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조아 민족주의자’ 유길준 집안 2
『친일인명사전』에 다섯쪽 반에 걸친 반민족행위자로 적바림될 만큼 두 팔 걷어부치고 친왜활동을 한 일급친왜파 유진오 삶에서 ‘하이라이트’를 이루는 것은 1956년 리용재(李容載,1922~2009) 씨와 한 세번째 혼인일 것이다.
리용재는 유명한 ‘리명래고약’을 일으킨 리명래(李明來,1880~1952) 막내딸로 고리대의대 앞몸인 경성여의전을 마
치고 소아과의사로 있다가 1956년 종로 관철동에 〈명래제약〉을 세워 리명래고약을 대량생산한 사업가였다. 유진오를 문학인으로 본다면 ‘문경유착’이고, 법률가로 본다면 ‘법경유착’이며, 정치가로 본다면 ‘정경유착’인 셈이다.
‘친왜기수’로 사람들 눈쌀을 찌푸리게 하던 유진오가 다시 사람들 입을 벌어지게 한 것은 1979년 12·12 군사반란이 일어나면서 신군부가 세운 국토통일원 고문이 되고, 1980년 전두환이 만든 국정자문회의 위원이 되어, 1983년 5월 29일 신군부가 세운 들러리 야당인 민주한국당 류치송(柳致松)총재·김수환(金壽煥)추기경과 함께 김영삼(金泳三) 단식투쟁을 말렸던 일이다.
15년동안 고리대학교 총장을 하다가 1967년 민중당 대통령 후보로 영입되면서 정계로 들어와 통합야당인 신민당 총재가 되어 오카모토 미노루 군사정권에 앙버티는20) 민주화투사 그림자그림21) 을 쓰게 되면서 친왜전력을 눈감은 인민과 청년학생들한테 우러름을 받기도 하였으나, 삼년구미(三年狗尾) 불위황모(不爲黃毛)였다. 「개 꼬리 삼년 묻어도 황모되지 않는다. 오그라진 개꼬리 대봉통에 삼년 두어도 아니 펴진다」는 속담은 유진오같은 불치들한테 딱 들어맞는 것이었다. 개꼬리를 아무리 오래 두어도 황모가 되지 않는다는 말로 본디부터 타고난 성질이 좋지않은 것은 언제까지 가도 좋은 성질로 바뀌지 않는다는 말이다.
1987년 유진오가 노환으로 눈을 감았을 때였다. 고리대학교에서 전직 총장에 대한 대접으로 고리대학교장으로 걸판지게 치뤄주었는데, ‘NL계열’에서 휘어잡고 있던 총학생회가 장례식장에서 붙박아 버티며 했던 말이다.
“민족고대가 변절자 장례식을 치뤄주는 것은 수치다!”
유진오 이야기를 하다보니 떠오르는 그림이 있는데, 그 외손자이다. 한홍구韓洪九라는 이로 우리나라 피어린 현대사를 바라보는 올바른 눈길로 높은 꼲아매김을 받는 학자이다. 친왜떼들한테는 그야말로 저승사자인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자기 외할아버지가 저질렀던 반민족행위에 눈을 감고 있다는 점이다. 구린입도 떼지 않는다.
도움거리 삼아 말하는데 한홍구 아버지 한만년韓萬年은 〈일조각一潮閣〉이라는 유명짜한 출판사를 했고, 할아버지 한기악韓基岳은 〈조선일보〉 기자였다. 뼈대있는 항왜언론인으로 기려지는 한기악인데 이정而丁과 단야丹冶와 죽산竹山 같은 사나운 사회주의 힘센장수 빼놓고 그때 신문기자는 그야말로 ‘특권층’이었다. 늴니리 지화자로 온갖 따논자리 누리며 죽지 못해 살아가는 인민대중 위에서 독판치던 아주 작은 ‘기득권층’이었다는 진짜만 알아두자. 왜인들이 ‘제1계급’이었다면 신문기자는 ‘제2계급’이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왜제 서울 동경에서 일류대학 나오고 경성제국대학과 연희전문·보성전문 나와서 머리 좋고 똑똑하다는 젊은이들이 기를 쓰고 들어가고자 했던 것이 신문사였던 것이다.
