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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인의 방 [蒜艾齋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시집 [☆히말라야를 향하여☆]의 앞표지(좌)와 뒤표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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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를 향하여]
신현봉 시집 / 시문학시인선 484 / 시문학사(2014.03.10) / 값 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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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를 향하여
신현봉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황량한 산
사람 사는 집 한 채
눈에 띄지 않는 그곳에
내가 찾는 사원이
경고하게 서 있습니다
거기에 가자면
나는 쓸쓸함이 친구가 되도록
더 외로워지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오체투지 하는 사람들
신현봉
오체투지하며
이 생生을
건너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보다는
다른 이의 평화와 행복을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낮은 곳에서
더 낮은 곳을 향해
길을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늘같고
땅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얼굴은 햇볕에 타고
옷은 남루하지만
웃음이 꽃보다 환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독빠
신현봉
드넓은 고원에서
홀로 양 떼를 돌보는 독빠
스쳐지나가는 여행자를 향해
손을 흔든다
나도 답례로 마음을 흔든다
이 짧은 순간에
우리는 무슨 말을
주고받은 것일까
입중론을 들으며
신현봉
내 안다 다 안다
그저 웃으시는 부처님
한결같은 자세로
미동도 않으시며
앉아계신 부처님
당신의 추품 안에서
또는 손바닥 안에서
웃거나 울고 있는 것인가요
열심히 뛰어 나의 세상이 고요해지면
언젠가는 지치고 상한 마음이
꽃처럼 활짝 피어날까요
하늘에 강이 흘러
초록은 벚꽃잎 흩날립니다
여행의 의미
신현봉
긴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세상은 정지해 있었다
시간은 잊었던 벽을 마주하고 앉았다
아침이 깨어나는 새벽마다
사람들은 모두 제 자리에 있다
날아가거나 걷고 있는 사람들
우리는 마치 풍경처럼
머물다 가는 것은 아닐까
마뺨윰초의 치우곰빠는 닝마빠 사원
돌 위에 새겨진 빠드마삼바바의
발바닥이 깊고 아득하다
바라나시 풍경 1
신현봉
흰두교인의 신앙으로
성스러운 강, 갠지스
한 생을 건너온 육신
한줌의 재
마을, 시장, 거리
넘치는 인파와 먼지
자동차, 릭샤, 자전거
거침없는 경적소리
바라나시 풍경 3
신현봉
나무 위에 놓인 시신
입 속으로 불이 들어가네
서로 이웃이었을 사람들
불 속에서 해체되니
재가 되어 사라지네
10여구의 시체가 타는 데도
역한 내음이 없는 것은
바람의 방향 때문인지
성스런 갠지스의 물로
온몸을 축성한 때문인지
인도의 소
신현봉
주인 없는 소
어디에나 있다
화장터 곁에도 있고
쓰레기장에도 있다
골목길에고 있고
기차역에도 있고
고속도로 한가운데도 있다
경적을 울려도 꿈쩍하지 않는 소
먹을 것을 찾아 기욱거리는 소
경사스런 일이 있으면
주인이 있는 소를 사서
방생하기도 한단다
어디에나 있는 소가 죽으면
개들이 잔치를 한다는데
돌로 빚어진 소는
힌두교 사원 안에 있다
바라나시에서 카주라호 가는 길 1
신현봉
해는 머리위에 떠올랐는데
할 일 없이 그저 무료하게
길가에 앉아 있거나
짧게 누워 있는 사람들
아무런 가진 것 없으니
근심이나 걱정도 없을지
시간은 더디게만 흐르고
나그네의 눈에는 무거운
침묵이 쌓인다
녹애원(sarnath)의 정적
신현봉
석가모니 부처님
여기서 처음 말씀하셨다네
다섯 명의 구조다자와 함께
사슴도 들었다하여
녹야원이라네
이를 기념한 초전법륜탑(Dhamekh stupa)
켜켜이 쌓인 시간 속을 흐르는
얼음 같은 정적
부처님의 자비와
다르마는 어디에 있는지
순천만 갈대
신현봉
순천만은
갈대 천지
해가 지면
계들의 세상
갈댓잎 뜯어먹는 소리
얼마나 건강한지
그대도 이곳에 와서
한 번 드셔보시라
봄날의 담벼락에 쓴 시
신현봉
황사가 날아와
짧은 봄이 깊다
살구꽃잎 벚꽃잎 흩날려
또, 한 봄이 가네
수년 전에 서울에 오신
티벳 스님들
히말라야의 환한 웃음들을
언제나 볼 수 있을까
가을햇살
신현봉
가을에는 햇살도 외로운가
들곷 곁에서 살랑거린다
가을을 걷는 사람의 어깨에
내려와 시를 들려주고
나무들의 숨겨진 마음을
잎새에 피어나게 한다
푸르게 치솟아 오르던 풀들의
고개를 숙이게 하고
겨울을 예감한 작은 생명들을
손짓해 불어낸다
성숙하여 겸손해진 가을 햇살이
우리 함께 웃자 한다
겨울 설악雪嶽
신현봉
설악의 등성이마다
누워 있는 호랑이
흑과 백의 뚜렷한 명암이
그려내는 무늬
겨울나무들이 뱉어내는
검고 진한 생명의 숨소리
겨울 설악은 호랑이의
숨결로 가득하다
가을밤의 산책
신현봉
가을밤은
경계가 없다
걷다 보면 모든 길이
소리 없이 이어진다
춘천의 역사동이나 죽림동에서
스톡홀름과 제네바의 뒷골목을 돌아
라싸와 간체를 지나
카이로나 남미의 시골마을을
나는 걷고 있는 것이다.
