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浩然齋 金氏의 詩文學 硏究
孫 燦 植*
Ⅰ. 緖 言
浩然齋 金氏(1681, 숙종7-1722, 경종2)는 親家와 媤家 모두 名門이다. 친정은 안동 金門으로, 고조부는 우의정을 역임한 仙源 金尙容이며(淸陰 金尙憲은 그의 아우임) 증조부는 金光炫으로 이조참판을 역임했는데 洪州牧使로 재직할 때 갈뫼(葛山)의 지형이 아름다운데다가 마침 정계가 사화로 얼룩지자 이곳에 낙향하여 말년을 보내다가 타계하였다. 묘소가 홍성군 갈산면 상촌리에 있고 그 후 자손들이 지금까지 이 일대에 세거하고 있으므로 이들을 세칭 갈미(葛山)김씨라고 한다. 조부는 金壽民으로 덕산현감을 역임했으며 효행으로 旌閭를 받았고 부친 金盛達은 고성군수를 역임하였으며 문학으로 農巖과 三淵의 추중을 받았다.
媤家는 恩津 宋氏로, 좌참찬을 역임했고(영의정에 추증됨) 시호는 文正이며 文廟에 배향된 同春堂 宋浚吉이 시증조부이며 시조부 宋光栻은 愼獨齋 金集 및 尤庵 宋時烈의 門人으로, 벼슬은 工曹正郞(贈 이조참판)이었고 媤父 宋炳夏 역시 尤庵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수원부사, 의주부윤, 掌樂院 正을 역임하였다. 남편 宋堯和는 字가 春囿로, 벼슬은 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으며 三淵의 문하에서 從遊하며 설악산중에서 주역을 수학하였다.
호연재는 부친 김성달과 모친 延安李氏(月沙 李廷龜의 증손)와의 사이에 6남 7녀 가운데 8번째(4남 3녀 후)로 태어났다. 15세에 양친을 여의고 19세에 출가하였다. 남편 宋堯和는 仁厚하고 인륜에 돈독했다고 하지만, 아내와 함께 지낸 시간은 그리 많지 않은 것으로 보이며, 특히 젊어서는 豪曠하여 법도에 구애되지 않아 호연재는 마음 속에 근심이 어려 있었으며 이에서 비롯한 심경은 호연재의 시 도처에 짙게 배어 표출되고 있다.
호연재는 1남 1녀를 두었는데 28세에 아들 寤宿齋 益欽을, 36세에 따님(金致恭)을 낳았다. 그리고 42세에 타계했으니 이때 아들은 15세, 따님은 7세였다.
호연재는 문학적인 가정에서 성장하였으며) 형제 자매, 조카들이 함께 모여 詩作을 주고 받곤 하였다. 호연재의 작품 중에는 이러한 가족들간에 주고 받은 작품들이 상당수 있다. 또한 호연재는 경서와 사기에 통하고 시문에도 능했으며 詩調가 청초하고 警句는 逼唐했다고 한다.
호연재는 194제 238수의 漢詩 작품과 일종의 인륜덕목 교과서라 할 수 있는 自警篇을 남기고 있어 우리 고전 문학상에 보기 드문 뛰어난 여류시인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호연재에 대한 학계의 관심과 논의는 그다지 활발한 편이 아니다. 호연재유고를 처음 발굴 학계에 소개한 것은 朴堯順으로, 그는 遺稿狀況, 작자, 내용, 특성 및 가치 등에 대해 간략히 解題的 성격의 글을 발표하고 호연재유고와 자경편의 全文을 영인․수록하여 연구의 단초를 제공하였다. 그 뒤로 門中에서 이를 국역․출간하고 원문을 영인하여 수록하면서 호연재와 관련되는 자료, 곧 外孫 金鍾㝡가 기록한 <事實記>, 아들 宋益欽이 기록한 <遺事>, 從姪 宋明欽, 姑從姪 金謙行, 外甥 金致恭, 外孫 金鍾㝡 등이 쓴 <遷葬時祭文>, 六代孫 金元行이 쓴 <小大軒公墓表> 등을 부록하고 첨부하였다. 그런데 이 國譯本에 영인․수록한 호연재유고는 박요순이 소개한 것과는 筆體가 판이하게 다르고 字句上에 있어서도 부분적인 차이를 보이고 있는 異本이다. 김미란은 <월간 은진송씨종보>에 호연재의 가계와 문학전통, 작품세계, 문학사적 위치 등을 요약적으로 발표하여 여류 문인으로서의 호연재의 위치를 자리매김하였다. 이상의 논의는 본격적인 연구라 하기에는 미흡하지만 다음단계의 연구를 위한 단초를 제공해 주었다는 점에서 일정한 연구사적 의의가 인정된다고 할 수 있다.
호연재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논문은 이숙희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는 호연재유고와 가계, 閨房의 事緣, 浩然齋詩의 特性, 思想, 閨房漢文學과 浩然齋文學의 位相 등에 대해 심도있는 논의를 하였다. 그런데 이 논문은 國譯 필사본인 曾祖姑詩稿 上․下를 접하지 못하고 문중에서 國譯한 호연재유고만을 대상으로 했기에 호연재의 작품에 대한 計量的 소개에 그쳐 부분적인 한계점을 지니고 있다.
이에 본고에서는 먼저 호연재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는 出典에 대한 검토를 통하여 그의 작품의 존재양상을 고찰하고 다음으로 그의 시작품들을 검토하여 호연재 시세계의 한 국면을 이해하기로 한다. 본고에서 논의할 호연재의 시작품은 異本을 함께 검토하되 아직 학계에 정식으로 보고되지 않은 점을 고려하여 曾祖姑詩稿 上․下를 주요 대상으로 하여 논의하기로 한다. 따라서 漢詩 작품에 대한 번역문 또한 曾祖姑詩稿 上․下의 표기를 따라 그대로 인용하되 필자는 띄어쓰기만을 덧붙이기로 한다.
Ⅱ. 浩然齋 金氏의 作品 槪觀
호연재의 작품은 시와 自警篇이 전하고 있다. 시가 수록된 문헌은 한문본과 한글 번역본의 두 종류가 있으며, 한문본은 鰲頭追到와 浩然齋遺稿가 있는데, 浩然齋遺稿는 두 종류가 있다. 그리고 한글 번역본은 題名이 曾祖姑詩稿로, 上․下의 2권이 전하고 있다. 自警篇은 시집과 별도로 또 하나의 책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에 대한 사항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1. 鰲頭追到의 性格
鰲頭追到는 19cm×26cm 크기 16면의 유일 필사본으로, 五言絶句 3題 3首, 七言絶句 7제 7수, 五言律詩 7제 13수, 七言律詩 1제 1수 五言長篇 4제 4수, 七言長篇 4제 4수, 長短句 2제 2수로, 27제(五言長篇과 七言長篇은 同一한 題名下에 달리 지어졌기에 題名이 하나 준 것임) 34수가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 鰲頭追到는 제명이나 작품 앞의 간략한 서술로 미루어 그 창작 전후의 배경을 알 수 있는 작품이 상당수 수록되어 있다.
즉 <夢歸行>을 비롯하여 <四月十四日, 兄弟游北園, 呼韻雜賦>까지의 작품(9제 10수)은 伯氏가 시집 한 軸을 보여주자 그에 대한 느낌 및 次韻의 성격을 띤 작품으로 지은 것으로, 癸未(1703, 숙종29)年부터 乙酉, 丙戌(1706, 숙종32)에 이르기까지 4년 간에 걸쳐 지은 작품이며, 이 때는 호연재의 나이가 23세-26세에 해당되는 시기이다.
<曩者, 伯氏思戀諸弟, 次杜律十五首, 乃以一軸見投, 阻面慕想之餘, 得此頗以慰情, 信筆次韻, 先得十餘首錄呈>이하 <效古體 6수>까지의 작품은 역시 伯氏가 杜律 15수를 차운하여 지은 작품을 받고서 이에 대한 차운의 성격으로 지은 것이다. 그리고 <次伯氏感紫荊詩韻>과 <次人字> , <對月思家>의 작품도 이와 관련하여 지어진 것으로 推察되며 <先忌日感懷得五古寄家>도 그 창작 배경을 제명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相逢行>은 1718년 38세에 叔氏와 季弟를 만나 지은 것이다. <仲氏湖中之行, 與叔兄及靜以到此, 至其歸時, 靜雖不來, 又携士鷹而至, 他鄕窮峽, 四兄妹相逢, 誠餘生難得之樂, 不勝喜幸, 仍成長短句以呈>도 四兄妹가 타향 窮峽에서 만나 그 기쁨을 長短句로 토로한 작품이다. 이 밖의 몇 작품들도 이러한 상황 속에서 지은 것임을 유추해 볼 수 있으나 명확한 단서는 찾기 어렵다. 이렇게 볼 때, 시집의 제명 鰲頭追到는 兄妹를 그리워하며 고향인 鰲頭里를 마음 속에서 찾아간다는 의미가 아닐까 한다.
