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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9-26 연일정씨 문중산 배산 산책 1만보
자유인 조동화는 연일정씨 문중산 배산을 산책하였다.
나의 어머님이 연일정씨여서 배산은 인연이 깊은 산이다.
배산입구에는 배산이 연일정씨사유지라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고, 입구좌측에는 정려각이 있는데 비문을 살펴보았다.
정려각을 관찰하여보니 연일정씨부인의 정려각으로, 남편이 젊은나이에 복막염으로 죽으니 26세의 열부 평양조씨가 남편의 뒤를 따라 남편이 죽은 다음날 자결하여 부위부강(夫爲婦綱)을 실천한 부인의 넋을 기리기 위해 문중들이 정려각을 설치하였다.
3강오륜중 부위부강(夫爲婦綱)이란 남편과 아내 사이에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이나 그시절 유교사상에 입각한 가혹한 시대상이 정려각에 비문을 세겨 놓았다.
정려각에 세겨진 부부는
딸 하나를 남기어 여산으로 출가하여 종종 찾아와 추모하고 갔다는 연일정씨 배산문중의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었으나 그 딸도 나이가 80객이 되여 찾아오는이가 없다고 합니다.
배산은 고려 조선시대에 연일정씨 관리가 나라에 공을 많이 세워 임금이 사패지를 포상하여 그래서 배산이 연일정씨 문중산이 되었다고 여겨집니다.
배산 중턱 묘지군락에는 나의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외삼촌 외숙모 묘역이 안치 되어 있기에 묘역을 지나며 잠시 들러 상석을 사진 촬영하고 추모하였다.
상석에 세겨진 외할아버지는 이름이 정자 옥자 규자이시며 1930.11.13 돌아가시었고, 외할머니는 나와 같은 김제 조씨이시며 내가 이세상에 태어나 네 살적 1954년 6월12일 돌아가시었고, 외삼촌 정진산은 각종악기에 천재적인 소질이 있었는데 2008년 3월25일 돌아가시었다.
배산 97m밖에 않되는 산이지만 노송들이 많아 솔향기가 그윽하여 맑은 공기를 머금고 두어시간 1만보 산책하고 집에 오니 피곤함이 싹 가시고 몸이 가벼워짐을 느낄수 있었으며 기분이 상쾌해짐을 느낄수 있었다.
조동화의 벗님들!
누죽걸산이란 말이 있다.
“누우면 죽고 걸으면 산다는 뜻의 줄임말"이다.
아일랜드의 극작가 버나드 쇼는 이런 명언을 했지요.
“부지런히 몸을 움직여 일에 열중하라. 이것이야말로 이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약보다도 강력한 효력을 지닌 영약인 것이다”
한국인 평균건강나이가 73.1이라고 하는데, 석양은 기울고 세월이 아까운 시간 건강이 최고 재산이여.
아무리 100세 시대라 한들 남은 인생 병으로 골골 거리지 않하려거든 건강관리 잘혀야지요.
세월이 덧없이 흘러가고, 되찾을 수 없는게 세월이니 시시한 일에 시간을 낭비하시지 말고 덧없고 부질없는 삶의 여로에서 좋은일 많이 많이 하시고 건강관리 잘 합시다.
우리세월에 건강을 잃어 천하가 주어진들 무엇 허겋는가요.
시간이 바쁜 친구들 걷는일 열심히 하여 즐겁고 행복한 시간됩시다.
감사합니다.
☛산책시간 및 거리 : 14:00-16:00(2:00) 도보1만보
배산 연일정씨(延日鄭氏)의 유래
연일 정씨(延日 鄭氏)는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오천읍을 관향으로 하는 성씨이다.
영일 정씨(迎日 鄭氏), 오천 정씨(烏川 鄭氏)라고도 한다.
연일 정씨(迎日 鄭氏)의 시조인 정종은(鄭宗殷)이 신라 때 간의대부(諫議大夫)를 지냈다고 한다. 정종은(鄭宗殷)의 후손 정의경(鄭宜卿)이 영일호장(迎日戶長)을 지내고 영일현백(迎日縣伯)에 봉해졌으므로 그 후손들이 본관을 영일(迎日)로 하였다 한다. 본관은 연일(延日)의 옛 지명인 영일(迎日)로 쓰기도 하고, 영일(迎日)의 마을인 오천(烏川)으로 쓰기도 한다.
배산의 비석에는 연일정씨 영일정씨 오천정씨로 혼용하여 비문이 세겨져 있음을 알수 있다.
