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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2.18(주일) 민수기 6:13~27 ‘’구별된 백성이 받는 축복“
사람들은 복받기를 원합니다. 또한 사람들로부터도 존경받고 높임받기를 원합니다. 그런 이유로 세상이 요구하는 복을 받지 못했다거나,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거나 따돌림을 당하면 무척 괴로워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별된 백성, 즉 나실인으로서 하나님께 복을 받아 누려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실인’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그 어원은 ‘분리하다. 절제하다’의 뜻을 가진 동사에서 파생한 말입니다. 그 뜻은 구별된 자(Seperated One)를 가리킵니다. 즉 나실인은 성별에 관계없이 일정기간 또는 평생토록 하나님을 섬기기로 서원한 평신도입니다(레위기27:2). 이들은 자신들이 나실인임을 나타내는 몇 가지의 의무조항들을 지켜야 했는데 이런 것들을 이행함으로써 그들 자신이 세상과는 완전히 구분되어 하나님께 헌신하였다는 증거를 내었습니다. 먼저, 나실인은 ① 포도나무에서 나온 소산이나 그와 유사한 술을 마실 수 없었습니다. ② 머리를 깎을 수 없었습니다. ③ 시체를 접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나실인은 이와 같은 규례를 지킴으로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했다는 증거를 나타내어야 했습니다. 구약성경에 일정 기간을 나실인으로 구별하는 것은 오늘날 ‘세상에서 구별된 하나님 백성과 그의 삶’을 상징합니다. 구원받은 모든 사람은 세상에서 이미 구별된 성도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나실인은 자기 몸을 구별한 기간이 끝나면 정해진 헌물을 준비하여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또한 그는 그동안 기른 머리털을 밀고 의식을 다 마친후에 일상생활로 돌아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나실인과 같이 구별된 백성으로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갈 때 어떻게 복을 받아 누릴지에 관해서 살펴보고 주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합니다.
1. 귀한 것으로 구별하여 드려야 합니다(13~17절).
구별된 백성으로 복을 받아 누리려면 귀한 것으로 구별하여 드려야 합니다.
나실인이 자기 몸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린 기간이 끝날 때는 번제, 속죄제, 화목제, 소제, 전제 등의 정해진 헌물을 정성껏 준비하여 드려야 했습니다(14,15절).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돈을 좋아하고 그것에 매여 있는 지를 잘 아십니다. 마태복음 6:24에는 이에 관하여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믿음이 있노라 하지만 여전히 재물을 더 소중히 여기며 하나님께 드리는 데 인색함을 고백합니다.
고후 8:1-9의 본문을 살펴보면 마게도냐 지역의 교회와 성도들의 헌금정신을 사도 바울이 칭찬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예루살렘에 큰 흉년이 들어서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이 큰 고통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때에 이방에 세워진 교회들이 헌금을 해서 고통 받는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을 돕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와 같은 마게도냐 지역에 있는 성도들이 많은 헌금을 모아 예루살렘교회로 보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고린도 지역은 항구 도시로 무역이 활발하였기 때문에 고린도교회는 마게도냐 지역의 교회들보다 훨씬 부유한 사람들이 많았지만 헌금에는 인색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로 하여금 예루살렘교회를 돕는 헌금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도록 독려하기 위해서 마게도냐 지역에 있는 교회 성도들이 많은 환난과 극심한 가난 가운데서도 어떻게 헌금을 했는지를 먼저 설명하면서 고린도교회도 적극적으로 헌금에 동참해 줄 것을 요청합니다. 그것이 고린도후서 8장 1~9절의 본문의 내용입니다.