2. 浩然齋遺稿의 性格
浩然齋遺稿는 두 종류가 전하고 있는데, 그 하나는 박요순이 영인․소개한 것인데, 28cm×25cm 크기 28면의 고아한 필체의 필사본으로 여기에는 73제 93수가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다른 한 이본의 浩然齋遺稿는 門中에서 國譯하고 뒷부분에 수록한 것인데, 이는 20cm×30cm 크기 44면으로 여기에는 103제 130수가 수록되어 있다. 이들 두 이본간에는 제명 및 시구에서 약간의 字句의 차이는 있지만 첫 번 째 작품에서 93번 째 작품까지는 동일한 순서로 동일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따라서 94번째 작품부터 130번 째 작품, 곧 29제 37수는 前者의 경우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고 後者의 이본에만 첨가되어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러한 차이는 後者의 이본을 통해서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後者의 이본에서는 94번 째 작품부터 104번 째 작품까지의 11제 11수는 <拾遺>라하였고, 105번 째 작품부터 130번 째 작품까지의 18제 26수는 <聯珠集>중에서 摭出한 것이라 하였다. 이렇게 볼 때, 원래의 浩然齋遺稿는 前者의 93수까지로만 이루어졌던 것인데 그후에 작품을 발견하고 첨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3. 鰲頭追到와 浩然齋遺稿의 關係
후자의 浩然齋遺稿에 수록된 130수 가운데 29제 37수는 <拾遺>와 <聯珠集> 등으로 그 작품의 수록 성격이나 출전을 밝히고 있다. 이를 27제 34수의 鰲頭追到와 비교해 보면 <拾遺>편에 수록된 11제 11수 가운데 1수(夢歸行)를 제외한 10제 10수는 鰲頭追到에 수록되지 않은 별개의 작품이며, <聯珠集>에서 摭出했다고 하는 18제 26수는 <拾遺>에 있는 <夢歸行>을 제외한 모든 작품이 鰲頭追到와 그 수록 순서까지 동일한 작품이다.
이렇게 볼 때, <拾遺>는 鰲頭追到와 상관성이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는 반면에, <聯珠集>은 鰲頭追到와 상당히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규정할 수 있다. 浩然齋遺稿에서 그 출전을 <聯珠集>으로 명기하고 있으니 鰲頭追到를 직접 보고 필서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양자의 관계는 상당히 관련성이 있을 것이라는 점은 쉽게 추찰할 수 있다.
<聯珠集>과 鰲頭追到의 관계는 앞서 서술한 鰲頭追到의 성격으로 미루어 鰲頭追到가 <聯珠集>보다는 먼저 필서된 것임은 분명하다고 본다. 문제는 <聯珠集>의 실체이다. <聯珠集>은 호연재와 긴밀한 관계가 되는 사람의 문집으로, 그가 자신의 문집을 정리할 때, 여기저기에 散在되어 있는 호연재의 작품을 함께 수록했을 것이라는 가능성만을 추리해 볼 수 있을 따름이다.
한편 鰲頭追到와 浩然齋遺稿의 공통되는 작품은 모두 19제 27수이며 각각의 시집에만 수록되어 있는 작품은 鰲頭追到에 7제 7수, <拾遺>와 <聯珠集> 摭出 작품이 10제 10수로 모두 17제 17수가 되어 결국 이들 두 시집에 공통적으로 수록되어 있는 작품의 총수는 37제 44수이다. 이렇게 볼 때, 두 시집에 수록되어 있는 호연재의 작품은 모두 110제 137수가 된다.
4. 曾祖姑詩稿의 性格
曾祖姑詩稿는 유려한 한글 행서체로 번역한 호연재의 시집이다. 이 시집은 上․下 두 권으로 되어 있는데, 책 표제는 曾祖姑詩稿라 표기되어 있고 內紙에는 호연유고라 다르게 표기되어 있다. 상권은 95면에 88제 108수, 하권은 106면에 106제 130수, 모두 201면에 194제 238수가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曾祖姑詩稿 上은 앞서 서술한 후자의 浩然齋遺稿와 2작품(<送春感懷> 2수 가운데 2번째 작품, <春夜>)이 누락된 것을 제외하고는 89번 째 작품인 <春寒>까지가 수록 순서 및 작품이 동일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曾祖姑詩稿 下의 맨 앞부분에 수록된 13제 20수 또한 후자의 호연재유고에 수록된 90번 째 작품인 <花山感懷復用淸字>부터 마지막 작품인 102번 째 <先忌日感懷得古言寄家>까지 수록 순서 및 작품이 동일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鰲頭追到에만 수록되어 있는 7제 7수도 曾祖姑詩稿 下의 90번 째부터 96번 째까지에 동일한 순서로 수록되어 있어 주목된다.
이런점으로 미루어 볼 때, 현재까지는 浩然齋遺稿의 또 다른 이본이 발견되지 않아 曾祖姑詩稿에 수록된 238수 모두를 대비해 볼 수 없어 번역의 중심 대본을 정확히 추정할 수는 없지만, 曾祖姑詩稿 上은 후자의 浩然齋遺稿를 대본으로 번역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여지며 浩然齋遺稿 또한 鰲頭追到 등을 참고로 정리된 후자의 하편이 존재할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면 이 曾祖姑詩稿는 누구에 의해 언제 번역․필서되었을까. 曾祖姑詩稿 下의 末尾에는 다음과 같은 筆書者의 筆書後의 서술이 있어 그 대강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셰 갑슐 오월 십이일 고녕아즁의셔 시작여 뉵월 초오일 필셔 본초 벗겨 두고(?) 업서 수십여년을 경영다가 비로소 뎡셔나 내 나히 뉵십팔이라 글(?)시 늙고 눈 어두온 그러나 부시 업서 즛모화스니(?) 괴나 젹심을 공드려 일워시니 빌여 샹게 말디어라
위의 인용문으로 볼 때, 필서일 및 그 기간은 甲戌年 5월 12일부터 6월 5일 까지 24일 동안이며 필서한 장소는 고령 衙中이고 이 당시 필서자의 나이는 68세였음을 알 수 있다. 정서한 해인 갑술년은 1754년(영조30), 1814년(순조14), 1874년(고종11)의 세 기간으로 압축하여 추정할 수 있는데, 시집의 제목이 曾祖姑詩稿인 점과 호연재의 생몰연대(1681-1722)를 감안하면 1754년은 관계가 희박하다고 보여지니 갑술년은 1814년과 1874년 둘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그리고 필서자는 曾祖姑詩稿라는 시집의 제목으로 보아 親家의 曾孫일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위의 인용문으로 보면, ① ‘번역자와 정서자가 동일인인가’, ② ‘번역과 정서는 동시에 이루어진 것인가’, ③ ‘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등이 문제가 된다. 일견 ‘ 본초 벗겨두고 수십여년을 경영다가 비로소 뎡셔나’의 文句로 보아 번역자는 따로 있었던 것이 아닌가 여겨지며, 정서는 번역이 이루어진 뒤 ‘수십여년’이 경과한 후에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란 아마도 한문본 浩然齋遺稿가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정해 볼 뿐이다. 따라서 필서자는 누군가가 수십여년 전에 번역한 원고를 求得하여 보관하고 있다가 이런저런 이유로 차일피일 미루다가 수십여년이 경과한 후 뒤늦게 정서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필서자가 번역과 정서를 동시에 했는지의 여부와는 별도로, 필서자는 고령 衙中에서 이를 정서했다고 했고 또 시집의 제목을 曾祖姑詩稿라 했으며, 갑술년에 68세라고 한 점을 참조하여 필서자를 추적해 보았으나 친가 남자 쪽으로는 그러한 사실을 발견할 수 없었고, 또한 참고삼아 媤家쪽의 증손들도 조사해 보았으나 단서가 될 만한 기록은 발견하지 못했다. 따라서 번역자 및 필서자(정서자)에 대한 문제는 친가 女系 및 고령군(읍)지 등의 면밀한 검토를 비롯하여 後孫들의 문집 검토 등 더 천착해야 할 문제가 남아 있다고 할 수 있다.
