如如山房에서 보내는 편지 ⑩
양문규 시인이 서울생활을 청산하고 낙향한 지 10여 년, 옛 생각 껴안고 나지막하게 엎드려 천태산 여여산방에서 펼치는 마음의 풍경! 그는 스스로를 유폐시키고 오랜 울음을 갈무리해 꽃 한 송이, 돌멩이 하나, 그 작고 보잘것없는 초라한 물상들에 끊임없이 눈 맞추며, 공동체적 삶의 숨결을 읽어낸다. 지금 바로 여기, 여여(如如)와 같이 있는 그대로의 존재양식으로 어둠 속에서 빛을, 절망 속에서 희망을 맑은 시처럼 길어 올리고 있다.
천태산 옛길 따라 장선리를 가다
양문규
봄날은 소리로부터 찾아오나 봅니다. 천태산에도 경칩을 며칠 앞두고 개구리가 울기 시작하였지요. 어디 개구리 울음소리만 있었겠습니까. 산비둘기를 비롯한 날짐승과 들짐승이 자신의 존재를 소리로 스스로 보여주는 것이었는데요. 그 소리들은 마치 생명을 일깨우는 전령처럼 들렸습니다.
그러나 그 소리들은 잠시 잠깐 귓바퀴에 매달렸다가 이내 허공 속으로 사라지기 일쑤였습니다. 3월 들어서도 꽃샘추위 아닌 혹한이 계속되었기 때문입니다. 진눈깨비도 아닌 함박눈이 길을 막고 계곡의 물줄기를 도로 한겨울로 돌려놓을 때가 종종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한낮 햇살이 따사로울 때면 천태산 자락은 소리, 소리들로 천국을 이루었습니다.
지난겨울은 참으로 혹독하였습니다. 잦은 폭설로 산방으로 오르는 차도가 막혀 오리 길을 걸어 다녀야만 했고요. 설상가상으로 수돗물마저 꽝꽝 얼어붙어 겨울을 나는 하루하루가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습니다. 산짐승들마저도 몸을 숨겼던 지난겨울, 여여산방 앞 가시덤불 언덕과 마당에 자주 내려앉던 산꿩도 찾아 볼 수 없었지요. 눈이 내리면 눈이 온다고 은행나무 주변을 서성이며 문자를 날리고, 사진을 찍어 카페에 올리던 아름다운 풍경은 빛바랜 추억으로 자리한 지 오래입니다.
겨울 내내 ‘봄이 오면… 봄이 오면’을 하루에도 수십 번씩 되뇔 때가 많았습니다. 봄이 오면, 뭐 특별하게 좋은 일이 생길 것이란 믿음이 있어서가 아니었습니다. 따사로운 햇살 한 줌이 그리워서였지요. 그리고 “산꿩이 알을 품고/뻐꾸기 제철에 우는” 옛길을 따라 높은 장선리까지 걷고 싶었습니다.
저의 어머니 고향은 영동군 양산면 가선리입니다. 어릴 때 학산 새재에서 가선리까지 어머니와 함께 외갓집을 찾을 때가 종종 있었는데요. 집에서 외갓집까지는 족히 삼십 리 길입니다. 넘벌 지나 모랭이 돌고 돌아 강 따라 가다보면 소골이 나오고요. 거기서 한 마장쯤 가면 가선리가 나오는데요. 가선리는 산으로 꽉 막힌 우리 동네와는 완연히 달랐지요. 앞으로는 강물이 흐르고 뒤로는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산이 병풍처럼 둘러쳐 있었는데요. 철없는 나이지만 동네가 참 이쁘다는 생각을 했었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맛나게 먹을 수 있는 먹을거리가 많아 좋았는데요. 보도 먹도 못한 물 생선이 그것이었지요. 전 그때까지 물고기라야 미꾸라지 아니면 중태기만 있는 줄 알았지요. 그리고 반찬이라야 맨날 푸성귀가 고작이었니까요. 그랬으니 그 맛이 어떠하겠는지요. 전 외갓집을 다녀온 이후 시도때도없이 “엄마 언제 외갓집 가?” 묻고 또 묻고 했지요.
