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의 성냥공장 아가씨’로 유명했던 곳 금곡동은 현재 인구수가 줄어들면서 인근의 창영동과 합쳐 금창동(행정동)으로 불리우고 있지만 구한말까지 ‘샛골’이라 불렸던 동네다. 이런 이름은 우리나라 곳곳에 널려있으며 인천만 해도 대략 네 곳이 있다. 그 해석은 몇 가지가 있는데 우선은 쇠(鐵) 또는 금이 나왔다고 해서 붙은 이름으로 보는 경우와 두 곳의 ‘사이(새) 마을(골)’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다. 일설에는 이곳에 금잔디가 많아 금곡리로 불렸었고, 일제 때 유명한 성냥공장이 있었기 때문에 성냥의 원료인 누런 유황을 금에 빗대 금곡리로 불렸다는 해석도 있으나 그다지 타당성은 없어 보인다. 하지만 한 때 이곳에 인천을 대표하는 노래 ‘인천의 성냥공장 아가씨…’라는 유행가가 만들어져 불릴 만큼 유명한 성냥공장이 있어 '인천'하면 '성냥공장', '성냥공장'하면 '인천'을 연상시킬 만큼 유명했다. 필자가 1973년도 논산 훈련소에 입소했을 때 내무반장이 성냥공장 노래를 시켜 가사를 모르면 기압을 줄 정도니 이해가 갈만 할 것이다. 여기서 노래의 가사 몇 소절만 소개하면, “인천의 성냥공장 성냥 만드는 아가씨~하루에 한 갑 두 갑 일년에 열두 갑~♪ 치마 밑에 감추고서 정문을 나설 때~♬ 치마 밑에 불이 붙어 ~~” 이하는 가사에 외설성이 있어 생략하기로 함. 이렇듯 성냥 제조업이 인천공업의 대명사로 통했기 때문에 전라도 내무반장도, 경상도 내무반장도 인천 출신 신병들이 군에 입소만하면 성냥공장 아가씨 노래를 시키곤 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성냥공장이 세워진 곳이 어딘가에 대해선 기록마다 약간씩 엇갈린다. 그러나 향토사 연구가들에 따르면 ‘인천이 확실하다고 한다. 대체로 인천에는 개항 후 3년이 지난 1886년부터 성냥공장이 세워져 처음에 생산된 제품의 일부는 중국에 수출되기도 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생산을 중단해야 했다. 저가의 일본제 성냥이 범람하면서 우리나라 중·남부 지역에서만 주로 소비됐다. 1917년 인천부 금곡리(현재의 금곡동 33번지 일대)6천여㎡에 조선인촌 (성냥)주식회사가 들어서 연간 7만여 상자의 성냥을 생산했다. 이는 당시 국내 성냥 소비량의 20%에 이르는 것이며 ‘우록표’ 나 ‘쌍원표’등이 큰 인기를 끌었다. 남녀 직공만 해도 500여명이나 돼 지방의학생들이 이 공장에 수학여행을 올 정도였다니 그 명성을 짐작할 만하다. 또한 공장 주변의 주민들도 종이에 밀가루 풀을 먹인 성냥갑을 만들어 납품하면서 동네 전체가 성냥촌이 됐으니 그만큼 이 사업이 인천 공업의 대명사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당시 금곡동 일대 공터나 도로변은 햇볕에 말리기 위해 널어놓은 성냥개비와 성냥갑으로 가득해서 동네 전체가 성냥공장을 방불케 했다. 인천에서 유독 성냥제조업이 번창할 수 있었던 것은 지리적, 사회적 등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인들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우선 인천에는 항구도시의 특성상 값싼 노동력이 풍부했다. 이와 함께, 압록강 일대 오지에서 벌목한 나무들이 신의주를 거쳐 인천항을 통해 반입되는 등 성냥의 재료를 구하는 것도 수월했다. 그러나 광복 뒤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지포 라이터’의 유행 등으로 점차 성냥의 가치는 떨어졌고, 이 공장도 60년대 들어 문을 닫게 됐다. 