읽을 것이냐에 따라 번역이 완전히 달라진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맛지마 니까야』에서는 ‘pa?icca’가 ‘pa?ipucch?’로도 읽힌다는 사실과 싱할라(스리랑카) 사람들은 ‘pa?icca’로 읽는다고 각주에 표기해 놓았다. 이 부분을 번역함에 있어서 논란의 소지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빨리어 ‘pa?icca’는 ‘∼에 근거해서, ∼ 때문에, ∼을 조건으로 해서’라는 뜻이고, ‘pa?ipucch?’는 ‘반문(反問), 반힐(反詰), 질문(質問)’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월폴라 라훌라는 『맛지마 니까야』에 나오는 ‘pa?icca’로 읽고, 이 단어를 ‘conditionality’, 즉 ‘조건부’로 번역했던 것이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은 이 부분을 어떻게 영어로 옮겼는지 살펴보자. 다음은 호너(I. B. Horner) 여사가 영어로 번역한 『맛지마 니까야』의 해당부분이다.
Then the Lord, knowing by mind the reasoning in the mind of this monk, addressed the monks, saying: "This situation exists, monks, when some foolish man here, not knowing, ignorant, with his mind in the grip of craving, may deem to go beyond* the Teacher's instruction thus: 'It is said, sir, that material shape is not self … consciousness is not self. Then, what self do deeds affect that are done by not-self?' You, monks, have been trained by me (to look for) conditions** now here, now there, in these things and in those." [I. B. Horner (tr.), The Middle Length Saying, Vol. Ⅲ (London: PTS, 1977), pp.68-69]
* atidh?vati; cf. M. iii. 230, S. iii. 103, iv. 230, Iti. p. 43, Ud. 64. Explained at UdA. 352. It means to by-pass, deviate from, outstrip, run ahead of, "go one better than," "improve upon." ** pa?icca-vin?t?, trained in conditions. S. iii. 104 reads pa?ipucch? vin?t?.
이와 같이 호너는 이 부분을 “너희 비구들은 여기저기서, 이런 저런 사물들에서 조건들을 (찾도록) 나에게 훈련받아왔다.”로 번역했다. 그녀는 이 부분을 번역하면서 매우 고심한 흔적을 엿볼 수 있다. 그녀는 ‘pa?icca-vin?t?’를 ‘trained in conditions’, 즉 ‘훈련된 만족스러운 상태’로 이해하고 번역했음을 각주에서 밝히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이에 대응하는 『상윳따 니까야』에서는 ‘pa?ipucch? vin?t?’로 읽히고 있다는 사실도 병기해 놓았다. 최근 타닛싸로 비구(Thanissaro Bhikkhu)는 『맛지마 니까야』의 이 부분을 다음과 같이 번역했다.
Then the Blessed One, realizing with his awareness the line of thinking in that monk's awareness, addressed the monks: "It's possible that a senseless person ? immersed in ignorance, overcome with craving ? might think that he could outsmart the Teacher's message in this way: 'So ? form is not-self, feeling is not-self, perception is not-self, fabrications are not-self, consciousness is not-self. Then what self will be touched by the actions done by what is not-self?' Now, monks, haven't I trained you in counter-questioning with regard to this & that topic here & there? [http://www.accesstoinsight.org/tipitaka/mn/mn.109.than.html (2012년 8월 30일 검색)]
이와 같이 타닛싸로 비구는 이 부분을 “자, 비구들이여, 내가 너희들을 여기저기서 이런 저런 주제에 관해 반문을 하여 훈련시켜오지 않았느냐?”로 번역했다. 그는 ‘pa?icca-vin?t?’를 ‘counter-questioning’, 즉 ‘반문(反問)’으로 번역했다. 또한 우드워드(F. L. Woodward)는 『상윳따 니까야』의 해당 부분을 다음과 같이 번역했다.
