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서쪽 허공을 낙타처럼 잡아끌고 이곳까지 왔다 여자는 사방에서 유리가 반짝이는 거리를 지나왔다 유리가 있는 한낮과 길은 계속되었고 여자의 몸은 텅텅 비어 있었다 그 속으로 쉴 새없이 기름을 실은 탱크로리가 달려갔다 몸 속으로 차오르는 것은 어둠이어야 했다 그곳을 향해 여자의 밸브는 자주 열렸다 여자의 몸은 밤의 전극에 닿고 싶었다 그러나 여자의 몸은 오랫동안 낮과 밤을 갈아 끼우지 못했다 여자의 발자국은 몸에 새겨졌고 도시에서 빼내고 있는 여자의 두 다리는 녹이 슬어 있었다
길 또는 그물 / 이원
길은 그물이다 몸을 가진 것들은 걸린다 걸려본 발이 길을 알리라 길 가운데 선 청동의 동상에도 그물의 그림자가 비친다 허리에 찬 위풍당당한 칼도 예외는 아니다 공기가 포장지처럼 바스락거린다 길 밖의 키작은 채송화는 다른 길을 만든다 간간히 꽃망울 잎망울까지도 물과 흙을 담은 길이다 길의 무너지는 무덤들이 꽃속으로 스며든다 이파리와 아파리 사이에서 조금씩 벌어지는 하늘이 새하얗게 바랜다 공기는 얼룩이 져 있다 어김없이 하늘을 따라가는 길 가파른 매듭을 보여주고 매듭은 깊은 골짜기를 몰고온다 높은 곳의 웅덩이에서 몇 개의 자루를 지고 가는 구름 구름속으로 지상의 그물이 삭아내린다
이원李原의 작품에는 상당수가 회화繪畵와 깊은 관련이 있다. 바로 그 점이 그의 작품을 논하는데 회화의 이론을 원용하도록 나를 유혹한다. 그리고 그의 시에는 80년대 이후 흔히 논의되는 신표현주의의 특성과 통하는 점도 있다.
시의 전문을 보며 그가 가고 있는 길을 함께 더듬어보자.
검은, 비닐봉지 하나, 길바닥을 굴러다닌다 계속해서 시간은, 길보다 먼저 다리를 뻗는다, 검은 비닐봉지, 이번에는 계단이 있는 곳까지, 굴러가더니 멈춘다 잠시 따갑게, 부스럭거린다 시간은 다리를, 양옆으로 길을 벌리며 간다, 가다 간판, 밑에서 멈춘다 무방비 상태로 옷의 앞을 모두, 풀어놓은 채 시간은 계속되고, 있다며 비닐봉지, 검은 쓰레기가 있는 곳으로 굴러 들어간다, 한참 나오질 않더니 검은, 그림자를 흔들며 헤집으며, 나무 밑에 멈춰 있다, 그곳에서 시간과, 비닐봉지가 같은 색으로 만난다, 나무에 등을, 기댄 시간의 한쪽 다리가 무릎에서, 잘려 있다 뒤를 보니 나무의, 중간쯤에 다리를 접어 올리고, 있다 비닐봉지는 여전히, 나무 밑에 머물러 있고 몸을 앞으로, 숙인 시간은 무엇인가를 뒤로, 껴안고 있다
- 이원의 <시간과 비닐봉지> 전문
위의 시는 낯설다. 그러나 전혀 낯설지는 않다. 위의 시가 수사적으로 낯선 것은 극적으로 과장(바르크적 수사법이 그렇다)하거나 극단으로 왜곡(초현실주의적 수사법이 그렇다)하거나 해서가 아니라, 대상을 극단으로 치밀하게 또는 극적으로 확대(극사실주의나 팝의 수사법이 그렇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시는 위에서 볼 수 있는 바처럼, 팝이나 극사실주의가 배제해버렸던 주체의 정서와 관념을 묘사의 행간 속에 일정한 형태로 병치 병렬하고 있다.(이런 점은 그의 시에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 있다. 바로 이런 점이 그의 시를 신표현주의와 비교하게 하는 것이다.) 이 관념의 형상과 이미지는 전통적인 시에 흔히 보던 것이므로 ‘전혀’ 낯설지 않을지도 모른다(시에 불규칙하게 찍혀 있는 쉽표는 나중에 따로 이야기하자.).