5. 自警篇의 性格
호연재는 앞에서 서술한 것과 같이 238수(조선조 양반 부녀자 가운데 가장 많은 수의 작품을 남기고 있음. 지금까지 가장 많은 작품이 전하고 있는 士大夫家의 여류시인은 허난설헌이라 알려졌는데, 허난설헌의 작품은 시 215수, 문 2편, 국문가사 2편이 전함)를 남기고 있는 동시에 본인 및 조선조 당시 여인들이 지켜야 할 덕목을 기술한 自警篇을 남기고 있어 주목된다.
自警篇은 ‘緖言’(실제로 제명이 명기된 것은 아니지만 내용상 서언이라 할 수 있음)을 비롯하여 <正心章第一>, <夫婦章第二>, <孝親章第三>, <自修章第四>, <愼言章第五>, <戒妬章第六>과 ‘跋文’(번역․ 필서자의 발문임)으로 되어 있어 전체가 24면이다. 이 自警篇은 원래는 호연재가 한문으로 기록한 것이었으나 이 한문본은 이미 필서 당시에 散失되었고 이를 한글로 번역한 언해본만이 전해오던 것을 호연재의 외손인 金鍾杰이 이를 다시 한문으로 번역하여 필서했다고 하는데, 현재는 한글본도 발견되지 않고 오직 김종걸이 漢譯한 한문본만이 전할 뿐이다. 김종걸은 호연재가 타계할 당시 불과 7세밖에 되지 않았던 따님의 6남 1녀(金鍾㝡, 鍾健, 鍾純, 鍾溥, 鍾杰, 李獻逐, 鍾寅) 가운데 5번째로 태어난 외손자이다.
김종걸이 외조모의 自警篇을 漢譯한 것은 그의 발문 기록에 의하면 崇禎三丙辰, 곧 1796년(정조20)이다. 김종걸은 자신의 모친(호연재의 따님)이 생전에 호연재의 自警篇이 한문 원본은 발견되지 않고 한글본만이 전해 오는 것을 유감으로 여겼다고 하니 그 散佚은 아마도 호연재 사후 얼마 되지 않아서의 일인 듯하며, 김종걸이 외조모의 自警篇을 漢譯한 것이 1796년임을 감안하면 한글로 언해된 曾祖姑詩稿도 自警篇의 언해시기와 상관성이 있을 듯하다. 다시말하면 호연재는 자신의 시 및 自警篇을 원래 한문으로 창작했는데, 창작 후 얼마되지 않아서 이를 부녀자들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자신 또는 호연재와 긴밀한 관계에 있는 사람이 이를 한글로 언해한 것이 아닌가 한다.
Ⅲ. 浩然齋 金氏의 詩世界
현재 전하는 호연재의 시작품은 대부분 출가 이후에 창작된 작품이다. 따라서 시에 표상된 정서 또한 부모, 형제․자매, 조카 등의 친정 식구에 대한 그리움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또한 출가한 이후, 여성이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갈등과 고뇌, 자주 집을 비운 남편으로 인해 병든 몸으로 홀로 어린 자식을 거느리고 힘들게 살아가는데서 오는 외로움과 처량한 심사 등의 탄식, 이러한 와중에서 오랜만에 친정식구들을 상봉한 반가움과 곧바로 다시 헤어져야하는데서 오는 안타까움을 토로하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이러한 갈등과 고뇌, 외로움, 질병으로 인한 고통 등을 해소하려는 수단으로서의 음주 및 신선사상에의 경도 등, 호연재의 시작품은 다양한 제재와 주제, 내용을 담고 있으며 그 기법 또한 여느 사대부 못지 않은 탁월한 시적 재능을 보여 준다.
본고에서는 曾祖姑詩稿 上을 중심으로 하되 浩然齋遺稿에 수록된 漢詩 원문을 함께 제시하여 호연재의 시세계를 크게 세 항목으로 나누어 범박하게 고찰해 보기로 한다. 그런데 曾祖姑詩稿 上만을 텍스트로 정한 이유는 曾祖姑詩稿 下에 수록된 작품 106제 130수 가운데 前述한 바와 같이 鰲頭追到(7제 7수) 및 浩然齋遺稿(13제 20수)에 수록된 20제 27수를 제외한 나머지는 한글 언해만 수록되어 있어 작품 내용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아직 덜 진행되었기 때문에서이다.
1. 그리움의 情緖
호연재 시에 표상된 그리움은 살아 있지만 만나기 힘든 형제, 자매, 조카 등 혈육에 대한 그리움과 사별한 부모 및 형제에 대한 그리움, 돌아가고 싶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 등 다양하게 형상되어 있다.
何處孤鴻度我門 어 곳 외로온 기럭이 내 문을 디나고 數聲凄切怨離群 두어 소리 쳐졀야 물이 나물 원망도다 寒窓獨宿思家客 창의 홀노 자며 집을 각 사이 中夜無眠欲斷魂 깁흔 밤의 이 업서 혼이 허지고져 난도다 <孤鴻> 외로온 기럭이라
서정적 자아는 한 밤에 잠 못 이루고 寒窓을 응시하며 안타깝게 고향을 그리고 있다. 창밖에 처절한 울음을 토하며 어두운 밤하늘을 날아가는 기러기의 모습은 서정적 자아가 잠 못 이루고 실제로 접한 實景이다. 무리를 이탈한 기러기는 곧 형제들과 떨어져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의 등가적 환기라 할 수 있다. 따라서 ‘孤, 凄切, 怨, 寒, 獨, 斷魂’ 등의 시어는 서정적 자아의 고독한 내면의 정서를 대변해 준다.
一別如今凡幾歲 번 니별매 이제 몃 되여고 弟兄顔面各依依 아와 형의 얼골이 각각 의의도다 漢陽城北書難寄 한양셩북의 글을 부치기 어렵고 雞足山南夢亦稀 계쥭산남의 이 드므도다 獨想淇泉瑳笑語 홀노 긔쳔본이난곳의 차히 쇼어 각니 可堪霜露減容輝 가히 상노의 용휘 감 견랴 生前會面何由得 젼의 얼골이 모도이물 엇지 엇들고 唯向蒼天拜手祈 오직 창텬을 향야 슈야 비놋다 <秋夜憶弟兄> 을밤의 뎨형을 각노라
例詩의 제목에서 규지할 수 있듯이, 가을밤에 멀리 떨어져 있는 형제들을 그리워하는 내용이다. 형제들과 이별하고 몇 해가 지나도록 만나지 못하여 이제는 얼굴마저 선명하게 기억되지 않고 어렴풋하게 떠오를 지경이 되었다는 것이다. ‘漢陽’과 ‘鷄足山南’은 각각 보고 싶은 대상과 자신이 위치하고 있는 공간적 거리감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곧 서정적 자아는 媤家인 鷄足山(大田에 소재한 산) 아래에서 弟兄들이 가 있는 한양을 떠올리며 출가하기 전 함께 즐겁게 지내던 일에 대한 그리움을 토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공간적 거리감은 그동안의 정황으로 미루어 어쩌면 생전에 만날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자아내게 한다. 그리하여 蒼天을 향하여 재회할 수 있기를 간절히 빌어 본다. 따라서 이는 아마 호연재가 病中에서 자신의 미래를 예견한 심경이었던 것이 아닐까 한다.
奔奔白日影難留 가며가 일을 그림 머물기 어려오니 卄載他鄕近白頭 스므 타향의 두의 갓가왓도다 惆悵如今春又去 툐챵홉다 이제 봄이 가니 東風歸夢到洪州 동풍의 도라가 이 홍의 니도다 <次姪頤行韻>五首 중 <其3> 딜이의 운을 노라
이 작품은 호연재의 3兄인 金時濟의 장남인 조카 金頤行(字 子正)의 시에 차운한 작품이다. 덧없이 흐르는 세월 속에서 어느덧 출가하여 고향을 떠난 지가 스무해나 되었지만 서정적 자아는 아직도 여전히 시집은 타향으로 인식되고 마음은 고향인 홍주로 향하고 있다. 이러한 고향과 형제⋅자매에 대한 그리움은 꿈을 통해 표출되기도 한다.