Thereupon the Exalted One, with his thought reading the thoughts of that brother's mind, said to the brethren: - 'It is possible, brethren, that some senseless fellow, sunk in ignorance and led astray by craving, may think to go beyond the Master's teaching thus: "So then you say that body is not the self: that feeling is not the self; that perception, the activities … consciousness is not the Self. Then what self can those acts affect which are not self-wrought?" That question, brethren, I have already answered thus and thus in those teachings that I have given you: - [F. L. Woodward (tr.), The Book of the Kindred Sayings, Part Ⅲ (London: PTS, 1925), p.88]
이와 같이 우드워드는 이 부분을 “형제들이여, 그 질문은 내가 이미 너희들에게 준 그런 가르침에서 이러저러하다고 답했다.”로 번역했다. 또한 인터넷 상에는 번역자를 알 수 없는 번역도 떠돌아다닌다. 그 내용부터 살펴보자.
15. The Blessed One knowing that monk's thought and thought process addressed the monks: “Monks, there is a possibility that a certain foolish man not knowing and overcome by craving should go beyond the dispensation of the Teacher thinking 'So then friends, matter is not self. Feelings, perceptions, intentions, and consciousness are not self. How could actions done by no self, contact the self?' Monks, I have trained you in these and other things putting across a series of questions.” [http://awake.kiev.ua/dhamma/tipitaka/2Sutta-Pitaka/3Samyutta-Nikaya/Samyutta3/21-Khandha-Samyutta/02-03-Khajjaniyavaggo-e.html (2012년 9월 1일 검색)]
위 인용문에서는 “비구들이여, 내가 일련의 질문들을 이해시킴으로써 이런 저런 일들에서 너희들을 훈련시켜왔다.”로 번역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월폴라 라훌라와 호너를 제외한 나머지 대부분의 번역자들은 ‘pa?icca’가 아닌 ‘pa?ipucch?’로 읽고 번역하였음을 알 수 있다. 스리랑카 출신인 월폴라 라훌라는 싱할라본(Si?ghalese manuscript)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 국내의 번역가들은 이 부분을 어떻게 번역했는가? 이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자.
4. 국내 번역 사례
전재성은 위에 인용한 빨리 원문을 다음과 같이 번역했다.
그러자 세존께서는 그 수행승이 마음속으로 그와 같은 생각을 일으킨 것을 알아채고 수행승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행승]*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 물질도 실체가 없고 감수도 실체가 없고 지각도 실체가 없고 형성도 실체가 없고 의식도 실체가 없다. 실체가 없이 만들어진 업을 내가 어떻게 받을 수 있겠는가?”라고 스승의 가르침을 넘어서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수행승들이여, 그 질문에 대해서는 내가 그대들에게 준 가르침 속에서 나는 이미 여러 가지로 대답했다.” [전재성 역주, 『쌍윳따 니까야』제4권 (서울: 한국빠알리성전협회, 2000), pp.256-257]
* 필자주: 위의 [수행승]은 [세존]의 오류이다. 이 내용은 붓다가 제자들에게 설하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상윳따 니까야』에서는 ‘pa?ipucch? vin?t?’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이와 같이 번역한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위에 인용한 빨리 원문을 각묵 스님이 번역한 것이다.