이 시가 수사적 측면이 아닌 내용적 측면에서 낯설다면, 이 시는 전통적인 묘사시와 달리, 너무나 일상적이어서 일상적이라고 말하기조차 민망한 ‘바람에 날리는 비닐봉지’라는 사물을 시적 대상으로 하고 있는 탓도 있다. 아니, 그 사물을 통하여 쓰레기의 물성物性을 형이상학적 물성으로 바꾸어 놓고 있는 점 때문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이 시는 거리에 버려져 있는 비닐봉지를 ‘거리에 버려져 있는 시간의 형상’으로 보여주는 데 성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면, 이런 것을 시로 써야 하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는가라는 의문이, 이 시를 그렇게 낯설게 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집에는 이제는 익숙한(그러나 아직 낯설기도 한) 예술적 대상이 된 사물이 가득하다. 그의 시집 맨 앞에 게재되어 있는 작품의 제목인「PC」로부터 1부에 수록되어 있는 17편의 작품 제목과 주요 사물만 열거해도, 플러그, 엽서, 밥그릇, 신발, 밥솥, 옷걸이, 남방셔츠, 비닐봉지, 라면, 빵, 아날로그와 디지털시계, 포스터, 자동차 등 등 줄지어 등장하고 있다. 이른바 ‘백화점적 사물’이란 것이 그것이다. 물론 이들은 팝아트 작가들이 즐겨 찾은 대상이다. 그리고 극사실주의 작가들이 카메라를 들고 즐겨 찾아다녔음직한 차가운 도시의 풍경도 여기저기 있다. 그러나 그의 시에는 여전히 낯선 구석이 있다. 누구는 이 작품에서 예술작품이란 지각 과정 그 자체이므로 그 과정을 치밀하게 보여줄수록 좋다는 의미의 쉬클로프스키의 말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그런 구석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것보다 작품 속에서는 당대當代의 실체, 그 실체의 리얼리티가 냉랭하게 고개를 들고 있지 않은가.
대상의 형태나 이미지를 끝없이 지우려는 미니멀 아트는 대상의 의심스러운 외형을 지움으로써 대상의 본질과 만나려는 코기톨로지의 관념적 모험이 보여주는 한 극단이다. 그리고 대상에 드리워지는 인식 주체의 관념과 정서를 철저하게 배제하려 한 하이퍼 리얼이즘을 포함한 여러 가지 새로운 리얼리즘은 그 코기톨로지의 근거인 주관을 극복하려 한 정신적 모험의 한 극단이다. 그러나 이 둘은 다 같이 주체 중심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회의로부터 출발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그러나 대상의 허상과 에고의 허상을 각각 지우고 세계의 중심축으로 작용하는 주체 이데올로기로부터 해방되려 한 이러한 정신적 모험들은 그 모험의 극단에서 허상을 지우려다가 그것을 지우려 하는 주체의 근거 자체를 지워버리는 위험과 만나게 된다. 이러한 고갈의 상태, 즉 고갈의 형식과 현실 세계의 이데올로기 붕괴는 서로 맞물려 있다고 보아야 한다. 고갈의 형식은 상대적으로 무한한 형식의 자유를 유발하고, 이데올로기의 붕괴는 중심 없는 다윈주의 세계를 현실적으로 유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 측면에서 말해본다면, 지금 우리가 현실의 예술에서 흔히 경험하고 있는 다양한 표현 매체의 구사, 고전적 작품과 대중 예술의 자유분방한 차용과 변용, 그리고 장르 개념의 해체 등이 그 좋은 보기들이다.