夢裏魂歸歸故鄕 속의 혼이 도라 고향의 도라 가니 煙霞滿江水空波 와 안개 강의 고 물이 브졀업시 믈질치도다 漁村寥落春色暮 어촌이 뇨락고 봄비치 져므럿 縹緲高閣是吾家 표묘히 놉흔 집이 내집이로다 芳草池塘生碧花 방초와 디당의 프른 닛기 낫고 落花紛紛滿地紅 치 러지기 분분이 야 희 이 븕엇도다 珠簾半捲笑相迎 쥬렴을 반만 것고 서로 나 마니 弟兄宛然故堂中 뎨형이 녯집 가온 완연여도다 慇懃問答似平昔 은근이 문답매 평셕 니 言到相思淚自流 말이 서로 각기의 니거 눈물이 스로 흐르도다 相思幾度暗斷腸 서로 각매 몃 번이나 챵 고 弟顔已衰兄白頭 아의 얼골이 임의 쇠고 형의 머리 희여도다 忽聞湖上曉潮動 홀연히 물 우희 새벽 됴 움이 드니 夢魂驚覺落帆聲 몽혼이 돗대 러디 소예 놀나 도다 歸來惆悵無尋處 도라오매 쵸챵야 곳이 업니 惟見西窓落月明 오직 셔창의 러지 이 아시 보도다 <夢歸行> 의 도라 가니라
꿈 속에 고향을 찾아가 형제들을 堂中에서 만나 웃으며 환담을 하는 한편으로는 형제들의 처한 정황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며 안타까워 한다. 꿈 속에서 만난 아우는 얼굴이 쇠했고 형은 이미 백발이 성성하다. 돛대 떨어지는 소리에 놀라 깨니 봄밤은 어느 덧 새벽녘이 되고 西窓에는 낙월만이 밝게 비칠 뿐이다. ‘고향과 형제에 대한 그리움(현실)→상봉, 그리움의 해소(꿈)→더 큰 그리움(현실)’의 과정을 되풀이 하는데, 이러한 그리움은 病中에서 더욱 고조된다.
病裏憶弟兄 병 속의 아오와 형을 각니 顔範各依微 안범이 각각 의미도다 屛山是何處 병산비안별이 어 곳인고 鰲洲海門西 오옷머리라 문 셔쳔이로다 長安隔千里 댱안이 쳔니 격엿 我獨臥懷川 내 홀노 회쳔의 누엇도다 兄弟本連氣 형뎨 본 년긔여거 別離奈渺然 별니미 엇지 묘연고 合眼似昏沈 눈을 고 혼팀하니 依俙聞兄音 의희히 형의 소 드리로다 驚覺回首看 놀나 여 머리 두루혀 보니 怳然無徵尋 황연야 곳이 업도다 呻吟更向壁 신음야 다시 벽을 향니 不覺雙淚流 쌍뉘 흐 디 못리로다 展轉苦日長 젼젼야 날이 긴 줄이 괴로오니 度日如三秋 날을 디내미 삼츄 도다 紗窓掩重重 사창을 듕듕이 다다시니 盡日靜無人 날이 도록 고요야 사이 업도다 自傷身命苦 스로 신명이 괴로오 슬허고 不敢怨天神 감히 하과 귀신을 원치 못노라 <病中憶弟兄>(伯氏諱時澤, 仲氏時潤, 叔氏時濟, 時洽, 季氏時淨) 병 가온예 형을 각노라(시휘시, 듕시휘시윤, 슉시휘시졔시흡, 계시휘시졍)
屛山과 鰲洲는 고향이며 長安은 형제들이 있는 곳이고 懷川은 자신이 병을 앓고 누워 있는 媤家이다. 종일토록 찾아 오는 사람도 없이 고요한 病床에서 눈물을 흘리며 형제들을 그리워하는 심정이 잘 표현되어 있다. 형제들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은 의식마저 몽롱하게 한다. 어렴풋하게 형제들의 소리가 들리는 듯하여 반갑고 놀라운 마음에 머리돌 돌려 쳐다 보지만 그것은 非夢似夢간에 듣게 된 幻聽일 뿐이다. 이에 서정적 자아는 病에 따른 고통과 함께 하소연할 대상없는 고독함에 벽을 향해 진정할 수 없이 눈물을 흘린다. “紗窓掩重重, 盡日靜無人”의 표현은 육체적 아픔보다도 그리움과 고독에 따른 고통이 더욱 참기 힘든 것이었음을 절실하게 함축하고 있다. 이처럼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의 처절한 “身命苦”에도 스스로 傷心할 뿐, “天神”을 원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病苦 속에서의 고독함이라는 극한적 상황에서도 남편에 대한 언급은 찾을 수 없다. 이는 아마도 “知樞府君(남편)이 젊어서 豪曠하여 법도에 切切하지 않아 부인(호연재)은 孤潔함이 쌓여 마음에 남이 알지 못하는 걱정거리가 있었다. 그러므로 詩篇 가운데는 때때로 離騷에 나타나 있는 感慨의 뜻이 토로되어 있다”라는 표현에서 규지할 수 있듯이, 남편과의 관계가 소원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자신에 대해 疎遠하게 대한 남편이지만 감히 원망할 수 없다는 것보다는 그 단계를 넘어 아예 기대하지 않기에 원망하는 마음마저 들지 않는 심적 상황에 이른 것, 따라서 이 시의 마지막 句의 표현은 남편에 대한 심적 상황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 밖에도 호연재는 詩篇의 도처에서 그리움을 토로하고 있는데, 일찍 타계한 부모 형제에 대한 哀悼의 성격을 띠고 있는 작품도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2. 社會問題에의 관심
호연재는 조선조 지방의 규방 여인임에도 불구하고 당대 사회․정치 현실에 대한 관심을 詩的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이는 아마도 호연재의 친가나 媤家가 名門家로 정치 현실에 직접적으로 참여한 사람들이 많으며 특히 시가인 宋氏宅이 숙종비 인현왕후의 외가라는 점 등에서 기인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인현왕후는 호연재의 媤曾祖父인 同春堂 宋浚吉의 외손녀인 동시에 호연재보다 14년 위였다.
東邦不弔遭艱憂 동방이 됴이디 못여 간우를 만나니 田野愚民哭未休 뎐야의 우민이 울기를 마디 아니 는도다 四紀君恩何處問 긔 님금이 은혜 어느 곳의 무를고 回瞻北闕恨悠悠 도로혀 북궐을 라보매 이 길고 기도다 <國哀>
例詩는 숙종의 승하 소식을 듣고 지은 작품이다. 一紀는 12년이니 ‘四紀’는 정확하게 말하면 48년이나 숙종이 1720년에 在位 46년만에 승하했으므로 위 작품에서의 ‘艱憂’는 숙종의 승하를 의미함은 물론이다. 그런데 이때 호연재의 나이는 40세였다. ‘田野愚民’은 일반적인 시골 백성을 뜻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동시에 서정적 자아 자신도 포함한 의미로 해석된다. 서정적 자아는 숙종의 승하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四紀의 君恩을 갚을 길 없음을 탄식하며 북궐을 향하여 한스러워 한다. 이처럼 임금이 계신 北闕을 향하여 君恩을 갚고자 하는 심상은 주로 사대부들이 정치현실에서 밀려나 외딴 지방에 위리안치되었을 때 토로하는 정서임을 감안하면 호연재는 단순히 규방에 처해 있던 조선조 여타 女人들과는 달리 정치현실에 직접 참여하고 싶은 소망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今聞新主卽王位 이제 님군이 왕위예 즉샤믈 드르니 文武相承自法程 문뮈 서로 니으시미 스로 법뎡이로다 唯願吾君明聖德 오직 원컨 우리 님금이 셩덕을 히시면 東方日月繼昇平 동방 일월을 니어 승평리이다 <聞嗣王卽位> 왕이 귀예 즉시 듯다
이 시는 제목을 통해 규지할 수 있듯이, 숙종이 승하하고 경종이 새로 왕위에 즉위했다는 소식을 듣고 지은 작품으로, 이 때 호연재의 나이는 41세였다. 경종은 1721년에 즉위하여 1724년 재위 4년만에 승하하였다. 서정적 자아는 새로이 왕위에 즉위하신 경종에 대해서 임금의 聖德을 밝혀 나라가 승평한 세월이 되기를 기원하고 있다. 그리고 한시 작법상에 있어서 ‘今, 文, 唯, 東’으로 모두 평성운으로 시작하고 있는 점도 특이하다고 할 수 있다.
