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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15. 묵상글 들 (연중 11주 화요일-나의 필요가 아니라 너의 필요를.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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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15.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연중 11주 화요일-나의 필요가 아니라 너의 필요를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하느님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현명한 사람과 현명한 사랑은
나의 죄와 악이 나의 사랑을 이기지 못하게 하고,
너의 죄와 악도 나의 사랑을 이기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죄를 짓고 난 다음 악에 지배를 당하여
죄지은 나를 미워하고, 부끄러워하며 숨기고,
어떤 때는 자포자기 상태로 죄악의 구덩이에 뒹굴기도 합니다.
이것은 악마적입니다.
악마는 작은 죄로 큰 죄를 짓게 하고, 한번의 죄로 많은 죄를 짓게 하는데
죄지은 자신에 실망케 하는 큰 죄, 사랑을 포기케 하는 큰 죄,
무엇보다 죄책감 때문에 하느님 은총을 못 보게 하는 큰 죄를 짓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현명하다면 더 이상 죄가 더 크고 많은 죄를 낳지
못하도록 죄와 사랑 중에서 사랑을 볼 것이고,
하느님 사랑과 은총 앞에 나의 죄와 악을 놓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 죄와 악보다 훨씬 크시기에
우리의 죄와 악이 그분의 사랑을 멈추게 하지 못하고,
그분의 사랑이 오히려 우리의 죄와 악을 씻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의 필요와 요구보다 훨씬 크시기에
한벌을 달라고 하면 두벌의 옷을 주시고,
십 리를 같이 가 달라고 하면 이십 리를 같이 가 주실 뿐 아니라
우리의 죄와 악보다 월등히 크시기에 우리가 큰 죄를 당신께 지어도
우리를 원수 삼지 않으시고, 수없이 지어도 당신 사랑을 멈추지 않으십니다.
누가 나의 원수가 되는 것은 그의 큰 죄악 때문이 아니라
나의 작은 사랑에 때문이기 때문인데
하느님의 사랑은 워낙 크시기에 원수도 없고 포기도 없으시지요.
그리고 하느님의 사랑은 크실 뿐 아니라 결핍도 없으시기에
결핍을 채우기 위해 누구의 사랑을 필요로 하지 않으시고
결핍이 없을 뿐 아니라 넘치시기에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치 않으시고 사랑이 필요한 사람은 모두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사랑이 필요한 사람은 두 부류입니다.
필요하기에 사랑을 요청하는 사람과
필요한데도 요청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랑 그것도 하느님 사랑이 더 필요한 사람은
청하는 사람이 아니라 필요한데도 청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청하는 사람은 사랑이 필요한 줄 아는 데 비해
청치 않는 사람은 자기가 사랑이 필요한 사람인 줄도 모르고
자신을 사랑 밖에 내놓거나 내몰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뜻에서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악한 사람이나
불의한 사람이 실은 사랑이 더 필요한 사람입니다.
어쩌면 이들은 짐짓 사랑 따윈 나 모른다며 일부로 막가는 사람이거나
나같은 사람은 사랑에서 제외되었을 거라고
지레 사랑을 포기한 사람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하느님께서는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 의로운 사람과 불의한 사람
가리지 않고 햇빛과 비를 주실 뿐 아니라 오히려
악인과 불의한 이가 당신 사람이 더 필요하다며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욕심은 나의 필요를 더 생각하지만
사랑은 너의 필요를 더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사랑은 더더욱 그러하여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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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15.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문수기
오늘 <복음>은 마지막 여섯 번째의 새로운 의로움으로, ‘완전한 사랑’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레위기> 19장 18절의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라는 말씀을 넘어서,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마태 5,14)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이웃과 원수를 구분해서 처우를 달리 해온 그동안의 관행을 완전히 뒤엎어, 이웃이나 원수를 가리지 않고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원수가 사랑받을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또는 우리 자신에게서 미움을 없애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혹은 단지 사랑에 한계를 두지 말라는 것만도 아닙니다. 오히려, 이는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있는 그대로를 ‘호의로’, ‘자애로’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곧 부족한 이를 부족한 채로, 원수를 원수인 채로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가 나를 미워하지 않게 되면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미워한 채로 사랑하는 일입니다. 나아가서는 그가 부족하기에, 바로 그 이유로 더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가 사랑이 더 필요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죄인이기에 처벌받아야 하기보다, 용서받아야 할 대상이듯이 말입니다.
동시에, 이는 자기 자신만 구원받아야 할 존재인 것이 아니라, 타인도 구원받아야 할 존재임을 깨우쳐줍니다. 자기 자신만 사랑받아야 하는 존재인 것이 아니라, 타인도 사랑받아야 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에 덧붙여 말씀하십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만 하지 않으시고, 그를 위해 기도하라고 덧붙이셨습니다. 사랑은 애당초 자기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위하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스테파노가 돌을 맞아 죽어가면서도 자기에게 돌을 던지는 이들을 위해 기도했던 것처럼(사도 7,60), 사도 바오로가 고난을 겪으면서도 박해하는 유대인들을 위해 기도했던 것처럼(1코린 4,12)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형제나 이웃만 사랑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자기에게 잘 해주고,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하라고도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렇다면, 지금 나의 기도가 가장 필요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혹 지금 나를 가장 힘들어하는 사람, 또 내가 가장 힘들어하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 아닐까요?
사실, 친구를 사랑하는 사람은 죄는 짓지 않을지 몰라도, 의로움을 행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친구가 아닌 원수를 사랑할 때라야, 의로움을 행하게 됩니다. 악을 피하는 것을 넘어 선을 행할 때라야, 비로소 완전해지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의로움은 단지 죄짓지 않고 무난하게 살기만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베푸는 데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사랑이 우리를 하느님과의 의로운 관계로 이끌어갑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로마 13,10)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늘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
-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
주님!
단지 사랑할 뿐만 아니라,
그 사랑이 그에게도 사랑이 되게 하소서.
내가 기도해해주고 싶은 사람이 아니라,
나의 기도가 가장 필요하고 나의 사랑이 가장 필요한 사람,
나를 힘들어 하고 나의 용서가 절실한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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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15.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하느님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오늘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예수님과 사도 바오로를 통하여 들려주시는 말씀도
어제와 마찬가지로, 시대 상황이 하느님께 맞서고 우상을 좇아가는 경우에
신앙인들은 어떻게 복음을 증거하며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지혜입니다.
로마 제국의 막강한 군대가 이스라엘에 주둔하며
주인 행세를 하던 그 시절에 그들은 유다인들의 원수였습니다.
원수가 되어 버린 로마군을 미워하며 이스라엘의 독립을 바라는 일은
당시 이스라엘의 대세요 숙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명분에 가려서 자신들 안의 크고
작은 갑질이 수평 폭력으로서 자행되는 현실에서는 동족의 단결과 일치는 요원했습니다.
조금이라도 힘이 세거나 유리하면 상대방을 짓누르려 하는 형편에서 로마군에 대한
증오가 모든 악과 불법행위를 합리화시켜 주고 있었던 판이었던 것입니다.
로마에 빌붙어서 제사독점권을 행사하며 기득권을 누리던 사두가이는 대표적인
반민족 집단이었고, 로마에 대항하여 이스라엘의 독립을 지향한다면서 동족 위에 군림하며
착취를 일삼던 바리사이들이 그 대표적인 위선자 집단이었습니다. 그들은 율법 지식에
대한 권위를 앞세워 민중 위에 군림하면서 하느님을 가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로마군에 무력으로 대항하려던 혁명당원들도 이 독립 명분 뒤에서 일상의
폭력을 동족들에게 행사하기로는 바리사이들과 마찬가지로 위선적이었습니다.
나중에 예수님과 맞바꾼 바랍빠나 예수님 옆에서 함께 못 박힌 두 강도가 그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한 마디로 가치의 위계질서가 뒤죽박죽 뒤섞인 혼돈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가장 먼저 하느님이 누구신지에 대한 가르침부터 펴셨습니다.
기초부터 튼튼해야 건물을 높이 세울 수 있듯이,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생각부터
올바라야 하겠기에 그리 가르치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악인에게나 의인에게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죄인에게나 착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십니다.