그때 세존께서는 마음으로 그 비구의 마음을 아시고 비구들을 불러서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이런 경우가 있다. 여러 어떤 쓸모없는 인간은 체득하지 못하고서 무명에 빠지고 갈애에 지배된 마음으로 스승의 교법을 능가하리라고 말하면서 ‘참으로 물질은 자아가 없다고 한다. 느낌은 … 인식은 … 심리현상들은 … 알음알이는 자아가 없다고 한다. 그런데 자아가 없이 지은 업들은 도대체 어떤 자아와 접촉하는가?’*라고 생각할 것이다. 비구들이여, 나는 이런 법들에 대해서 여기저기서 [다음과 같은] 질의응답으로 그대들을 훈련시켰다.”** [각묵 스님 옮김, 『상윳따 니까야』제3권 (울산: 초기불전연구원, 2009), p.312]
* ‘자아가 없이 지은 업들은 도대체 어떤 자아와 접촉하는가?’는 『맛지마 니까야』 ?긴 보름밤 경?(M109/iii. 19) §14의 anattakat?ni kamm?ni kamatt?na? phusissanti로 읽어서 옮긴 것이다. Be, Se는 kam att?na? 대신에 kattam att?na?으로, Ee는 katam att?na?으로 나타나는데 Ee는 kam att?na?으로 수정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맛지마 니까야』에는 이 비구는 상견(常見, sassata-dassana)에 빠져서 이렇게 말했다고 적혀 있다. (MA. iv. 79) ** ‘비구들이여, 나는 이런 법들에 대해서 여기저기서 [다음과 같은] 질의응답으로 그대들을 훈련시켰다.’는 Be, Se: pa?ipucch?-vin?t? kho me tumhe bhikkhave tatra tatra tesu tesu dhammesu를 옮긴 것이다. Ee는 이렇게 고쳐서 읽어야 한다. 주석서는 ‘질의응답을 통한 훈련(pa?ipucch?-vin??t?)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지만 바로 아래에 나타나는 오온의 무상 · 고 · 무아에 대한 교리문답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위에 인용한 전재성 번역과 각묵 스님의 번역을 비교해 보라. 누구의 번역이 더 원문에 충실한 번역인가를 독자들이 스스로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교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이 부분을 번역함에 있어서 전재성은 어떠한 각주나 설명도 덧붙이지 않았다. 반면 각묵 스님은 다른 이본들과 일일이 대조하여 자신이 번역한 것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각묵 스님이 각주에서 밝힌바와 같이, 그는 ‘pa?ipucch?-vin?t?’를 ‘질의응답을 통한 훈련’이라고 번역했다. 어쨌든 여기서 중요한 사항은 붓다가 직접 설했다고 하는 부분, 즉 “pa?icca (or pa?ipucch?) vin?t? kho me tumhe, bhikkhave, tatra tatra tesu tesu dhammesu.”이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pa?icca vin?t?’로 보느냐 ‘pa?ipucch?-vin?t?’로 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내용이 된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번역은 참으로 중요하면서도 또한 힘든 작업이다. 역경가(譯經家)들은 이렇게 힘들여 작업한 번역물들을 세상에 내놓는다. 붓다의 가르침을 조금이라도 널리 전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면 원전을 읽을 수 없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번역서를 참고하여 도움을 받는다. 그러면서도 번역자의 노고에 대한 칭찬에는 매우 인색하다. 후학으로서 최소한의 예의도 지키지 않고 비난하기 일쑤다. 외국의 학자들은 다른 사람의 번역이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자신이 직접 번역하여 내놓는다. 그래서 수없는 똑같은 경전의 번역물들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후학들이 보고 스스로 판단하여 선택한다.
다시 말해서 훌륭한 번역은 다른 논문에 인용되어 살아남고, 그렇지 않은 번역은 사라지게 된다. 마치 시장 원리에 의해 수요와 공급이 이루어지는 것과 동일하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필자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은 잘된 번역에 대해서는 일언반구(一言半句)의 언급도 없고, 오직 잘못된 번역이나 오류에 대해서 주로 지적한다. 이처럼 역경가들이 욕을 얻는 먹는 것은 그들이 감당해야 할 숙명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면으로 보면 번역하지 않는 나는 상대적으로 욕을 덜 먹는다. 불행 중 다행이 아닐 수 없다.
5.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지금까지 논의한 부분, 즉 ‘자아가 없다면 누가 업(業)의 결과를 받을 것인가?’라는 어느 비구의 질문에 대해 붓다는 “비구들이여, 나는 이런 법들에 대해서 여기저기서 [다음과 같은] 질의응답으로 그대들을 훈련시키지 않았느냐?”라고 답변했다. 이 답변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왜 붓다가 이와 같은 말을 할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살펴보아야만 한다.
『상윳따 니까야』에 나오는 이 경(SN 22:82)의 제목은 ‘뿐나마-숫따(Pu??am?-sutta)’이다. 이 경의 이름을 각묵 스님은 ‘보름밤 경’이라고 옮겼고, 전재성은 ‘보름달’이라고 번역했다. 일본의 『남전대장경』에서는 ‘만월경(滿月經)’이라고 번역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만월경’이라는 번역을 선호한다. 왜냐하면 경전의 이름[經名]은 간단명료할수록 기억하기 쉽기 때문이다.
