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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요나 1:1,2; 2:1,2; 3:1,2
제목: 하나님의 뜻을 아는 방법
일시: 2017. 1. 22
장소: 라이프찌히 한인교회
I.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옳은 것이기 때문이다. 진리이기 때문이다. 선이기 때문이다. 뜻을 알기만 한다면 무서울 게 없을 것이다. 심지어 순교라도 할 것이다. 그러나 뜻을 모르면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주저주저 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을 아는 방법이 무엇인가?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자신의 생각 사이에서 갈등했던 요나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깨닫는 지혜를 얻기 원한다. 요나를 보면 하나님의 뜻은 삼겹줄로 이해된다. 삼겹줄 이해는 입체적인 이해이다. 삼겹줄이 무엇일까?
II. 말씀이 임해야 한다.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1:2)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로 요나에게 임하니라”(3:1)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어떠한 방법으로 말씀해 주셨는지 설명되어있지는 않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요나는 여호와의 말씀을 인지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는 말씀이 임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에게 있는 최고의 말씀은 성경이다. 이 성경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가장 잘 알 수 있다.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우리는 말씀을 사모해야 한다. 성경에 정통해야 한다. 성경은 성경 속 인물들뿐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아는 데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성경은 우리의 거울이 된다. 그 거울을 통해서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다. 성경은 우리 인생의 수수께끼를 풀어 주고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게 하는 매뉴얼이다.
성경 말씀은 이미 알테구닥다리이고 오늘날 시대와는 맞지 않는 것이라고? 구식이기에 요즘에는 적용할 수 없는 것이라고? Never우리는 성경의 진리를 결코 쓰레기통에 버려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은 당시 성경이 씌여졌던 시대의 옷을 입었다. 오늘날 우리는 옛날의 옷을 벗고 새로운 옷을 입을지언정, 그 속의 텍스트, 진리, 하나님의 뜻은 여전히 변치 않는다. 우리는 단지 오늘에 맞는 새로운 의상을 입을 뿐이다. 당시의 Context에서 나온 Text가 오늘의Context 안으로 다시 들어와야 한다.
어머니는 우리가 어릴 때 돼지고기 요리해서 비계를 먹으라고 그렇게 강요했다. 그러나 우리가 장성한 지금은 기름덩어리 지방을 먹지 말라고 한다. 한번은 비계덩어리를 먹으라는 옛날의 주장과 기름을 제거하고 살코기를 먹으라는 지금의 주장이 서로 모순되는 이야기를 하신 어머니를 곤란하게 만들고 싶은 장난기가 발동했다. 그래서 왜 옛날에는 먹으라 하고 지금은 먹지 말라고 하느냐고 논리로 밀어붙였다. 역시 쩔쩔 매시는 어머니! 그때 아버님이 대변하시길, “그땐 그랬어. 가난한 시절에는 먹었어야 했어” 당시 컨텍스트는 먹어야 했고 지금 콘텍스트는 먹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옛날에는 없어 굶었고 지금은 다이어트 하느라고 굶는 것이다. 주장은 변해도 변치않는 진리는 거기에 있다. 아들을 향한 어머니의 사랑과 애정이 거기에 있는 것이다. 먹으라고 할 때나 먹지 말라고 할때나 표현은 다르지만 근본 내용은 같다. 어미가 매를 들고 혼낼 때나 쓰다듬어 주시면서 칭찬할 때나 표현은 다르지만 그 사랑은 동일한 것이다.
우리는 “성경적이다”라는 말을 종종 쓴다. 성경적이라는 의미는 바로 변치 않는 성경의 근본 진리가 상황에 따라 새로운 옷을 입고 다양하게 표현되는 context 안에서도 영향을 받지 않고 Context를 지배한다는 것이다. 주변상황에 따라 하나님의 뜻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시대상황과 모든 형편이 조명되고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진리의 말씀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말씀이 나를 해석하게 해야 한다. 내가 중심이 되어서는 안되고 성경이 중심에 있어야 한다. 말씀이 나를 비추어야지 내가 그 성능 떨어지는 내 지식과 생각의 손전등을 가지고 말씀을 비추어서는 안된다. 비계를 먹을 수도 있고 먹지 말아야 할 수도 있지만 여전한 진리는 어머니가 자식들을 사랑하신다는 것과 같다. 그것이 성경적이다. 성경에 나온다고 무조건 성경적인 것이 아니다. 성경에 나온다고 우리는 일부다처를 따르지 않는다. 성경에 나온다고 우리는 로마의 노예제도를 따르지 않는다. 성경에 나온다고 우리는 초대교회의 시스템을 그대로 따르지 않는다. 시대에 따라 표현은 달라도 성경의 진리는 언제나 변치않는 불변의 진리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는 말씀이 임해야 한다.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III. 기도해야 한다.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바로 기도해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1:2)고 하셨지만 그는 “일어나 다시스로” 가려고 욥바로 내려갔다. 그러나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자신에게 주어진 미션에 대해서 진지하게 기도하게 되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 3일주야를 있었다. 3박3일 개인 금식수련회를 한 것이다. 주변에는 고등어 갈치 방어 등 다른 물고기들이 녹아소화되고 있었으리라. 녹다말은 것들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전혀 빛이 들어오지 않기에 얼마나 어두웠겠는가? 이 큰 물고기 역시 소화가 되지 않는 이 요나로 인해서(고집이 얼마나 센지 하나님도 소화를 못하고 있는데...) 속이 더부룩했을 것이다. 그러니 바다 깊은 심연으로 가기도 하고 물위로 솟구쳐보기도 했었을 것이다. 피차 얼마나 큰 멀미가 났겠는가!