따라서 악인이나 죄인들보다 더 의롭고 더 착해야 합니다. 도덕적인 명분에서 조금이라도
그들에게 밀리면 안 됩니다. 조금이라도 그들의 더러운 악에 물들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들의 악에 밀려서 손해를 입고 상처를 받고 심지어 십자가에 달려 죽을지언정 선에
관해서는 양보할 수 없는 겁니다. 이것이 하느님을 믿는 신앙인들의 온전한 자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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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15.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새벽을 열며, 빠다킹 신부님.
예전에 혼자 개인 여행을 갔다가 있었던 황당한 일이 생각납니다. 빨리 화장실에 가야만 하는 상황에 놓였습니다. 저는 얼른 근처 카페로 들어가서 차를 주문하고는 곧바로 화장실로 갔습니다. 급한 일을 모두 마치고 세면대에 가서 손을 씻는데 난처한 상황임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글쎄 남자 소변기가 하나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급한 마음에 화장실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들어온 것이었습니다.
다행히 화장실 안에 사람이 없었기에 망정이지 큰일 날뻔했습니다. 그래서 재빨리 밖으로 나왔는데, 문 앞에서 어떤 자매님과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이 자매님이 깜짝 놀라면서 눈이 동그랗게 커졌습니다. 그리고 제게 한마디 하셨습니다. 뭐라고 하셨을까요?
저를 혼내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이 자매님은 “아! 죄송합니다.”라고 말씀하시고는 옆의 남자 화장실로 들어가셨습니다. 남자가 나오니 그곳은 남자 화장실로 생각하셨던 것입니다. 그때 차마 “자매님, 여기가 여자 화장실이에요.”라고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의 행동이 다른 이에게 이렇게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영향을 미쳐야 할까요? 당연히 좋은 행동으로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모범을 따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상에 좋은 영향을 미쳐서 더 밝고 행복이 넘치는 세상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주님의 모범인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그 사랑은 세상의 관점에서는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사랑이 어떻게 쉽겠습니까? 그런데 나 자신을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원수같이 말도 잘 듣지 않는 나를 그리고 당신 뜻에 정반대로 행동하는 나였습니다. 그런 나를 용서해주시고 또 당신의 큰 사랑으로 받아주시는 주님을 떠올려보십시오. 지금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가 분명해집니다. 주님 말씀처럼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분은 이런 사랑이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불가능한 일을 명령하시지 않습니다. 불가능해 보이지만 가능하다는 것을 당신의 모범으로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모범을 따르는 사람에게는 분명히 더 큰 은총과 사랑을 주십니다.
이 은총과 사랑을 받은 우리는 주님의 말씀처럼 하느님 아버지처럼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각자를 위해서 또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세상을 위해서 좋은 영향이 계속되어야 하므로 반드시 사랑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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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은 누구에게나 따뜻한 빛을 준다. 그리고 사람의 웃는 얼굴도 햇빛과 같이 친근감을 준다. 인생을 즐겁게 지내려면 찡그린 얼굴을 하지 말고 웃어야 한다(슈와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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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가 잘 되는 곳은?
어느 동네에 과일가게가 세 군데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다음의 가게 중 어디가 제일 장사가 잘될까요?
1) 그냥 오시는 손님을 맞이하고 파는 곳.
2) 멋진 실내장식이 되어 있는 곳.
3) 과일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는 곳.
3번의 과일가게가 제일 장사가 잘되는 집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곳 사장님께서 이런 말을 합니다. 과일에 관해 설명할 때와 설명하지 않을 때 매출액이 2배 차이가 난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더 많이 과일에 대해 알려고 노력한답니다. 알면 알수록 전달해 줄 것도 많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세상 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냥 단순히 땅끝으로 가라는 것이 아닙니다. 자금의 자리를 포함해서 모든 곳에 기쁜 소식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이를 위한 우리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새로운 교우가 오면 왔나보다 하는 수동적인 교회.
2) 아름다운 성전 만들기에만 힘을 쏟는 교회.
3) 새로운 교우가 오면 자세히 설명해 주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공부하는 교회. 당연히 3) 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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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15.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5,43-48: 원수를 사랑하여라.
“원수를 사랑하여라.”(44절)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명령하신 것은 원수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해서이다. 원수가 남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는 아무도 미워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자신에게서 나쁜 것을 없애 버리기 위해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다. 미워한다는 것은 당사자는 아무런 해도 입지 않을 수 있지만, 미워하는 사람은 영에 큰 해를 입는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어야 한다. 스테파노가 순교할 때, 자기에게 돌을 던지는 이들을 위해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이를 보여 주었다(사도 7,60 참조). 이렇게 그리스도께서는 불가능한 것을 법으로 제정하지 않으신다. 유대인들에게 많은 고난을 겪었던 바오로도 그들을 위해 기도한다(1코린 4,12 참조).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라고만 하시지 않고 기도하라고 하셨다.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45절) 이렇게 원수를 사랑할 때, 그분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받은 우리는 아드님이 주신 계명을 실천할 때 그분의 자녀가 될 수 있다. 우리는 하느님 안에 새로이 태어남으로써 자녀들이 되며, 그분의 새로운 창조물이요 자녀로서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자녀의 권한을 받는다. 우리는 아드님과 같은 참 자녀들이 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를 자녀가 되는 권한으로 부르시는 것은 우리가 당신 모습과 닮은 모습이 되도록 하시려는 것이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45절) 여기서 해는 그분의 지혜를 뜻하며, 비는 진리의 가르침이 적셔주는 것을 뜻하고 있다. 이 지혜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우리의 몫이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46-47절)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자신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 자체가 기쁨이기 때문에 보물을 지닌 것은 아니다. 그러나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하느님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가 자기 본능을 넘어 행동하는 것이므로 그는 큰 보물을 지닌 것이다. 하느님의 상속자는 행실로 하느님을 닮지 않는다면 완전한 상속자가 아니다.
“하늘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48절) 오늘 복음은 “모든 것은 선으로 완전해진다.”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우리가 가진 믿음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한다. 믿음은 분노가 앙갚음으로 바뀌는 것을 막을 뿐 아니라, 분노를 해를 입힌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부드럽게 바꾸어 놓기도 한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하느님 상속자들의 삶으로 부르시고 그리스도를 본받는 모습을 보이도록 부르신다. 그렇게 함으로써 아버지의 선하심을 본받을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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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15.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3-48).”
이 말씀은, “편 가르기를 하지 마라.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여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우리는 모두 형제이고 이웃입니다.
(모든 사람이 전부 다 내가 사랑해야 할 나의 형제이고 이웃입니다.)
따라서 원수는 없습니다.
내가 내 마음대로 원수라고 생각하는 이웃이 있을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수를 사랑하여라.” 라는 예수님의 계명은
“이웃을 원수로 여기지 말고, 사랑하여라.” 라는 계명입니다.
“그래도 살다 보면, 나를 미워하는 사람도 생기고, 내가 미워하는 사람도 생긴다.
미워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너무나 어렵다.” 라고
하소연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자기 안에 있는 미움부터 없애려는 노력을 왜 하지 않는가?”
“혹시 사랑하려고 노력하지도 않으면서 사랑이 어렵다는 말만 하는 것은 아닌가?”
내 안에 있는 ‘이웃에 대한 미움’을 없애려면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웃 안에 있는 ‘나에 대한 미움’을 없애려면 그에게 먼저 가서
용서를 청하고 화해해야 합니다(마태 5,23-24).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은, 사랑은 좋아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점입니다.
(“원수를 사랑하여라.” 라는 계명은 “원수를 좋아하여라.” 라는 계명이 아닙니다.)
미워하고 싫어하는 감정과 좋아하는 감정은 양립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의지의 실천이고, 선의 실현이기 때문에,
감정과 상관없이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미워하고 싫어해도 사랑을 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그런 감정과 사랑은 차원이 다르다는 뜻입니다.
<무조건 잘해주는 것만 사랑이 아니라, 타이르고, 꾸짖는 것도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엄하게 꾸짖으신 일은(마태 16,23),
그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하신 일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을 막으려고 그렇게 엄하게 꾸짖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주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꾸짖고 비판하신 것도
그들을 회개시켜서 구원하기 위한 ‘사랑’입니다.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들의 위선을 싫어하셨고, 그들을 꾸짖으셨습니다.>
성경에서, “원수를 사랑하여라.” 라는 계명을 실천한 대표적인 예는
루카복음에 나오는 ‘착한 사마리아인’입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강도당한 사람’은 유대인으로 생각됩니다.