이런 세계가 바로 신표현주의 요체이다. 표현 목적에만 부합한다면 작가들은 자유롭게 무엇이든 차용하고 원용한다. 그런 만큼 신표현주의는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러나 형상과 이미지의 회복이라는 목표는 동일하다. 그리고 그 목표를 현실화하기 위해 사실주의적 기법을 적극 수용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관계하는 것은 진부한 사실주의와는 거리가 먼 새로운 사실주의의 다양한 기법이다. 그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기법은 대상의 확대 묘사이다. 미니멀 아트가 본질과 만나기 위해 대상을 축소한다면 그와 반대 입장에 있는 팝이나 하이퍼와 같은 리얼리즘은 대상을 확대한다. 그것은 관념적 또는 이데올로기적 재현의 추상성을 객관적 물리적 형태로 극복하려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리얼리즘의 정신은 사실주의적 재현의 단순성을 강렬한 묘사적 왜곡의 기법을 통해 뛰어넘으려는 표현주의의 정신과 잘 어룰리는 것이기도 하다. - 이원 시인이 추천하는 이원론. 오규원의 <다윈주의의 그물> 중에서 - 《 시사사 》2015년 1~2
거리에서 ㅡ이 원
내 몸의 사방에 플러그가 빠져나와 있다 탯줄 같은 그 플러그들을 매단 채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다
비린 공기가 플러그 끝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곳곳에서 사람들이 몸 밖에 플러그를 덜렁거리며 걸어간다
세계와의 불화가 에너지인 사람들 사이로 공기를 덧입은 돌들이 둥둥 떠다닌다
—시집『그들이 지구를 지배했을 때』199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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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 스토어 3 ㅡ이 원
6225 봉화산행 지하철은 지금 합정에 있다
나는 절두산과 잠두봉을 지나 광흥창역 지하에 있다
걸을 때마다 온몸에서 쇠붙이 소리가 나는 노인이 지나갔다
새들의 입술에서 사람이 줄줄 새고 있다
내몰린 것들을 안고 바다는 곡선을 깎아냈다
밤이 왔는데 아직도 다물어지지 않은 입이 있다
—《애지》 2014년 여름호
애플 스토어 2
남자가 걸어온 길을 게웠다
그림자는 비좁았다
업힌 아기가 엄마의 등을 때리며 악을 쓴다 눈물은 없다
슬립을 입은 여자가 베개에 얼굴을 파묻는다
흰 베개 뽑힌 깃털로 둥근 어깨
내 몸에서 나온 내 피를 믿니
이빨 자국은 사과 속살에 남겨진다
—《시사사》2014년 3-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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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 스토어 4 ㅡ이 원 (1968~ )
젖은 비둘기를 안고 낮에 아이가 찾아왔다 억지로 물에 넣었냐고 했다 아이는 나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해질녘에 산양을 안고 아이가 찾아왔다 다리를 다쳤냐고 했다 누구 다리냐고 물을 수 없었다 한밤에 까마귀를 머리에 얹고 아이가 찾아왔다 살아 있다 새어 나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 . 컴퓨터로 모든 것이 가능한 곳에서 ‘나는 클릭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썼던 시인이 가까스로 도달한 주기도문 혹은 인간기도문. 주객(主客)이 없으므로 더욱, 세상 전체가 죄의 아픔으로 여리디 여려지는, 하나님 없는 고해 성사. 불길(不吉)도, 살아있는 것이 살아있다는 것이고 살아있다는 것이 치유인.ㅡ 김정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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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詩로 여는 세상 작품상]
