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채널을 돌리다가 우연히 평화방송을 보았습니다.
뜻밖에도 신부님께서 '분노의 필요성'에 대해 역설하고 계셨습니다.
어떤 성당에서.. 재개발 사업과 관련해서 성당까지 먹으려고 하는 것을
그 성당의 신부님이 끝까지 저항해서, 싸워서.. 결국 막아냈다는 일화를 소개하면서
만일 그 성당 신부님이 기도나 하고 그런 착한 신부였다면 그 성당은 벌써 헐렸을 거라고.. 그러시더군요.
그러면서 분노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분노'는 하느님께서 주신 생존의 도구이다..
일정량의 분노를 가지고 살아야 살맛나는 인생을 살 수 있다..
특히 사회정의가 위협받을 때, 그것에 저항하는 분노는 꼭 필요하다..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우리 불가(佛家)에서는 '분노'라고 하면.. 이건 삼독(三毒) 중에 하나라고 해서
엄청나게 위험하고 나쁘고, 당장 뿌리뽑아야 할 원흉 중의 원흉으로 지목하는 것인데
'하느님께서 주신 생존의 도구'라고 하는 말씀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지요.
나중에 알고보니 그런 분노를 '거룩한 분노'라고 하더군요.
기독교에서 말하는 거룩한 분노는, 죄와 세상에 타협하지 않겠다는 단호함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거룩한 분노'를 보여주셨다고 합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셨다는 대목이 있다고 합니다.
또 마틴 루터 킹목사가, 흑인차별에 대해 보여주었던 분노도 '거룩한 분노'이며
마더 테레사 수녀의 헌신적인 봉사도, 가난한 사람들이 버림받는 것에 대한 저항이었으며
이 또한 일종의 분노와 상통하는 것으로서 '거룩한 분노'라고 합니다.
방송을 다 보고.. 저는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 불가에도 '거룩한 분노'라고 할 만한 게 있을까?
그런데 아까도 언급했지만 분노를 독(毒)이라고까지 말하는 불가에 그런 게 있을리 없지요.
다만, 이런 건 있습니다. 거룩하신 분이 보여주는 분노..
거룩하신 분, 즉 부처님이나 보살님이 보여주는 분노라면 '거룩한 분노'라고 할 수 있겠지요?
우선 자비의 화신, 관세음보살님의 분노가 있습니다.
관세음보살 중에서 십일면관세음보살님은 열한 가지 표정을 하고 계시는데,
앞면에 3면은 아주 자애로운 모습인 자상(慈相)
오른쪽 3면은 흰 이를 드러내고 웃는 모습인 백아상출상(白牙上出相)
또 뒤에 1면은 크게 웃는 모습인 폭대소상(暴大笑相)이지만
왼쪽 3면의 표정은 분노한 모습인 진상(嗔相)입니다.
여기에 이제 정수리 부분의 불면(佛面)을 합하여 모두 11면이 되는 것인데
자비의 화신인 관세음보살님께서 분노의 표정을 하신다는 점이 놀랍지 않습니까?
또 신중탱화에 보면 아주 험상궂은 표정을 한 예적금강이 있는데
예적금강은 삼두(三頭) 삼목(三目) 팔비(八臂), 즉 머리가 3개, 각 얼굴마다 눈이 3개, 팔이 8개입니다.
이 예적금강은 여러 신들의 우두머리 격으로, 모든 악귀나 천마외도, 망령들을 물리치고(퇴마) 번뇌망상을 없애주는
그런 능력이 특히 뛰어난 신장님인데, 이 예적금강은 바로 석가모니부처님의 화현(化現)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십일면관세음보살님의 진상을 보살님의 '거룩한 분노'라고 한다면
예적금강의 험상궂은 표정은 부처님의 '거룩한 분노'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관세음보살님도 때에 따라서는 신장의 모습을 나타내신다고 합니다.
관세음보살보문품에 보면, '선남자여, 집금강신의 몸을 나타내어 제도할 중생은
관세음보살이 곧 집금강신의 몸을 나타내어 설법하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집금강신은 곧 신장님인데, 신장님 표정이 어떠할까요? 일종의 분노상이 아닐까요?