성냥공장과 함께 금곡동에는 인천 유도의 전설인 김수복 옹의 도장 ‘대한 상덕관’이 헌책방 골목 입구에 자리잡고 유명세를 떨쳤다. 수원 출신인 김옹은 17세 때 일본에 건너가 유도와 접골법을 배워 젊은 시절 ‘사자’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각종 대회를 휩쓸고 다녔다. 당시에는 지금과 달리 유도 시합에서 몸무게에 따른 체급 구분이 없었다고 하는데 김옹은 큰 덩치의 일본인 유도 고수들을 모두 물리치며 명성을 쌓았다. 그는 또 65년간 접골원을 운영해 인천은 물론 김포 및 수원 등의 지역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그의 치료를 받았다. 김옹은 70년에 걸친 유도 인생을 통해 수많은 제자를 길러냈으며 그의 아들과 손자까지 유도인 집안으로 대를 잇고 있다. 필자의 친구인 김옹의 장남 김천기(59)씨는 송도고등학교 동창인 최재훈(전 청소년대표)씨와 각종 전국체육대회를 휩쓸며 송도고가 유도 명문고로 대를 있는데 크게 기여했다. 이 또한 김옹의 유도에 대한 애정이 낳은 결과가 아닌가 생각한다. ~ 출처:〔incheon@news〕발행 제487호(2010.02.25)
◈ 또 다른 사연 성냥공장 아가씨라는 노래가 있었다. 80년대 이전까지 군대에서 사병 생활을 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알고 있는 노래이다. 물론 정식 군가는 아니고, 진중가요라고도 할 수 없는 통속적인 노래이다. 이 곳에 소개하기가 민망할 정도로 저속한 그 노래의 노랫말은 이렇게 시작된다. 인천의 성냥공장 성냥공장 아가씨 하루에도 한 갑 두 갑 일년에 열두 갑 치마 밑에 감추고서 정문을 나설 때 치마 밑에 불이 붙어… 노랫말의 내용은 인천에 있는 성냥공장 아가씨가 치마 밑에다 몰래 성냥을 감추고 나온다. 불이 나서 경을 쳤다는 내용이다. 성적으로 한창 왕성한 시기에 사회에서 격리되어 있던 사병들인지라 약간의 외설성이 담긴 이런 노래가 불려진 것은 이해가 갔다. 불현듯 그 노랫말이 떠오르면서 새삼스럽게 몇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1) 하필이면 성냥 공장 아가씨일까? (방직공장, 신발공장이 아니고) 2) 하필이면 인천일까? (서울, 부산, 대구, 대전 등도 있는데) 3) 하필이면 하찮은 성냥을 감추고 나왔을까? (돈이나 귀금속이 아니고) 4) 하루에 한두 갑이면 일년이면 수백 갑이지 왜 열두 갑일까? 5) 성냥은 황에다 힘을 주어 그어야 불이 붙는데, 불은 왜 났을까? 백과사전을 찾아보니 그 의문이 대부분 풀렸다. 우리 나라에 성냥이 보급된 경로는 다음과 같이 나왔다. 1880년 개화승(開化僧) 이동인(李東仁)이 일본에 갔다가 수신사(修信使) 김홍집(金弘集)과 동행 귀국할 때 처음으로 성냥을 가지고 들어왔으나, 일반에게 생활용품으로 대중화하기는 국권피탈 후인 1910년대에 일본인들이 인천에 조선성냥[朝鮮燐寸]을 설립한 것을 비롯하여 군산·수원·영등포·마산·부산에 공장을 설립하여 생산 판매함으로써 가정용으로 보급되었다. 그러나 한국인에게는 공장설치도 일체 허가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기술도 배우지 못하게 하여, 한국 시장을 독점하고서는 성냥 1통에 쌀 1되라는 비싼 값으로 판매하였다. 1945년 8·15광복 후 처음으로 한국 사람의 손으로 인천에 대한성냥을 비롯하여 전국에 300여 개의 수공업 형태의 공장이 설립되어 월간 400만 포의 성냥을 생산 공급하게 되었으며, 한국전쟁 후에는 150여 개 업체로 정리되었고, 1970년대부터 자동화시설로 전환함에 따라 업체 규모의 대형화로 업체수가 20개로 감소되었다. 즉, 우리 나라 최초의 성냥공장은 일본인이 인천에 세운 조선성냥이고, 일본인들은 성냥의 독점화를 위하여 조선인의 기술 습득을 막았다. 그로 인해 일제 강점기 때는 성냥 한 통이 쌀 1되였다. 