이 경은 오온에 관한 교설이다. 이 경을 설하게 된 배경은 대략 다음과 같다. 한때 세존께서 사왓티의 동쪽에 있는 미가라마따(녹자모) 강당에 머물고 있었다. 그때는 마침 포살을 마친 보름날 밤이었다. 비구들은 붓다로부터 법을 듣기 위해 노지(露地)에 둘러앉았다. 그때 어떤 비구가 자리에서 일어나 붓다께 예를 갖추고 난 뒤 질문하는 것으로 이 경이 시작된다.
[비구] “오온에 대한 집착(五取蘊)은 무엇을 뿌리로 합니까?” [세존] “오온에 대한 집착은 욕구를 뿌리로 한다.” [비구] “그러면 취착이 오온에 대한 집착(五取蘊)입니까? 아니면 취착과 오온에 대한 집착(五取蘊)이 다릅니까?” [세존] “취착과 취착의 대상이 되는 오온은 같은 것도 아니요, 서로 다른 것도 아니다. 오온에 대한 욕탐이 바로 취착이다.” [비구] “그러면 취착의 대상이 되는 오온에 대한 욕탐에는 차이가 있습니까?” [세존] “오온에 대한 욕탐에는 차이가 있다.” …… [비구] “그러면 어떻게 해서 [불변하는] 자신이 존재한다는 견해[有身見]가 있습니까?” [세존] “어리석은 범부들이 색(色, 육체)이 자아라고 관찰하고, 색 안에 자아가 있다고 관찰한다. 이렇게 해서 [불변하는] 자신이 존재한다는 견해[유신견(有身見)]가 있다.” [비구] “그러면 어떻게 해서 [불변하는] 자신이 존재한다는 견해[유신견(有身見)]가 없습니까?” [세존] “성스러운 제자는 색(色, 육체)을 자아라고 관찰하지 않고, 색을 가진 것이 자아라고 관찰하지 않고, 색이 자아 안에 있다고 관찰하지 않고, 색 안에 자아가 있다고 관찰하지 않는다. 이렇게 해서 [불변하는] 자신이 존재한다는 견해[有身見]가 없다.” [비구] “그러면 무엇이 오온(五蘊)의 달콤함이며 무엇이 위험함이며 무엇이 벗어남입니까?” [세존] “오온을 반연하여 일어나는 육체적 즐거움과 정신적 즐거움이 오온의 달콤함이다. 오온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것이 오온의 위험함이다. 오온에 대한 욕탐을 길들이고 욕탐을 제거하는 것이 오온으로부터 벗어남이다.” [비구] “그러면 어떻게 알고 어떻게 보아야 식(識)을 가진 이 몸과 밖의 모든 표상들에 대하여 ‘나’라는 생각과 ‘내 것’이라는 생각과 자만의 잠재성향이 일어나지 않게 됩니까?” [세존] “그것이 어떠한 색(色) · 수(受) · 상(想) · 행(行) · 식(識)이건, 과거의 것이건 미래의 것이건 현재의 것이건, 안의 것이건 밖의 것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저열하건 수승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이것이 내가 아니요,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보아야 한다. 비구여,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보아야 식(識)을 가진 이 몸과 밖의 모든 표상들에 대하여 ‘나’라는 생각과 ‘내 것’이라는 생각과 자만의 잠재성향이 일어나지 않게 된다.”
그때 어떤 비구에게 이런 생각이 마음에 일어났다. ‘참으로 색(色)은 자아가 아니라고 한다. 수(受) · 상(想) · 행(行) · 식(識)도 자아가 아니라고 한다. 그런데 자아가 없이 지은 업들은 도대체 어떤 자아와 접촉하는가?’ 그때 세존께서는 마음으로 그 비구의 마음을 아시고 비구들을 불러서 말씀하셨다.