그 당시에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은 원수지간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원수 사이입니다.)
그래서 착한 사마리아인이 강도당한 사람을 도와준 일은
이웃을 사랑한 일이기도 하고, 원수를 사랑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 사마리아인은 강도당한 사람이 원수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았고,
도움이 필요한 이웃이라는 것만 생각했습니다.
바로 그것이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말씀하시고 나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라고
물으셨는데(루카 10,36), 이 말씀은 “누가 이웃인가를 묻지 말고,
먼저 이웃이 되어 주어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이웃에게 먼저 다가가서 이웃이 되어 줄 것인가? 원수가 될 것인가?
또는 그 이웃을 원수로 삼을 것인가?”
이것은 각자 스스로 결단하고 선택할 일입니다.>
구약성경에도 “원수를 사랑하여라.”로 해석할 수 있는 율법이 있습니다.
“길을 잃고 헤매는 너희 원수의 소나 나귀와 마주칠 경우,
너희는 그것을 임자에게 데려다 주어야 한다. 너희를 미워하는 자의 나귀가
짐에 눌려 쓰러져 있는 것을 보았을 경우, 내버려 두지 말고
그와 함께 나귀를 일으켜 주어야 한다(탈출 23,4-5).”
우리가 구약시대를 “이웃만 사랑하고 원수는 미워한 시대” 라고만
생각하는 것은 편견입니다.
예수님 말씀에 들어 있는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 라는 말은,
구약성경의 율법을 인용한 말이 아니라,
당시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사고방식을 가리킨 말로 해석됩니다.
구약성경에는 그런 율법이 없습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라는 말씀은,
“박해자들의 회개와 구원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로 해석됩니다.
(사랑의 궁극 목표는 회개와 구원입니다.)
하느님께서 악인에게도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불의한 이에게도 비를 내려
주신다는 말씀은, 하느님께서는 ‘그들도’ 사랑하신다는 뜻인데,
그 사랑은 그들도 모두 회개해서 구원받기를 바라시는 사랑입니다.
(악인들의 악행과 불의를 묵인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라는 말씀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죄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에서 ‘세리들이나 하는 짓’이라는 말은,
세속 범죄자들이 자기들끼리 ‘의리’ 라고 부르는,
‘패거리 의식’ 같은 것을 가리킵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라는 말씀은, ‘완전한 사랑’을 실천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원수 같은 사람도 사랑하는 것은 완전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고,
하느님의 사랑을 본받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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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15.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박형순 바오로 신부님.
오늘의 묵상
신자이기 때문에 지켜야 할 계명 가운데 가장 큰 계명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가장 잘 지켜야 하는 계명이지만, 동시에 가장 지키기 어려운 계명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랑하라고 계속해서 이야기하십니다. 그냥 하는 사랑이 아니라, 이웃은 물론 원수까지 사랑하라 하시네요. 참 어렵습니다. 내가 미워하는 사람, 나를 미워하는 사람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요?
다시 오늘 복음을 읽으면서 사랑과 관련된 구절만 살펴봅니다.
신약의 언어인 그리스어에는 사랑에 네 단계가 있습니다. 첫째는 ‘에로스’입니다. 우리가 아는 육체적인 사랑입니다. 둘째는 ‘스토르게’입니다. 이것은 혈연으로 연결된 사랑을 의미합니다. 셋째는 친구 사이의 우정을 의미하는 ‘필리아’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이 ‘아가페’입니다. ‘아가페’는 사랑의 가장 높은 단계로, 하느님께서 사람을 향하여 품으시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들려주시는 사랑이 바로 ‘아가페’입니다. 오늘 복음이 전해 주는 사랑은 이웃에게도, 원수에게도, 곧 모든 사람에게 하느님께 받은 사랑을 전하는 ‘사랑의 실천’을 의미합니다. 사랑의 출발점이 내가 원하는 사랑, 내가 좋아서 하는 사랑이 아니라, 하느님께 받은 사랑의 전달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사랑을 우리에게 바라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떠오르는 태양을 통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통해서 우리에게 무조건 베풀어 주십니다.
원수를 사랑하기 어렵습니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을 좋아하기 어렵지요. 그럼 우리 함께 하늘의 태양을 보면 좋겠습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함께 맞아 보는 것은 어떨까요? 우리의 눈을 부시게 만드는 태양이, 하늘에서 내리는 비가 하느님께서 무조건 베푸시는 사랑임을 기억해 봅시다. 태양을 보면서, 비를 맞으면서, 그 사랑을 나와 가까운 사람부터 시작하여 원수에게까지 전달할 수 있다면, 우리의 부족한 사랑은 하느님의 완전함을 향하여 움직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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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15.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나도 다른 사람의 원수가 될 수 있다
살아가면서 나를 아프게 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그래서 나는 ‘상처를 많이 받았다.’고 말합니다. 사실 상처를 주는 사람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나와 관련이 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상처가 되지 않고 쉽게 잊어버립니다. 아주 가까이 있기에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아내가 될 수 있고 남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자식이 될 수도 있으며 부모나 이웃, 절친한 친구, 동료가 될 수 있습니다. 상처를 풀지 못한 채 시간이 흐르면 미움이 쌓이고 마음의 병이 되고 결국은 원수가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 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5,44-45). 고 말씀하셨습니다. 미움을 사랑으로 정복하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는 원수와 박해하는 사람, 악인과 선인, 의로운 사람과 불의한 사람이 따로 없습니다. 다 내 자식이요, 사랑해야 할 대상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아낌없이 사랑을 베푸십니다. 오로지 사랑만이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원수를 만드는 것은 바로 나입니다. 사랑으로 충만하다면 원수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나는 하느님이 아닙니다. 그러니 상처를 받을 수 있는 연약함을 지녔고, 그렇기 때문에 상처를 받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상처를 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할 것도 아니고, 혹 아픔이 이미 시작되었다면 그 아픔을 오래 가지고 있지 않아야 합니다. 더러운 것이 내 몸에 들어왔는데 왜 그것을 끌어안고 있습니까? 내보내야지요. 상처를 준 그 무엇이 내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인식하면 내보내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내가 싫어하는 사람, 원수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깊이 보면 우리 자신들이 다른 사람의 원수가 될 수도 있습니다.
가끔 신자들의 기도소리를 들어보면 ‘세상에 못된 사람이 너무 많은데 회개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이러저러한 상태를 낱낱이 고발하는 식으로 얘기해 놓고는 ‘그러니 고쳐주십시오’. 하는 식입니다. ‘자기는 아무런 잘못도 없고 회개할 이유도 없는데 남들이 잘못해서 이지경이 되었으니 그들을 좀 어떻게 해 주십시오.’ 하고 간절히 기도하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다른 사람도 나도 다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이고, 질그릇처럼 깨지기 쉬운 연약함을 지녔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원수를 사랑하여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무리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느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이미 원수가 없습니다.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시는 하느님만을 바라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나도 다른 사람의 원수이니 오늘은 하느님의 풍성한 은총으로 하느님의 마음을 닮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하느님의 마음을 간직하여 모두가 사랑해야 할 사람으로 보인다면 비로소 하느님의 자녀라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사람들로부터 온갖 멸시를 받고 죄인 취급을 받았던 세리들도 서로를 사랑하며 서로 상대방을 헐뜯지는 않았습니다. 하느님을 모르는 이방인들 사이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서로를 존중하고 우애를 베푸는 것은, 아주 보편적인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사랑해야 할 소명이 있을 뿐입니다. “성인은 착한 사람을 착하게 대하고 착하지 않은 사람 또한 착하게 대하니 이는 덕이 오직 착하기 때문이다”(노자49장). “사랑은 사랑일 뿐, 상대에 따라서 달라지거나 있다가 없다가 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이현주).
