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출처: 내고향 풍기 원문보기 글쓴이: 배규택
시보네 에세이 59
빛바랜 신문 속의 풍기
2부 — 사람과 삶의 무게
땅은 말이 없다.
문화도 쉽게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은 말한다.
울고, 웃고, 버티고, 무너지고,
다시 일어서면서.
2부는 그 사람들의 이야기다.
신문 기사 속에 단 몇 줄로
스쳐 지나간 이름들, 숫자들,
그리고 그 뒤에 숨어있는
눈물과 땀의 무게를.
하나. 폭우가 허리를 자른 날
1961년 여름
1961년 7월 12일
경향신문은 큰 활자로 외쳤다.
"暴雨에 허리 잘린 中央線"
그해 여름 경북 영주군 일대에
폭우가 쏟아져,
죽령 터널 입구 언덕이 무너졌다.
새벽 3시 50분, 서울 청량리발
대구행 25열차가 멈추었다.
이후 죽령 터널을 통과하는
모든 기차 운행이 종단되었다.
풍기—안동 간 50.5킬로미터 구간
전면 운행 중단. 통신망도 완전 두절.
죽령. 소백산 허리를 가로지르는
그 고개.
선조들이 보부상의 짐을 지고 넘고,
임진왜란 때 피난민이 눈물로 넘고,
근대에는 기차가 터널을 뚫고 지나가던
그 길이 하룻밤 빗물에 잘려나갔다.
풍기에서 대구로, 서울로 이어지던
생명선이 끊긴 것이다.
그 여름 풍기 사람들은 고립된 섬처럼
앉아 물이 빠지기를 기다렸을 것이다.
버스편도 모두 두절되었다는
기사 말미의 한 줄이
그 고립의 무게를 전해준다.
그러나 그들은 기다릴 줄 알았다.
소백산 아래 사람들은 원래 그랬다.
폭우가 와도, 눈이 쌓여도
산이 있고 길이 있으면 언젠가는
열린다는 것을.
둘. 씨름판의 함성
1961년 풍기 장날
1961년 5월 경향신문 지방 단신 하나.
"풍기 8일 당지에서는 면체육회 주최로
면민 친목을 위한 동(洞) 대항
씨름대회(제1회)가 1천여 명
관중이 모인 가운데 성대히 거행되었다."
일등 — 동부2동. 이등 — 성내4동.
삼등 — 성내2동.
단 두 줄의 기사. 하지만
그 두 줄 속에
얼마나 많은 것이 들어있는가.
장날의 흥겨운 북소리, 모래판 위에
맞붙은 장정들의 뜨거운 숨결,
편을 갈라 목청껏 응원하는
아낙들과 아이들의 목소리,
씨름이 끝나고 막걸리 한 잔에
화해하던 이웃들.
1천 명이 모인 것이다.
당시 풍기의 인구 규모를 생각하면
그것은 마을 전체가 나온 축제였다.
선거철에 갈라졌던 마을이, 강이 말라
한숨 쉬던 사람들이
씨름판 앞에서는 하나가 되었다.
모래판 위에서는
오직 힘과 기술만이 말했다.
그 씨름판에 내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있었을지 모른다.
셋. 소백산 화전민의 슬픔
쌍둥이를 두고 간 아버지
1965년 5월 1일 동아일보
주말 특집 기사는
제목부터 가슴을 저민다.
"소백산의 화전민,
쌍동이도 못 본 채..."
경북 영주군 풍기면 교촌동 147번지.
서독 엔센 광산에서 적탄 작업 중
사고로 숨진 최대혁(33) 씨의 이야기다.
그의 부인 이영숙(29) 씨는 부석면
소백산 기슭의 화전에 가 있어
남편의 장례식도 모른 채 지냈다 한다.
더 가슴 아픈 것은 그 다음이다.
최씨가 떠날 때 임신 중이던 부인은
그해 3월 10일 쌍둥이 딸
'명순'과 '금순'을 낳았다. 아버지는
그 아이들의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이국땅 탄광 속에 묻혔다.
최씨의 본가에는 부모와 세 동생,
처와 장남 중철(1), 딸 넷 등 11명
가족이 방 두 개짜리 판잣집 한 채뿐.
오직 소백산 준령의 화전
2천여 평으로 연명하는 집이었다.
풍기 바닥에서 '최 효자'로 통하던
그는 품팔이를 해가며
주경야독으로
풍기 중고교를 우등으로 졸업했으나,
가난으로 어쩔 수 없어
여비 5만여 원을 빌려 서독 광부로 갔다.