저녁놀에 하늘거리는 코스모스
밭머리에서 하얗게 웃고 섰는 억새
가을이 깊어갈 수록
부드러워지는 햇살
그것들을 주머니에 가득 담았다가
먼 그대들에게
말 없이 선물할 수는 없을까
나는 찬 이슬이
온몸에 스미는 것을 허하며
속이나 비워야겠다
비자림榧子林
신현봉
비자나무 열매의
상긋함
허공에 깃든
제주의 맛
아린妸燐에게
신현봉
태어난 첫달에 너와
나누는 이야기
기쁨 슬픔 희망 절망 고통 사랑 미움 상처는
마음에서 오는 거란다
기품은 나이에 있는 것이 아님을
배냇짓하는 너
여러 생生을 건너온 바람이 엿듣고는
슬며시 고요 속을 불어간다
미인美人
신현봉
사람
산속에 살든지
도시에 살든지
사람
둘이 살든지
혼자 살든지
사람
지위나 재산 같은 것
있든지 없든지
사람
아름다운 향기 넘쳐
스스로 빛나는
인왕산仁王山에서 1
신현봉
꽃들
차례로 피었다 이울어
떠나는 사람들
꽃 진 자리에
맺혀 있는 것은
상처인가 열매인가
돌아앉은 눈물 속에
되살아나는 그대
부디 안녕하기를
인왕산仁王山에서 5
신현봉
만남에는 기한이 있었네
이별 후에 비로소 알 수 있었네
그것이 우연처럼 왔다면
해일같이 헤어짐이 왔다 하여
놀랄 일은 아니라 할 것이네
쉽고 가볍게 꿈꾸는 자에게
사랑이나 영원은 없는 것인지도
참 모를 일이네
걸쳤던 옷도 벗고 가야 하는데
인연이 짧다 해서 그대
서운해 하지 않았으면 싶네
가을바람 불어오면
찬 바람이 뒤따라 불어온다네
출리심出離心 1
신현봉
*
한 밤의 병원
의사는 두 사람
한 분이 내 어깨위에서
작은 상처를 찾아내고는
헤집어가며 살펴본다
뭔가를 찾아냈는지
쭈욱 뽑아낸다
뱀이다
검은 색과 흰색이 반반인
40여센치미터 정도의 뱀은
바닥에 내려놓자
꿈틀거리며 달아나려 한다
그 때 엄마뱀인 듯
죽이지 말고 살려달라는
애원의 목소리가 아련하게 들린다
의사가 자비를 베풀까 봐
일순 염려하며 긴장한다
의사는 그럴 수 없다고
뱀의 머리를 누른다
다음날 아침 어깨는
아지랑이처럼 가벼웠다
**
며칠 후
머릿속에서 콩알 반쪽보다도 작은
검은 물체가 후두둑 떨어진다
놀라움에 살펴보니
개구리로 변신해 가는 올챙이였다
내 생각의 분주함 속에서
자라고 있었던 것인가
얼마나 오래 나는
나도 모르는 뱀을 길러왔던 것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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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自序
정년퇴직을 했다.
봄날처럼 가볍다.
지나온 길을 돌아보면
잘못과 허물이 그대로 살아 있다.
삶은 꿈같고 환영 같아서
더 소중하고 귀한 것.
히말라야를 향해 갈수록
히말라야는 내게로 다가온다.