헌금 문제는 성도들에게도 가장 민감한 문제입니다. 실제로 ‘한국교회 미래를 준비하는 모임’의 자료에 의하면 사람들이 교회 나오기 싫어하는 이유가 헌금부담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물질에 대한 비유와 설교를 제일 많이 하셨습니다. 실제로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의 비유 중 거의 50% 이상이 물질에 대한 말씀입니다. ‘밭에 보화 비유, 부자 청년에 관한 비유,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기지 말라’는 말씀 등 많은 부분이 이러한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물질에 대해 많이 언급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돈, 즉 헌금은 신앙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입니다. 헌금은 성도의 신앙의 표시입니다. 헌금생활 속에는 그 사람의 신앙이 나타나 있습니다. 특히 헌금은 신앙의 성장과 많은 관계가 있는데, 어떻게 헌금생활을 하고 있는가를 통해서 그 사람의 신앙의 성숙도를 짐작해 볼 수가 있습니다. 신앙이 성숙해질수록 헌금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게 되며, 하나님께 헌금할 수 있다는 그 자체를 기뻐하고 감사하게 됩니다. 신앙이 있는 사람과 신앙이 없는 사람의 차이점이 무엇이겠습니까? 신앙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께 드리지 않을 구실을 찾지만, 신앙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 드릴 이유를 찾는다는 점이 서로 다릅니다.
헌금은 물질을 드려 하나님께 헌신하겠다는 신앙고백입니다. 헌신에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자신의 몸을 드려 하나님을 섬기는 헌신이 있으며, 물질을 드려 하나님을 섬기는 헌신이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몸으로 헌신하는 사람은 물질로도 헌신하게 되며, 물질로 헌신하는 하는 사람은 몸으로도 헌신하게 됩니다.
헌금이란 물질이 많이 있다고 하고, 적게 있다고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수천억의 재물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를 깨닫지 못하면 단 돈 10원도 헌금할 수가 없습니다. 헌금이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는 자가 할 수 있으며,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은혜를 받은 자가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 서울의 **교회 선교부에서 우리교회 열두광주리 헌금을 위해 기도하다가 선교부 부장권사님이 우리도 한 광주리를 해야 겠다는 마음으로 십시일반으로 모으고, 또 모으고 해서 작년 8월초에 한광주리 천만원을 보내오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그친 것이 아니라 작년 연말에도 그동안 기도하면서 모았왔던 돈 100만원을 또 보내오셨습니다. 아마 지금도 기도하면서 모으고 있을 것입니다. 자기 교회일도 아니고 후원하는 교회의 기도제목이고, 그 교회선교부가 우리교회만 후원하는 것이 아니고, 5~6개 교회도 동시에 후원하고 있는데, 형평성 문제도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헌신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많은 도전이 됩니다. 이러한 헌신이 전에 살펴보았던 마게도냐 지역 교회의 헌신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마게도냐 교회는 자신들에게 할당된 의무만을 이행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위해서 물질로 다른 성도들을 섬길 수 있을까를 생각하며, 그 은혜로운 헌신에 자신들을 동참시켜달라고 자원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자원하여 드리는 것을 가로막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인색함입니다. 고후 9:7절을 보면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성남에 사시는 송** 집사님의 간증입니다. 송 집사님은 서울 중심가인 남대문에서 금은방을 경영했었는데, 장사가 잘 되어 경제적으로 부유해지니까 주일 예배까지도 결석하게 되고 신앙도 점점 잃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장사꾼이 얼마나 바쁜지는 하나님이 더 잘 아시지요?’라며 자신을 합리화하였습니다. 그리고 ‘돈을 조금만 더 많이 벌면 십일조를 드릴테니 당분간 이해해주세요.’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싹쓸이 도둑이 들어와 금은방을 몽땅 털어갔습니다. 수년 동안 모아 두었던 금, 재산, 패물들을 다 잃어버리고,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되었습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남대문을 정리하고 성남단지로 이사를 하였습니다. 순식간에 모든 것을 잃어버린 충격으로 허탈감에 빠져 있다가, 그래도 가정의 생계를 위해 보따리 장사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보따리를 들고 다니는 자신의 초라한 모습에 ‘내가 이게 무슨 꼴이람’ 하고 신세를 한탄하며 울고 있을 때, 그에게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송집사야, 도둑 맞은 것이 그렇게 원통하느냐? 나는 너보다 더 원통하다. 네가 나의 것인 십일조를 드리지 않고 몇 년 동안이나 도둑질을 했으니 너도 도둑이다.” 그는 그 음성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 앞에 회개하였습니다. “하나님, 이제는 하나님 앞에 정말 열심히 충성하겠습니다.” 그는 보따리 장사를 하면서 돈을 조금씩 모아 가게를 차렸습니다. 교회도 열심히 나오고 적지만 하나님 앞에 온전히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그러자 가게가 점점 잘되었습니다. 그는 늘어나는 수입만큼 하나님께 정확하게 십일조를 드렸고 감사헌금과 건축헌금도 드렸습니다. 지금은 축복을 받아 성남에서 제일 큰 의류가게를 경영하고 있습니다.