그것이 바로 앞에서 인용한 대목이다. 그 다음 대목이 이 경의 핵심이다.
“비구들이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색(色)은 항상한가. 무상한가?” “무상합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움인가. 즐거움인가?” “괴로움입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것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관찰하는 것이 타당하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비구들이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수(受) · 상(想) · 행(行) · 식(識)은 항상한가. 무상한가?” “무상합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움인가. 즐거움인가?” “괴로움입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것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고 관찰하는 것이 타당하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세존]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그것이 어떠한 오온이건, 그것이 과거의 것이건 …… 저열하건 수승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이것은 내 것이 아니요,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보아야 한다.”
[세존]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보는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색(色) · 수(受) · 상(想) · 행(行) · 식(識)에 대하여 싫어하여 떠난다. 싫어하여 떠나서 사라지고 사라져서 해탈한다. 해탈하면 ‘나는 해탈했다.’는 지혜가 생겨나서 ‘다시 태어남은 파괴되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다. 해야 할 일은 다 마치고 다시는 윤회하는 일이 없다.’고 그는 분명히 안다.
『상윳따 니까야』에서는 여기서 경전이 끝난다. 그러나 이 경과 똑같은 『맛지마 니까야』의 ?만월대경(滿月大經)?(MN 109)에서는 “그때 그 비구들은 세존의 말씀을 듣고 흡족하여 기뻐하였다. 이 상세한 설명[授記]이 설해졌을 때 60명 비구들의 마음에 집착이 없어져서 번뇌로부터 해탈했다.”라는 대목이 덧붙여 있다.
이상으로 이 경전의 주요 내용을 간략하게나마 살펴보았다. 이제 이 경의 핵심 내용이 무엇인지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어떤 비구가 오온에 대하여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여 붓다께 직접 하나하나 여쭈었다. 그래서 붓다는 그의 질문에 따라 오온의 핵심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그러나 그 비구는 여전히 ‘자아가 있다’는 상견(常見, sassata-dassana)에 빠져 붓다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하고 불필요한 질문을 계속함으로써 붓다를 괴롭혔다. 붓다는 그 비구가 ‘자아가 없다면 누가 업(業)의 결과를 받을 것인가?’라는 의문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경전에서는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생략했다. 그러나 전후 문맥을 통해 그가 계속 붓다를 괴롭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자 붓다는 앞에서 인용한 내용을 약간 격한 어조로 말했던 것이다.
위에서 인용한 경전의 내용을 좀 더 알기 쉽게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그런데 이 어리석은 비구는 무명(無明)과 갈애(渴愛)에 얽매여 ‘자아가 없다.’는 스승의 가르침이 잘못된 것임을 논파하려도 대들었다. 그것이 바로 ‘자아가 없다면 누가 업의 결과를 받을 수 있겠는가?’라는 물음이다. 경전에서는 실제로 그가 말한 것이 아니라 그 비구의 마음을 붓다가 간파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아마 후대의 불전 편찬자들이 붓다를 이겨보겠다고 덤벼 든 그 비구와의 험악한 분위기를 좋게 묘사하기 위해 다듬은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그 비구가 직접 붓다께 ‘자아가 없다면 누가 업의 결과를 받을 수 있겠는가?’라고 따져 물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자 붓다는 약간 격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이 바보 같은 놈아! 내가 오온에 대해 여기저기서 묻고 답하는 형식으로 수없이 되풀이 하여 설명하지 않았느냐? 그래도 아직 ‘자아가 있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가? 그러면 내가 이 자리에서 다시 한 번 더 반복하겠다.”
“비구들이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색(色)은 항상한가. 무상한가?” “무상합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움인가. 즐거움인가?” “괴로움입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것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관찰하는 것이 타당하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
이와 같이 붓다는 다시 한 번 더 오온의 무상 · 고 · 무아에 대해 묻고 답하는 형식, 즉 ‘질의응답을 통한 훈련(pa?ipucch?-vin?t?)’를 반복했던 것이다. 『맛지마 니까야』에 의하면, 그때 붓다의 설법을 듣고, 60명의 비구들이 해탈했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그날 질문을 했던 그 비구가 붓다의 가르침에 승복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붓다의 설법을 듣고 아라한과를 증득한 경우 그 제자의 이름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 경과 같은 경우에는 그 질문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있다.