2014년 2월
신현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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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봉 詩集 [※히말라야를 향하여※]
[ 해설 ] -
영혼의 자유를 찾아가는 긴 여행길
김석환(명지대학교 문창과 교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들은 광막한 연속체인 우주를 ‘천/지/인’ 3차원적 체계로 인식해 왔다. 그런데 동물 중에서 유일하게 직립보행을 하는 인간들만이 발은 땅을 딛고 있으나 머리는 하늘을 우러러보며 살 수 있는 특권이 있다. 그러한 육체적 특징은 인간이 감성과 이성 그리고 영성을 갖고 있다는 정신의 우월성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 같다. 즉 인간은 이성과 감성으로 땅 위의 가시적인 현상을 인식하고 판단할 뿐만 아니라 영성으로 하늘의 뜻 또는 지고한 진리의 세계와 소통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닌가. 그런데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물질문명이 발달하기 시작한 근대 이후부터 이성의 고마움을 맹신하기 시작한 인간들의 정신에서 하늘의 비밀을 꿈꾸고 탐구하던 상상력과 영성은 점점 퇴화되어 온 것 같다. 물신주의의 광풍 속에서 현대를 사는 우리들이 앓고 있는 인간성 상실과 소외는 영성을 잃고 땅위에 보이는 것만이 진리라 믿고 하늘, 그 보이지 않는 형이상학 또는 신의 세계를 외면한 대가일 것이다.
하늘과 단절된 채 사는 현대인들에게 시가 위안과 치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성적 논리를 초월한 상상의 세계를 보여 주는 예술이기 때문이다. 시는 시인이 대상 너머에 숨은 진실을 천착하기 위해 새롭고 독자적 문법을 창조하고 그에 따라 구축된 언어 체계가 아닌가. 그런데 시가 보이지 않는 진실을 찾아 보여준다는 점에서 영성으로 하늘에 존재하는 신과 소통하고 그 비밀을 깨닫는 종교와 유사성이 있을 것이다. 발생론적으로 보면 원시시대의 제천의식에서 제사장이 하늘로 올리던 주문이 시의 기원이 되었다는 것도 시와 종교가 어느 면에서 유사한 관계가 있음을 입증한다. 다만 종교는 시가 그리는 상상의 세계의 극점 또는 그 너머에 신이 존재한다고 믿는 ‘성(聖)’의 세계와 소통하려는 영성의 영역에 속한다는 점에서 시와 다를 것이다.
그런데 신 시인은 정년을 맞아 평생 봉직하던 공직으로부터 퇴직하여 티베트나 인도를 여행하고 자연과 가까이 하거나 산을 오르며 신의 음성에 귀를 귀울인다. 그리고 지나온 길을 돌아보고 남은 미래를 내다보는 그 구도와 자아성찰의 여행길에서 쓴 시들을 모아 시집에 펴내는 것이다. 시집 서두에 쓴 ‘자서’에 보면 살아온 길에 남아 있는 “악업”이 덮이기를 기도하며 자신의 존재를 찾고 진정한 도(道)가 어디 있는가를 찾고자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시인은 정년퇴직을 하면서 지상에 발을 붙이고 사는 인간의 실존적 한계와 삶의 유한성을 벗어나 더 가치 있고 영원한 삶을 찾기 위해 여행을 떠나고자 한다.
아침 햇살에 사위는 별빛처럼
사그라드는 모닥불처럼
나는 사라져가리라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황량한 산의 능선에
외롭게 버티고 서 있는 사원
햇빛과 바람과 흰구름이
살아 있는 곳
강변에는 녹색이 아름답게 빛나고
룽따와 타르쵸가 휘날리는
그곳으로 가리라
비가 오고 바람이 분다고
눈이 온다고
걱정하지 않으리라
서두르지 않으리라
힘들면 쉬었다 가고
때로는 날아서 가리라
사물들의 이야기
강과 별들의 이야기
가슴으로 들으며 가리라
-「정년퇴직」전문
산업화 시대에 돌입한 이후 사람들은 대부분 일정한 직장을 택하여 노동을 하고 그 대가로 받는 임금으로 생활하게 되었다. 직장의 구성원이 되면 질서에 따라 상사의 명령에 복종하고 하급자의 요구를 수용하며 주어진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방심하는 만큼 경쟁에서 낙오되고 불이익이 주어지니 시간이란 권력에 억압당한 채 자신의 욕망을 밀쳐두고 생활해야 한다. 그러다가 일정한 연령에 이르면 다음 세대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직장에서 물러나는 게 ‘정년퇴직’아닌가.