壁上靑龍空自鳴 바람벽 우희 쳥뇽이 쇽졀업시 스로 우니 何時涌匣適群英 어느 의 갑틀의 나 고든 영웅을 만날고 乘風快渡長江去 람을 타 콰히 긴강을 건너가 殺盡群匈復大明 모든 흉 거 죽이고 대명을 회복고 <靑龍刀> 칼일흠
이 작품은 벽 위에 걸려 있는 청룡도를 소재로 한, 男兒다운 기상이 넘치는 작품이다. 일반적으로 劍을 노래한 작품들은 정치 현실에 쓰이지 못한 자신의 처지를 ‘갑속에 든 칼’로 비유하여 자신의 능력을 알아 주는 聖君을 만나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펼쳐 보겠노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런데 이 시에서는 갑속에 들어 있는 청룡도를 들고 長江을 건너가 群凶을 다 죽이고 명나라를 회복할 것을 노래하고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群凶’이라 하여 청나라에 대한 적개심을 표출하면서 ‘大明’을 회복하기를 갈망하는 이 표현은 북벌계획에 앞장섰던 媤曾祖父 동춘당의 영향과 관계가 깊다고 본다. 한편 이러한 大明 회복 의식의 이면에는 우리나라에 이를 제대로 쓸 줄 하는 영웅, 곧 올바르고 곧은 기개있는 인물이 없음을 안타까워 하는 의미도 함축하고 있다.
⋯⋯ ⋯⋯ 男兒世上仗忠孝 남 셰샹의 튱효 집흐니 孝當竭力忠盡命 효의는 맛당이 힘을 갈 거시오 튱의 목숨을 다디라 起身草野遇明主 몸을 초야의 니혀 명쥬 만나 許身以死死不更 몸을 죽기로써 허야 죽어도 고티디 아니도다 躬行仁義奉甘旨 몸소 인의 야 감지 밧들고 摠執智節答君命 지졀을 총집야 님군의 은혜 갑도다 威儀嚴肅服萬民 위의 엄슉히 여 만민을 빈복 고 德容恭莊定四方 덕용을 공장히 야 방을 뎡는도다 一人之下萬人上 사의 아오 만민의 우희 聲名巍巍擁衆望 셩명이 외외야 듕망을 도다 邊方急報有不意 변방의 급뵈 아니미 이시면 披甲揮兵威萬里 갑을 닙고 군 둘너 만니 위는도다 磨刀長江嚴霜翻 갈을 긴강의 니 엄상이 번득이 고 歇馬龍山秋風起 을 뇽산의 쉬으매 튜풍이 니러나도다 群凶殺盡踏荊楚 군흉을 죽여 다고 형툐 밧고 腰佩金印舞霜鋒 허리의 금인을 고 상봉으로 춤추도다 身到將相樹大功 몸이 댱샹의 니러 큰공을 셰우고 濟世治平掌中弄 셰샹을 건져 다려 평히 손바닥 가온 희롱리로다 如當世亂道不合 만일 셰샹이 어즈러으 당야 되 합디 아니면 棄之糞土何足顧 리긔 분토쳐로 리니 엇지 죡히 고뎐리오 布衣一拂山路幽 포의 번 치매 뫼길히 그윽 湖山雲月自相好 호산과 운월이 스로 됴토다 靑山隱隱碧溪廻 쳥산이 은은고 벽계 됴화시니 白雲深處是吾棲 운 깁흔 고지 이 내 깃드리 로다 琴書靜好酒盈樽 금셔 졍호고 술이 준의 여시니 朗誦黃庭鶴雙啼 이 황졍경을 외오며 학이 쌍으로 우도다 俯仰天地無愧怍 뎐디의 부앙 괴작미 업니 丈夫志氣何不悅 댱부의 지긔 엇지 깃브지 아니리오 微微一縣眞可笑 미미 고을은 진짓 가히 우온디라 得失治亂何足說 득실과 티란을 엇지 죡히 의논리오 得之何喜失何憂 어든들 무어시 깃브며 일흔들 무어시 근심되리오 但恨愚夫見相迫 다만 우뷔 서로 박하 보 노라 吾兄至今病在席 우리 형이 이져 니러 병드러 돗긔 잇디라 去住行色誠難度 가며 머무 을 진실노 혜아리기 어렵도다 病中心事應多苦 병듕의 심 응당 괴로오미 만흐리니 爲之憧憧心嗟惡 위루야 동동매 이 차악도다 ⋯⋯ ⋯⋯ <仲氏遞官> 듕시 벼을 리다
例詩는 仲氏인 金時潤이 遞官되어 떠나갈 때 지은 작품이다. 군주에게는 신하로서, 백성들에게는 목민관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덕목을 세세하게 열거하고 있다. 이 시의 앞부분에서는 귀거래를 노래한 도연명을 例擧하면서 귀거래의 이유를 勞辱이 많기 때문이라 전제하였다. 勞辱을 피하여 귀거래를 하면 모르겠거니와 일단 관리로서 정치 현실에 참여하면 明主를 만나 목숨을 걸고 지혜와 절개로써 君命에 보답해야 하며 몸소 仁義를 행하여 어버이를 봉양하고 威儀와 德容을 엄숙히 하고 공손히 하여 백성들을 다스리고 사방을 안정시켜야 한다. 만약 변방에 난리가 일어나면 갑옷을 입고 병기를 휘두르며 위엄을 떨치고 群凶을 다 죽여 평정해야 한다. 세상을 구제하고 나라를 다스리며 천하를 평화롭게 하는 將相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만일 세상이 어지럽고 도가 맞지 않는다면 미련없이 湖山에 귀거래해야 한다고 한다. 湖山에서 구름과 달, 청산, 개울물, 琴書, 술과 어울리며 때로는 道書인 黃庭經을 외우는 삶을 살면 족하다고 한다.
그런데 仲氏는 將相과는 거리가 먼 조그만 고을의 縣監이 되어 떠나가는 것이다. 실제로 호연재의 仲氏는 靑山 현감을 역임하였으니 아마도 이 시는 김시윤이 청산 현감이 되어 떠나갈 때 지은 것인 듯하다. 미미한 縣에 불과하므로 得失治亂은 족히 말할 것도 못되니 딱히 기뻐하고 근심할 일도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병석에서 신음하는 중씨의 건강문제라고 하였다.
慇懃三顧臥龍崗 은근이 와룡강의 세 번 도라 보니 强出茅廬報聖王 강잉야 모려의 나 셩쥬 갑도다 眼看山河成敗勢 눈의 산하 셩패 형셰 보고 胸藏天地覆飜量 가의 텬지 복번 냥을 초와도다 爲君明節松間月 님금을 위 은 졀은 솔 이의 이오 報國誠忠雪後霜 나라흘 갑흘 튱셩은 눈후의 서리로다 可惜得君時不遇 가히 앗갑다 님금을 엇고 만나지 못여시니 英雄遺恨至今長 영웅의 유이 이제 니러 기럿도다 <武侯> 무후졔갈냥
이 시는 제갈공명에 대한 사실을 시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山河의 성패를 간파하고 천지를 覆飜할 수 있는 능력, 임금과 나라를 위한 松間月같은 절의, 雪後霜과 같은 誠忠을 지녔지만 때를 만나지 못하여 뜻을 이루지 못한 제갈량의 삶을 可惜해 하고 있다.
호연재의 이러한 사회문제 및 정치현실, 역사적 인물 등에 대한 관심의 표명은 前述한 가정적 환경과 분위기에 상당한 원인이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여자로 태어난 것에 대한 불편한 심회 및 그 代償 심리의 작용과도 일정한 관계가 있을 것으로 해석된다.
可惜此吾心 가히 앗갑다 이내 이여 蕩蕩君子心 탕탕 군의 이로다 表裏無一隱 표리의 나도 초미 업니 明月照胸襟 명월이 흉금의 비최여도다 淸淸若流水 고 아 흘 물 고 潔潔似白雲 조코 조하 흰 구름 도다 不樂華麗物 화려 거 됴화 아니고 志在雲水痕 이 구름과 물 흔젹의 잇도다 弗與俗徒合 셰쇽 무리로 더브러 합치 아니니 還爲世人非 도로혀 셰샹 사의 그다 미 되여도다 自傷閨女身 스로 규녀의 몸인 줄 슬허니 蒼天不可知 창텬을 가히 아디 못리로다 奈何無所爲 엇지 리오 욜 배 업니 但能各守志 다만 능히 각각 딕희리로다 <自傷> 스로 슬허노라 고지 업니
서정적 자아는 자신의 군자다운 면모를 이 시에서 형상화하고 있다. 겉과 속이 하나도 감춤이 없는 명월과도 같은 흉중, 흐르는 물처럼 맑고 흰구름처럼 깨끗한 마음, 그리하여 뜻을 세속에 얽매이지 않고 행운유수처럼 살고자 한다. 하지만 이렇게 세속과 더불어 동화되지 못하는 삶의 자세에 대하여 세상 사람들은 도리어 자신을 그르다고 한다. 이러한 자신의 삶의 태도 및 지향이 용납되지 않는 현실에 대해 서정적 자아는 그 원인이 閨女이기 때문으로 인식하고 이를 상심해 한다. 하지만 서정적 자아는 이러한 세인들의 인식과 시선 때문에 자신의 삶의 태도를 바꾸려 하지 않는다. 묵묵히 자신의 뜻을 지키며 살아가겠노라 재삼 다짐해 볼 뿐이다.
