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치아
고대부터 베네티아 해안가의 석호지대에 어부들이 살았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오늘날의 베네치아 인들이 훈족의 아틸라 침공을 피해 베네치아 맞은편의 소택지에서 피난생활로 자리를 잡기 시작한 것은 5세기 중엽이며, 6세기 중엽에는 롬바르드족이 침입하여 아드리아해 연안까지 몰려오자, 로마인들이 물에 취약한 그들을 피해 석호(潟湖; 사주의 발달로 해안의 만이 바다로부터 떨어져 생긴 호수) 근처의 갯벌 지대로 도망가, 잘 썩지 않는 삼나무 기둥을 바닷가 진흙에 박았다. 나무는 잘 뒤틀리고, 부식하지만 물속에 박아져 공기와의 접촉이 차단되면 곰팡이나 벌레가 끼지 않고 썩지 않아, 이 말뚝 위에 기단을 세우고 그 위에 벽돌을 쌓아 도시를 형성하였다.
이렇게 세운 기둥 위에 집을 지어 마을을 형성된 6세기 말에는 리알토섬을 중심으로 한 열두 개의 섬에 마을이 형성되었고, 118개의 섬이 409개의 다리로 연결되어 있는 수상 도시가 되었다. 이처럼 물 위에 건설된 도시라 농지가 없으니 영주도 있을 수 없었고 로마 패망 후에 생긴 도시라 고대 로마의 유적이 전혀 없고, 교황청과도 소원하여 도시 전체가 파문을 당하기도 했지만 그들은 교황을 별로 중시하지 않았다.
베네치안이라 불린 원주민인 베네티족(族)은 섬 주변의 풍부한 고기를 잡는 어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소비하고 남은 고기는 천일염으로 염장시켜 각지를 돌며 소금과 함께 비단과 융단, 보석과 교환했다. 이렇게 물물교환 된 물건을 사러 유럽 각지에서 원매자들이 베네치아로 몰려들자, 베네치아에는 유럽에서 가장 큰 시장이 형성되었고 점점 부유해진 그들은 운하 주위에 성을 짓고, 중앙상임통치위원회가 결성된 568년부터 새로운 항구들이 건설되면서 말라모코는 지역의 중심지가 되어갔다.
7세기에 베네치아는 비잔틴 제국 의 지배하로 편입되고, 해상무역 의 중심지로 도시국가 행태를 갖 추기 시작했다. 조선산업이 활성 화되면서 아드리아해의 지 배권을 넓혀간다. 726년 비잔틴 제국의 황제, 그레고리오 2세가 발호하던 수도원을 억압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으로 문자를 모르는 사람들에 대한 선교용으로 당시에 묵인해오던 성상(聖像)에 대해 파괴령을 내리자, 이에 반발한 베네치아가 스스로 우르수스(726-737년간 재위)를 도제로 선출하자, 비잔틴제국은 그를 히파투스(로마 시대의 집정관을 뜻하는 그리스어)로 인정하며 베네치아를 달랬지만, 공식적으로는 동로마 제국령이였다.
파르티치 파치오 가문(811년~836년 안젤로, 주스티니아노, 조반니 등 3명)이 지배하는 동안 베네치아는 근대적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다. 도제였던 안젤로는 교량, 운하, 방벽과 석조건물 등의 건축을 통해 베네치아가 바다로 영토를 확장하기 시작하였다. 주스티니아노 시절에는 상인들이 알렉산드리아로부터 성 마르코의 유해를 몰래 숨기고 들여와 베네치아의 수호성인으로 삼았다. 서기 1000년에는 아드리아해로 진출하여 슬라브 해적을 영구히 진압했으며, 도메니코 셀보 시대(1071년~1084년)에는 비잔티움을 도운 대가로, 아드리아 해안에서의 베네치아의 종주권을 인정받고 달마티아를 식민지로 삼아 유럽 전역에 베네치아의 이름을 알렸다.
1082년에는 비잔틴 황제로부터 ‘비잔티움 제국 전역에서 베네치아 상인의 면세’를 선포하는 금인칙서(金印勅書)를 얻어내면서 7세기 이래 무슬림 세력에 막혔던 동지중해의 뱃길을 열어 이후 홍해와 이집트를 지나는 중계무역 역할을 통해 부와 국력의 축적하면서 비잔티움 제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하였다.
십자군전쟁에도 참가한 베네치아는 제1차 전쟁에서는 200여 척의 선박을 동원하여 시리아의 항구도시 공략을 도운 대가로 1123년에 예루살렘 왕국 내에서의 실질적인 자치권을 부여받았다. 12세기에는 대규모의 국영 조선소를 건설하여 동 지중해의 제해권을 확립했고, 각지에서 온 상인들을 위해 세계 최초의 외환 업무를 시작한 베네치아는 제4차 십자군 전쟁에서는 병력의 운송을 책임졌다.