시인은 퇴직을 하며 ‘사위는 별빛처럼’, ‘사그라드는 모닥불처럼’ 사라져가리라고 다짐한다. 그러나 시인에게 그 사라짐은 평소 생활주변에서 볼 수 있는 한 점 생명체도 찾을 수 없는 ‘황량한 산의 능선’으로 가서 ‘햇빛과 바람과 흰구름’을 가까이 하며 더불어 살기 위한 예비이다. 즉 늘 세속의 먼지들로 어둡고 어지러운 현실을 벗어나 햇살처럼 밝고 바람처럼 자유로운 세계로 가기 위한 출발이다. 그곳에서 산 능선 위를 나는 ‘흰구름’이 되어 번뇌를 떨치고 더 많이 갖기 위해 서두르지 않으며 신의 섭리를 들려주는 ‘강과 별의 이야기’를 가슴으로 듣기 위해서이다.
시인은 먼저 지상에서 가장 높아 사람의 발길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 ‘히말라야’를 향한다.
풀 한 포기 자리지 않는
황량한 산
사람 사는 집 한 채
눈에 띄지 않는 그곳에
내가 찾는 사원이
견고하게 서 있습니다
거기에 가자면
나는 쓸쓸함이 친구가 되도록
더 외루워지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히말라야를 향하여」
시인이 풀 한 포기의 생존도 허락하지 않고 사람 사는 집 한 채 없는 ‘황량한 산’을 산과 소통할 수 있는 ‘사원’이라 믿고 찾는 까닭은 무엇일까. 시인은 그 ‘사원’이 ‘잘못과 허물이 그대로 살아 있는’ 현실을 떠나 더 ‘소중하고 귀한 것’을 감추고 있는 하늘로 향하는 통로가 되어주리라 믿기 때문일 것이다. 지구에서 가장 높다는 ‘히말라야’는 황량하기게 오히려 세속과 거리를 둔 채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사다리가 되기에 충분할 것이다. 그곳으로 가기 위해서 시인은 지금까지 맺은 인연과 이별한 뒤에 찾아올 ‘쓸쓸함’을 친구로 삼고 ‘외로워지는 연습’을 하리라고 한다.
시인은 그곳으로 가다가 “오체투지 하여 이 생生을 건너가는 사람들”을 만난다. 하늘과 땅을 닮은 그들은 이타적이고 겸손한 자세로 낮은 곳을 향해 가고 있다. 오랜 고행 길에서 비록 햇볕에 얼굴이타고 옷은 남루하지만 이웃의 평화와 행족을 위해 기도하며 웃음을 짓는 그들에게서 시인은 진정한 삶의 길을 생각한다.「오체투지 하는 사람」. 그리고 “행복한 빈자의 시절”을 보내다 중국에 주권을 빼앗긴 티베트에서 “라싸의 영혼은 황금의 물결”에 침몰하는 비극이 벌어지고 있다. “남의 땅이 되어버린 내 땅”에서 “밀라래빠”가 부르는 노래는 물질적 풍요보다 순결한 영혼을 지키려는 간절한 기도일 것이다. 「티베트의 기도」또한 ‘창탕고원’에서 개이고 흐린 날씨에 아랑곳없이 “풀을 뜯는 /야크와 양들”. 그리고 “홀로 양 떼를 돌보는 독빠”는 신의 뜻을 좇아 자연에 기대어 사는 그 영혼들의 상징이다.(「창탕고원․1」)
또한 시인은 ‘티베트 고원’에서 비가 내려 땅이 파이고 흙더미가 무너지며 산사태가 나더라도 오직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을 본다. 그렇게 “자연 그대로 자연인 곳”의 강변에 초록빛 생명을 키우는 물과 은하수가 들려주는 우주의 이야기를 품은 채 “지구촌 곳곳에서 말 달리는/룽따와 타르쵸”가 오색으로 펄럭이는 것을 본다(「룽따와 타르쵸의 나라」). 그리고 시인은 “한결같은 자세로/미동도 않으시며/앉아계신 부처님” 앞에서 자신이 그 품이나 손바닥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입증론을 들으며」). 또한 햇살이 내리는 가을에 “빈 호수와 밭에 쌓이는/잎들”을 “티베트에서 오신 스님”의 법문과 동일시하며 그것이 강물이 되어 흐르는 것을 느낀다. 그렇게 영적인 눈이 뜨이고 귀가 열리는 것은 ‘지止’에 관한 법문을 들으며 일상적 시간의 흐름을 벗어나 멈추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지止에 관한 법문을 들으며」). 이처럼 시인은 여행지에서 만나는 사람들이나 동물은 물론 무심히 떨어지는 잎 하나에서도 참된 삶의 자세를 발견하고 신의 손길을 본다.