그러므로 지금의 처지에 안주하지 말고 적극적인 사랑의 실천을 통하여 하느님의 완전함을 드러내시기 바랍니다. 많이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많이 행하십시오.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이미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로마5,5).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사랑은 어떤 사랑일까요? 원수사랑! 이죠. 그렇다면 가장 아름다운 사랑은? 당연히 원수사랑! 이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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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15.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군대에 있을 때입니다. 업무상 ‘비밀취급인가’를 받아야 했습니다. 서류에는 ‘대외비, 3급 비밀, 2급 비밀, 1급 비밀’이 있습니다. 서류를 인수하면서 서명을 해야 했습니다. 저는 3급 비밀까지 취급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습니다. 2급 비밀과 1급 비밀은 더 많은 보안이 필요했기에 비밀취급인가의 등급이 높은 사람만이 볼 수 있었습니다. 교구청에 있을 때입니다. 저는 교구청의 여러 모임에 위원으로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참석하는 모임의 서류나 공문을 열어 볼 수 있도록 제게 권한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주교평의회나 참사회의의 서류나 공문은 제가 볼 수 없었습니다. 제게는 그런 권한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비밀을 취급하는 사람은 알게 된 비밀을 지킬 의무가 있습니다. 알게 된 정보를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 사용해서도 안 됩니다.
공익을 위해서, 긴급한 재난의 상황에서 비밀을 해제하거나 공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코로나19에 대한 백신의 지적재산권을 공개한다고 합니다. 공개된 정보를 활용해서 더 많은 백신을 공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국민들의 알 권리를 위해서, 사회 정의를 위해서 비밀문서를 공개하기도 합니다. 당시의 정책이 국민을 위한 것이었는지, 집단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는지 판단할 수 있습니다. 투명한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의무적으로 공개해야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기업체의 재무제표도 공개됩니다. 그래야 신뢰하고 투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마트폰에 사용되는 다양한 웹들도 무료로 공개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무료로 공개된 웹을 통해서 생활에 편리한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소유에서 존재로 넘어가는 삶의 모습을 ‘공유경제’ 모델에서 볼 수 있습니다. 도시에서 자전거나, 전동 킥보드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합니다. 스마트폰을 이용해서 쉽고, 편하게 이용할 수 있습니다. 사무실을 공동으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각종 사무기기를 함께 사용하기에 비용이 절감됩니다. 사무실을 함께 사용하기에 임대료도 절약 됩니다. 옷을 함께 사용하기도 합니다. 면접을 가거나, 모임에 참석할 때 굳이 비싼 옷을 사지 않고, 저렴한 비용으로 좋은 옷을 입고 반납하면 됩니다. 휴가를 갈 때 좁고 비싼 호텔을 이용하기 보다는 넓고 저렴한 빈집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사용하지 않는 집을 소유한 사람과 숙소를 원하는 사람을 연결해 주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장소까지 안전하게 이용하는 차량도 있습니다. 차량이 필요한 사람과 차를 이용해서 수익을 원하는 사람을 연결해 주기 때문입니다.
국가에서 정부의 자원을 회의실과 강의실, 강당과 다목적 실, 주차장, 체육시설, 숙박시설과 같은 자원을 공개한다고 합니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 필요한 사람들이 저렴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한다고 합니다. 국민의 세금으로 만들어진 국가의 자원을 국민을 위해서 돌려주는 발상의 전환입니다. 저도 사제관 지하에 자전거를 가져다 놓았습니다. 다른 신부님들도 자전거를 가져다 놓았습니다. 필요한 신부님들은 언제든지 자전거를 탈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뉴욕으로 여행 온 신부님들이 사제관에 있는 자전거를 이용하였습니다. 소유하는 것보다 공유하는 것이 더 좋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초대교회는 이미 소유의 삶이 아닌 공유의 삶을 실천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가진 것을 교회에 봉헌하였습니다. 교회에는 가난한 사람도, 궁핍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어린아이도, 과부도, 노약자도 따뜻하게 보살핌을 받았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살아가는 고린토의 신자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은 모든 면에서 곧 믿음과 말과 지식과 온갖 열성에서, 또 우리의 사랑을 받는 일에서도 뛰어나므로, 이 은혜로운 일에서도 뛰어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여러분이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소유하는 삶에서 존재하는 삶으로 변화될 때, 우리는 새로운 세상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 세상은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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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15.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
- 하느님의 소망所望이자 우리 삶의 궁극 목표目標 -
우리 하나하나가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은 하느님의 소망이자 우리 삶의 궁극 목표입니다. 누구나 한결같이 노력하면 하느님의 은총으로 훌륭한 사람이, 위인이, 성인이, 의인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세상에 온 보람이요 행복입니다.
누가 과연 이런 훌륭한 사람일까요? 재산이, 학식이 많아서, 지위가 높고 인물이 좋아서가 아니라 참으로 무사한, 깨끗한, 초연한 이타적 아가페 하느님 사랑을 닮은 참 사랑의 사람이 진정 훌륭한 사람입니다.
‘훌륭하다’가 순 우리말인줄 알고 찾아 봤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칭찬할 만큼 뛰어나고 대단하다는 뜻’으로 어원은 한자 ‘홀륜(囫圇;온전할 홀. 완전할 륜)’에서 나왔으며 홀륜은 이지러지거나 모자람이 없이 이루어진 완전한 모양의 덩어리라는 뜻이라합니다. 홀륜의 중국어 발음(hulun)이 변화한 것으로 봅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진정 훌륭한 사람이겠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주님이 알려주십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이 하나뿐입니다. 바로 이런 사람이 진정 참 사람이요 하늘 아버지의 자녀라 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위대한, 훌륭한 사랑은 이런 사랑입니다. 참 깊고도 깊은 순수한 사랑, 하느님을 닮은 아가페 사랑입니다. 잠시 어제 있었던 감동을 나누고 싶습니다. 이 또한 일종의 순수한 아가페 사랑입니다. 화투 비광에 담긴 뜻과 더불어 원장 수사가 이를 바탕한 합성 사진에 관한 내용입니다.
“화투 비광 그림의 위쪽 검은 것은 버들가지, 가운데 파란 것은 냇물, 왼쪽 아래 구석의 노란 것은 개구리입니다. 그리고 한가운데 있는 사람은 일본의 유명한 학자이자 서예가인 ‘오노노미치카제’입니다. 비광에는 숨은 이야기가 있다 합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심한 좌절상태에 빠져 있던 미치카제는 냇가를 거닐다 무심코 아래를 보니 개구리 한 마리가 불어난 물에 쓸려가지 않으려고 늘어져 있는 버들가지를 향해 온힘을 다해 점프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가지가 높아서 개구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버들가지를 잡을 수 없었습니다. 이를 보고 있던 미치카제는 코웃음을 쳤습니다.
‘어리석은 개구리 같으니라고, 노력할 걸 노력해야지...’
그런데 때마침 강한 바람이 불었고 버들가지는 개구리가 있는 쪽으로 휘어졌고 마침내 개구리는 버들가지를 붙잡고 냇가를 벗어나 올라갔습니다.”
이 모습을 보면서 미치카제는 큰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이또한 하느님의 구원하는 아가페 순수한 사랑을 상징하는 예화입니다. 개구리뿐 아니라 미치카제도 구원한 하느님의 아가페 사랑입니다. 바로 위 비광 그림의 예화와 더불어 제가 집무실 앞에서 찍은 사진을 비광과 합성된 사진을 원장수사가 보내준 것입니다. 제가 즉시 화답한 메시지입니다.
“멋집니다. 기발한 착상입니다. 길이 남을 작품입니다. 비광의 숨은 뜻도 감동적입니다. 개구리에게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진인사대천명의 자세를 배웁니다. 하느님 아가페 사랑은 결코 무심하지 않습니다. 참 감사합니다.”
이 기막힌 합성작품은 하두 정교한 작업이라 무려 2시간이 걸렸다니 이 또한 일종의 하느님 아가페 사랑의 표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바로 이런 하느님 아가페 순수한 사랑이 우리 궁극의 희망입니다. 우리를 감동케하고 우리 마음을 정화하고 성화합니다. 사실 이런 사랑을 발견하면 살 힘이 생깁니다. 바로 오늘 복음이 하느님 아가페 사랑의 절정을 참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대로 우리 모두 아가페 사랑을 실천하라는 주님의 간곡한 권고입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대자대비, 공평무사한 하늘 아버지께서 차별없는 무상無償의 사랑을 끊임없이 쏟아 주시기에 이렇게 살 수 있는 우리들입니다. 다섯의 대당명제(1.화해하여라, 2.극기하여라, 3.아내를 버려서는 안된다, 4.정직하여라, 5.폭력을 포기하여라)에 이어 마지막 결론같은 ‘5.원수를 사랑하라’는 결론같은 대당명제입니다.