매달 한두 번씩 편지가 왔고,
현금을 송금해 여동생 결혼비용까지
보내왔으나 부친 최씨는 돈표를 쥐고
경황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소백산 화전밭. 봄이면 잡풀을 불태우고
씨를 뿌리는 그 비탈에서, 아버지는
먼 나라 탄광 속에서
어떤 꿈을 꾸었을까.
쌍둥이 딸의 얼굴은
한 번도 보지 못하면서.
유·불의 향기가 깊은 소백산은
이런 사람들의 눈물도 함께 품고 있었다.
넷. 날벼락 맞은 서민들
불실 신용금고의 그늘
1973년 10월 3일 동아일보는
이렇게 외쳤다.
"날벼락 맞은 庶民加入者 —
不實信用金庫 被害 막심한
영주·봉화군 일대"
그리고 부제는 더 날카로웠다.
"認可해준 當局도 責任져야.“
경북 북부의 중심지인 영주의 경우
동일산협, 삼화기업, 순창기업,
중앙진협, 영주상협 등 열 개의
신용금고가 난립해 있었는데,
그 중 동일산협 사장을 비롯한
간부들이 1천2백여 가입자로부터
8천여 만 원을 거둬들인 후
잠적해버렸다.
중앙진협, 대남기업, 순창기업도
수백만 원에서 1천여 만 원의
부금을 떼먹고
문을 닫아버렸다는 것이다.
피해는 풍기와 봉화,
예천 일대까지 번졌다.
영주의 충북하숙 주인 임승대(35) 씨와
그 집에 세 든 접대부 김 모 양(21)은
동일금고의 20만 원짜리 신용계에
들었다가 불입한 부금 15만 원을 날렸다.
봉화읍 포저2리의 변정희 부인(48)은
매일 12원씩 60만 원짜리 계를
중앙진협에 들었다가 57만 원을
불입한 후 업자가 도주,
몽땅 손해를 봤다고 말했다.
국가가 인가했고 목돈을 마련한다는
꿈 하나를 믿고 가입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국가가 인가해준 금융업체가
이렇게 공신력이 없어서야
누구를 믿고 살겠느냐고
피해자들은 한숨을 쉬었다.
풍기 인삼밭을 일구고, 베틀을 짜고,
화전을 불태우며 모은 푼돈이
그렇게 사라졌다. 강이 마르는 것보다
더 허망한 일이 사람의 탐욕으로
일어난 것이다.
다섯. 권명숙 양의 땀방울
1972년 모범 근로자
1972년 9월 15일 동아일보.
노동청은 전국 각 사업장에서 뽑은
50명의 모범 여자 근로자를 표창했다.
그 중에 권명숙(權明淑) 양(22)
경북 영주군 풍기면 동부3동
출신의 이름이 있었다.
11년간 베틀을 짜
3천3백 평의 땅을 마련하고
자립한 생활수기 당선자.
잠깐, 멈추어 이 숫자를 들여다보자.
22살. 11년. 3천3백 평.
열한 살부터 베틀을 짜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국민학교를 마치자마자,
어쩌면 채 마치지도 못하고,
베틀 앞에 앉았을 것이다.
강이 말랐던 그 땅에서,
날벼락 맞은 서민들이 한숨 쉬던
그 시절에, 그 소녀는 묵묵히
베틀 발판을 밟았다.
겨울이면 손이 트고 여름이면
땀이 베틀 위로 떨어졌다.
그렇게 11년. 3천3백 평의 땅.
평안도 실향민들이 들여놓은 직기,
소수서원에서 이어진 자립의 정신
그 모든 것이 어쩌면 이 스물두 살
소녀의 베틀 위에서
하나로 모였는지도 모른다.
신문은 그녀의 이름을
딱 한 번 불렀다.
나는 그 이름을 오래 기억하고 싶다.
여섯. 풍기가 낳은 별
김계원 육군 참모총장
1966년 9월 3일 동아일보 프로필 란에
한 인물의 이름이 실렸다.
"金桂元 參謀總長 —
기쁨에 앞선 벅찬 改修作業"
제18대 육군참모총장에
취임한 김계원 대장. 그의 출신지는
경북 영주 풍기였다.
배재중학과 연전상과를 거쳐
1946년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하고
임관한 군력 20년의 고참 장성.
한국 육군 창설 초창기 멤버 중
한 사람으로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육군포병을 창설한
세 명의 유공자 중 하나이기도 했다.
기사는 그의 사람 됨됨이도 전한다.
작달막한 체구에 매사에 빈틈이 없고
강직한 성품의 소유자. 사람들을
대할 때는 싹싹하고 자못 가정적이며
효성이 지극하다. 취미는 음악과 사격.