요나는 물고기뱃속을 지옥이라 표현하고 있다.
그 지옥 같은 물고기 뱃속에서 요나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기도 밖에 할 것이 없었다. 하나님께서 요나가 당신의 뜻대로 하지 않기에 개인면담에 들어간 것이다. 그때 요나는 구원의 하나님께 서원의 기도를 하게 된다. “하나님의 뜻을 알겠으니 이제 행동으로 옮기겠습니다. 이 물고기 뱃속에서 나갈 수 있게만 해주신다면 제가 싫든 좋든 당신의 뜻을 행하겠습니다”라고 약속하는 것이다. 기도 속에서 자신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과 자신의 계획과 생각, 그리고 이루어진 일에 대해서 깊이 묵상하는 시간이 되었을 것이다.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욘2:2). 분명히 익사되어 죽었어야 할 자신이 살아 있는 것이 신기했다.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욘2:6)라고 고백한다. 자신감이 생겼다. “..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욘2:4).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욘2:7). 그리고 서원한다.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욘2:9)라고 한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꺽고 내 뜻을 관철시키는 싸움터가 아니요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는 대화의 테이블이다. 이것에 대해 하나님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를 묻는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과 내 마음 사이에서 핀트를 맞추어 나가는 것이다. 요나는 3박3일의 시간을 기도의 시간으로 보낸 것이다. 우리는 극한상황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하나님과 함께 진지한 대화의 시간이 필요하다. 루히쉬한 시간이다. 루히쉬? 하지만 아주 긴장스럽고 진지한 시간이다. 기도의 시간이 조용한 것 같지만 가장 뜨거운 시간이다. 요나가 그러했다.
목욕탕에 가면 몸무게 저울이 있다. 몸무게를 잴 때 어떻게 하는가? 전자저울이든 바늘저울이든 대번에 올라갔을 때 측정된 수치가 내 몸무게가 아니다. 먼저 올라설 때면 저울이 확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온다. 몸을 움직여서 가끔 힘을 주어 보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안되고 루히쉬한 모멘트가 필요하다. 그러면 오르락 내리락 하던 바늘이나 수치가 요동이 없어지면서 자기 자리를 찾아들어간다. 진짜 내 몸무게를 보여주는 것이다. 몸무게를 잴때는 몸에 힘을 줄 필요도 없이 자연스럽게 체중계에 몸을 맡기고 루히쉬하게 있으면 되는 것이다. 조용하지만 그때가 가장 긴장스러운 때이다. 다이어트가 성공을 한 것인지 살 좀 찌고 싶은데 자꾸 빠지는지.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좀 긴장스러운 루히쉬를 주고 계신다. 아무것도 할 수 없고 3박3일동안 물고기 뱃속에서 수동적일 수 밖에 없는 요나의 모습이 바로 우리가 종종 경험하는 삶이기도 하다. 아무것도 믿을 것이 없고 던져진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기도하는 것이다.
요나는 자신의 뜻을 비운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으로 채우고 있다. 기도는 나를 비우는 작업이다. 왜 눈을 감고 기도하는가? 눈을 뜨면 자꾸 뭐가 보이기 때문에 그렇다. 믿을 만한 사람이 보인다. 믿을 만한 재능이 보인다. 믿을 것이 자꾸 보인다. 그것을 안보이게 하려고 눈을 뜨지 않고 기도하는 것이다. 그리고 비우는 작업 끝에 무엇으로 채우는가? 하나님의 음성으로 채우는 것이다.