유진오와 한 항렬 기계유씨 길카리22) 로 유진오(俞鎭五,1922~1950)라는 시인이 있었다.
해방이 되면서 전배 시인 오장환(吳章煥,1918~1950)이 밀어줘서 시단에 나온 유진오가 10만이 넘는 사람들 앞에서 ‘마이크’를 잡은 것은 해방 다음 해인 1946년이었다. 9월 1일 「국제청년데이」. 조선음악가동맹원들이 모뽀리23) 하는 「적기가(赤旗歌)」며 「해방의 노래」 다음 연단에 올라간 25살짜리 젊고 잘생긴 청년이 읊어대는 〈누구를 위한 벅차는 우리의 젊음이냐?〉라는 시는 10만이 넘는 서울시민들 피를 끓어오르게 하는 것이었다.
미군정 포고령 위반죄로 아홉달만에 때24) 에서 나온 유진오는 「싸우는 감옥」이라는 옥중투쟁기를 선보이고, 문학가동맹에서 얽은 「문화공작대」 제1대에 들어 경상남도 바닥을 돌며 ‘문화’에 목마른 인민대중을 일깨우고 어루만짐으로써 더욱 드레진25) 항쟁시인 모습을 보여준다.
유진오가 문화공작대원으로 서울을 떠난 것은 1949년 2월 27일 아침이었다. 눈보라 휘몰아치는 첩첩산중을 가리산지리산하던26) 며칠만에야 간신히 김지회(金智會)부대 만나 같이 간 영화가동맹원 홍순석(洪淳錫29)이 갖고 간 영사기는 전기를 일으킬 연모가 없어 못돌리고, 음악가동맹원 유호진(劉浩鎭21)이 부는 하모니카와 「싸우다 쓰러진 용사」라는 시 한닢 읊조리고 지리큰뫼 내려온 유진오가 전라북도 남원 어느 마을에서 자경단원한테 붙잡힌 것은 3월 29일이었다.
남조선로동당 문화부장 김태준(金台俊,1905~1949), 여순항쟁 목대잡이27) 김지회(金智會) 정인 조경순(趙庚順21)과 함께 사형선고 받은 유진오가 법정을 나섰을 때였다. 형무소로 싣고 갈 트럭을 타야 되는데 두 손목에 수갑이 채워진 조경순이 트럭에 잘 오르지 못해 버둥거릴 때 뒤에서 수갑찬 손으로 궁둥이 받쳐 올려주는 유진오한테 고개 돌려 살푸슴28) 하는 조경순이었다. 사형선고 받을 때 재판장과 유진오가 주고받았다는 말이다.
재판관: 대한민국과 인민공화국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유진오: 전 민족의 염원인 자주독립국가를 열망할 따름이다.
재판관: 그렇다면 그것은 무슨 나라냐?
유진오: 역시 인민공화국이다.
재판관: 현재의 심정은?
유진오: 양심적인 문학인으로 살고 싶다.
6·25가 터지면서 서울에 있는 형무소에 있던 좌익수는 ‘해방’되었고 지방 형무소에 있던 좌익수는 ‘학살’되었다. 유진오 어머니가 집안에 있던 금붙이를 모조리 쓸어모아 구명운동을 한 끝에 무기로 감형된 유진오는 서대문형무소에서 전주형무소로 옮겨진다. 넘쳐나는 좌익수들이어서 태어나 자란곳 따라 옮겨 가두게 된 것이었는데, 그것이 유진오 살매를 갈랐다. 유진오가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어머니가 동명이인으로 종씨되는 유진오를 찾아가 ‘진정서’를 써줄 것을 비대발괄29) 했던 적이 있다. 한마디로 자빡놓은30) 유진오가 해준 것은 가져간 진정서에서 잘못된 글자나 고쳐주는 것이었다.