외갓집을 걸어서 다녀올 때면 어머니로부터 이런저런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 중에 가장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야기가 있었는데요, 가선리에 속한 장선리였지요. 제가 태어난 새재보다 고개가 더 높고 많다는 것과 마당 한가운데 큰 바위가 있고요. 심지어 부엌과 광에도 저보다 더 큰 바위가 수두룩하다는 거였어요. 어디 그뿐인지요. 밤에는 호랑이가 나와 밤마실은 물론 뒷간도 갈 수 없는 골짜기라 하였지요. 강을 건널 때는 뗏목을 이용했으며, 얼음이 얼면 가슴에 긴 장대를 끼고 강을 건너다녔다는데요. 얼음이 깨져 빠지면 얼음 위에 걸친 긴 장대를 잡고 강에서 빠져나오고 했다나요.
제가 초등학교 입학할 무렵 외가식구들은 대전으로 이사를 갔는데요. 그 이후 동화 속 나라 장선리는 저의 머릿속에서 오래도록 지워져 버렸습니다. 가끔 외할머니나 외삼촌이 와도 장선리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습니다. 외갓집을 갈 때는 삼십 리 걸어가는 가선리 대신 영동역에서 완행열차를 타고 대전을 갔지요. 열차 속에서 어머니는 내게 뭔 이야기를 들려주었는지 아무 기억도 나지 않는데요. 아마도 열차 타는 재미로 천방지축 노는 내 모습을 어머니는 그저 흐뭇하게 지켜보기만 했을 겁니다.
장선리를 다시 추억하는 계기가 있었는데요. 서울생활을 청산하고 낙향, 새재 농막과 천마산 중화사를 거쳐 천태산 영국사 뒷방에 기거할 때였지요. 서울에서의 얽히고설킨 복잡한 일로 마음에 큰 상처를 입고 가족과 헤어져 이곳저곳을 떠돌다 영국사 뒷방지기로 만 5년을 살게 되었는데요. 천 년 천태산 은행나무의 넓은 품속에서 마음의 상처를 갈무리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가끔 아름드리 은행나무를 떠나 남고개를 넘게 되었는데…, 그 끝자락이 장선리로 이어지는 길이었습니다.
마당 한가운데 너럭바위 있다
댓돌 위 검정 고무신 있다
마루 한쪽 맷돌 확독 있다
뒤뜰 크고 작은 독 있다
외양간 코뚜레한 소 있다
사랑채 흙벽 종다래끼 뒤웅박
키 호돌이 삼태기 있다
뒷간 똥장군 똥바가지 있다
정짓간 쇠솥 있다
조왕신 절구통 절굿공이 있다
헛간 벽 쇠스랑 갱이 갈쿠리 걸려 있다
도리깨 홀태,
족답식 탈곡기 있다
쟁기 지게에 얹혀 있다
닭장 닭둥우리 있다
개울 나무다리 놓여 있다
뒷산 서낭당 있다
상엿집 있다
천태산 남고개 너머
더 깊은 골짝
장선리
―양문규, 「장선리」, 『집으로 가는 길』(詩와에세이, 2005) 중에서
천태산 주차장에서 진주폭포를 따라가다가 남고개를 지나 장선리로 가는 옛길은 천혜의 자연 경관을 자랑합니다. 뿐만 아니라 수생동물을 비롯 들짐승과 날짐승이 자유로이 생을 즐기며 살아가는 곳이기도 하지요. 이 길은 등산객이 찾는 길이 아니라 누교리, 명덕리, 가선리 주민들이 산나물을 뜯고 땔 나무를 해 나르던 뜨거운 삶의 길이요, 장선리 학생들이 남고개를 넘어 진주폭포를 지나 천태 분교를 다니던 배움의 길이기도 하지요. 천태산 등산을 위해 등산꾼들이 인위로 낸 길이 아니라 삶을 지혜롭게 살기 위한 자연의 길이요, 소통의 길인 셈입니다.
