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松溪의 판소리 敎育
소리와 인연을 끊은 지 약 10년 정도 지날 무렵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양암(亮菴) 정광수(丁珖秀․1909~2003)의 소개로 득량출신 박춘성(朴春城․1921~1995)이 소리수업 받기를 간청하자 받아들였다. 6년여의 교습 후 전주에서 열린 대사습(大私習)에서 영예의 장원(壯元)을 차지하면서 송계는 주목을 받게 된다. 이후 당대 명창이고 창극(唱劇)에도 뛰어났던 동초(東超) 김연수(金演洙․1907~1974)를 비롯한, 쑥대머리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임방울(林芳蔚․1905~1961)ㆍ명창인 亮菴에 이르기까지 많은 소리꾼들이 소리를 배우기 위해 송계의 문하로 몰려들어왔다.
오늘날 보성 소리를 이은 제자들은 강산제 보성소리를 가장 가까이서 배운 박춘성과 보성소리를 가장 충실하게 이어 받은 성우향(成又香․1932~ )과 12세의 나이에 문하에 들어가 7년여 가량 수업을 받은 율어출신 조상현(趙相賢․1939~) 그리고 송계가 말년에 가르친 마지막 제자 성창순(成昌順․1934~ )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은 한국을 대표하는 판소리 명창으로 성장해서 일가를 이루고 있다. 해방을 전후해서 한국전쟁 이후까지 송계의 초가가 있는 도강부락의 농가에는 많은 제자들이 몰려와 소리공부를 하느라 판소리가락이 산하에 울러 퍼지며 그치지 않았다.
송계의 소리교육은 남달랐다. 오늘 날처럼 녹음기 같은 문명의 이기가 없던 시절에 많은 소리꾼들은 구전심수(口傳心修)로 소리를 익혀왔다. 이른바 선생이 한 구절을 불러주면, 제자들은 그것을 따라 부르는 교육방법이 바로 구전심수법라는 것이다. 송계는 제자들에게 구전심수법으로 교육시키면서도 한 구절 한 구절을 일정한 수준에 이를 때까지, 수십 수 백 번씩 반복해서 부르게 했다고 한다. 제자들은 득음(得音)을 위해 영천(聆川)의 두개의 보(洑)에서 떨어지는 폭포를 주로 이용하게 했다. 폭포의 굉음을 압도할 수 있어야 진정한 소리꾼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제자들에게 버려야 할 4가지를 강조했다. 첫째는 노랑 목을 쓰지 말 것, 두 번째, 함성을 쓰지 말 것, 그리고 세 번째, 전성, 즉 발발성을 쓰지 말 것, 마지막으로 비성(鼻聲)을 쓰지 말 것 등이다. 송계는 이름난 명창은 아니다. 그는 어려서 백부를 따라다니면 소리를 공부했다. 그러나 그는 소리꾼으로써는 짧은 연륜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찾아오는 제자들을 오늘날 명창으로 훌륭하게 키워냈다. 사실이지 그는 천재적 이라고 할 만큼 음악성이 탁월하지도 않았다. 여기다 중앙무대와 인연을 끊고 향리에 은거했기에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무명이다.
그러니까 송계의 판소리소리교육은 1930년부터 1960년대까지 약 30여년 정도이다. 그의 제자들이 한국의 판소리계를 주름잡은 데는 시대의 변화와 타이밍이 맞아 떨어진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먹고 살기 어려웠던 1960년대 이전까지 판소리는 천대받은 국악이었다. 게다가 한국전쟁을 통해 신분질서가 완전히 무너졌다. 이어서 1970년부터 산업화로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면서 잃어버린 우리 것을 찾은 조류가 형성된다. 잊혀져가는 민속과 전통놀이 등을 발굴하려는「한국판 르네상스」의 강풍이 전국을 휘몰아쳤다. 판소리 또한 그 조류의 예외가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② 松溪 3대의 소릿꾼
松溪는 아들 鄭權鎭(1927~1986)에게는 소리를 전수하지 않았다. 천대 받는 판소리를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았던 까닭이다. 그래도 명창의 핏줄은 속이질 못했을까. 어린 권진은 사랑채에서 들려오는 판소리에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서당에 다닐 무렵에는 아버지의 제자들이 부르는 웬만한 판소리는 따라서 흥얼거릴 수 있을만큼 재능이 뛰어났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이 판소리를 부르는 것을 엄히 금지했다. 이런 아버지의 고집 때문에 그는 '보통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판소리 근처만 빙빙 돌며 애를 태웠다.
그의 재능을 아깝게 여긴 아버지의 주변사람들이 “일제가 지속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 민족 혼은 판소리밖에 없으니 판소리가 빛을 볼 것이다. 그러니 아들에게 판소리를 가르쳐라” 하며 권유했다. 그래서 열다섯 살이 되었을 무렵에 부산 동래 권번에 소리선생으로 있던 아버지의 수제자 박기채에게 소리를 배울 수 있었지만 1년 정도에 그쳤다. 그 무렵 정응민에게 소리를 배우던 제자로는 김연수, 정광수, 김준섭과 같은 쟁쟁한 소리꾼들이 있었는데 박기채는 그 중에서도 정응민이 아끼던 제자였으나 요절했기 때문이다.
권진은 부산에서 5년쯤 양복점의 점원으로 일했다. 19세 때 고향에서 장복순과 혼인을 했다. 혼인한 지 한 달 만에 강진의 고성사라는 절로 들어가 소리공부에 매달렸다. 집과 절을 오가며 판소리 공부를 하는 동안 해방이 되고 6.25 한국전쟁을 거쳤다. 이후에는 군산이나 대구 그리고 대전 국악원과 같은 곳에 창악강사로 초청되어 떠돌아다니며 살았다. 그러다가 1962년에 국립창극단이 설립되자 단원으로 1년쯤 지내다 국악예술학교의 창악강사로 일했다. 그는 1964년에 「심청가」 인간문화재로 지정을 받기에 이른다.
그동안 어깨 너머로 아버지의 소리를 배운 권진은 독공을 하면서 아버지의 소리를 습득하게 되었고, 판소리 문화재로 지정된다. 이는 곧 부자 명창으로 평가받은 셈이다. 정권진은 아들 삼형제를 두었는데, 큰아들 정회천은 전북대학교 국악과 교수로 재직 중이면서 "선대가 이루어 놓은 판소리 업적"을 학문적으로 정리하고 있다. 또한 그는 중학시절부터 명고수 김명환(인간문화재.89년 작고)으로부터 고법을 배워 무형문화재 59호(김명환 고법) 전수조교로 등록되어 있으며 명인 함동정월로부터 가야금 산조도 배웠다.
가야금을 전공한 그의 부인 안희정씨(서울대 국악과졸)도 전주도립국악원 교수로 있다. 차남 정회완(전남대 국악과졸)과 부인 최미애(전남대 무용과졸)는 전남도립국악원에서 대금연주자와 한국무용을 맡고 있다. 국립국악원에서 판소리를 부르고 있는 막내아들 정회석(서울대 국악과졸)은 KBS 국악관현악단 해금주자인 그의 부인 정수년(서울대 국악과졸)등과 함께 모두가 부부 국악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정응민은 지난 1996년 탄신 100주기를 맞으면서 판소리를 연구하는 학자들뿐만 아니고, 많은 국악계 인사들에게서 판소리사에서 귀중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재조명했다.
오늘도 판소리에 대한글 잘보고 공부하고 갑니다.
세세한 숨은 이야기가 흥미롭습니다. 판소리의 역사를 자세히 알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