익산에는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후손인 병조판서 정덕성(鄭德成)이 조선전기 입향한 이후 후손들이 익산시 모현동의 원모인마을과 옥호동을 중심으로 세거하고 있다.
배산입구 좌측에 80여년 전에 세워진 정려각이 있다.
오랜세월에 정려각 철재문은 녹슬어 있었다.
배산입구 연일정씨 정진희 처 평양조씨 조명희 열녀 정려각 내용
한문으로 세겨진 열녀 평양조씨의 정려각을 더듬더듬하여 한글로 바꾸어 정려각 내용을 보니 비극이였다.
남편이 병사하였다고 남편이 죽은 다음날 죽음으로서 사랑을 표현하였다니 지극한 사랑이었네.
조선시대 사대부 양반가에서는 부인의 정절을 기려 열녀문을 세우곤 하였지요.
열녀 평양조씨 조명희(趙明姬)는 수원의 명문가정에서 1922년8월9일(임술년) 태어났다.
연일정씨 정진희(鄭鎭禧)와 수원전문학교(현서울농대)재학당시 수원에서 결혼하여 남편과 같은 학교를 졸업한 후 정진희는 전남지방의 금융기관에 재직했다.
평양조씨 조명희 남편 정진희(丁巳年 1917.11.21.-丁亥年1947.2.19)는 홍문관 대재학을 지낸 학포(學圃) 정숙주(鄭叔周)의 후손이다.
열부 조명희는 당시 고향에서 노부모를 모실 때에 정성을 다하여 극진한 효도를 다했다.
그리고 어려운 생활속에서도 두 시동생을 교육시키면서도 불평하거나 힘에 겨운 표정하나 없이 가정을 화목하게 이끌어 나가 마을 사람들의 칭송이 자자했다.
그후 남편은 이리농림학교로 옮겼는데, 1947년2월19일 평소 지병이던 복막염으로 인해 세상을 떠났다.
그러자 조씨는 그 자리에서 남편의 뒤를 따르겠다고 하여 남편이 죽은 다음날 1947년2월20일 음독 자결하였다.
이때 나이 꽃다운 26세였다.
무자년 1948년 중추절 세움
조명희 열녀문 정렬각(貞烈閣)을 관찰한 느낌
연일정씨(延日鄭氏) 배산문중(盃山門中) 정진희(鄭鎭禧) 처(妻) 평양조씨(平壤趙氏) 조명희 정렬각 세워진지76년, 배산입구에 홀연희 열녀의 정열각이 비바람에 싯겨 초라한 모습으로 방치되고 정렬각(貞烈閣) 주변이 잡초만 무성하게 자라 볼성 사납네.
조선중기 이후 우리의 역사 속에서 남편을 사별할 경우 그 부인이 따라 죽는 것을 미덕처럼 여기던 때가 있었습니다.
남편이 죽었을 경우 비통해서 죽음을 맞이한 여인에게는 열녀라는 수식어가 붙어 열녀문을 세워줬지요.
열녀를 칭송하며 미화하는 시대의 자화상이 많은 열녀가 탄생되여 열여각이 세워지곤하였다.
조선시대 시대상이 연일정씨(延日鄭氏) 정진희 처 평양조씨 조명희의 삶을 26세의 나이에 정지시키고 말았구나.
조선시대 제도와 관습이 남편이 죽으면 따라 죽는 여인의 삶이 미덕으로 칭송되었던 시절,
열녀라는 말로 과대 포장되고 미풍양속이란 말로 미화되었던 과거의 모습이 26세의 삶에 딸을 하나 남기어 놓고 종지부를 마치었다니 가슴아픈 과거세상의 모습이로구나.
그 딸도 세월의 수레 바뀌속에 팔십객으로 변하였겠고만.
1947년(정해년) 연일정씨 정진희의 처 평양조씨 조명희가 죽은 이듬해 정열각을 세웠네
1948년에 세워진 평양조씨 조명희 정여각은 연일정씨 정진희에 대한 정절을 기려 세웠건만 세월이 흘러도 기념물로 지정도 않되고, 안내판 하나 없이 관리도 허술하게 방치되여 잡초만 무성하여 눈살을 찌푸리는구나.
평양조씨 조명희씨여!
구름처럼 바람처럼 우주의 깃발로 저하늘나라에서 행복하시오.
2024.9.26. 연일정씨 정진희 처 평양조씨 조명희 열녀각을 지나며..... 조동화
※정열각(貞烈閣)
정려각(旌閭閣), 열려문(烈閭門) 같은 의미로 열여를 칭송하고 정절을 기리기 위해 그들이 살던 고을 입구에 세운 붉은 비석 또는 문을 가리킨다.