지난 4월 24일 천태산 은행나무를 사랑하는 사람들(대표 양문규)은 문화재청 2011년 문화재 생생사업의 일환으로 ‘천태산 옛길 걷기 및 망탑봉3층석탑 등 영국사 일원 문화재 생생체험’을 하였습니다. 이날 시에문학회 전국 문인 및 영동군민, 천태산을 찾는 내방객 등은 함께 천태산 옛길을 걸었는데요. 영동군 문화관광해설사(정경홍)로부터 장선리 학생들의 등굣길, 천태산 범바위 전설 등을 들었지요. 그리고 진주폭포에 이르러 누교리 이장(여병연)으로부터 주민들의 삶터로서의 옛길에 대한 애환도 함께 들을 수 있었습니다. 특히 범바위 전설을 들을 때에는 눈시울이 저절로 붉어졌습니다.
장선리 어린 학생들이 수업을 파하고 집으로 돌아갈 때는 부모들이 남고개까지 마중을 나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가을, 어린 학생들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수업을 마치고 삼삼오오 모여 집으로 가는 중 진주폭포 아래 모여 놀고 있는데 한 아이가 오줌을 싸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후들후들 떨고 있지 않았겠어요. 고개를 쳐들고 언덕 위를 바라보니 누렁이만한 호랑이가 아가리를 떡 벌린 채 금방이라도 집어 삼킬 자세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더랍니다. 그날 이후 학생을 둔 부모들은 남고개에서 반 마장 더 내려와 진주폭포에서 기다렸다가 아이들을 데리고 집으로 갔다고 합니다.
진주폭포를 지나 우리 일행은 망탑봉3층석탑(보물 제535호)으로 아쉽게 발길을 돌려야 했는데요. 천태산 옛길인 진주폭포에서 남고개까지 산불과 자연보호를 위해 영국사가 폐쇄했기 때문입니다. 망탑봉3층석탑을 지나 영국사 은행나무(천연기념물 제223호) 등의 문화재 생생체험을 마치고 오후 1시가 넘어 여여산방에서 준비한 국수로 아쉬움을 감추어야 했습니다.
제가 처음 천태산 옛길 진주폭포부터 남고개를 넘어 장선리로 이어지는 길을 걷게 된 것은 당시 영국사 주지 스님 도반인 원묵 스님과 함께였습니다. 원묵 스님은 선방 수좌로 하안거와 동안거가 끝나면 제가 쓰던 옆방에서 결제일까지 참선과 만행을 하였는데요. 만행 때면 스님과 함께 천태산 등산로가 아닌 옛길을 따라 걸었지요. 높은 장선리로 이어지는 금강이 환히 내려다보이는 곳까지 걸어갔다 오게 되었는데요. 우리는 계곡의 가재, 소금쟁이, 물방개, 중태기 등 곳곳 바라보며 길을 가는 동안 행복했지요. 또한 참다람쥐, 토끼, 산꿩과 너구리, 노루가 우리가 걷는 길을 자유로이 노닐고 있었는데, 그때 그들이나 우리가 놀래기는 마찬가지였지요. 그러나 서로가 서로의 마음을 나누기라도 한 것처럼 들짐승과 날짐승들은 숲에 몸을 숨겼다가도 이내 또르르 우리 앞을 유유히 날거나 종종걸음으로 지나가곤 했지요.
