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땅이름에는 곰, 노루, 가재 등 동물 이름이 들어간 것이 무척 많다. 그러나 그 이름의 원천적인 뜻을 보면 동물과는 관계없는 것이 태반이다. 이렇게 된 데는 원래 다른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 세월이 지남에 따라 발음상 변화를 일으켜 동물 이름처럼 된 것들이 많게 되다 보니 동물 관련의 이름처럼 느껴지게 된 것이 많은 것이다. 발음상 모음 변화로 그리 된 것도 있고 더러는 음절의 연결 관계에서 자음이 동화(同化)되어 그리 된 것도 있다.
원래는 땅이름이 다른 뜻으로 붙여졌지만, 그것이 동물 이름처럼 되어 꼭 동물과 관계 있는 것처럼 된 것도 많다.
가장자리의 뜻으로 붙여진 가재말이 ‘가재’와 관계있는 곳처럼 변했는가 하면, 땅이 늘어졌다는 뜻으로 붙여진 ‘너르목(널목)’이 ‘노루목’이 되어 ‘노루의 목’과 연관된 이름처럼 변했다. ‘구석말’이 그 옛말인 ‘구억말’로 불리다가 ‘구엉말’, ‘궝말’로 불리고, 곧 ‘꿩말’이 되기도 하면서 ‘꿩’과 관련된 이름처럼 보이게도 한다.
● ‘곰달내’의 옛날 문헌 표기
곰이 달렸다는 들판이 있다. 서울 양천구 신월동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이곳의 이름이 생긴 유래를 달리 주장하고 있다. 달빛이 비친 내가 그 들을 지난다면서 ‘고운 달빛이 비치는 내’라 하여 ‘곤달내’가 되고, ‘곰달래’까지 되었다는 것이다.
이 말이 과연 맞는 것일까?
그러나 ‘곰달내(곰달래)’라는 이름은 앞에서 이야기한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큰 들판의 내’라는 뜻의 ‘검달내’가 ‘곰달내’로 변한 것이다. 일제가 1914년 만든 지도에선 한자로 ‘고음월리(古音月里)’라고 써 놓고 그 옆에 카타카나 표기로 ‘고우무다루리’라고 적혀 있는 것이 보인다. 이것은 ‘곰달리’를 그렇게 표기한 것이다. ‘검’, ‘감’, ‘곰’ 등은 땅이름에서 ‘큰’이라는 뜻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
옛 지도에서는 이곳의 곰달내가 한자로 ‘고음달내(古音達乃)’라고 나온다.
재미있는 것은 ‘곰’ 자를 한자로 적을 수 없어서 이를 ‘고음(古音)’이라고 적은 것이다. ‘달내’는 그대로 음차하여 ‘달내(達乃)’라고 적었다. 《대동여지도》 등 우리 나라 옛 지도에서는 우리 소리를 그대로 적을 수 없는 것은 이처럼 글자를 조합해서 적는 일이 많았다.
곰달내의 옛 지도 한자 표기
곰 > 古音(고음) > 達(달)
달> 達
곰(검) > 新(신) / 달 > 月(월)
지금 이곳의 ‘신월동(新月洞)’이라는 이름도 근처 ‘신당리(神堂里)’의 ‘신’과 ‘고음월’의 ‘월’을 합성하여 지은 것이다. 지금 이곳을 지나는 길이름이 곰달래길이다. ‘곰달래’로 적은 것도 잘못이다. ‘곰달래’기 진달래의 사촌쯤 되는 식물 이름으로 생각해 그렇게 붙였는지는 모르지만 ‘곰달내’로 적어야 한다.
이름에 ‘곰’ 자가 들어갔으니 곰과 관련이 있는 이름일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이름은 곰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검+달+내 = 검달내 > 곰달내
여기서의 ‘검’은 ‘큰’이라는 뜻이고 ‘달’은 ‘들’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이 이름은 ‘큰 들판의 내’란 뜻이 된다. 지금의 신월동의 ‘월(月)’은 곰달내의 ‘달’의 뜻을 빌린 것이다.
서울 양천구 신월동의 곰달래길
● 곰나루의 전설
곰나루에서 ‘곰’도 마찬가지이다.
곰나루는 한자로는 ‘웅진(熊津)’인데 이름을 보면 꼭 곰(熊)과 관련이 있는 듯 보인다. 그래서 여기에는 곰과 관련된 전설까지 전해 내려온다.