그러나, 십자군이 운임을 지불할 수 없게 되자, 도제 엔리코 단돌로는 1183년 베네치아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 자다르를 대신 공략해 줄 것을 십자군에게 부탁한다. 이에 십자군은 1202년 자다르를 함락시킨 후 1204년에는 베네치아의 또 다른 적수였던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하며, 이때 베네치아는 네 마리의 청동제 말 조각상을 성 마르코 성당의 광장으로 가져오고 약탈한 재화로 운임을 충당하였다. 결과로 비잔티움제국이 분열되자 베네치아는 비잔티움제국 영토의 3/8을 획득하였다.
이탈리아반도의 대부분 도시국가들은 11세기부터 공화정으로 출발했으나 14세기가 시작되면서 군주제로 바뀌기 시작했고, 16세기를 전후하여 이탈리아 전역은 외세의 영향력이 증대되었지만, 베네치아는 줄기차게 공화제를 유지하며 독립적인 지위를 지켰다. 지도자로 선출된 도제에게는 명예와 권위는 보장되었지만, 독점적인 권력이나 특권은 부여하지 않는 것이 베네치아 시민들의 정치의식이었다. 1354년에 도제로 선출된 팔리에로는 귀족들로부터 효과적인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1355년 4월에 쿠데타를 시도했으나 실패하여 사법기관인 십인회의 평결로 처형되었다.
15세기 초 이탈리아 본토로 지배권을 확장하기 시작하였으며, 선박 3,300척, 해군 병사 36,000명을 보유하게 된 베네치아는 1425년에는 밀라노의 비스콘티와의 전쟁의 승리로 서부의 국경을 아다강까지 확장하고, 15세기 중엽에 국력 및 영토 확장이 정점에 달했다. 비스콘티 공 작이 죽고 스포르차가 밀라노를 지배 하자, 그와 로디 조약을 체결하여 베네테 주, 베르가모 주, 크레모나, 트렌토, 라벤나와 이스트라 및 달마티아까지 지배하면서 해외의 에우보니아와 에지나를 지배지로 두었다.
1453년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한 후, 1454년 오스만은 베네치아에 항구 사용 및 교역을 허가했으나, 1470년 오토만제국은 역공으로 에게해의 베네치 아 군사 거점이었던 네그로폰테를 빼앗았 다. 이처럼 베네치아는 트루크에 패배했 지만, 15세기말 공화국의 영토는 약 7만 제곱킬로미터였으며, 인구는 210만 명에 달했다(동시대 인구는 영국 3백만, 이탈 리아 전체 1천 1백만, 프랑스 1천 3백만, 에스파냐 6백만, 신성로마제국 1천만).
1570년 다시 오스만과 전쟁이 발발하자, 베네치아, 에스파냐와 교황령은 동맹을 결성하고, 총 208척의 갤리선의 대선단을 구성하여, 1571년 10월 7일 오스만과 격돌한 레반토 해전에서 승리한 동맹군은 갤리선 117척을 나포하여 배분하였다. 에스파냐의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하자, 프랑스와 합스부르크 제국은 1700년에 베네치아와 동맹을 원했으나, 베네치아는 중립을 지켜 그동안 쌓아둔 부로 생존은 유지하지만 쇠퇴는 피할 수 없었다. 1797년에 나폴레옹이 베네치아를 침공하여 베네치아를 오스트리아에게 넘기자, 기존의 주인인 세레니시마 가문이 몰락한 베네치아는 1866년 이탈리아에 합병된다.
베네치아 여행에서 주의 할 점 두 가지는 소매치기가 많아 헐렁한 바지를 입고 뒷주머니엔 지갑을 넣으면 소매치기가 지갑을 빼가라는 말이 된다. 또 하나는 바가지를 씌우는 가게가 많아 여행 책자가 추천하는 식당에 들리는 것이 좋다. 물의 도시로 유명하지만, 수질이 시궁창이다. 특히 주택가 사이 작은 운하의 수질은 하수도 수준으로 가능하면 운하에서 물놀이나 물에 접촉 하는 것을 삼가는 게 좋다.
두갈레 궁전과 산마르코 광장
시야가 탁 트이는 S자 대운하와 골목골목을 연결하는 소폭의 작은 수로가 거미줄처럼 연결되어있다. 1591년에 완공된 리알토 다리 양쪽의 상가는 16세기 중엽 모습이 조금씩 변모한 모습이라 하며, 다리를 건너의 리알토 시장은 베네치아 유일의 시장으로 해산물과 육지에서 수송된 채소류 등을 하역하는 곳이다. 이 재래시장은 어둠이 내리면 대부분 문을 닫으나, 유리세공이나 가면 가게들은 문을 늦게 닫는다. 가격은 중저가이지만 디자인이나 품질은 손색이 없어 안목만 있으면 지갑을 열어도 후회하지 않는다.