3. 醉鄕에의 몰입과 仙界의 동경
호연재는 가정적인 환경과 분위기, 타고난 성품 등으로 인하여 조선조 규방 여인들에게서 찾기 드문 사회현실과 정치문제 등에 유다른 관심을 표명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자신의 삶의 지향과 태도는 당대 현실로서는 용납되기 어려운 상황이었음은 물론이다. 이에 호연재는 세속과 화합, 동화하지 못하고 늘 외롭게 살아 간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호연재는 혼자 가정 살림을 모두 맡아 처리하면서 당장의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곤궁한 삶을 살았으며, 이 때마다 친정 오라버니들에게 도움을 청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고독과 갈등, 고뇌를 해소하기 위하여 때로는 술잔을 기울이고 때로는 신선을 동경하는 삶을 살았으며 이를 시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永夜眠難得 긴밤의 을 엇디 못니 悄悄待曉鍾 쵸쵸히 새벽을 기리도다 玲瓏半夜月 녕농 반야 이오 蕭瑟五更風 쇼슬 오경 람이로다 世事愁千疊 셰샹 일은 근심이 쳔텹이나 고 離情恨萬重 난 졍은 이 만겹이나 도다 回瞻身外伴 몸 밧긔 벗을 도라보니 只有一蒼松 오직 창숑이로다 <閑情三首> 한가 이라 세슈, <其2>
서정적 자아는 밤새도록 잠 못 이루고 새벽을 맞고 있다. 방안의 창틈으로 새어 오는 휘영청 밝은 달빛과 소슬한 五更風은 잠 못 이루는 심경을 더욱 고조하는 배경 역할을 한다. 서정적 자아가 잠 못 이루는 요인은 다름 아니라 천첩 만첩이나 쌓인 ‘世事愁’와 ‘離情’ 때문이다. 호연재 시에 드물게 표상된 이러한 ‘세사수’와 ‘이정’은 곧 주변의 시가 식구들과 화합하지 못하는 상황과 남편에 대한 그리움이라 할 수 있다. 텅빈 방안에는 아무도 없고 창밖으로 어른 거리는 蒼松만이 유일한 벗이 되어 있는 시적 자아의 상황이 애절하게 직서되어 있다. 특히 ‘離情恨萬重’의 표현은 이러한 고독과 잠못 이루는 요인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離情’은 표면적인 소박은 아니었다고 할지라도 언제나 자신의 옆자리를 비워 둔 남편의 태도와 그로 인한 심경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심경을 달래려고 “시와 술을 임의 야 을 으니” 세상 사람들, 특히 媤家 사람들은 자신을 미치광이라 일컫는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정적 자아는 이러한 世人들의 비난에도 개의치 않는다.
醉後乾坤闊 후의 건곤이 널벗고 開心萬事平 을 열매 만 평여도다 悄然臥席上 쵸연이 돗 우희 누어시니 唯樂暫忘情 오직 잠간 셰졍을 니 즐기놋다 <醉作> 야 짓노라
例詩의 서정적 자아는 술에 취하여 자리 위에 누워 있으면서 그 심경을 토로하고 있다. 술에 취하니 乾坤이 넓게 여겨지고 닫혔던 마음이 열려 萬事가 태평해지며 情을 잊을 수 있어 즐겁다는 언표는 곧 醉鄕에 몰입하는 이유가 ‘萬事가 不平’하고 ‘情’을 잊지 못해서라는 것을 드러낸 표현이다. 하지만 醉鄕에의 몰입을 통한 망각은 근본적인 해소책일 수 없음을 ‘暫忘情’의 표현을 통해 규지할 수 있다. 따라서 榮樂이 서로 어긋난 삶에서 오는 갈등과 고뇌를 해소하기 위해 술에 취하는 행위를 반복하게 되며 이러한 삶의 태도는 마치 정치현실을 떠나 강호에서 은일 자적하는 조선조의 일반적인 儒者들과 유사한 지향을 보이기도 한다.
滌蕩胸襟千古情 가의 쳔고의 들 씻고 陶然醉臥聽流鸎 도연이 여 누어 뉴을 듯도다 凉風入戶秋期近 람이 지게예 드니 긔약이 갓가왓고 白月盈庭夜氣淸 흰이 의 득야시니 밤긔운이 도다 綠水泠泠籬外在 프른물은 녕녕야 울밧긔 잇고 靑山隱隱檻前生 프른뫼흔 은은야 난간압희 나도다 功名秪是黃粱夢 공명이 다만 이 황냥 이라 何事區區與世爭 무일노 셰샹으로 더브러 토리오 <謾吟二首> 부졀업시 읇노라, <其1>
夜靜溪山玉漏長 밤이 계산의 고요여시니 옥뉘 기럿고 黃花浥露小庭香 누른 치 이슬을 먹음어 젹은 의 향긔 죠왓도다 樞星倒嶺雲華散 츄셩이 예 것구러져시니 구름 치 흐터지고 落月盈軒秋色凉 러지 이 마루의 차시니 빗치 서늘도다 微酒半醒志氣闊 아다운 술을 반만 니 디긔 널벗고 新詩欲動世情忘 새시 움이고져 니 셰졍을 닛도다 自歡自歎身何似 스로 즐기고 스로 탄식니 몸이 무고 無樂無悲一醉狂 즐거움도 업고 슬픔도 업서 미친거시로다 <其2>
<謾吟二首> 가운데 첫번째 작품에서 서정적 자아가 陶然히 醉鄕에 몰입하는 이유는 가슴 속에 응어리진 ‘千古情’을 씻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서정적 자아는 초가을의 문턱 달밝은 밤에 背山臨水한 정자에서 술에 취해 누운 채로 流鸎 소리를 들으며 功名으로 대유된 世事에의 집착에서 벗어나 초연한 심경에 잠겨있다.
두번째 작품 역시 首聯과 頷聯에서 묘사하고 있는 시․공간적 배경은 가을 달밤이다. 서정적 자아는 술에 취해 世情을 잊고서 시를 짓는다. 술을 마시고 시를 지으며 世情을 잊는 행위와 심경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로 이어진다. 淸淨한 심적 상태로는 잊기 어려운 世情이란 곧 媤家 생활에의 부적응과 남편과의 疎遠한 관계로 인한 갈등과 고독으로 추찰된다. 이러한 世情은 정신적 평정을 해치는 것이므로 잊어야 할 대상이다. 잊어야 하지만 잊기 어려운 世情을 잊기 위해서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삶에 있어서의 ‘기쁨과 탄식’이나 ‘즐거움과 슬픔’은 외적인 상황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 여하에 달려 있다는 인식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는 술이 필연적으로 따르게 되며 이러한 과정을 거쳐 그 결과는 ‘無樂無悲’의 승화된 심적 경지로 상승된다. 이를 서정적 자아는 ‘醉狂’이라 하였다.
이처럼 술에 취해 世事를 잊고 시를 지으며 직면한 고뇌와 葛藤을 해소하고자 했던 시적 표현은 조선조 규방 여인의 작품에서 찾기 어려운 내용이라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호연재는 담배를 피우며 그 맛을 西王母의 ‘년환’보다 낫다고 하고 ‘두루 인간의 시 사의계 고야 이 약을 가져 에우인 챵 플디어다’라 하여 마음에 쌓인 갈등과 고뇌를 푸는 수단으로 인식하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호연재는 이처럼 갈등과 고뇌를 해소하기 위해서만 술을 마신 것이 아니라 한가하고 즐거운 정취를 돋우기 위해서도 음주를 즐기도 한 好酒家였던 것으로 보인다.
호연재는 이처럼 술을 마시고 갈등을 해소하며 한가한 정취를 즐기는 한편, 仙境을 관념하고 仙界를 傲遊하며 仙人이 되고자 하는 낭만적 상상력을 詩篇을 통해 표찰하기도 하였다.