배재·연전 시절에 밴드 대장을 지냈고
한미장성사격대회에서 번번이 우승하는
특등사수.
43세. 부인 서봉선(39) 여사와의
사이에 2남 1녀.
소백산 아래 작은 고을에서 태어나
나라의 군을 이끄는 자리에 오른 것이다.
화전민이 산비탈을 일구고, 소녀들이
베틀 위에서 청춘을 바치고,
서민들이 날벼락을 맞으면서도
다시 일어서던 그 땅이
이런 사람도 키워냈다.
풍기는 작았다.
그러나 그 품은 작지 않았다.
일곱. 소백산 주목과 석송령
나무도 세금을 낸다
1991년 4월 경향신문은
소백산 비로봉 주목 군락지를 다뤘다.
천연기념물 244호. 4만5천 평에
1천5백 그루. 가슴 높이 둘레 2.8m,
높이 12m, 수령 2백~5백 년.
봄비가 얼어붙어 빙화(氷花)가
피어있는 사진 속 주목은
살아있는 조각이다.
어릴 때 그리 높다 여기지 않았던
소백산이, 그 품에 이토록
오래된 생명을 안고 있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1987년
경향신문이
소개한 석송령(石松靈) 이야기다.
경북 예천군 감천면 천향동에 사는
수령 600년의 소나무. 1930년 마을 주민
이수목 씨에 의해 '석송령'이라
이름 붙여지고, 땅 1천1백91평이
이 나무 앞으로 등기되었다.
나무가 땅의 임자가 된 것이다.
그래서 석송령은 해마다
토지 재산세를 꼬박꼬박 낸다.
마을 주민 65명으로 조직된
석송령계가 나무의 재산을 관리하고,
매년 정월 14일 자시에 동신제를 올린다.
이 나무의 뿌리는 기사에 따르면
풍기 지방에서 홍수에 떠내려온 것을
어느 농부가 건져 심은 것이
이제까지 이어졌다 한다.
풍기에서 떠내려간 나무 한 그루가
예천에서 600년을 살며
마을의 수호신이 되었다.
강이 말랐어도,
서민들이 날벼락을 맞아도,
폭우에 길이 끊기고, 불에 집이 타도
결국 이 땅 사람들은
뿌리를 내리고 오래오래 서 있었다.
석송령이 그렇게 말하는 것 같다.
고향을 등지고 떠났어도,
어딘가에 뿌리를 내리고
오래도록 서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신문지는 기억이다
낡은 신문 한 묶음을
다시 접으며 생각한다.
역사는 교과서에만 있지 않다.
그것은 소수서원의 독서 소리와
부석사의 예불 종소리가 함께
울리는 이른 아침에도 있고,
삼백 년 동안 말라가는 강물 앞에서
씨를 뿌리던 농부의 눈빛 속에도 있고,
불실 신용금고에 날벼락 맞은
서민들의 탄식 속에도 있고,
전쟁 통에 풍기 소년 이인(異人)의
소문을 믿고 싶었던 사람들의
간절함 속에도 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밑바닥에는
11년간 베틀을 짜며 땅을 일군
스물두 살 권명숙 양의 손이 있고,
이국 탄광에서 쌍둥이 딸의
얼굴 한 번 보지 못하고 간
최대혁 씨의 편지가 있고,
풍기 출신으로 나라의 군을 이끈
김계원 장군의 어깨가 있고,
화마가 휩쓸고 간 자리를
다시 일으켜 세운 이름 없는
이웃들이 있다.
풍기는 소백산 자락 깊숙이
자리잡은 작은 고을이다.
죽령 너머 세상과 가로막혀 있어
고립된 듯했지만, 그 고립 속에서
오히려 깊어졌다.
평안도 실향민들이
냉면 한 그릇에 고향을 담았고,
화전민이 산비탈을 일구며
쌍둥이 아이를 낳았고,
씨름판에서 마을이 하나가 되었고,
소녀들이 베틀 위에서 청춘을 짰고,
선비들이 서원에서 글을 읽고
스님들이 산속에서 예불을 올렸다.
강이 말라도 다시 물을 찾았고,
불이 나도 다시 짓고,
폭우가 와도 기다렸고,
날벼락을 맞아도 다시 일어섰다.
그것이 소백산 아래 사람들이
살아온 방식이었다.
그 모든 것이 누렇게 바랜
신문지 속에 잠들어 있다.
나는 그 잠을 깨우는 마음으로,
오늘 이 글을 쓴다.
고향이 그립다.
소백산이 그립다.
그리고 그 산 아래,
이름도 없이 살다 간
그 사람들이 그립다.
2026.5.19
시보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