바로 이것이 율사와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는 유일한 처방입니다. 비상하거나 특별한 사랑이 아닌, 차별이나 무시가 없는 인간 모두에 대한 존중과 연민의 아가페 사랑입니다. 삶은 은총의 선물이자 평생과제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에게 하느님의 유일한 소망이자 우리 삶의 궁극 과제를 부여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래야 이지러지거나 모자람이 없는 참으로 훌륭한 사람입니다. 대자대비, 공평무사한 아가페 사랑을 실천하면서 하늘 아버지를 닮아갈 때 비로소 참 사람의 실현이자 완성입니다. 세상에 온 보람이자 참 행복에 이르는 유일한 길입니다. 바로 이의 하느님 아가페 사랑의 영원한 롤모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님이십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이야 말로 아가페 사랑의 샘입니다.
바로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에게 격찬 받는 ‘환난의 큰 시련속에서도 기쁨이 충만하여, 극심한 가난을 겪으면서도 아주 후한 인심을 베푼’ 마케도니아 교회 신자들이 이런 아가페 사랑의 본보기입니다. 마지막 바오로의 말씀이 참 멋지고 은혜롭습니다.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우리는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
새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님이야말로 역설적으로 ‘텅빈 가난의 충만한 샘’이요, 마르지 않는, 끊임없이 샘솟는 하느님 아가페 ‘사랑의 샘’임을 깨닫습니다. 아가페 사랑의 샘터인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하느님 아가페 사랑으로 영적 갈증을 완전 해갈하는 우리들입니다. 이런 아가페 순수한 사랑은 베네딕도 규칙의 절정인 참 아름다운 제72장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서로 존경하기를 먼저하고, 육체나 품행상의 약점들을 지극한 인내로 참아 견디며, 서로 다투어 순종하고, 아무도 자신에게 이롭다고 생각되는 것을 따르지 말고 오히려 남에게 이롭다고 생각하는 것을 따를 것이며, 형제적 사랑을 깨끗이 드러내고, 하느님을 사랑하여 두려워할 것이며, 자기 아빠스를 진실하고 겸손한 애덕으로 사랑하고, 그리스도보다 아무것도 더 낫게 여기지 말 것이니, 그분은 우리를 다 함께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할 것이다.”(성규72,4-12)
마음만 먹고 한결같이 노력하면 하느님의 은총으로 우리 모두 훌륭한, 아가페 사랑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싫든 좋든 상관없이 상대방을 인격적으로 존중하고 연민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사실 잘 들여다 보면 예외없이 고단하게 살아가는 불쌍한, 가엾은, 측은한 사람들입니다. 모두가 아가페 사랑에 목말라 하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이런 아가페 사랑의 실천에 항구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끊임없는 하느님 찬양과 감사의 기도와 삶에서 샘솟는 아가페 사랑입니다.
“내 영혼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내 한평생, 나는 주님을 찬양하리라. 사는 동안, 나의 하느님 찬송하리라. 행복하여라, 예수님의 하느님을 구원자로 모시고, 주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이!”(시편146,1ㄴ.2.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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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15.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아버지를 닮는 길을 알려 주십니다.
"원수를 사랑하여라. ...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
예수님께서 본능이나 감정만으로는 실천하기 어려운 요구를 하십니다. 구약 시대에는 원수에 대한 복수나 박해자에 대한 저주가 율법이나 관습으로 용인 내지는 묵인되어 왔으니 예수님의 이 가르침은 상당히 큰 도전이 될 것입니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마태 5,46)
아버지는 선인도 악인도, 의인도 불의한 이도 가리지 않고 해와 비를 보여 주십니다. 그분께는 누구도 제외되지 않지요. 그분의 사랑이 반응의 일환이거나 대가성 응답이 아닌 까닭입니다. 그분 사랑은 계산하지 않고 기대하지 않는 순수의 사랑입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완전함입니다. 완전한 사랑은 예외를 두지 않습니다. 자기 사랑에서 누구도 소외시키지 않지요. 모든 사랑은 아버지의 이 완전함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사랑이라 부르면서 그 사랑을 닮지 않았다면 자기 욕정의 만족을 위한 거래일 공산이 큽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모금을 독려합니다.
"그들은 힘이 닿는 대로, 아니 그 이상으로 기꺼이 내놓았습니다."(2코린 8,3)
사도는 마케도니아 교회에 베푸신 하느님의 은총을 이야기하면서, 그들이 환난과 시련과 극심한 가난 속에서도 기쁨이 충만하여 후한 인심을 베풀었다고 전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이 무언가를 많이 받고 누리는 부유함보다, 오히려 베풀고 나눌 수 있는 비움의 덕으로 증명된다는 것을 배웁니다.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여러분이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2코린8,9)
예수님께서 우리의 가난을 떠안으시고 우리를 충만하게 하셨습니다. 그분이 죄인의 자리에서 모든 불의를 떠안으시면서 우리를 의롭게 해 주신 교환의 신비가 가장 큰 구원의 선물, 곧 은총이지요.
죄인일 수 없는 분이 죄인이 되시고 의로울 수 없는 우리가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 가난하실 수 없는 분이 가난하게 되시고 부유할 수 없는 우리가 부유하게 된 신비가 바로 은총입니다.
이 은총은 "우리"라는 울타리, "형제"의 경계를 넓히게 해 줍니다. 우리의 부유함이 예수님께서 가난하게 되신 대가이니 그분 마음이 아파하시는 이들과 나누는 것이 마땅합니다. 은총으로 받은 모든 것은 원래 주님의 것이었으니까요.
가난으로 고통받는 예루살렘 성도들을 위해 어려움 중에서도 팔을 걷어부치고 손을 내밀게 만드는 사랑은 나와 너, 우리와 너희, 형제와 원수, 이웃과 이방인의 경계를 허무는 데서 시작합니다. 모든 인간, 모든 피조물이 완전하신 아버지의 한 자녀이고 한 형제라는 의식에서 출발된 사랑은 차츰 확장되어 원수에게까지, 박해자에게까지 가닿을 수 있습니다. 원수, 박해자에게서 시작하려면 한없이 어렵지만, 모두가 "우리"라는 의식에서 시작하면 사랑도 가능하지요.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떠오르는 사람 있을 수 있습니다. 특정인일 수도 있고 어떤 부류의 소수자나 집단일 수도 있지요. 내가 형제와 이웃의 담정 밖으로 밀어낸 이들, "우리" 안에 끼워주길 꺼리는 이들은 철천지 원수부터 나와 다른 이들까지 다양할 겁니다.
혹 그런 이들이 떠오른다면, 아주 조금씩 마음의 울타리를 넓히려는 결심부터 시작하는 것이 오늘의 말씀을 실천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노력이 내가 은총을 받은 사람이라는 증거이고, 그러다보면 원수도 박해자도 제외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아버지의 완전함을 닮아가려 오늘도 서툴고 미숙한 사랑의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그 과정에서 바친 인내와 희생이 은총의 열매로 영롱히 맺힐 것이니, 힘내십시오.
▶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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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15.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이병우 루카 신부님.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5,44)
우리가 주님이시라고 고백하고 있는 또 그렇게 믿고 있는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우리에게 살아내기 힘든 말씀을 하십니다.
사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과 수도자의 길과 사제의 길을 걸어간다는 것은 그 자체가 힘든 길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로 동화되어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동화되어야 하는 것은 예수님처럼 너를 위해 죽는 것입니다. 이 죽음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율법의 완성이요 율법의 본질인 사랑입니다.
마지막 힘듬인 너를 위해 죽는 바로 그 전 단계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원수 사랑과 박해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는 원수 사랑과 박해자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그만큼 힘들고 어려운 일이라는 의미입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루카23,34)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을 위해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 몸소 원수를 사랑하셨고, 당신을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때문에 원수 사랑과 박해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고, 해야만 하는 구원의 일입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5,48)
완전한 사람, 완덕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이 완덕의 산을 오르려면, 원수 사랑과 박해자를 위해 기도해야 하는 큰 산을 반드시 넘어야 합니다.