돈을 통제하는 훈련 없이 내 믿음이 성장하여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헌금을 드리는 일은 내 삶의 주인이 오직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며, 내가 소중히 여기는 돈을 거룩한 돈이 되도록 다스리는 가장 기본적인 훈련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자신의 돈을 구별하여 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할 수 없지만 주님이 하신다”는 고백을 통해 돈을 구별하여 드릴 수 있습니다. 적용) 나는 주의 은혜에 감사하여 헌금을 흠 없이 귀한 것으로 구별하여 드립니까? 기복적이거나 생색을 내며 의무적으로 겨우 드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2. 거룩히 살겠다는 삶의 결단을 해야 합니다(18~21절).
구별된 백성으로 복을 받아 누리려면, 거룩히 살겠다는 삶의 결단을 해야 합니다.
인생은 결단을 잘해야 성공하며 행복하고 축복된 삶을 삽니다.
영국의 철학자 러셀(Bertrand Arthur William Russell)은 “위대한 일은 먼저 결단하고 시작하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먼저 결단하고 시작하는 사람이 위대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40대 대통령 레이건(Ronald Wilson Reagan)의 어린 시절 이야기입니다. 하루는 레이건의 부모님이 구두를 사주겠다고 하여 함께 구둣가게에 갔습니다. 그런데 구둣가게 주인아저씨가 “앞이 둥근 것과 각진 것 중 어떤 구두가 마음에 드느냐?” 하고 물어보자 그는 계속 살펴보기만 할 뿐 결정을 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는 그날 구두를 맞추지 못하고 돌아가야 했습니다. 며칠 후 다시 부모님과 함께 구둣가게를 찾았지만 여전히 결정을 못하자, 구둣가게 아저씨가 “알았다. 내가 너의 맘을 알았으니 너는 내가 지어주는 대로 구두를 신으면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구두를 사기 위해 세 번째 구둣가게를 찾았을 때, 아저씨가 어린 레이건을 주려고 만들어 놓은 구두를 보니 한 쪽 구두는 둥글고 다른 한 쪽은 네모지게 만들어서 짝짝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어린 레이건은 아저씨에게 구두가 짝짝이가 된 이유를 물었습니다. 아저씨는 “결정할지 모르는 아이에게는 이 신발을 신겨야 한단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레이건은 그 때 머릿속에 결정할지 모르는 사람의 신발은 짝짝이라는 교훈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레이건은 그 후 결정과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과감하게 결정하고 선택해서 결국 미국의 대통령에 당선되어 정치가로 성공을 했습니다.
결단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담배를 끊겠다고 결단하지 못해 암에 걸리는 사람도 있고, 술을 끊겠다고 결단하지 못해 알코올 중독에 빠지는 사람도 있고, 도박을 끊겠다고 결단하지 못해서 재산을 모두 잃게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일단 결단하고, 그 결단대로 행동에 옮겨야 풍족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18절에 나실인의 기간이 끝나면, 그는 일상으로 돌아가기 전에 자기 몸을 구별한 기간에 기른 머리털은 모두 깎아 불태워야 합니다(18절). 이는 ‘몸을 거룩히 드린 후 새로운 삶을 살겠다’는 표시입니다. 또한 머리털을 민 후에 나실인은 제사장이 삶은 숫양의 어깨와 광주리 가운데 무교병 하나와 무교전병 하나를 취하여 자신의 손에 두고 여호와 앞에 요제로 흔들어야 하고, 그것과 흔든 가슴과 받들어올린 넓적다리를 다 제사장에게 돌려야 합니다(19,20절). 이것은 ‘세상 짐을 내려놓고 거룩한 사명을 감당하며 살겠다’는 결단을 나타냅니다.
모세의 후계자로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데 앞장 섰던 지도자 여호수아의 나이가 많아 죽음이 가까웠을 때 가나안 땅의 수많은 우상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유혹하고 시험했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그의 고별 설교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 섬길 자를 오늘 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 24:15)고 하였습니다.