원묵 스님이 전주에 있는 작은 절에 소임을 맡아 떠나게 되면서부터 홀로 천태산 옛길을 따라 걷게 되었는데요. 하루는 큰맘 먹고 장선리까지 한걸음에 달려갔지요. 코흘리개 시절 어머니로부터 들었던 그 높은 장선리, 마당에 큰 바위가 덩그러니 놓여 있고 부엌과 광에도 큰 돌이 박혀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어릴 때 보았던 농기구들이 집안 구석구석 박혀 있었는데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장선리, 그 장선리에 내가 서 있다는 게 눈물겨웠습니다. 큰 장선리를 지나 아래 장선리에 이르렀을 때는 숨이 멎을 듯했습니다. 세상과 함께 하면서도 결코 세상에 속하지 않은 곳이 바로 장선리였습니다.
‘너럭바위, 댓돌, 맷돌, 확독, 종다래끼, 뒤웅박, 호돌이, 삼태기, 똥장군, 똥바가지, 절구통 , 쇠스랑, 갈쿠리, 도리깨, 홀태, 족답식 탈곡기, 닭둥우리’ 등 민속촌에서나 볼 수 있는 농기구와 살림 도구들이 집안 구석구석 자리 잡고 있는 게 아니겠어요. ‘서낭당, 상엿집’ 등 도시 한복판에서 찾아 볼 수 없는 진풍경이 저를 꼬마시절 새재로 데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날 이후 가까운 벗들이 저를 찾아올 때면 자연스레 천태산 남고개 너머 깊은 장선리를 찾아가지요.
봄이 오면, 봄이 오면 장선리에 가보고 싶었습니다. 지난겨울 그들은 어떻게 겨울을 났을까 궁금하기보다도 봄을 어떻게 즐기고 있을까가 더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저처럼 봄날 잠 못 이루며 “밤새 무반주로 물소리 게워내는 논배미 개구리//날갯짓도 없이 까만 눈으로 별빛 찍어내는 동구나무 소쩍새//벌어진 입 다물지 못하고 뭉클뭉클 지도를 펼치는 뜰팡 너구리//복사꽃 바닥 칠 때까지 옛길 휘감는 당산나무 부헝이//머루 다래 칡 줄줄이 잎으로 기는 물컹하고 비린 산허리 노루//빽빽한 숲 속 진눈깨비처럼 날아다니는 히히 호오 쓰이쓰이 호랑지빠귀//중략//저 소리 소리들, 귓바퀴에 매달린 봄밤”(양문규, 「봄밤」 전문)을 즐기고 있을 것 같아서였지요.
우리 사회는 언제부터인지 자연적인 길보다 인위적인 길을 우선시하고 있습니다. 통행에 아무런 불편이 없는 길, 차량 통행이 뜸한 길 등을 확장하고 포장하면서 직선의 길로 만드는 건 예사이고요. 심지어 강가의 숲을 파헤쳐 자전거 길을 내고, 하천을 포장하여 주차장을 만들뿐만 아니라 본래 없던 길을 올레길이라 만들어 산림을 훼손하는 지자체가 해마다 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연, 생태, 환경의 위기’를 부르짖는 게 오늘의 슬픈 현실입니다.
인간과 자연은 본래 한 울타리 안에 한 몸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뭇 생명들이 함께 넘나드는 길, 자연 속에 인간의 길이 있고, 인간의 길에 자연이 나란히 놓여있습니다. 그래서 자연의 신음이 내 몸의 고통이며 자연의 푸르름이 인간을 꽃 피우는 것이지요. 자연과 인간이 한 몸임을 자각할 때 비로소 우리는 살아 있는 존재로 걸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이 인간이게끔, 자연이 자연이게끔 하는 길, 나무와 풀, 들짐승과 날짐승, 인간이 한 생명을 이루는 공생의 길, 천태산 옛길이 바로 그런 길입니다.
─『시에』 2011년 여름호
양문규
충북 영동 출생. 1989년 『한국문학』으로 등단. 시집 『벙어리 연가』, 『영국사에는 범종이 없다』, 『집으로 가는 길』, 『식량주의자』. 논저 『백석 시의 창작방법 연구』. 평론집 『풍요로운 언어의 내력』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