오늘 수사님 한 분과 함께 설악산 대청봉에 오릅니다.
참으로 힘든 산인 원수 사랑과 박해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산을 기억하면서, 특히 우리를 위해 당신의 전부를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산을 기억하면서, 뚜뻑뚜뻑 대청봉을 향해 오르면서 땀 흘리겠습니다.
그리고 소리없이 매일 복음 묵상글을 통해 만나는 저의 영적인 벗님들도 기도 중에 기억하겠습니다.
오늘도 주님과 성모님 손잡고 화이팅 합시다!
이병우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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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15.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마태 5, 44)
모든 사랑의
바탕에는
하느님 사랑이
있다.
하느님 사랑을
통해
우리자신을
제대로
보게된다.
사랑은
부족한 서로를
채워주는
하느님의
뜻이다.
사랑이
우리를
구원(救援)한다.
구원으로
가는 길을
사람이 되어오신
예수님께서 몸소
가르쳐주신다.
참된 사랑은
자기
중심적이지
않다.
참된 사랑에
동참하는
그리스도인들이다.
괴롭고
힘든 것이
우리의
인간관계이다.
우리의
현실을
알기에
건강하고
평화로운
관계는
부대끼며
길을 찾는 것이다.
부족함과
한계를
인정하기에
하느님께
의탁한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미움의
지옥에 있는
우리자신을
먼저
보게 하신다.
미움의 지옥에서
벗어나는 길은
가장 중요한 것이
하느님 사랑임을
깨닫는 것이다.
살아있는
이 순간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
살아있지만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우리 삶에
참된 사랑을
부어주신다.
참된
사랑이다.
사랑을
잃지 않는 것이
복음이며
참된 생명이다.
하느님 사랑을
받아들이는
생명의 시간이다.
사랑이
사랑을
치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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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15.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전삼용 요셉 시ᅟᅢᆫ부님.
원수를 사랑하는 법 : 먼저 생존을 보장받아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사전작업으로 이웃을 판단하는 습관을 버리라고 하십니다. 이웃을 심판하게 되면 분별심이 생기고 그러면 선인과 악인에게 공평하게 대해주는 것은 불가능하게 됩니다.
마음 안에 판단이 일지 않아야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라고 하신 말씀을 실천할 수 있게 됩니다. 일단 판단하여 분별심이 생기면 선인과 악인을 똑같이 대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이웃을 분별하고 판단하는 마음이 왜 생기는 것일까요? ‘생존’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웃이 친구인지 적인지 분별하지 않으면 잡아먹힐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이런 두려움은 내가 ‘정글’ 속에서 살고 있음을 증명해줍니다. 정글에서는 자신의 힘으로 살아남아야 합니다. 그러나 정글은 항상 죽음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한 부인이 병원에서 아이를 낳고 집에 돌아왔는데 돌연 막연한 공포감이 엄습했습니다. 남편이 출근하고 나면 괜히 불안했습니다. 누가 문을 열고 들어오거나 창문을 열고 들어올 것만 같았습니다.
‘도대체 내가 왜 이러는 거지?’
퇴근한 남편에게 이런 말을 했더니 시큰둥한 반응이었습니다.
“아파트에서 무서울 게 뭐가 있어? 창문에 쇠창살까지 붙어 있고 아파트 입구에는 경비 아저씨까지 있어. 푹 쉬면 나을 거야.”
그러나 불안증은 갈수록 심해졌습니다. TV나 신문기사에서 안 좋은 것을 읽으면 그것이 자신에게 일어날 것만 같아 떨렸습니다. 상상에 상상이 더해지고 불안에 불안을 더했습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콜택시를 불러 아기와 함께 30분 거리의 친정으로 달려갔습니다. 집에 있던 어머니가 깜짝 놀라 말했습니다.
“너 왜 갓난아기를 안고 돌아다녀?”
그녀는 모든 게 무섭다는 이야기를 털어놓았습니다.
“그럴 수도 있지. 그래도 이렇게 나돌아다니면 못 써. 어서 돌아가.”
철석같이 믿었던 어머니마저 자신의 속마음을 헤아려주지 않자 더 절망에 빠졌습니다.
‘나를 이해해주고 보호해줄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어.’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던 중 강가에 내려 아기를 안고 강물로 뛰어들었습니다. 다행히 지나가던 한 시민의 도움으로 그녀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지만, 아기는 숨지고 말았습니다.
[참조: 『마음을 비우면 얻어지는 것들』, 김상운, 21세기 북스]
이 부인의 문제점은 무엇이었을까요? 자신이 자신과 아기의 생존을 책임질 수 있다고 믿었던 것에 있습니다.
그녀에게 세상은 정글입니다. 내가 아니면 나와 아기를 보호해 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더욱 모든 사람을 분별하게 되고 모든 사람이 자신을 잡아먹으려고 달려드는 원수가 될 수도 있습니다.
나에게 원수가 생기는 이유는 상대방이 무언가 잘못해서라기보다는 내가 나를 정글의 삶을 살도록 내버려 두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원수를 용서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정글은 정글입니다. 정글에서 원수가 생기지 않으려면 정글보다 강하게 나의 생존을 보존해 줄 대상을 찾아야 합니다. 그러면 원수가 생기지 않고 용서할 필요도 없어집니다.
아프리카에 간 어떤 사람이 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보았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향해 갑자기 소리쳤습니다.
“머리를 숙여라. 무릎을 꿇어라. 기어서 아빠에게 오너라. 이제 일어서라. 잘했다 아들아.”
그렇게 한 이유를 보니 아들이 오던 길 위의 나무에 독사가 있었던 것입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말에 그대로 따릅니다. 왜냐하면, 아들은 지금 정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보호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여기에서 아들은 무엇이 위험한지 분별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아버지가 해 주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로부터 보호받고 있다고 믿으면 독사는 그냥 독사일 뿐 원수가 아닙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믿어야 원수까지도 용서할 수 있게 되는 이유입니다. 율법은 인간의 힘으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통해 완성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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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15.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혼자만 멀찌감치 앞서가는 것이 아니라, 함께 걷고, 같이 먹고, 더불어 살아가는 ‘함께 영성’(Sinodality)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초대교회 시절은 성령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인해 은총 충만한 순간이었습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자신들의 두 눈으로 메시아 예수님을 직접 목격한 직제자들의 감동적인 증언을 들을 수 있었기에 더욱 그랬습니다.
그래서인지 그들은 혹독한 박해 앞에서도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고 당당했습니다. 가난과 추위, 배고픔과 역경 속에서도 늘 기뻐했습니다. 성령께서 함께 동행하지 않으셨으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도시대와 초기 교회 시대는 기적으로 충만했던 순간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직제자들과 그분의 부활 목격 증인들은 마치 스승님처럼 놀라운 기적을 행했습니다. 말씀 한 마디로 불치병 환자를 치유시켰으며, 이미 목숨이 끊이진 사람들까지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놀라운 기적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거듭되는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기쁨으로 충만했습니다. 극심한 가난을 겪으면서도 자신들보다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가진 바를 아낌없이 나누었습니다. 이러한 초기 교회 교우들의 모습이 첫번째 독서에 잘 소개되고 있습니다.
“환난의 큰 시련 속에서도 그들은 기쁨으로 충만하여, 극심한 가난을 겪으면서도 아주 후한 인심을 베풀었습니다.”(2코린토 8장 2절)
이토록 놀라운 기적의 원동력이자 배경은 스승이자 길잡이이신 예수님이었고, 그분이 공생활 기간 내내 취하셨더 고유한 노선이었습니다. 그 노선은 다름 아닌 하향성(下向性)의 노선, 아래로의 영성, 육화강생의 노선, 자기 낮춤의 길이었습니다.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여러분이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1코린토 8장 9절)
오늘 우리나라를 바라보니 참으로 대단한 나라, 대단한 민족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류역사상 전무후무한 급격한 경제성장를 초단기간에 이뤄냈습니다. 불과 5~60년전만 해도 너나할 것 없이 쫄쫄 굶고 다니던 최빈국이었는데, 이제 G7에 가장 근접한 나라로 성장했습니다.