그 당시 가나안 땅에는 바알, 아세라 등 신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백성들 앞에서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선언을 합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을 섬기는 나라가 제일 부강한 나라이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제일 행복한 사람이고, 하나님을 섬기는 가정이 가장 복된 가정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서 여호수아와 같이 당당하게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고 선포하시기를 바랍니다.
열왕기상 18장 21절에 엘리야 선지자도 여호수아와 비슷한 말을 합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아합왕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의 죄악과 우상 앞에서 하나님을 선택하지 못해서 갈팡질팡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고린도전서 10장 31절 말씀에도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하였습니다. 먹는 것도, 마시는 것도,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고, 직장에 다니는 것도, 공부를 하는 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합니다. 우리 삶의 목적과 가치관이 무엇입니까? 내가 잘되고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오늘날 성도들도 믿음의 결단을 하여야 합니다. 내가 가진 재물과 재산을 어떻게 쓸 것인지 결단해야 합니다(민 28:1~2). 나라와 민족을 위해 내가 어떻게 희생해야 될지를 결단해야 합니다(에 4:16). 그리고 주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도 결단해야 합니다(시 119:105~107). 또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도 나름대로 결단하여야 합니다(욜 1:14). 전도하는 것도 그렇습니다(행 21:12~13), 하나님 일에 봉사하는 것도 결단해야 가능합니다(고전 15:57~58). 우리는 이러한 결단 앞에 단호하게 “Yes(예)”인지 “No(아니오)”인지를 결정을 해야 합니다.
영국의 마이어(F. B. Meyer ; 1847~1929) 목사님은 신앙에 대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향해서 결정하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어떤 일이 있든지, 그것이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모두 하나님을 위해서 결정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내 자신의 욕심이나 욕망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 결단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거룩한 백성으로 나를 불러주시기 전에는 내가 세상을 좋아했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후에는 세상보다 주님이 좋은 것을 일상생활에서 온몸으로 가족과 이웃에게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럴 때 구별된 백성으로서의 복을 받아 누리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매우 연약하기 때문에 매주 예배로, 소그룹 공동체로 모여 흐트러진 삶의 방향을 다시 주께로 돌려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성도로서 이 땅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히10:24,25). 나 혼자서는 힘이 없습니다. 히브리서 10:24-25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적용) 나는 일상생활에서 가족과 이웃에게 주님 주신 사명 따라 좁은 길로 가는 것을 결단하고 온 몸으로 그것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아니면 아직도 결단하지 않고 미적미적하고 있습니까?
3. 축복의 통로로 살아야 합니다(22~27절).
구별된 백성으로 복을 받아 누리려면, 축복의 통로로 살아야 합니다.
사람에게 가장 큰 축복이 뭐냐? 그걸 알고 신앙생활해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많이 원하지만 가장 귀한 인생의 복은 다른 사람을 많이 복되게 하는 겁니다. 나로 인해서 더 많은 사람이 복을 받게 되는 인생이, 그런 사람이 가장 복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도 자신은 부족한 것이 많지만도 자신이 축복이 통로가 되어서 때로는 돈이 없는 사람에게 장학금을 주어 공부를 시키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훌륭한 사람으로 성장을 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전도를 해서 불행했던 사람이 나를 통해서 전도를 받고 예수를 믿어 너무나 좋은 평화로운 삶을 회복했다는 이런 경험들을 가진 분들은 죽음의 자리에서 참 하나님 앞에 감사의 미소를 짓고 참 기쁜 마음으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분들도 있습니다.