여행길에서 돌아온 시인은 세상을 다시 바라보며 만나고 본 것들을 회상하면서 인간의 존재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 꿈길을 거닐 듯 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으나 “세상은 정지해” 있을 뿐 조금도 변함이 없고, “시간은 무한정으로 흐르고”만 있다. 여행을 하는 동안 잠시 떠나 있던 현실의 “벽을 마주하고 앉았”는데 새벽이 밝아오고 “사람들은 모두 제자리”를 지킬 뿐이다. 그렇게 시인은 시간의 흐름을 벗어날 수 없는 현실에 얽매인 채 “마치 풍경처럼 머물다 가는” 삶의 덧없음과 유한성을 깨닫는다. 그리고 “돌 위에 새겨진 빠드삼바바의 발바닥”만큼 “깊고 아득하”게 지상에 흔적을 남기고 살다 갈 수밖에 없는 자신의 존재를 생각한다(「여행의 의미」).
그러던 시인이 다시 일상을 벗어나 나라 전체가 종교적 공간이요 힌두교 성지라는 인도로 향한다. 그리하여 죄를 씻어 주는 “성스러운 강, 갠지스” 유역의 ‘바라나시’에 머문다. 한 생을 마친 육신이 타서 한줌의 재가 되고 있는 그곳에도 인간이 사는 마을이 있고 인파와 세속의 먼지가 넘치며 앞을 다투며 달려가려는 차들의 경적소리가 요란하다.(「바라나시 풍경․1」). 삶과 죽음이 공존하듯 어둠과 빛이 공존하는 그곳에서 힌두사제들은 감사의 기도를 올리며 사자의 영생을 기원한다. 그리고 화장터에서는 주검이 불티를 날리며 타고 있는데 이방인들은 그 풍경을 볼거리에 불과하다는 듯 구경을 하는 상황인 인간 존재의 운명적 아이러니를 그대로 보여준다.(「바라나시 풍경․2」).
또한 시인은 인도에서 소가 화장터 곁에서부터 고속도로 한가운데까지 차지하고 있는 이색적인 풍경을 본다. 그런 소들이 사는 동안에는 “경적을 울려도 꿈쩍하지 않”을 만큼 특별한 대접을 받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죽으면 “개들이 잔치를 한다”고 한다. 그런데 “돌로 빚어진 소”는 힌두교 사원 안에 있다니 소가 힌두교 신자들에게 어떠한 상징적 의미를 갖고 숭배의 대상이 된 것일까. 아무튼 종교가 한 사회의 문화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가를 실감케 한다(「인도의 소」). 그리고 시인은 인도 사람들이 낡은 천막 아래서 소와 개와 함께 자며 가진 게 없이 생활하는 것을 본다. 겉으로 보기엔 죽기만을 기다리는 것 같으나 새처럼 자유롭게 살아가는 그들에게 “근심의 그림자”가 없기를 빈다(「샨티 샨티 샨티」). 또한 큰 나무그늘 아래서 땔감을 머리에 이고 가는 여인과 추운 밤에 자그마한 화톳불을 피워놓고 노숙을 하는 사내들이 있다. 아무 곳이나 갈 수 없는 소보다도 못한 그들의 삶을 보며 시인은 풍요롭고 편안하게 살고 있는 자신을 돌아보고 죄스럽고 미안한 생각을 하기도 한다(「인디아 생각」).
이처럼 시인은 여행 중에 본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풍경이나 움막이나 길가에서 가난하지만 근심 걱정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을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 보여주고 있다. 그들을 보며 동정의 눈물을 흘리면서도 그들의 가슴 속에 숨어 있을 따뜻하고 평화로운 마음을 발견한다. 그리고 정지된 시간 속에서 가난하지만 오히려 여유롭게 사는 그들을 보며 인간의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를 생각한다. 그리하여 더 많은 물질을 얻기 위해 서로 다투며 속도 경쟁을 하며 달려가는 문명사회 속에 살아가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이국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시인은 생명의 숨결이 살아 있는 국내의 산하로 발길을 서두른다. 갈대가 우거진 순천만에 가서 해가 지면 게들이 “갈댓잎을 뜯어먹는 소리”에 귀를 세우기도 한다. 제주도로 가서 ‘다랑쉬오름’을 오르며 바람을 마시고 “젊은 억새들”이 봄을 부르는 손짓에 숨을 죽인다. 그리고 수평선 위의 놀 속에 날고 있는 “갈매기 세 마리”의 자유를 보기도 한다. 그렇게 문명의 소음과 찌든 먼지들을 비우고 자연 속에 깃든 생명의 소리를 들으며 자유를 감지하던 시인은 문득 발걸음을 멈추고 ‘토담’에 기대어 본다.