검은 모래 외 2편 ㅡ 이 원
발목과 손목을 해변의 모래에 파묻은 아이들이 무엇인가를 찾고 있다
하늘이 길고 넓은 천처럼 내려왔다 펄럭이기 직전이다 색이 자꾸 바뀌었다
아이들은 모래에 말굽자석처럼 척추 뼈를 말아 넣고 있다 아이들의 몸에 원무가 들어있다 떠밀려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
파도도 파도소리도 검다 허공은 각각 다른 소리를 내는 중 모래도 검다
억울하게 죽은 영혼들은 바람에 씻긴 말들이 데리고 오나
안간힘으로 달빛을 밀어내주고 있을 것이다 물 밑을 열며 올라오는 손이 있을 것이다
아이들은 검은 모래에 가느다란 손목과 발목을 파묻고 있다 물이 들어오는 해변에 아이들이 있다
신이여 아이들을 버리소서 세상이 이미 아이들을 버렸습니다 못 박힐 순결한 손이 필요 없나이다
집채만한 파도가 아이들을 삼켰다 어둠이 하는 일을 어둠은 끝내 알지 못하므로 당분간 종려주일은 없을 것이므로
—《포지션》2013년 여름호
애플 스토어
숲이 된 나무들은 그림자를 쪼개는 데 열중한다
새들은 부리가 낀 곳에서 제 소리를 냈다
다른 방향에서 자란 꽃들이 하나의 꽃병에 꽂힌다
늙은 엄마는 심장으로 기어들어가고
의자는 허공을 단련시키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같은 자리에서 신맛과 단맛이 뒤엉킬 때까지
사과는 둥글어졌다
—《시인동네》2013년 가을호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여기 꽃병이 하나 놓여 있고, 꽃병에는 여러 종류의 꽃이 꽂혀 있다고 상상해보자. 각각의 꽃은 빛깔이나 잎의 생김새, 향기가 제각각이다. 꽃병에 묶이듯이 꽂혀 있지만 각각 꽃의 독립된 면면이 훼손되지는 않는다. 꽃은 '단 하나'의 꽃으로서 온전하게 보호받는다. 사과 한 알이 막 익고 있다고도 상상해보자. 신맛이 들고 단맛이 들고 있다. 사과가 둥글게 익는다는 것은 이 여럿의 맛이 한데 혼합되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물론 맛들이 마구 섞이더라도 각각의 맛은 혀에 댈 때 마치 여러 가닥으로 갈라지듯이 되살아난다. 이 시를 읽다 보면 전체와 그 전체를 이루는 일부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차례나 위치, 역할, 이치 등도 충분히 뒤바뀔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한곳에 꼭 붙어 있는 것은 없다. 변경되지 않는 것도 없다. 여지가 많이 남아 있다.ㅡ문태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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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구에서 고독하다
7cm 하이힐 위에 발을 얹고
얼음 조각에서 녹고 있는 북극곰과 함께 우리는 지구에서 고독하다
불이 붙여질 생일 초처럼 고독하다 케이크 옆에 붙어온 플라스틱 칼처럼 한여름에 생겨난 잎들만 아는 시차처럼 고독하다
식탁 유리와 컵이 부딪치는 소리
죽음이 흔들어 깨울 때 매일매일 척추를 세우며 우리는 지구에서 고독하다
출판기념회처럼 고독하다 영혼 없는 영혼처럼 코스프레처럼 고독하다
텅 빈 영화상영관처럼 파도 쪽으로 놓인 해변의 의자처럼 아무 데나 펼쳐지는 책처럼 우리는 지구에서 고독하다
어제와 같은 오늘의 햇빛과 함께
문의 반복처럼 신발의 번복처럼 번지는 물처럼
우리는 고독하다
손바닥만한 개에 목줄을 매고 모든 길에 이름을 붙이고 숫자가 매겨진 상자 안에서 천 개가 넘는 전화번호를 저장한 휴대폰을 옆에 두고 벽과 나란히 잠드는 우리는 지구에서 고독하다
꼭 껴안을수록 뼈가 걸리는 당신을 가진 우리는 지구에서 고독하다
하나의 창에서
인간의 말을 모르면서도 악을 쓰며 우는 신생아처럼 침을 흘리며 엄마를 찾는 노인처럼
물을 마시고 다리를 접고 펼치고 반은 침묵 반은 허공