한국인이 세운 최초의 성냥공장도 인천의 대한성냥이었고, 성냥공장이 자동화시설을 갖추고 대형화 된 것은 1970년대 이후였다. 또한, 우리 나라는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1970년대 이전까지 국민의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했다. 소득 수준이 낮았으니 국민 대부분이 돈이 없었고 소비도 많지 않았다. 신발도 짚신을 신거나 집 주위에서는 맨발로 다닐 만큼 절약했고, 옷도 천을 사다가 집에서 해 입는 경우가 많았다. 군것질은 보통 사람에게는 사치였고, 외식이란 말 자체가 없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절약할 수 없는 것이 있으니 성냥이었다. 전기가 일상화 되기 전인 1970년대 이전까지도 매일 불(남포불, 등잔불, 촛불 등)을 켜기 위해 성냥이 있어야 했고, 전기 밥솥이 없으니 밥을 짓기 위해서도 성냥이 있어야 했으며, 라이터가 귀한 시절이니 담뱃불도 성냥이었다. 즉, 성냥은 집집마다 반드시 소비해야하는 당시로서는 불황이 없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던 것이다. 1) 방직공장이나 고무신공장보다 성냥 공장이 더 필요 했으니, 성냥공장 아가씨였고, 2) 일본인이 세운 최초의 성냥 공장과 해방 이후 최초의 성냥공장이 인천에 있었으니 인천의 성냥공장이었으며, 3) 성냥은 결코 하찮은 것이 아니고 한 통에 쌀 1되의 고가였으니, 감춰서라도 가지고 나올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4) 그러면 하루에 한두 갑이면 1년이면 수백 갑인데, 왜 열두 갑일까? 이 부분은 필자의 상상이다. 하루에 한두 갑이란 조그만 휴대용 성냥이 아니었을까? 아무리 치맛속이라고 해도, 커다란 성냥통을 몸에 숨기고 나올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일년에 열두 갑이란 큰 성냥통으로 열두 갑일 것이다. 하루에 작은 성냥갑으로 한두 갑을 훔쳤다면, 1년이면 큰 통으로 열두어 갑 쯤 될 것이다. 성냥공장 아가씨들은 가난한 부모를 위해서 또는 힘들게 공부하는 동생들의 학비를 위해서 먹을 것을 아끼고, 입을 것을 절약하며 일을 했다. 그러다가 명절 때 귀성하는 날 그 아가씨들이 고향에 가져가는 선물 보따리 속에는 귀금속은 아니지만 집에서 꼭 필요한 생필품인 성냥 눈물겨운 그 성냥이 들어 있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것을 훔치다가 들켜서 인간 이하의 수모를 받기도 했을 그 시절의 누이를 생각하면 서러운 마음도 든다. 5) 치마 밑에 감춘 성냥에서 왜 불이 났을까? 최초의 성냥은 마찰성냥이었다. 마찰성냥이란 나뭇개비 끝에 붙어 있는 발화성 약제를 황이 아닌 벽이나 구둣굽 등에 마찰시켜도 어느 곳에서나 발화되는 성냥을 말한다. 황린성냥·적린성냥·황화인성냥이 이에 속한다 마찰성냥은 황린을 발화연소제로 사용한 것으로 독성과 자연발화의 위험이 있으므로 국제적으로 제조금지되고, 그것을 보완한 것이 지금의 안전성냥이다. 물론 마찰성냥이라고 해서 가만히 있는 데도 옷속에 불이 붙을 정도로 허술한 것은 아니지만, 이것을 과장되게 표현한 것이 '치마 밑에 불이 붙어'인 것이다. 인천의 성냥공장 아가씨! 이 노래는 젊은 사병들의 이성에 대한 욕구를 표현한 외설적인 노래이다. 그러나 그런 노래가 탄생한 이면에는 가난했던 옛날의 아픈 기억이 있다. 그 시절 우리 누이들의 눈물겨운 아픔이 스며있는 성냥공장 아가씨! 외설적인 생각을 떠올리며 부르기에는 죄스러운 노래이기도 하다. - 옮겨온 글 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