그런데 '자비' 그러면.. 아주 부드럽고 자애로운 표정만 연상되는데
왜 이렇게 자비의 화신인 보살님과 부처님에게 분노의 모습이 나타나는 것일까요?
부처님께서는 열반경에서, 품어주는 자비와 때리는 자비를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섭수(攝受)자비와 절복(折伏)자비입니다.
섭수자비는 어머니가 아이를 돌보듯 상대를 사랑으로 포용하고 베푸는 자비이고,
절복자비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하듯이 상대에게 궁극적인 이익이 되게 하기 위해
엄격한 가르침을 베푸는 것을 말하는데, 이 때에 방편으로써 '분노'가 필요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굳이 말하자면 불가에서 볼 수 있는 '거룩한 분노' 즉
거룩하신 분들이 보여주는 분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불가의 '거룩한 분노'는 그저 방편일 뿐, 결코 분노가 아닙니다.
그 알맹이는 여전히 '자비'입니다. 자비를 행하는 일종의 '연출'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불보살님의 '거룩한 분노'입니다.
우리는 화를 낼 때, 그 감정을 어찌하지 못하고, 그야말로 '눈에 뵈는 게 없이' 정신없이 화를 냅니다.
그 감정에 빠져들고 사로잡혀서, 나 자신의 통제권을 완전히 뺏겨 버리는 겁니다.
그러나 불보살님이 화를 내는 것은 그렇게 치미는 감정의 노예가 되는 상태가 아니라
그 상황에선 짐짓 화를 내는 것이 상대방에게 유익하기 때문에 일종의 방편으로써 화를 내 보이는 것이지
우리처럼 격한 감정의 동요가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마음자리는 늘 그대로, 여여한 평정심이요 부동심입니다.
그러므로 겉으로 봐선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 같아도, 그 질적인 면에선 천지차이인 것이죠.
화를 내지만 화를 내는 게 아닌 것, 오히려 더 깊은 사랑.. 이것이 바로 '거룩한 분노'입니다.
저는 확신하건대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분노 또한 그러했을 겁니다.
예수님은 온 인류를 위해 목숨조차 아까워하지 않으실 정도로 철저한 사랑을 실천하신 분입니다.
세계 역사상 4대 성인(聖人) 입니다. 거룩하신 분, 성스러운 분이라는 찬사를 받는 분입니다.
'성스럽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영어로 holy라고 합니다.
이 holy는 whole 즉 '전체'라는 말과 상통하는 개념이라고 들었습니다.
'나'라는 개체의식을 완전히 초월하여, 온전한 전체의식을 회복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인은 자기 중심적 사고방식을 완전히 초탈하여
나니 너니 하는 오종종한 개체의식, 에고가 완전히 소멸한 분입니다.
그런 분에게, 누가 누구를 미워하고 증오하고.. 그런 개념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행동은 분노였으되, 그 마음자리만큼은 오직 사랑과 연민,
그리고 부동심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거룩한 분노'입니다.
예수님께서 화를 냈기 때문에 거룩한 분노가 아니라
겉모양은 분노이지만 그 속은 '분노가 아닌 분노'이기 때문에
억지로 표현하여 '거룩한 분노'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불가에서 말하고 있는 방편.. 바로 그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거룩한 분노'의 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내면적인 것은 보지 않고, 그저 겉으로 나타난 것만 보고
'사회 정의를 위한 분노'가 거룩한 분노라고 이해하는 건 매우 위험한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도대체 '정의'란 무엇입니까? 나의 정의가 상대방에게 악이 될 수도 있고
지금 정의가 나중에 악으로 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우리 불가에서는 정의의 이러한 위험성을 '아수라의 몰락'을 통해 경고하고 있습니다.