결론적으로 이 경에서는 실제로 ‘자아가 없다면 누가 업의 결과를 받을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직접적인 답변은 없다. 사실 이러한 물음은 무기(無記, avy?kata) 질문(pa?ha)에 해당된다. 붓다는 이러한 질문에 직접 답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오온의 무상 · 고 · 무아의 이치를 꿰뚫어 알면 저절로 알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굳이 그와 같은 어리석은 질문은 하지 않게 된다.
이와 같이 우리는 초기경전을 읽을 때, 너무 문자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 그 경전에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 내용이 무엇인가를 정확히 파악해야만 한다. 그래야 불필요한 오해를 줄이고 곧바로 수행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6. ‘무아(無我)에 관한 올바른 입장’
끝으로 초기불교의 무아론에 대해 잠시 언급해 두고자 한다. 붓다가 설한 ‘무아론’은 영원주의적 상견(常見)과 허무주의적 단견(斷見)을 타파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가르침이다. 이에 대해 월폴라 라훌라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붓다의 가르침에 따르면, ‘나는 자아를 갖고 있다’는 영원주의적 견해(常見)는 ‘나는 자아를 갖고 있지 않다’는 허무주의적 견해(斷見)와 마찬가지로 그릇된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생각들은 모두 ‘나는 존재한다’라는 그릇된 견해에서 일어나는 속박이기 때문이다. 무아에 관한 올바른 입장은 어떤 견해나 관점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투영 없이 객관적으로 사물을 보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나’ 또는 ‘존재’라는 것이 인과법칙에 따라 끊임없는 변화의 흐름을 타고 상호작용하는 정신적 물질적인 결합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영원하고 지속적이면서 항구적인 존재는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월폴라 라훌라 원저, 전재성 역저, 앞의 책, p.171]
인터넷의 댓글들을 보면, 무아의 교설을 잘못 이해한 삿된 견해들이 판을 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어떤 네티즌은 ‘고정 불변하는 실체가 없다는 무아(無我)를 잘못 이해하여 허무주의에 빠져 있었다. 대승불교도 중에서도 나가르주나(N?g?rjuna, 龍樹)의 중론(中論), 즉 팔부중도(八不中道)를 잘못 이해하여 허무주의에 빠진 경우가 많았다. 이런 사람들을 공병(空病)에 걸린 사람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공병에 빠진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해 유식사상(唯識思想)이 태동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나가르주나가 천명한 중론(中論)의 부작용인 공병(空病), 매사 무아에 매몰되어 있는 사람들의 잘못된 견해를 타파하기 위해 유식사상이 태동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무아를 잘못 이해하게 되면 매사 허무주의에 빠져 현실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지 못하게 된다. 이러한 허무주의는 상견론(常見論)에 빠진 사람보다도 더 위험하다. 붓다는 당시 유행하고 있던 상견(常見)과 단견(斷見) 모두 잘못된 견해임을 천명했다. 그것이 바로 ‘무아설’인 것이다. 이에 관한 자세한 사항은 다음 기회에 언급하기로 하고, 오늘은 이만 여기서 줄인다.
위 본문에서 팔리어나 산스크리트어 ? ? ? ? ? ? ? ? ? ?? ? ? 등 글이 깨어져 ? 기호로 나타납니다. 아래 주소의 팔리문헌연구소 블로그의 원문은 완전하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마성스님 - 팔리문헌연구소장 http://blog.daum.net/riplmaseong
원불사근본불교대학源佛寺 http://cafe.daum.net/wonbulsatem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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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글잘 읽었습니다. 만월경,보름달경,보름달...우리말을 조금 더 살폈으면 하는 마음이 있어서...제안합니다. 저라면..보름경이라고 하겠습니다. 보름에는 날짜와 달이라는 뜻이 이미 들어있기때문입니다.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2.11.25 10:49
좋ㄷ은 생각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