산 마르코 광장
그러나 산마르코 광장 아케이드와 광장 동쪽의 골목에는 귀에 익은 명품가게가 들어선 것이 예전과 다르다. 정통 이탈리아 음식점은 점심시간이 지났는데도 만석이지만, 터무니없는 바가지요금을 피하려면 정부에서 발행하는 책자에 나와 있는 음식점을 고르는 것이 요령이다. 구글지도에서 추천하는 음식점은 믿을 만하고, 작은 운하를 연결하는 돌다리 계단을 지나 호텔을 찾아가야 하는 베네치아를 여행하면서 허리를 보호하려면 무거운 가방은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15세기에 건축된 두칼레 궁전(Palazzo Ducale)은 북유럽의 고딕양식에 동방의 양식이 추가된 베네치아 고딕양식으로, 679년부터 1797년까지 120명의 총독 거주지 겸 바다로부터 침범하는 적을 막는 요새였지만, 지금은 박물관으로 사용 중이다. 성당 앞의 큰 광장은 피아차라 부르고, 궁 앞의 작은 광장은 피아체타라 부른다.
공공기관, 도서관과 미술관 등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자동차 공해가 없는 피아차를 오가는 관광객들의 여유와 한가로움이 느껴진다. 그들의 머릿속 에는 ‘베네치아가 조금씩 가라앉고 있 다.’는 현실은 생각조차 하지 않을 것 이나, 갯벌 위에 세워진 건축물의 기 초부분이 온난화와 무분별한 지하수 개발 때문에 침식하고 있어 지금은 1 층 부분만 잠겨 있지만, 언젠가에는 베네치아의 5층 높이까지 수몰될지 모른다.
두칼레 궁전 정문
피아체타 끝에는 콘스탄티노플에서 가져온 흰 대리석으로 만든 원주가 2개가 있다. 좌측원주 위에는 베네치아의 수호신인 날개 달린 사자상과 악어를 밟고 있는 우측의 성 테오도르 상(성 마르코 이전의 베네치아 수호성인)이 쌍을 이룬다. 광장의 동쪽에는 흰 대리석 열주가 서있는 회랑과 성 마르코 대성당과 잇닿는 두칼레 궁전은 베네치아의 명소다. 성당이 재건되면서부터 총독을 비롯한 베네치아의 시민은, 동방침략 때마다 이 건물을 장식할 조각이나 부조 등을 가지고 건물을 꾸미는 것이 관례였다 한다.
1590년에 틴토레토가 그린 벽화 ‘천국’은 세계에서 제일 큰 유화로 보지 않으면 후회와 궁금증이 따르는 대작으로 총독의 권위를 더한다. 벽에는 역대 통령의 초상화가 걸려있는데, 반역으로 처형된 팔리에르 초상자리는 검은 천으로 덮여 있다. 독재자는 영원한 멸시를 피할 수 없어 사후에도 이처럼 만인의 조롱거리가 되나보다.
9세기에 세워진 높이 99m의 종탑은 무너져, 1511년~1514년까지 벽돌과 대리석으로 다시 건립되었으나 소금기 가 많은 바닷가의 바람에 부식되어 1902년에 다시 무너졌다. 지금의 탑 은 1912년에 다시 세운 것으로 종루 위까지는 엘리베이터로 올라갈 수 있 으며, 날씨가 좋은 날에는 알프스산맥 도 보인다는데 오르지 않았지만, 베네 치아의 어디서다 보여 훌륭한 길잡이 노릇을 한다.
궁전에는 2개의 출입구가 있는데 대성당과 면한 문이 포고령을 게시하는 ‘문서의 문’으로, 위에는 베네치아의 상징인 책을 펴든 사자가 날개를 편 조각이 서있다. 참고로 마르코 폴로는 베네치아 사람이나 ‘동방견문록’은 실지로 동양을 가보고 쓴 것인가가 의심받고 있다.
배가 불러 잘 날지도 못하는 비둘기들의 천국인 성당 맞은 편 광장의 카페 플로리안은 베네치아에서 가장 오래된 카페로, 수백 년 된 커피집인 만큼 이곳 커피 값이 일반 카페의 5~6배나 비싸, 커피 한 잔이 16.5 유로이니 우리 돈으로 21,450원이다. 삼면으로 둘러싸인 이 광장을 ‘유럽에서 가장 큰 응접실’ 이라 했다는 나폴레옹이 커피를 마셨다는 이 카페를 시작으로 유럽에서 카페가 생겼다한다.
이런 전통 있는 카페의 발코니 좌석에서 광장을 오가는 사람 구경을 하며 커피를 마시며 한 시간 동안 사람 구경을 하는데 이 식당의 그랜드 피아노와 첼로와 바이올린의 3인조 미니밴드의 가벼운 재즈를 연주하는 솜씨가 훌륭하여 박수를 쳐주니, 내게 인사를 꾸벅하며 ‘도라지’와 ‘아리랑’ 두 곡을 연주해주어 한국인의 체면을 고려하여 눈치있는 밴드에게 감사의 표시로 10유로를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