마을 어귀
빈 논베미 끝에서부터
고요가 밀려오는 늦가을
사금파리의 싸늘한
차가움에 부딪쳐
빛나는 햇살
토담에 기대 서서
마냥 바라보던
허공
희미해진 풍경에
다시 온기를 흐르게 하는
먼 토담
-「토담 풍경」
가을이 깊어지면서 추수를 끝낸 ‘빈 논베미’는 어쩌면 시인의 내면 풍경인지도 모른다. 벼 이삭을 흔들던 바람도 자고 ‘고요가 밀려오는 늦가을’에 시인은 신산스럽던 일상의 상념을 비운다. 그러자 천상의 축복인 듯 내리는 맑은 햇살에 ‘싸늘해진 사금파리’가 하얗게 빛나듯 무디어진 감각이 깨어난다. 이어서 ‘토담에 기대 서서’ 허공을 바라보며 상상의 날개를 펼치던 옛날의 풍경이 떠오르다 희미해진다. 세월 속으로 사라진 그 ‘먼 토담’에 아직도 남아 있을 온기가 늦가을의 차가움을 견디게 한다.
그렇게 생명의 온기가 살아 있는 흙에 피땀을 더하고 반죽하여 토담을 쌓고 기대어 살던 옛날은 추억이 되어 버렸다. 기계화 되고 문명이 발달하면서 사람들은 정성을 들여 토담을 쌓기보다 시멘트 벽돌로 고층 빌딩을 짓고 장벽을 높여 이웃과 단절된 채 살게 되었다. 그 “허술한 시간의 벽돌” 담은 서로를 소외시킬 뿐이지 생명이 넘치는 유토피아로 가는 발판이 되지 못할 것이다. 시인은 ‘벽돌담’, 그 “편하게 쌓아 올린 날들”을 딛고서 지고한 문화적 가치의 상징인 “별을 따려 하는”것은 헛된 꿈임을 경고한다. 그런데 자연의 시간은 순환하며 다시 봄이 찾아와 겨우내 얼었던 땅에서는 깨어나는 생명의 숨소리가 들려온다. 그러나 생명의 봄은 저절로 오는 게 아니라 인류의 어둠을 몰아내며 평화를 불러오는 사람들의 숨은 노력 덕분이다. 시인은 온몸으로 뿜어내는 그들의 “푸른 힘”이 봄바람에 실려와 새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는 것은 본다. 그리고 그 속에 숨은 생명력의 “마법”이 고향 마을 “천남리의/살구나무꽃”을 피우며 헤어진 “옛사람”들의 얼굴을 떠오르게 한다(「봄날, 봄날, 봄날에는」).
시인은 그 봄바람에 “살구꽃잎 벚꽃잎”이 피고 지는 것을 보며 맑은 영혼을 찾던 “티벳 스님들”과 “히말라야의 환한 웃음”을 그리워한다(「봄날 담벼락에 쓴 시」). 도한 담벼락에 “별”을 닮은 “희미한 얼굴들”과 “들꽃” 그리고 “티베트의 하늘과/산과 강”을 크레용으로 그리며 마음의 그늘을 지운다. 그렇게 “한 번도 써보지 않은 크레용으로 ”그린 그림은 시인이 지향하는 생명과 평화가 넘치는 꿈의 세계요 그곳으로 가는 길을 찾는 자신의 시와 다름이 없을 것이다(「봄날에 크레용으로」). 그런 시인은 인왕산 자락에서 봄기운을 느끼며 “매양 그날이 그날인 사람들의 오래된 뼛속으로 새싹이 돋”기를 희망한다(「뼈 속에서 움트는 봄」). 또한 풀들을 고개 숙이게 하고 겨울을 맞이할 생명들을 불러내는 가을햇살을 맞으며 “성숙하여 겸손해진” 미덕을 보기도 한다(「가을햇살」).
심지어 시인은 한겨울에 벌거벗고 칼바람을 맞으며 서 있는 나무들 속에 숨은 “시퍼런 정신”을 보기도 한다. 그리고 가지마다 하얗게 핀 눈꽃을 “눈 시리게 아름다운 하늘꽃”이라 명명하며 자신도 맨몸으로 봄을 맞을 준비를 한다(「겨울의 한복판에 서있는 나무들」). 그리고 설악의 등성이에 서 있는 나무들의 “검고 진한 생명의 숨소리”를 들으며 “호랑이의 숨결”을 연상하기도 한다(「겨울 설악」). 그리고 서해의 작은 섬 ‘굴업도’에 가서 “손님이 올 때마다 죽어야 한다”는 것도 모르고 “바다와 땅 속에서/태어나는 봄”을 바라보는 사슴과 염소의 운명을 생각한다(「굴업도 봄마중」). 그러나 자신이 언제 죽음을 모르고 사는 것이 그 동물들뿐이겠는가. 사람 역시 지상을 언제 떠나야 할지 모르고 영원한 우주적 시간 속의 한 순간에 불과한 짧은 삶을 누리다 떠나가야 하는 존재임이 분명하다.