어린아이를 업은 ‘몹시 귀티나는 부인’이었던 서울 혜화국민학교 교사였던 새각시와 늙은 어머니가 전주 변두리를 샅샅이 뒤졌으나 유진오 주검은 찾을 수가 없었다. 사상범전문 수용소였던 대전형무소만이 아니라 충북, 경북, 전북, 그리고 춘천형무소에 있던 좌익쪽 수감자들까지 충청남도 대덕군 산내면 랑월리 뼈잿골에 끌어다 마구 죽여버렸다는 것을 알 속절이 없었던 것이니, 그때가 1950년 7월 첫무렵이었다. 향수 29. 이로써 이 중생 아버지(1917~1950)와 리관술(李寬述,1902~1950) 선생과 유진오시인은 저승길 동무가 되신다.
기계유씨 윗대에 빼어난 사람이 있었다. 계유정란(癸酉靖亂) 쿠데타 일으킨 수양대군(首陽大君)을 죽이고 단종(端宗)을 다시 세우려던 사육신(死六臣) 가운데 한 분인 유응부(兪應孚, ?~1456) 장군이시다. 중국사신 맞이 모꼬지31) 에 수양 아들이 나오지 않고 한명회(韓明澮) 잔뇌굴림으로 수양 뒤에 운검(雲劒, 2품 위 무관이 칼을 차고 임금 곁에서 지키던 한때 벼슬)을 세우지 않도록 했다는 것을 알게 된 유응부가 말하였다.
“이런 일은 빨리 할수록 좋은데 만약 늦춘다면 누설될까 염려가 되오. 지금 세자는 비록 여기에 오지 않았지만 수양 우익(羽翼: 곁부축하는 신하)이 모두가 이곳에 있으니 오늘 이들을 모두 죽이고 단종을 뫼시고서 호령한다면 천재일시(千載一時)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니 이런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될 것이오.”
성삼문(成三問)과 박팽년(朴彭年)이 굳이 말려서 마침내 그만두게 되고, 동패32) 였던 김 질(金礩) 등돌림33) 으로 족대기질34) 받게 되었을 때였다. 살가죽이 벗겨지는 끔찍한 족대기질로 달군 쇠가 배밑을 지질 때 식은 쇠를 집어 땅에 던지며 소리쳤다.
“이 쇠가 식었으니 다시 달구어 오라!”
그는 효성이 지극해서 집이 가난하였으나 어머니를 봉양하는 채비에는 모자람이 없었으며, 세속살이는 더없이 깨끗해서 벼슬이 재상급인 2품 관직에 있으면서도 거적자리로 방문을 가리웠고 고기 없는 밥을 먹었으며, 때로는 양식이 떨어지기도 하니 처자가 이를 한가하고35) 있었는데, 그가 죽던 날에는 그 안해36) 가 울면서 길가는 사람한테 말하기를 “살아서도 남한테 기댐이 없었는데 죽을 때는 큰 화를 입었구나.”고 하였다. 유응부가 목이 잘릴 때 했다는 말이다.
“뇌만 굴리는 먹물들과 일을 도모한 내가 어리석은 자였구나.”
키가 남보다 크고 얼굴 생김새는 무겁고 조용하였으며 씩씩하고 기운차서 활을 잘 쐈으므로 세종과 문종이 모두 고임주고37) 아꼈던 그가 쓴 어씁한38) 시조 한닢39) 이다. 싸움말40) 잡아타고 만주벌판 달려가고픈 무장 서슬이 눈에 밟히는 듯하다.
“좋은 말 오천필은 버들 아래 울고
가을새매 삼백마리는 누 앞에 남았네” (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