체조선수처럼
우리는 지구에서 고독하다
제 속을 불 지르고 만 새벽 두 시 도로처럼 고독하다 길들은 끊어지고 싶다 열두 살에 죽은 아이의 수목장 나무 앞에 놓인 딸기우유처럼 고독하다
막힌 문을 향해 뛰어가는 비상구 속 초록 인간과 함께 우리는 지구에서 고독하다
시체를 뜯어먹는 독수리들과 함께 높은 곳의 바람과 함께 다른 말을 하나로 알아듣는 이상한 경계와 함께 우리는 고독하다
흰 변기가 점령한 지구에서 우리는 고독하다
변기의 무릎을 갖게 된 우리는
지구에서 고독하다 펭귄은 지구에서 고독하다 토끼는 지구에서 고독하다
오로지 긴 귀가 머리 위로 솟아 있다
주파수 93.1MHz가 잡히는 지구는 고독하다
—《21세기문학》2013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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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 2 — 이원
여자와 남자는 앉을 때 같은 모양을 가졌다 손을 살그머니 오므려 무릎 위에 놓는 방식 살그머니 따뜻한 빛이 생겨나게 하는 방식
남자는 여자의 눈을 보고 웃는다 여자는 남자에게 눈빛을 맞추며 웃는다 둘이서만 바라보게 되어 알을 품은 모양이 되었다
남자는 손을 동그랗게 오므리고 있다 여자의 손은 꽃묶음이 살짝 가려주고 있다
지구에서 한 자리
사랑의 모양
ㅡ신생ㆍ2015ㆍ봄호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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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기 위해
곧추 세운 등뼈 아래로 엉덩이를 엉거주춤 유지해야 하는 이 포즈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각자의 배후를 전적으로 위탁하는 포즈를 우리는 언제부터 배워야 했습니까 의자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기 위해 어디부터 구부려야 했습니까 어디를 숙여야 했습니까
의자를 닮기 위해 발을 매단 채 손을 매단 채 이상한 도형이 되어야 했습니다
침묵하고 있는 이 짐승은 언제 달리기 시작하나요
창 밖 난간으로는 발음을 모르는 혀들이 몰려들었습니다 밤의 숲에 가면 뼈의 외침이 나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로잡힌 척 의자에 앉아 우리는 손만 쉴 새 없이 움직입니다 한 끼를 위한 너덜너덜한 손의 동작을 왜 멈출 수 없습니까 항문과 입을 동시에 벌리는 법
우리는 어쩌면 이토록 징그러운 동작을 배웠을까요
의자 손잡이가 비명을 지르고 있는 입이라 해도
고해성사의 순서를 알게 되었다면 그것 또한 사소한 습관이 아니겠습니까
뒷모습이 구겨져 있습니다 깜깜한 곳에 우리는 너무 오래 접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신 의자와 의자가 대화하는 것을 믿습니까
토하고 말았지요
이런! 의자들끼리는 당황은 하지 않습니다
(‘문예중앙’, 2014년 봄호’)
시인 이원은 현대시의 다채로움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이름 1996년 첫 시집 『그들이 지구를 지배했을 때』 같은 해 해체된 ‘서태지와 아이들’의 노래 제목. 시집 첫 시의 제목은 ‘PC’. 2001년 두 번째 시집은 ‘월인천강지곡’을 비튼 『야후!의 강물에 천 개의 달이 뜬다』였다. 시집에 실린 시인의 말, ‘나는 클릭한다/고로 나는 존재한다’로 유명세를 탔다.
얼핏 ‘0’과 ‘1’의 무한 연쇄가 만드는 디지털 가상세계 안에서 길 잃고 분열된 자아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재빠른 감각의 문명비판적인 면모는 이 시인의 일부일 뿐이다. 그의 시편들은 보다 묵직하고 근원적인 것처럼 보인다. 이씨가 흠모했던 스승 오규원(1941∼2007) 시인이 ‘신표현주의’라고 명명한 시편들에서는 가차 없는 시선, 강렬한 수사(修辭)가 돋보인다. 정밀묘사를 위한 대상 왜곡이다.