(☞ 새의 둥지를 지켜준 제석천 이야기 http://cafe.daum.net/santam/IaMf/50)
그래서 저는, '무엇에 대한 분노인가' 하는 외부적인 것에 초점을 두고 이해하기 보다는
분노의 행동을 하는 그 마음상태, 즉 내면적인 것에 초점을 두고 이해해야
거룩한 분노의 진면목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리석은 분노는 격한 감정의 동요에 휘둘리는 위험한 행동이지만
거룩한 분노는 여여한 부동심에서 우러나오는 자비로운 방편입니다.
거기에는 어떠한 미움이나 원망, 증오나 적개심.. 그런 감정은 추호도 없습니다.
오직 사랑뿐입니다. 오직 자비뿐입니다.
만약 그런 감정이 조금이라도 개입된다면,
그 즉시 '거룩함'은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불가에서 오직 자비와 부동심을 설한다고 해서
아무런 방어도 하지 말고,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말라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필요할 땐 하되, 다만 그 마음가짐이 자비로워야 하고, 안정된 평정심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마음가짐이라야 비로소, 정확한 상황 판단과 적절한 조치가 가능하기 때문이며
격한 감정의 동요는 이미 번뇌이며 괴로움이지만, 안정된 마음은 행복의 요체이기 때문이며
감정에 사로잡힌 분노는 어떠한 경우를 막론하고 위험한 것이며, 해로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삼독심을 경고하며, 특히 분노를 버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관세음보살이 어떻게 이 사바세계에 다니며, 어떻게 중생을 위하여 법을 말하며 방편의 힘은 어떠하나이까.」
부처님이 무진의 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여,관세음보살은 부처의 몸으로서 제도할 이에게는
부처의 몸을 나타내어 법을 말하고, 벽지불의 몸으로 제도할 이에게는 벽지불의 몸을 나타내어 법을 말하고,
성문의 몸으로 제도할 이에게는 성문의 몸을 나타내어 법을 말하느니라.
범천왕의 몸으로 제도할 이에게는 범천왕의 몸을 나타내어 법을 말하고,
제석천왕의 몸으로 제도할이에게는 제석천왕의 몸을 나타내어 법을 말하고
자재천의 몸으로 제도할 이에게는 자재천의 몸을 나타내어 법을 말하고
하늘 대장군의 몸으로 제도할 이에게는 하늘 대장군의 몸을 나타내어 법을 말하고
비사문(사천왕)의 몸으로 제도할 이에게는 비사문의 몸을 나타내어 법을 말하느니라." [법화경 관세음보살보문품]
☞ 스파이 놀이, 부처 놀이 http://cafe.daum.net/santam/IQ3i/1431
(분노존의 필요성) 억지로 참을 바엔 차라리 그냥 화를 내라 http://cafe.daum.net/santam/IQ3i/2045
첫댓글 견해와 강의, 긴 타자... 감사드립니다.
짧지만 깊은 배려의 댓글... 감사드립니다. ^^
삭제된 댓글 입니다.
무주색전투 무주성향미촉법전투..
<홍삼아씨님 댓글> 성삼위 일체의 예수님 .자비의 부처님 ^*^거룩한 분노는 분노가 아니라 아름다운 분노이다 .......어려우면서도 감동되는 글 감사히 받습니다 ^*^법당에 가면 어느날은 부처님의ㅡ 모습이 아주 온화하고 따스해서 마음의 평안을 찾고 기도하고 돌아 오는 날도 있지만 어느날은 엄하고 또 엄하신 얼굴을 하고 계셔서 무서울때도 있었습니다 ^*^ 아마도 제마음 상태이거나 무언의 기도속에 평안함을 얻은 까닭일까요? [추천글 보기 12.12.30. 17:12]
<분홍편지님 댓글> 잘 알겠습니다.^^
제 휴대폰 바탕화면에는 법륜스님께서
웃고 계신데요
볼때마다 저에게 말씀을 하시는 듯 합니다 ㅎㅎ
어떨땐 아이구 그래 그래 도닥여주시고
어떨땐 아이구 속을 그리써서 되겠어 야단도 하시고
ㅎㅎㅎ^^; [추천글 보기 12.12.31. 18:55]
잘 보고 잘 배우고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