시인은 그러한 생의 유한성을 초월하기 위해서일까. 사계절 내내 산과 들 또는 바다를 여행하며 변화와 순환을 거듭하는 자연 속에 내재된 생명의 숨결을 온몸으로 감지한다. 그 여행은 문명 속에서 편리한 일상을 보내는 동안 잠들어 있던 영성을 깨워 지고한 가치와 영원한 생명의 세계를 찾기 위한 순례와 구도의 길이다.
그 순례길은 비교적 자연이 잘 보존되어 있는 제주도로 이어진다. 그곳 용머리 해안에서 낚시에 걸려 나온 가시돔 한 마리를 보고 자신을 발견한다.
낚시꾼의 낚시에
걸려 올라온
가시돔 한 마리
붉은 피 몇 방울
바위에 떨어져
햇빛에 반짝인다
그가 나인 것 같아
가슴 깊이 새겨져
지워지지 않는다
- 「용머리 해안에서」
낚시 바늘을 숨겨둔 미끼를 맛있는 먹이인 줄 알고 물었다가 ‘붉은 피’를 흘리며 최후를 맞는 가시돔은 맹목적인 물질적 탐욕 때문에 소외와 고독이란 중병을 앓게 된 현대인들의 모습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시인은 바위 위에 떨어져 햇빛에 반짝이는 핏방울이 주는 의미를 가슴 깊이 새겨 본다.
그리고 귀여운 어린아이 ‘아린’을 보면서 인간 존재의 우주적 의미를 생각해 본다. “작은 우주”인 인간이 탄생하는 순간에 “우주가 화답”하며 만물들과 인연을 맺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봄비가 내리고 모과꽃이 인자하게 웃는 것도 한 생명이 탄생하는 그 우주적 사건을 축하하는 메시지이다. 그리고 “반딧불이들이 보석보다 아름다운 빛을 내며” 밤하늘을 밝혀 준다는 것이다. 그렇게 시인은 인간도 만물들과 유기적 관계를 맺고 있는 귀한 존재임을 보여준다(「아린」). 시인이 때가 묻지 않은 국내외 산하를 여행하며 그 속에 내재된 생명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까닭은 그러한 유기론적인 생명관 때문일 것이다.
또한 시인은 “새잎 나는 은행나무 아래서 이벽”을 기억하며 늘 새로운 시간과 만나고 이별해야 하는 것이 삶의 길임을 암시한다. 나아가 더 즐겁고 행복한 그 “꿈으로 가는 길 위에서”“때가 되면 꽃이 지듯이” 어디론가 늘 떠나고 있는 게 우리들이라며 유유자적하는 삶의 자세를 보여 준다(「송별」). 시인은 그러한 인생길에서 사람이 사는 곳이나 지위 또는 재산의 유무에 상관없이 “아름다운 향기 넘쳐 스스로 빛나는” 존재가 될 때 참다운 ‘미인’이라고 한다(「미인」).
시인은 장대비를 헤치며 한라산을 오르다 “더 젖을 것이 없을”만큼 비에 젖을 때 모든 걱정이 사라지고 가슴이 후련해 옴을 느낀다.
장대비 헤치며
한라에 오른다
젖을 것 다 젖어
더는 젖을 것이 없을 때
걱정은 없어지고
가슴은 후련해지네
백록담에는 안개만 가득하여
마음이 사진기가 된다네
있다가도 없는 바람 빼놓고
삼다三多의 제주에
가장 많은 것이 무엇인지
산에 올라보면 알게 된다네
설문대할망의 전설은
여전히 살아 있다네
-「한라산」
시인이 오르는 ‘한라산’은 땅과 하늘, 즉 속세로부터 성의 세계를 이어 주는 사다리가 되어 준다. 그리고 그곳에 내리는 ‘비’는 시인에게 천상의 비밀과 숲의 생명력을 온몸으로 느끼게 하고 세속의 먼지를 씻어주는 성결한 생명수나 다름이 없다. 시인은 마치 선경에 들어 온 듯 안개 자욱한 백록담에서 전설 속의 ‘설문대할망’을 생각하며 신비한 풍경을 가슴에 담아 본다.