참 좋은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압축 경제 성장 이면의 어두운 그늘, 부작용도 만만치 않습니다. 천박한 자본주의, 물질만능주의, 경제지상주의로 인해 차별받는 이웃들, 소외되는 이웃들, 죽어가는 이웃들이 부지기수입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초대교회 신자들이 목숨걸고 추구했던 공유 의식이 절실히 필요한 순간입니다. 너와 나 사이에 가로막혀 있는 높은 벽을 허무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혼자만 멀찌감치 앞서가는 것이 아니라, 함께 걷고, 같이 먹고, 더불어 살아가는 ‘함께 영성’이 요구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과거 우리 민족의 전통 문화의 많이 닮아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식사 시간때 누군가가 갑자기 찾아와도 아무렇지도 않은듯 환대했습니다. 자리를 좁혀 그를 식탁에 앉게 하고, 초스피드로 수저를 놓아주며 그를 끼워주었습니다.
식사 시간에 맞춰 깡통과 대문을 두드리는 걸인들을 위해 어머니들은 넉넉히 밥을 준비했습니다. 극심한 가난을 겪으면서도 아주 후한 인심을 베푼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간절한 목소리로 부르짖고 계시는 시노달리니(sinodality) 운동, 즉 ‘함께 걷기’ 운동이 점점 더 큰 메아리가 되어 전 세계에 울려퍼졌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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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15.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김 로마노 형제님.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제1독서 (2코린8,1~9)
"환난의 큰 시련 속에서도 그들은 기쁨이 충만하여, 극심한 가난을 겪으면서도
아주 후한 인심을 베풀었습니다. 나는 증언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힘이 닿는 대로, 아니 그 이상으로 기꺼이 내놓았습니다. 그러면서 성도들을 위한 구제 활동에 참여하는 특권을 달라고 우리에게 간곡히 청하였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그렇게까지 기대하지는 않았는데도, 먼저 주님께 자신을 바치고, 또 하느님의 뜻에 따라 우리에게도 자신을 바쳤습니다." (2-5)
코린토 후서 8장 2절은 당시 마케도니아 교회의 상황과 더불어 그들이 어려운 가운데서도 풍성한 헌금을 할수 있었던 이유를 언급한다. 마케도니아 교회는 환난의 큰 시련 속에서도 기쁨이 넘쳤고, 극심한 가난 속에서도 아주 후한 헌금을 했다.
실제로 필리피서 1장 29절, 30절이나 테살로니카 전서 1장 6절, 2장 14절, 3장 3절과 4절, 테살로니카 후서 1장 4-10절 등등에서는 마케도니아 교회들이 당한 환난의 많은 시련들이 거론되어 있다.
그들은 실제로 스스로도 감당하기 힘든 고난가운데 있었기에 다른 지역의 어려움에 관심을 가지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인 아주 후한 헌금을 한 것은 주목할 일이다.
그들은 결코 부유한 사람들이 아니었으며, 가난 역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지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환난과 가난을 자신들의 기쁨과 부요함을 드러내는 계기로 삼았다.
코린토 후서 8장 2절에서 '인심'으로 번역된 '하플로테토스'(haplotetos)는 'liberality', 'generosity' 로 번역되는데, '관대함', '헌금', '연보' 라는 뜻이다. 이것은 타인들을 향한 열린 마음과 관대함을 뜻한다.
코린토 후서 9장 11절과 13절에서도 이 표현이 '후한 인심', '관대함' 이란 뜻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을 감안할 때, 단연코 이런 의미를 나타낸다.
따라서 자신들이 겪고 있던 물질적 결핍에도 불구하고, 자신들보다 더 심한 결핍을 겪고 있었던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그들의 열린 마음과 관대함 그 자체가 구제활동을 자발적으로 하게 된 동기이며, 또한 그것이 그들 가운데에 하느님께서 은혜를 베푸신 중요한 표지라는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이러한 마케도니아 교인들의 태도는 "가난한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많은 사람을 부유하게 하고,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은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는자"(2코린6,10)의 모습을 지닌 바오로 사도의 삶의 태도와 동시에 자신이 가진 모든 소유를 내놓은 마르코 복음 12장 41절 이하의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하다.
'그들은 힘이 닿는 대로, 아니 그 이상으로 기꺼이 내놓았습니다'
진정한 관대함이란 넉넉한 소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가진 것이 별로 없는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참된 자선일 수 있다.
그런 차원에서 그리스도인의 자선의 가치는 결코 양이 아니라 희생의 기준에 의해서 축적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그러한 가난한 온갖 시련 가운데서도 관대한 사랑과 열정을 보인 마케도니아 교인들의 모습은 코린토 전서 16장 1-4절에서 사랑의 결핍이나 인색함을 보이는 코린토 교인들의 모습과 명백하게 대조가 된다.
마케도니아 교인들의 헌금의 특성은 두 가지로 나온다.
첫째로 그들은 '힘이 닿는 대로' 내놓았을 뿐 아니라 '그 이상으로' 내놓았다. '힘이 닿는 대로'(kata dynamin; 카타 뒤나민)란 표현은 일반적인 헌금의 기준이다.
즉 헌금은 외부의 강요나 남의 눈을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소득에 대한 고려와 함께 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돈을 남겨두고 드리는 것이 자연스럽고 일반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그 이상으로'(para dynamin; 파라 뒤나민; '힘에 지나도록')내놓았다는 말은 마케도니아 교인들이 자신들의 현재와 미래를 완전히 하느님의 손에 의탁하는 자세로 헌금했다는 것을 말한다(2코린12,9; 마태6,8.25-34; 필리4.19).
여기서 '이상으로' 번역된 전치사 '파라'(para)는 '~이상으로'(above), '~을 넘어서'(beyond)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마케도니아 교인들은 그들이 할 수 있는 '능력'(dynamis; 뒤나미스)의 범위를 초월하여 구제 헌금을 예루살렘 교회로 보냈던 것이다.
둘째로 마케도니아 교인들은 타율이나 강제가 아니라 '기꺼이' 헌금했다. 여기서 '그들은 ~기꺼이' 로 번역된 '아우타이레토이'(authairetoi)의 원형 '아우타이레토스'(authairetos)는 '자기 자신'을 뜻하는 인칭 대명사 '아우토스'(autos)와 '선택하다' 라는 뜻을 지닌 '하이레티조'(hairetizo)의 합성어에서 파생된 형용사로서 '자기가 원한', '자발적인', '독자적인' 이라는 뜻을 가진다.
이것은 바오로 사도가 마케도니아 교회들의 궁핍하고 어려운 사정을 고려해서 일부러 헌금을 부탁하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참으로 놀라운 헌금 태도인 것이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들이 이러한 구제 활동 계획에 참여하기를 '간곡히 청했다'는 사실에 있다(2코린8,4).
'우리에게 간곡히 청하였습니다'
원문의 '메타 플레스 파라클레세오스'(meta polles parakleseos)를 '간곡히' 라고 번역했는데, 여기서 '폴레스'(polles; 심히, 너무도; much)가 포함되어 있어 헌금을 하겠다는 그들의 간청이 얼마나 강렬했는지를 드러내준다.
마케도니아 교인들은 예루살렘 성도들을 위해 헌금하는 것을 하나의 '특권' (karin; 카린; gift; 선물, 은혜) 으로 생각했으며, 성도가 누릴 수 있는 그 영광스러운 특권에 자신들도 동참할 수 있는 영광을 달라고 구했던 것이다.
또한 '청하였습니다'로 번역된 '데오메노이'(deomenoi)는 '데오마이'(deomai)의 현재분사로서 마케도니아 교인들의 간청이 과거에 한번으로 끝난게 아니고 마치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것처럼 매우 진지하고 지속적이었다는 것을 드러낸다.