정려문(旌閭門)은 충신, 효자, 효부, 열녀 등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정려기(旌閭記)를 게시한 문을 지칭한다.
정려기를 대문에 걸면 정려문이라고 하고, 독립된 건물형태에 게시하면 정려각(旌閭閣)이 된다.
마을 어귀에 세워 많은 사람들의 귀감이 되도록 하는 경우는 정려각의 형태로 한다.
※참고 : 현대상식과 동 떨어진 조선시대 여자에 대한 규범
⇒삼종지도(三從之道)란 “결혼하기 전에는 아버지를, 결혼해서는 남편을, 남편이 죽으면 자식을 따라야 한다”
⇒칠거지악
① 시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 것(不順舅姑), ② 자식을 낳지 못하는 것(無子), ③ 음탕한 것(淫行), ④ 질투하는 것(嫉妬), ⑤ 나쁜 질병이 있는 것(惡疾), ⑥ 수다스러운 것, ⑦ 도둑질하는 것(盜竊) 등이 그 내용을 이루고 있다
배산 중턱 묘지군락에는 나의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외삼촌 외숙모 묘역이 봉분으로 합장하여 안치 되어 있기에 묘역을 지나며 잠시 들러 상석을 사진 촬영하고 추모하였다.
상석에 세겨진 외할아버지는 이름이 정자 옥자 규자이시며 1930.11.13 돌아가시었고, 외할머니는 나와 같은 김제 조씨이시며 내가 이세상에 태어나 다섯살 되던해 1954년 6월12일 돌아가시었고, 외삼촌 정진산은 각종악기에 천재적인 소질이 있었는데 2008년 3월25일 돌아가시었다.
나의 어머님 정순봉과 외할머니 김제조씨
본인 조동화는 김제조 6대조 조의(趙義) (충청병마절도사)는 아들 이지와 숭지를 두었는데 나는 이지의 후손입니다.
나의 어머니 정순봉의 어머니(나의 외할머니)는 김제조씨이며 이름이 조숙희이고 숭지의 후손으로 확인되었답니다.
어머니의 외삼촌은 조순채(김제조씨)이며 1980년 돌아가시었다.
어머니의 외삼촌 조순채는 누님 조숙희(나의 외할머니 광무7년 1903년생 생일1월16일-1954.6.12. 51세 작고하시다)와 다섯살 아래로 누님 한분밖에 없었으며, 아들 넷과 딸 둘을 두었네.
나의 외할아버지 정옥규 1930.11.13. 돌아가시었다.
나와 나이가 같은 조순채의 셋째아들 병규(1950년생)는 이리에 살며 영신교회 다닐 때 몇 번 만난적이 있는데 수원인가 어디로 이사가서 아들 둘을 두었구먼.(족보확인)
나의 어머님 정순봉의 뿌리를 찾다.
어머님 정순봉(鄭順奉)께서는 모현동 옥구동에서 1928년도(소화3년) 음력 8월15일(양력 9월28일)에 태어나 1996년5월5일(양력, 음력은3월18일) 69세에 사망하시었다.
나의 어머님께서는 두 살때 아버지(나의 외할아버지)를 여의었고 어머니(나의 외할머니)를 26살 때 여의시었다.
부 정옥규(나의 외할아버지)는 1890년(개국499년, 명치23년) 익산군익산면고현리29번지(현 모현동)에서 출생하시었으며 1930년 40세에 사망하시었다.
모 조숙희(나의 외할머니 김제조씨)는 1903년(명치36년) 김제군백구면월봉리에서 출생하시었으며, 1920년(대정9년) 17세에 정옥규(나의 외할아버지)와 혼인하여 1남2녀를 두었으며, 1954년6월12일(음) 51세의 나이에 사망하시었다.
나의 어머님 정순봉께서는 초여름쯤 되면 해마다 모 조숙희(나의 외할머니)기일에 고기나 생선을 준비하여 옥구동으로 가시어 기일을 추모하였던 기억이 생생하다.
외할아버지 정옥규와 외할머니 조숙희는 13년 나이 차이가 난다.
외할아버지 정옥규와 외할머니 조숙희는 1남2녀를 두시었는데, 어머님의 오빠가 정진산이고 언니가 정순례, 그러니까 나의 어머님 정순봉이 막내이시었다.
오빠 정진산은 1923년(대정12)익산군익산면고현리29번지(모현동)에서 출생하여 2008년 85세에 사망하시었다.