IV. 삶에 뛰어들라.
지난 주 꿀 꿈과 깰꿈의 말씀에서 요셉의 꿈을 시기하던 형들이 동생 요셉을 죽이기로 작정하고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 그의 꿈이 어떻게 되는지를 우리가 볼 것이니라”고 했다. 그런데 그것이 삶속에서 현실이 되었다. 어떻게 되는가? 요셉이 총리가 되고 그들은 그 앞에서 머리를 숙여 목숨을 구걸하는 입장이 되었다. 요나가 하나님의 뜻을 더욱 분명히 알게 되는 것은 삶의 현장이었다.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
“일어나라” “가라” “명한 바를 선포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한번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보라고 삶의 현장을 통해서 말씀하신다. 요나는 자기의 뜻을 행동으로 나타내었다. 하나님은 요나가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자기의 생각대로 해보라고 내버려 두셨다. 니느웨가 아니라 다시스 즉 청개구리와 같이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가고자하는 요나는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요나는 자신의 뜻과 계획대로 순조롭게 되어가는 것처럼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당신대로의 계획이 있었다. 요나를 바다 한가운데로 몰아가고 계신 것이었다. 배도 준비하신 하나님이 이제 대풍을 준비해 놓고 계셨다. 결국 배는 풍랑으로 인해 침몰직전까지 몰리게 된다. 마침내 제비가 등장한다. 풍랑이 일게 한 장본인이 누군지 뽑아내고자는 것이다. 우리가 볼 때는 무모하게 보이지만, 하나님은 그 제비를 계획하셨다. 요나에게 제비가 걸렸다. 이때 바다는 “옳지 옳지”라고 말하듯이 “바다가 점점 흉용”하게 된다. 주변 사람들이 묻는다.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잔잔하겠느냐”고 묻는다. 이쯤 되면 요나는 항복해야 되지 않겠는가! 요나는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고 한다. 자신이 뛰어들 일이지 왜 들어 던져달라고 하는가? 요나는 버틸때까지 버티고 있었다. 선장과 선원들은 꽤나 인정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래도 요나를 살려보자고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다. “그 사람들이 힘써 노를 저어 배를 육지에 돌리고자 하다가 바다가 그들을 향하여 점점 더 흉용하므로 능히 못한지라.”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렇게 외치며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진다. “주 여호와께서는 주의 뜻대로 행하심이니이다”(욘1:14). 그리고는 바다의 풍랑이 가라앉게 되었다.
우리가 삶의 현장에서 젖먹던 힘까지 다 소진하고 마지막 외칠 고백은 “여호와께서는 주의 뜻대로 행하심이니이다”이다 우리 안에 에너지가 남아 있으면 그것 가지고 또 버팅기려고 할 것이다. 그것을 신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깃털같이 가볍게 하기 위해 우리 삶의 모든 연료를 다 태워버려라. 그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지친 몸을 일으켜 세울 것이다. 모세를 보라. 밀린 인생이었다. 바로왕궁에 들어간 것도 어미가 더 이상 그를 키울 수 없어서 갈대상자에 넣어 나일강에 띄웠던 것이다. 그가 미디안광야로 가게 된 것도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밀려서간 것이다. 동족인 히브리인을 위하다가 애굽사람 하나를 죽였기 때문이다. 그가 다시 왕궁으로 가서 바로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달라고 했을때도 하나님이 강권적으로 그를 밀어내신 것이다. 혀가 둔하고 입이 뻣뻣하다고 했는데도 말이다. 요나도 그랬다. 여호와의 얼굴을 피했다. 그리고 계획했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었다. 하나님은 배를 준비해 두셨고 광풍도 예비하셨고 큰 물고기도 준비해 놓으셨다. 제비도 준비하셨고 그를 3박3일 개인면담도 하셨다. 요나는 계획했지만 알고 보면 계획되었다. 삶의 현장 속에서 매 순간 하나님의 기막힌 인도하심이 있었다. 밀렸을 때는 민 사람이 있는 것이다. 밀리는 사람은 단지 힘만 빼고 있으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요나를 코너로 모시고 요나는 의지하는 힘이 다 소진할 때까지 최선을 다한다. 바로 그 삶의 현장에서 요나는 깨어지고 하나님의 의도를 알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알기 원하는가? 이제 한 주간을 살아보라. 좀 더 알게 될 것이다. 한달을 더 살아보라. 일년을 더 살아보라. 역사가 흘러가면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계획을 말씀해 주실 것이다.
요나서에서 요나의 최종적인 고백은 무엇인가?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4:2) 요나는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되었지만 또한 그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을 체험한 것이다.
V. 요나의 뜻과 하나님의 뜻이 어긋났다. 하지만 요나는 결국 말씀으로, 기도로, 삶으로 하나님의 뜻을 좇게 된다. 하나님이 No라고 하시면 내가 Yes라 할찌라도 멈춰서야 한다. 역으로 하나님이 Yes 하시면 내가 No 라고 할찌라도 우리는 달려나가야 한다. 내가 좋고 나쁘고, 내게 유익이고 무익이고, 내게 슬픈일이고 기쁜일이고가 기준이 아니라, 주님이 삶에 기준이 되어야 한다. 니느웨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그들을 구원하는 것이었다. 요나는 니느웨가 멸망당하는 꼴을 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앞에 무슨 계획을 가지고 있는가? 가장 먼저 하나님의 뜻이 있어야 한다. 그분의 뜻을 물으라. 변치 않는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기를 축원드린다. 루히쉬한 기도 속에서 하나님과 개인적인 면담이 깊어지기를 축원드린다. 삶의 현장에서 수많은 일들을 경험하라. 내 계획이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경험하기를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