自愛山深俗不干 스로 뫼히 깁허 쇽의 거리 세지 아니믈 랑니 掩門寥落水雲間 문을 뇨락히 슈운의의 다도다 黃庭讀罷還無事 황뎡을 닑기 파매 도로혀 일이 업니 手弄琴絃舞鶴閑 손으로 거문고 희롱매 춤추 학이 한가도다 <山深> 뫼히깁다
호연재는 前述한 바와 같이 정치 현실에 나아가서는 將相이 되어 세상을 구제하고 천하를 다스려야 하지만 不道한 횡포한 세상에서는 湖山에 물러나 자연물을 벗하며 거문고를 희롱하고 道書인 황정경을 읽는 청정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하는 장부다운 기상을 소유하였다. 例詩에서는 이와 같은 삶의 지향, 곧 世俗의 雜事와 차단된 깊은 산중의 水雲 사이에서 거문고를 희롱하고 黃庭經을 읽는 삶을 표현하고 있다.
綠雲捲暮嶽 푸른 구름이 져믄 뫼희 거두니 紅日暎滄浪 붉은 은 물의 비최도다 白玉空山老 옥은 븬뫼희 늙엇고 黃金大海藏 황금은 큰바다희 추여도다 紫芝長詠誦 붉은 지초를 기리 읇고 외오니 玄圃却凄凉 현푀신션잇 믄득 쳐량도다 靑靄繞竹舘 푸른 안개는 대집을 둘넛고 丹砂任自嘗 단는 임의로 맛보는도다 <失題> 뎨를 일타
이 시에서 서정적 자아는 山上에서 저 멀리 大海로 잠겨가는 저녁노을을 바라 보고 있다. ‘綠-紅’, ‘白-黃’의 시각적 색채의 대비와 ‘산-바다’의 공간적 대비를 통하여 眼前에 펼쳐진 장관을 仙界(현포)로 관념하고 자신은 장생불사하기 위한 仙藥인 丹砂를 맛보는 환상에 잠겨 있다. 勝景을 대하여 갖는 이러한 상상적 관념은 그의 詩篇 도처에 仙語의 사용을 통해 표백되어 있다.
釋家高意厭塵紛 셕가의 놉흔 이 셰샹분요를 슬케 녁여 霧食草衣出世群 안개를 먹고 풀을 닙어 셰샹 무리의 낫도다 聊得仙翁淸靜道 애오라지 신션의 고 고요 도를 어더 蓬萊長日弄浮雲 봉 긴날의 구름을 희롱도다 <釋家> 셕시 부쳐의 셩 의 집
起와 承에서는 釋家를 말하고 轉과 結에서는 신선을 말하여 道釋에 대한 관념이 혼융되어 있다. 표면적으로는 객관적 묘사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내심 그러한 삶을 지향하는 서정적 자아의 羨望的 의식이 함축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瑤臺日晩五雲香 요의 날이 늣고 오운이 향긔로왓 簾捲春風玳瑁梁 발을 츈풍 모냥의 거덧도다 瓊酒滿樽歌一曲 보로온 술이 잔의 곡됴 노니 玉人微醉倚珠床 옥인이셔 미야 구술상의 의지여도다 <遊仙詞> 곡됴일홈, <其1>
芙蓉顔色紫霞衣 부용 안의 하 옷엿고 羽駕朝天夜未歸 짓멍에로 하의 됴회야 밤드도록 도라오지 못도다 瓊臺霧罷遊何處 경의 안개 파매 어곳의 놀고 彩靄香雲繞月輝 와 향운이 비 둘너도다 <其2>
芭蕉影動小堂凉 파쵸 그림 움이매 쇼당이 서늘니 風彈琴絃近夕陽 람이 거믄고줄을 고 셕양이 갓가왓도다 童子不來仙鶴夢 동 오지 아니고 션학이 水晶簾外碧桃香 슈졍발 밧긔 벽되 향긔로왓도다 <其3>
碧桃花落海天秋 벽도치 쳔의 러질 예 仙樂蓬萊碧海樓 신션이 봉 벽누의셔 즐기도다 人間苦樂何須問 인간의 고락을 엇지 모미 므리오 回首蟾宮日月悠 머리 셤궁의 두루혀매 일월이 기럿도다 <其4>
腰着霞裳頭揷花 허리의 안개치마 닙오며 머리의 츨고 白雲斜坐渡銀河 운의 빗기안자 은하 건너도다 新粧侍女相邀入 신장 시녜 서로 마자 드러가니 十二樓中坐小娥 십이누 가온 쇼애 안잣도다 <其5>
호연재는 <遊仙詞>라는 제목하에 모두 6수를 지었는데, 例示하지 않은 나머지 1수는 曾祖姑詩稿 下에 수록되어 있는데 이 작품에서도 ‘羽駕에 바람을 타고 두 날개를 재촉하며 碧天과 蒼海를 배회하고 蓬萊山의 옛자취를 구름 가운데 밞으며 傲遊’하는 심경을 표출하고 있다. 例詩의 <其1>에서는 天上 瑤臺의 五雲이 향기로운 분위기 속에서 玉人이 술에 취해 珠床에 의지하여 한 곡조를 노래하는 천상 선계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으며 <其2>에서는 芙蓉같은 顔色을 한 仙官이 紫霞 옷을 입고 羽駕를 타고 朝會하는 모습과 아름다운 仙界를 묘사하고 있다. <其3>에서는 파초 그림자, 서늘한 바람, 仙鶴, 水晶簾, 碧桃花 등을 통하여 仙界를 묘사하고 있으며 <其4>에서는 碧桃花가 海天에 떨어지는 때에 蓬萊 碧海樓에서 즐기는 신선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其5>에서는 霓裳을 입고 白雲을 타고 은하수를 건너 十二樓에서 侍女의 시중을 받는 仙女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이처럼 <遊仙詞>는 仙界, 仙闕, 仙人, 仙車, 仙衣, 仙酒, 仙樂, 仙果, 仙樓 등 신선설화를 수용, 화려한 仙界의 묘사를 통하여 서정적 자아는 仙人이 되어서 仙界에서 마음껏 傲遊하고 있다. 하지만 煉丹을 통한 仙化를 갈망한 것은 아니다. 단지 환상적이고 낭만적인 정신세계에서의 신선관념을 통해서 일시적이나마 현실적 질곡을 초월하고픈 욕망을 投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때로는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며 갈등과 고뇌를 해소하는가 하면 때로는 仙界를 동경하며 현실의 질곡을 벗어나고자 하는 꿈을 꾼 호연재, 그는 病床에 누워 지나온 삶을 되돌아 보면서 ‘명되 고 어긔미 만으며 즐거으믄 젹고 슬프고 괴로움은 만흔’ 삶이었노라 회상하면서 그러한 그의 삶의 역정을 뛰어난 詩的 재능을 동원하여 이처럼 다양하게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Ⅳ. 結 語
호연재 김씨는 허난설헌과 더불어 조선조의 대표적인 士大夫家의 여류문인이다. 우리의 先入見과는 다르게 조선조의 여류문인은 의외로 많은 편이다. 상당수의 여인들이 그들의 뛰어난 재능과 또한 名望있는 집안의 폭넓은 이해를 토대로 하여 활발한 문학활동을 하였다.
文集을 남긴 士大夫家의 여류문인들을 살펴보면, 허난설헌(1563-1589)을 비롯하여 南平曺氏(1574-1645), 安東張氏(1598-1680, 允摯堂 任氏(1721-1793), 意幽堂 南氏(1727-1823), 芙蓉堂 申氏(1732-1791), 師朱堂 李氏(1739-1821), 令壽閤 徐氏(1753-1823), 憑虛閣 李氏(1759-1824), 三宜堂 金氏(1769-1823), 靜一堂 姜氏(1772-1832), 幽閑堂 洪氏(1791- ? 1827이후), 情靜堂 黃氏( ? - ?, 1849이전), 貞一軒 南氏(1840-1922), 淸閑堂 金氏(1853- ?, 1890) 등 16세기 후반부터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여류문인들이 대체로 골고루 분포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 浩然齋 金氏는 17세기에서 18세기로 넘어가는 시점의 대표적인 여류시인이다.
이 가운데 호연재는 그 詩的 재능이 탁월할 뿐아니라 작품의 量的인 면에 있어서도 가장 많은 수를 남기고 있어 이에 대한 학자들의 관심과 연구가 시급한 실정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본고에서는 그 예비적 단계의 하나로 호연재 작품의 존재 양상과 그의 가계 및 생애, 시적 특징의 일단을 범박하게 검토해 보았다. 이상에서 논의한 내용을 요약하여 결론을 삼기로 한다.