오빠 정진산은 7살의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어 어린나이에 가장노릇을 하였으며 31세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여 두 여동생들을 극진히 보살피었다.
언니 정순례는 1925년(대정14년)11월2일 출생하시어 황등면 방아다리로 출가하시었다.
나의 이모님 정순례(鄭順禮)께서는 방아다리에서 김동수 동구 동식 동만 아들 넷을 두어 장남 김동수(나의 이종동생)는 경기도 마석에 자리잡았다.
나의 어머님 정순봉은 1928년생으로 오빠 정진산이 다섯 살 위이시고 언니 정순례는 세 살 위이시었다.
※참고(대한제국 국권상실1904-1910 일제강점기 한일합방 1910-1945)
개국(開國) : 조선의 연호 1392년을 시점으로 함
(개국이란 朝鮮의 개국 연도인 1392년을 기준)
명치(明治) : 1868년이 원년-1912년까지(45년간 사용)
대정(大正) : 1912년부터-1926년까지(15년간 사용)
소화(昭和) : 1926년부터-1989년(64년간 사용)
왜 사는가 ?
참 웃기는 이야기다
왜 살다니 ?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자신의 의지로 태어 나지 않았다.
같은 맥락에서 “왜 태어 났나” 는 더 더욱 의미가 없다.
어느 날 인가 내가 나를 인식한 순간 난 이미 태어나 있었고
목숨을 끊지 않는 한 살아 있을 뿐이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한세상 살고져 제 맘대로 태어나지 않았으며
잘 났으나 못 났으나 주어진 한번뿐인 삶을 꾸려간다.
그렇다 우리는 하루 하루를 살아 있는 것이지 “살아간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수 많은 철학자들이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
아마도 단하나 우리의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것 즉 “어떻게 살 것인가”가 생각의 여유를 두는 것이리라.
어떻게 사느냐는 매우 중요하며 각자 지향하는 바에 따라 천차만별의 결과가 나올 수 밖에 없다.
불교에서는 윤회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거의 모든 종교에서 내세(來世)를 이야기한다.
영생불멸도 끔찍하겠지만 유한한 삶을 산다는 것도 그리 유쾌하지는 않다.
죽음은 분명 두려운 일이고 그에 대한 도피처로 생긴 것이 종교다.
어떻게 살다 가는 것이 잘 살다 가는 것일까 ?
난 한마디로 정의하고 싶다
진실하게그리고나눔에생활로 살라는 것이다.
그리고하고 싶은 일은 꼭하고 살기를 바란다.
세상을 둘러보라
얼마나 좋은 세상인가 ?
하늘에 피어나는 뭉개구름, 일곱빛갈 무지개와 찬란한 일출, 타는 저녁놀이 늘 우릴 설레게 하질 않던가.
바람 부는 날 느티나무 언덕에 서 보았는가 ?
눈 내리는 날 옷깃을 세우고 아무도 걷지 않은 순백의 땅을 밟아 보았는가 ?
천둥 번개 심지어 벼락이 을러대는 칠흑 같은 밤에 공동 묘지를 거닐어 보았는가 ?
아무도 심지 않고 거두지 않으나 홀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그 많은 들풀과 산꽃을 그대는 아는가 ?
하얀 포말을 날리며 천지를 호령하듯 포효하는 파도며, 산간 이름 모를 새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졸졸 흐르는 시냇물을 따라 걸어 보았는가 ?
온갖 음악이며 춤은 어느 정도 경험했으며, 가슴 조이게 하는 명작을 얼마만큼 읽었으며,
영화 연극 오페라 판소리는 얼마나 보았으며
인도네시아의 발리, 태국의 푸캣은 가 보았는가 ?
목숨을 주고 싶을 정도로 격렬한 사랑을 해 보았는가 ?
사랑하는 이의 그림자라도 보면 좋고 발자국 소리만이라도 듣고 싶어 애태워 봤는가 ?
네 자신을 사랑하라
네 행복할 권리를 반드시 찾으라
다시는 가질 수 없는 이 생을 찬미 하며 음미하고 즐기라
많은 서론이 필요하지 않다. 죽어지지 않아 사는 것이다.
살고 싶어도 죽으면 살수가 없다. 그러나 사는 동안많큼
은 건강하게 살아야 한다.
그래서 재물을 잃으면 조금 잃고, 명예를 잃으면 조금 더
큰 것을 잃고, 건강을 잃으면 다 잃는다고 하지 않던가!
그만큼 남녀노소 관계없이 건강하게 살기를 원하고 있다!
===좋은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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