.예수를 믿기 전에는 자기 중심적으로 살기 때문에 결국은 내가 잘 되기 위해서 남에게 손해를 입히고, 내가 좀 잘 되기 위해서 남에게 아픔과 고통을 주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믿고 변화되면 내가 좀 고생이 되고 손해보더라도남의 유익을 위해 축복의 통로로 살아갑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예수믿는 사람은 기도가 자기 가족의 범위를 넘고, 우리 교회를 넘어서 기도해야 합니다. 자신만을 위해서 자기 교회만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좋은 기도가 아닙니다. ‘나에게 건강 주세요’, ‘내 자식이 잘되게 해주세요’ 라는 기도는 건강한 기도가 아닙니다. 이런 기도는 하지 않아도 믿음으로 살면 하나님이 자연스럽게 채워주십니다.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도 우리 교회만을 위해서 기도해서는 안됩니다. 그 기도는 기도 수준이 떨어집니다. 우리가 축복의 통로가 되도록 하나님께서 기도해야 합니다. 엎드릴 때마다 여러분의 자녀들도 ‘축복의 통로’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는 우리 아이가 축복의 통로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회사 들어가도 회사를 복되게 하는 사람이 되도록 기도해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구약성경에서 야곱의 아들 요셉을 축복의 통로로 사용하십니다. 애굽에 종으로 팔려가 보디발의 집에 들어갔는데 요셉으로 인해서 보디발의 집이 복을 받게 됩니다. 또한 애굽에 총리가 되어서 애굽이라는 제국도 요셉으로 인하여 복을 받습니다. 또한 요셉으로 인하여 그의 아버지 야곱과 그 형제들도 기근중에 구원받게 되고 복을 받게 됩니다. 이 요셉의 바로 ‘성도의 축복의 통로’라는 샘플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는 곳마다 직장이 잘 되고, 교회가 잘 되야 합니다. 그 사람이 축복의 통로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잊어 버리면 안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축복의 통로요, 그분이 십자가 달려 죽으심으로 죄악으로 말미암아 모든 저주 아래 있는 인생들에게 하늘문을 여시고 이 땅에 축복이 임하도록 회복시켜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축복의 통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고백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축복의 통로가 되는 줄 믿습니다.
축복의 통로가 되려면 하나님께서 나와 우리교회에게 주신 복음의 은혜와 축복이 나에게서 종점이 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내가 축복의 종점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수정교회가 축복의 종점이 되지 않게 하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축복의 종점은 어떤 사람에게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데 다 그 복을 자신이 받아서 누리는 것으로 끝내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복을 주실 때는 우리에게서 끝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흘러가라고 주신 겁니다. 우리가 은혜의 강물헌금을 드리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나에게 돈을 주면 그 돈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복되게 해야 합니다. 나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면 다른 사람이 은혜의 자리에 나오도록 사용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복을 달라고는 하는데 복을 주면 그 복이 그 사람에게 종점이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사해와 같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우리가 언제 풍요롭게 하고, 기름지게 하고, 언제 축복된 삶으로 나아갑니까? 하나님이 주신 복을 나눠줄 때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넘칠 줄 믿습니다. 누가복음 6:38에 “주라 그리하면 내가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에게 안겨주리라”고 했습니다.
민수기 5~6장에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대제사장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축복할 내용을 알려주십니다. 그리고 대제사장이 여호와께서 복과 은혜와 평강을 백성에게 주시기를 축복하면 여호와께서 복을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22,23절). 즉 대제사장이 거룩한 백성을 긍휼히 여기며 간절히 축복할 때, 하나님은 그 백성을 지키시며 은혜와 평강을 내려주십니다(24,25절). 24,25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듯이(창2:3),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이미 복되게 하셨기에 우리도 거룩할 수 있습니다(계 20:6). 대제사장이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축복기도를 했듯이 우리도 주의 말씀에 의거하여 주의 이름으로 서로를 축복하는 특권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서로 서로 지체와 가족과 자녀와 이웃의 삶을 격려하고 축복해주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구별된 나에게 베푸신 최고의 복을 날마다 새롭게 경험하며 축복의 통로로 살아야 합니다. 적용) 왕 같은 제사장의 특권으로 주의 말씀에 의거하여 축복해야 할 지체와 이웃은 누구입니까?
결 론 하나님은 죄인인 우리에게 복주시기 위하여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구원자로 보내주셨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 하나님은 복주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믿고 구별된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 빛을 비추시고, 나를 향하여 그 얼굴을 향하여 드시고 평강을 주셨습니다(24~26절).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거룩한 삶으로 초대된 자가 된 것입니다. 이 거룩한 삶으로의 초청에 응하여 내 삶을 구별하는 것이 곧 영생이요, 축복된 삶입니다. 이런 자는 인생의 목적이 행복이 아니라 거룩임을 삶으로 고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