호연재 김씨(1681-1722)는 친가와 媤家 모두 名門이다 친가는 安東 金門으로 仙源 金尙容은 고조부이며, 시가는 恩津宋氏로 同春堂 宋浚吉이 媤曾祖父이다. 부친 金盛達과 모친 延安李氏(月沙 李廷龜의 曾孫)와의 사이에서 6남 7녀 가운데 8번째(4남 3녀 후)로 태어났다. 15세에 양친을 여의고 19세에 宋堯和에게 출가하여 1남 1녀를 두었는데, 28세에 아들 宋益欽을 낳았고, 36세에 따님(金致恭의 처)을 낳았으며, 42세에 타계하였다.
호연재는 문학적인 가정에서 성장하여, 형제 자매, 조카들과 詩作을 주고받았으며, 현재 전하는 작품은 194제 238수의 漢詩와 自警篇이 있는데, 그의 詩的 특징은 詩調가 청초하고 警句는 逼唐했다고 한다.
호연재의 작품은 鰲頭追到, 浩然齋遺稿, 曾祖姑詩稿 上․下에 수록되어 있다. 鰲頭追到는 16면의 唯一 필사본으로, 五言絶句 3題 3首를 비롯하여 27제 34수가 수록되어 있는데, 題名이나 작품 앞에 作詩와 관련한 간략한 서술을 하고 있어 창작 전후의 배경과 그 시기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작품이 상당수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 鰲頭追到에 수록되어 있는 작품은 대부분 親家의 兄妹를 그리워하며 고향인 洪城 葛山의 鰲頭里를 마음속에서 그리워하는 작품들이다. 浩然齋遺稿는 두 종류가 전하고 있는데, 박요순이 소개한 것은 73제 93수가 수록되어 있으며, 門中에서 國譯하고 영인⋅수록한 것은 103제 130수가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後者의 것은 <拾遺>와 <聯珠集> 摭出을 포함한 것으로, 원래의 浩然齋遺稿는 93수까지로만 이루어졌던 것인데, 그후에 작품을 발견하고 첨가한 것이다. 鰲頭追到와 浩然齋遺稿의 공통되는 작품은 37제 44수로, 이들 두 시집에 수록되어 있는 호연재의 작품의 總數는 110제 137수가 된다.
曾祖姑詩稿는 유려한 한글 행서체로 번역한 호연재의 시집으로 上․下 두 권으로 되어 있다. 책 표제와는 달리 內紙에는 호연유고라 표기되어 있다. 上卷은 95면에 88제 108수가 수록되어 있으며, 下卷은 106면에 106제 130수가 수록되어 있어 모두 201면에 194제 238수가 수록되어 있다. 曾祖姑詩稿 上은 門中에서 국역⋅소개한 浩然齋遺稿를 대본으로 하여 번역했을 것으로 보이며, 이의 下篇이 존재했을 것으로 보이지만 현재까지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리고 曾祖姑詩稿 下는 본고에서 최초로 학계에 그 존재를 소개하는 것인데, 그 원본이라 할 수 있는 漢文本은 발견되지 않고 있어 한글로 번역된 한시와 그 내용만을 살필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 曾祖姑詩稿는 甲戌年 5월 12일부터 6월 5일 까지 24일 동안에 걸쳐 고령 衙中에서 당시 나이 68세인 老人이 筆書하였는데, 1814년이나 1874년 둘 가운데 하나일 것으로 추정된다. 시집의 제목으로 보아 번역자는 호연재 親家의 曾孫 가운데 한 사람으로 보이며, 필서자는 번역한 원고를 求得하여 보관하고 있다가 여러 이유로 인하여 번역이 이루어진 후 수십 년이 경과한 후에 정서한 것으로 보인다.
自警篇은 <緖言> <跋文>을 비롯하여 <正心>, <夫婦>, <孝親>, <自修>, <愼言>, <戒妬> 등 모두 8장(실제의 章은 6장으로 되어 있음) 24면이다. 이 自警篇은 원래 호연재가 한문으로 기록한 것인데, 이 한문본은 필서 당시에 散失되었고 이를 한글로 번역한 언해본만이 전해 오던 것을 호연재의 외손인 金鍾杰이 이를 다시 한문으로 번역하였다. 그런데 오늘날은 그 언해본마저 逸失되고 전하는 것은 김종걸이 漢譯한 것뿐인데, 김종걸은 이를 1796년에 漢譯하였다.
호연재의 시세계는 그 내용도 다양할 뿐 아니라 그를 담는 형식 또한 다양하다. 그런데 본고에서는 호연재의 시세계를 내용 및 주제를 중심으로 그의 삶과 연관하여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그 특징을 검토하였다. 호연재는 그 詩篇 도처에서 그리움을 토로하고 있는데, 살아 있지만 만나기 힘든 親家 혈육에 대한 그리움, 死別한 부모 및 형제에 대한 그리움, 돌아가고 싶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 등 다양한 그리움의 情緖를 형상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시속에는 ‘孤, 凄切, 怨, 寒, 獨, 斷魂, 惆悵, 寂寥’ 등의 詩語가 빈번하게 등장한다. 또한 이러한 그리움은 꿈속을 통해 표출되는데, 꿈을 통해 그리움이 일단 해소되지만 꿈을 깬 이후의 더 큰 그리움에 눈물짓기도 하며 病苦에 신음하면서 血肉에 대한 그리움을 토로하기도 한다.
호연재의 시속에는 조선조 여류문인에게 쉽게 발견하기 어려운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을 표명한 작품들이 많이 발견된다. 肅宗의 승하 소식을 접하고 통곡하며 君恩을 갚을 길 없음을 탄식하는가 하면, 景宗이 새로 왕위에 즉위했다는 소식을 접해서는 聖德을 밝혀 나라가 昇平한 시대가 도래하기를 기원하기도 한다. 또한 벽에 걸려 있는 靑龍刀를 소재로 한 시에서는 청룡도를 들고 長江을 건너가 群凶을 무찌르고 明나라를 회복할 것을 노래하는 늠름한 기상을 보이기도 한다. 諸葛孔明이 천지를 飜覆할 수 있는 능력과 節義 및 誠忠을 지녔지만 때를 만나지 못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可惜해 하는 등 지나간 역사에 대한 평을 하기도 하며, 목민관으로서의 當務에 대해 역설하기도 한다. 이러한 호연재의 사회문제에 대한 각별한 관심은 자신의 성격 및 포부와 함께 媤家 및 親家의 가정적 분위기가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
호연재는 媤家 식구들과 화합하지 못하고 남편과의 관계도 소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호연재는 혼자 가정 살림을 도맡아 처리하면서 당장의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경제적으로 곤궁한 삶을 살았다. 이러한 고독과 갈등 및 궁핍한 삶에서 오는 고뇌를 해소하기 위하여 호연재는 때로는 술에 취하고 담배를 피우며, 때로는 신선을 동경하는 낭만적 思惟 속에서 飛翔을 꿈꾸기도 하였다. 따라서 그의 시속에는 仙語가 빈번하게 등장하고 있으며, <遊仙詞> 6수를 짓기도 하였다. 勝景을 仙界로 관념하고 仙藥인 丹砂를 맛보는 환상에 잠기기도 하며 羽駕를 타고 蓬萊 仙界를 傲遊하며 十二樓에서 仙官, 仙女들과 함께 술에 취해 仙樂을 등기도 하는 등 신선설화를 수용하여 낭만적 사유를 詩的으로 形象化하면서 고뇌를 초탈하고자 하였다.
호연재는 여류시인으로의 존재론적인 의의는 且置하고서도 漢詩를 한글로 번역한 점에서의 독특한 특징을 보여주고 있는 점, 長篇 古詩, 十字詩 등의 다양한 형식을 통한 詩作, 自警篇 및 漢詩의 내용적 특징 등 그에 대한 관심과 論議는 앞으로 계속되는 과제다.
<참고문헌>
浩然齋 金氏, 浩然齋遺稿 浩然齋 金氏, 曾祖姑詩稿 上⋅下 浩然齋 金氏, 自警篇 浩然齋 金氏, 浩然齋遺稿(宋昌準 譯, 鄕志文化社), 1995. 安東金氏大同譜 張志淵, 大東詩選, 아세아문화사, 1977. 鄕土硏究會, 鄕土硏究 제21집, 향지문화사, 1992. 朴堯順, 韓國古典文學新資料硏究, 한남대학교 출판부, 1992. 金美蘭, 「浩然齋 金氏의 作品世界와 文學史的 意義」, 月刊 恩津宋氏宗譜 제16호, 1995. 李淑嬉, 「浩然齋 金氏의 文學과 思想」, 韓國의 經學과 漢文學, 태학사, 199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