올해 미당문학상 후보작 22편 가운데 ‘점점 더 단단한 공이 되어가려는 듯이’는 신표현주의 계열로 읽힌다. 시 속에서 알몸의 여자는 샤워 부스 바닥에 웅크려 토악질을 하고 있다. 헛구역질인 듯 ‘눈물은 머리통을 뚫고 나오지 못’하고, 여자는 ‘점점 더 몸을 웅크’리고 등은 ‘부풀어 오른다’. ‘목구멍에서 항문까지 하나로 뚫린’ 여자의 몸 위로 ‘물 쏟아지는 소리가 잘린 철사처럼 쏟아진다’. 결국 시인은 ‘여자의 허리뼈를 따라 꿰맨 자국이 선명해진다/파고 묻고 메운 구덩이처럼 여자는 있다’라고 묘사한다. 섬뜩한 묘사다.
네 편이 포함된 ‘애플 스토어’ 연작시는 현대사회의 디스토피아적 면모에 대한 비판으로 읽힌다. 한없이 매끄럽고 간지러운 문명의 첨단 기기는 어떻게 만들어지나. 이면에 노동착취·인간소외 등이 똬리를 틀고 있는 건 아닌가. 네 편 중 ‘애플 스토어 1’은 지난 4월 동료 시인·평론가 100명이 선정한 ‘오늘의 시’에 선정됐다. 하지만 감상이 쉽지는 않다. 시인 문태준은 "해석의 여지가 많다"고 평가한 바 있다.
전문을 소개한 시 ‘의자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기 위해’에 대해 이씨는 “갈수록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에서 쓴 시”라고 설명했다. 의자에 엉거주춤 앉은 자세에서 의자를 빼낸 후 사람의 자세에만 주목하면 얼마나 부자연스러운 모습인가. 의자에 앉아 음식이라도 먹는다면 항문과 입이 동시에 열린 묘한 상태가 되는 게 아닌가. 이씨는 “먹고 살기 위해 숟가락·젓가락 드는 자세를 무한반복해야 하고, 늦은 밤 귀가할 때 교통편을 찾고 타고 내려 걷는 똑같은 절차를 반복해야 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뭔가 인간 존재에 끔찍한 점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의자에…’는 단순히 인간 행동의 맹목적인 부분, 존재의 한계 등을 파고 든 작품이 아니다. 이씨는 “시의 형식 실험과 정서의 표출이라는, 어울리지 않는 두 항목의 화해를 꾀했다는 점에서 내게는 일종의 시적 전회(轉回)의 의미가 있다”라고 했다. 물론 그런 특징을 잘 포착하려면 지금까지 이씨 시의 궤적 전체를 면밀히 살펴야 할 것이다.ㅡ신준봉 기자
이것은 사랑의 노래 ㅡ 이원
언덕을 따라 걸었어요 언덕은 없는데 언덕을 걸었어요 나타날지도 모르잖아요
양말은 주머니에 넣고 왔어요 발목에 곱게 접어줄 거예요 흰 새여 울지 말아요
바람이에요 처음 보는 청색이에요 뒤덮었어요 언덕은 아직 그곳에 있어요
가느다랗게 소리를 내요 실금이 돼요 한 번 들어간 빛은 되돌아 나오지 않아요
노래 불러요 음이 생겨요 오른손을 잡히면 왼손을 다른 이에게 내밀어요 행렬이 돼요
목소리 없이 노래 불러요 허공으로 입술을 만들어요 언덕을 올라요 언덕은 없어요
주머니에 손을 넣어요 새의 발이 가득해요 발꿈치를 들어요 첫눈이 내려올 자리를 만들어요
흰 천을 열어 주세요 뿔이 많이 자랐어요 무등을 태울 수 있어요 무거워진 심장을 데리고 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