마케도니아 교인들은 클라디우스 황제 통치 때, 심한 기근과 유다인들로부터 혹독한 박해를 경험하고 있었던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사도11,27-30)에게 동병상련의 마음을 가지고 끈끈한 그리스도 안에서의 형제애를 보여주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코린토 후서 8장 5절은 그들의 예루살렘 교회를 향한 관대함의 특징이 헌금을 얼마나 많이 했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먼저 하느님께 완전히 헌신했다는 데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자신을 먼저 하느님께 온전히 드린 자는 하느님의 뜻을 알게 되고, 이로써 하느님의 일을 하는 봉사자들에게도 물질적인 후원을 할 수 있는 것이라는 말이다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사랑을 하라는 말씀은 사랑이신 분을 주어라는 말씀>
(마태5,43-48)
43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 어느 율법사가 예수님께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계명을 잘 안다고 말하자 ‘그렇게 해, 그럼 니가 살 것이다’ 하십니다.
(루가10,29.-30) 29 그 율법 교사는 자기가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예수님께,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때 착한 사마라아인 비유를 주신 후~“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로 율법사의 질문을 바꾸어 물으십니다. 비유 말씀을 보겠습니다.
30 예수님께서 응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 버렸다.
= 옷을 벗기고 초주검으로 만든 강도?
(잠언25,18) 이웃에게 해로운 거짓 증언을 하는 자는 방망이와 칼과 날카로운 화살과 같다. 고 묵상햇듯이~
=율법을 선억의 법으로 주어 진리의 옷을 벗기고 구원의 생명을 빼앗긴 그 죽음의 상태로 만들어 버린 그 율법의 가르침이 강도인 것입니다.(요한10,1참조)
그 율법의 법은 구원, 생명을 줄 수 없기에~ 율법자들은 그 강도만난 자를 피해 가버리는 것입니다.
(루가10,31.-36) 31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32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생명의 옷을 줄 수 있는 진리의 반대 쪽으로~~~
33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예수님의 마음)이 들었다. 34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상처에 기름(메시아)과 포도주(피)로 돌보아 주는 그리스도를 뜻하는 것.
35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36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 이웃, 하면 우리들은 먼저 율법사들처럼 내가 돌봐줘야 할 그 어떤 다른 이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너희가 도움을 받아야할 이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법의 신앙으로 진리의 옷, 구원의 생명을 빼앗긴 강도만난 자로~ 이땅에 사마리아인으로 오신 당신의 도움을 받아야할 너희가 이웃임을 알아 들으라고 하시는 말씀이지요.
44ㄱ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 사랑(아가페)을 주어라
(필리3,18) 내가 이미 여러분에게 자주 말하였고 지금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는데,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 예수님의 도움이신 십자가의 피, 그 구원의 진리를 믿지 않는 것, 예수님의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1열왕21,20) 아합 임금이 엘리야에게 말하였다. “이 내 원수! 또 나를 찾아왔소?” 엘리야가 대답하였다. “또 찾아왔습니다. 임금님이 자신을 팔면서까지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 나봇의 포도밭은 생명나무가 있는 에덴동산인 것, 그곳 하느님의 듯인 생명의 말씀을 자신의 뜻을 위해 듣는 것, 뺏는 것. 그렇게 자신들의 뜻을 위해 말씀을 듣고 기도하는 이들은 모두 아합이며 하느님의 원수인 것. 그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 아합과 같은 나, 그 웬수인 나(이웃)에게 그 죄인들의 죗값으로 죽으신 얘ㅖ수님의 십자가의 죽음, 그 아가페 사랑을 들려 주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면 사람들이 박해할 것이니~~
44ㄴ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 기도, 프로쉬콤마이(흘려주다) - 하느님의 진리의 말씀을 흘려주라는 것, 그들도 그 진리로 하늘의 생명을 받을 수 있도록~
45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 떠오르게,아나텔로스 - 아나(위) 텔로스(완성)
위에 발광체- 해(빛-예수)를 비추어 ~ 善인, 義인 그 모든이를 해, 말씀으로 완성하시는 것입니다.
(이사60,19) 해는 너에게 더 이상 낮을 밝히는 빛이 아니고 달도 밤의 광채로 너에게 비추지 않으리라. 주님께서 너에게 영원한 빛이 되어 주시고 너의 하느님께서 너의 영광이 되어 주시리라.
(말라3,20) 그러나 나의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움의 태양이 날개에 치유를 싣고 떠오르리니 너희는 외양간의 송아지들처럼 나와서 뛰놀리라.
46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 세리-(텔로네스) 완성(안식)을 값을 주고 사는 자 라는 뜻, 그것이 죄인 것.
47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 세리와 다른 민족들의 그들이 하는 일의 댓가인 償이 아닌 그리스도인이 받는 償, 福은 하느님의 생명을 받아 하늘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늘의 아버지처럼 되는 것, 그러니 나와 이웃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이죠.
48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 아버지처럼, 아버지(하느님의 성전) 하느님의 듯을 담아 그분의 성전이 되면 하늘의 아버지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
그릇보다 담긴 내용물이 참인 것처럼 하느님의 완전하심, 그것이 무엇인지도 우리는 모르지 않는가?
그분은 창조주시며 우리의 생명이신 진리이시라는 것밖에는~~ 아멘.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복음(마태5,43~48)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43~45ㄱ)
마태오 복음 5장 43절은 '그리고'라는 접속사를 두고 완전한 대칭을 이룬다.
즉 '사랑해야'와 '미워해야'가 대칭을 이루고, '네 이웃을'과 '네 원수는' 이 대칭을 이룬다.
문장 구조를 보면, '네 이웃을 사랑하는 것'과 '네 원수를 미워하는 것'이 같은 비중을 지니는 가르침이라는 뉘앙스를 준다.
하지만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가르침은 레위기 19장 18절에 나오지만,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표현은 모세 오경이나 예언서에 나오지 않는다.
따라서 후자는 성경의 가르침이라기 보다는 당시 유다인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던 보편적인 교훈이나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 시대에 유다인은 로마의 압제하에 있었고, 이민족과 반민족적인 동족들의 압제를 받고 있었기에, 이들을 공동의 적으로 생각하고 증오심을 갖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은 당시의 시대상을 지적하시며, 이웃 사랑의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고 계신 것이다.
마태오 복음 5장 44절의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에서 '사랑하여라'에 해당하는 '아가파테'(agapate; love)의 원형 '아가파오'(agapao)는 하느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나타낼 때도 사용된 단어로서, 자기 희생적인 순수한 사랑을 나타낸다.
사실 인간 본성적으로 생각하면 원수를 결코 사랑할 수 없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대상이 원수라 할지라도, 계산적인 사랑이 아니라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풀라고 요구하신다.
그런데 이런 사랑은 누가 베풀 수 있는가?
하느님 대전에 죄를 지어 사탄의 노예가 되어 하느님과 원수가 된 자신을 하느님 몸소 당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찾아오셔서 십자가상에서 못박혀 죽으시기까지 조건없이 사랑하셔서 자신의 죄를 대속하셨다는 그 사랑을 확신하고 체험한 자들이다.
그래서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성체와 말씀 앞에 아담과 하와의 이기적이고 본성적인 자아를 내려 놓았을 때, 비어진 우리 자신 안에서 하느님께서 이러한 원수 사랑을 실천하게 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에서 '기도하여라'에 해당하는 '프로슈케스테'(proseuchesthe; pray)의 원형 '프로슈코마이'(proseuchomai)는 '~을 위하여'라는 뜻의 전치사 '프로스'(pros)와 '기도하다', '원하다'는 뜻의 '유코마이'(euchomai)의 합성어로서 '~을 위하여 간구하다'는 뜻이다.
여기서는 현재 명령형으로 쓰여 지체하지 말고 계속해서 기도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렇게 원수에 대해서 소극적으로 참고 인내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기도하는 자세로 나아가는 영적 수준까지 이르러야, 완덕(完德)의 근원이시고 모범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고, 하느님의 속성을 본받는 것이 된다는 말씀이다.
마태오 복음 5장 45절(ㄱ)의 '너희 아버지의 자녀'에 해당하는 '휘오이 투 파트로스 휘몬'(hyoi tou patros hymon; the children of your Father)에서 '아버지의'로 번역된 '투 파트로스'(tou patros)는 소유격이다.
희랍어에서 소유격은 그 속성을 나타내는 경우가 있어서, 여기서 '아버지의 자녀'는 '아버지를 닮은 자녀', '아버지의 속성을 가진 자녀'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실로 우리가 천국 시민으로서 하느님의 자녀라고 불림받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속성을 본받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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