또한 시인은 인왕산을 오르며 피었다 지는 꽃을 보고 매미들의 노래를 듣고 풀벌레와 교신을 하며 시를 짓는다. 그렇게 시인은 숲에 깃들어 있는 생명들과 교감함으로써 자연을 닮은 진정한 ‘미인’이 되기를 소망하는 것이다. 그런 시인에게 흰나비, 잠자리 떼, “들꽃잎에 영그는/흰 이슬”도 모두 자연의 섭리를 일러주는 다정한 이웃이 된다. 이처럼 시인은 천상과 지상을 이어주는 산을 오르며 일상을 벗어나 진정한 영혼의 자유를 누리고자 한다.
한편「출리심」연작시에서 시인은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며 그 깊이에 남은 헛된 탐욕을 비우고 참된 자아로 거듭나기를 기원한다. 병원에서 의사가 작은 상처를 헤집어 “검은색과 흰색이 반반인/40여센치미터 정도의 뱀”을 찾아 뽑아내는 꿈을 꾼다. 그 꿈에는 자신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탐욕의 ‘뱀’을 제거하고 싶은 무의식이 투사되어 있을 것이다(「출리심․1」). 또한 시인은 “집과 사무실이라는 쳇바퀴를 돌리며 잠자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그 잠에서 깨어나 자신의 존재 위치를 확인한다. 그리고 먼 미래의 어느 날 또 “이승의 어디에서” 무엇을 추구하기 위해 “절하고 있을 것인가”를 상상해 보며 “거미줄에 걸려 있는 잠자리”처럼 현실에 얽매인 채 살아가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리고 물질이나 권력 등을 우상처럼 섬기며 그 노예가 되어 살던 일상으로부터 벗어나 “어느 때나 주변과 어울려/풍경이 되는 나무”위로 알아가기를 꿈꾼다(「출리심․3」). 그 꿈은 곧 현실의 규칙에 따라 사는 동안 소외되어 있던 참된 자아를 찾아 자유롭고 진정한 삶의 주체가 되어 살고자 하는 무의식적 욕망의 표현이다.
시인은 정년퇴직을 하면서 히말라야, 티베트, 인도 등을 여행하며 잠들어 있던 영성을 깨우고 진정한 삶의 길이 어디에 있는지를 탐색한다. 그리고 국내의 여러 산하를 돌며 자연 속에 내재된 생명의 숨결을 온몸으로 감지한다. 그 긴 순례의 여행은 시인에게 자신의 참된 욕망에 따라 살기보다 곧 헛된 가치를 위해 살아야 하는 일상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영혼의 자유를 얻기 위한 노력이다. 이 시집엔 그 여행길에서 감지한 자연의 섭리와 생명의 숨결이 숨 쉬고 있다. 갈수록 물신주의가 팽배해지고 그에 비례하여 인간의 소외와 고독이 심화되는 시대를 향해 많은 영혼의 세계로 가까이 갈 수 있다는 참된 삶의 길을 제시해 준다. 늘 천상을 향해 산을 오르던 시인의 맑은 시심이 물질의 우상에 절을 하느라 아픈 우리의 등을 치유해 주고 기울어진 어깨를 바로잡아 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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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사의 글 ◆
시인은 정년퇴직을 하면서 히말라야, 티베트, 인도 등을 여행하며 잠들어 있던 영성을 깨우고 진정한 삶의 길이 어디에 있는지를 탐색한다. 그리고 국내의 여러 산하를 돌며 자연 속에 내재된 생명의 숨결을 온몸으로 감지한다. 그 긴 순례의 여행은 시인에게 자신의 참된 욕망에 따라 살기보다 곧 헛된 가치를 위해 살아야 하는 일상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영혼의 자유를 얻기 위한 노력이다. 이 시집엔 그 여행길에서 감지한 자연의 섭리와 생명의 숨결이 숨 쉬고 있다.
― 김석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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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현봉 시인∥
∙ 1952년 충북 제천 출생
∙ 1986년 한양대 교육대학원 졸업
∙ 1987년. 6.『현대시학』전봉건 선생 천료 데뷔
∙ 시집 :『난지도』『그대와 함께 가는 길』『히말라야 가는 길에』『작은 것 속에 숨어 있는 행복』『나는 여기에 그대는 그곳에』『너는 나이기에』외
∙ 2011.12. 제34회 한국현대시인상 수상
∙ 한국문인협회, 펜클럽한국본부, 한국현대시인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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