그 전설을 들어 보자.
한 나무꾼이 산에서 늦게 내려오다가 한 여인네의 유혹을 받는다. 결국 여인의 미모에 빠져 버린 나무꾼은 결국 여인과 결혼하고 여인이 살던 굴에서 함께 살게 된다. 그런데 나중에 아기를 낳고 보니 아기의 몸에 짐승의 털이 달린 것이었다. 이상해서 잘 살펴보니 그것은 곰의 털이었고, 그 털은 어미인 여인의 털과 같은 것이었다. 결국 곰의 변장에 넘어가 결혼한 것을 후회한 나무꾼은 몰래 굴에서 도망쳐 나와 그 앞의 금강을 건넜다. 이를 본 아내인 곰이 다시 돌아오라고 소리쳤지만 나무꾼은 끝내 도망쳐 버렸다. 이에 실망한 곰 아내는 곧바로 아기 곰을 강물에 던지고, 자신도 강물에 몸을 던졌다. 그 곰들의 시체가 며칠 동안 강물에 둥둥 떠다녔다고 한다. 그래서 그 후로 그 강을 ‘곰나루’라 불렀고, 한자로 ‘웅진’이 되었다는 것이다.
참 그럴싸한 내용의 전설이다. 그러나 이것은 전설일 뿐 곰나루는 ‘곰’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검+나루 = 검나루 > 곰나루
충남 공주 부근의 웅진(곰나루) 《대동여지도》
● 꿩의 전설과 치악산
높이 1,282미터. 태백산맥의 오대산에서 남서쪽으로 갈라진 차령산맥의 줄기로 영서지방의 명산이며 원주의 진산이다. 남북으로 웅장한 치악산맥과 산군(山群)을 형성하고 있다. 주봉인 비로봉(飛蘆峰)을 중심으로 여러 봉우리를 연결하며 그 사이에 깊은 계곡들을 끼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오악 신앙(산악에 대한 신앙)의 하나로 동악단을 쌓고 원주·횡성·영월·평창·정선 등 인근 5개 고을 수령이 매년 봄·가을에 제를 올렸다. 원래는 단풍이 들면 산 전체가 붉게 변한다 하여 ‘적악산(赤岳山)’이라 불렀는데, 뱀에게 잡아먹히려던 꿩을 구해 준 나그네가 위험에 처하자 그 꿩이 자신을 구해 준 은혜를 갚아 나그네가 목숨을 지켰다는 전설에 따라 ‘치악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꿩에 얽힌 전설 때문에 치악산이라고 했다? 정말 그럴까? 우리 땅이름의 보편적인 정착 과정으로 볼 때 이것은 믿기지 않는다. ‘치악산’이라는 이름이 붙기 이전부터, 또 ‘적악산’이라는 이름을 쓰기 전부터 이 산은 이름이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일반 평민들이 부르는 보통명사 형태의 일반적 이름일지도 모른다. 치악산의 ‘치’에 중점을 두고 짐작을 해 보면 ‘꿩’과 유사한 어떤 이름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런 종류의 토박이 이름들을 살펴보았다. 살펴보니 ‘꿩’자가 붙은 땅이름들이 거의 ‘구석’과 관련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꿩’과 ‘구석’ 두 말의 연관 관계를 따져 보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구석말, 구석매, 구석마루, 구석내…….
이 이름들의 다른 이름들을 보니 다음과 같이 나왔다.
구억말, 구억매, 구억마루, 구억내…….
여기서 ‘구억’은 ‘구석’의 방언이자 옛말이다.
그런데 ‘구억말’ 중에는 ‘구엉말’이나 ‘공말’인 것이 많다. 경기도 여주시 오학동의 ‘공말’도 ‘구석말’이 그 바탕이다. 이 ‘공말’은 ‘꽁말(꿩말)’로 전음된 것도 있다. ‘구석말’의 변형이 날짐승의 ‘꿩말’까지 간 것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구석(가장자리)에 있는 산’이란 뜻에서 나온 ‘구억매’가 ‘구엉매;로도 되고 ’공매‘로도 된다. 더 나아가 ‘꽁매(꿩매)’까지 갈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이 ‘꿩매’를 한자로 의역하면 어떻게 될까? ‘치산(雉山)’이나 ‘치악(雉岳)’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원주 고을 사람들이 이 산의 이름을 많이 불렀을 텐데, 그 고을 가장자리에 있는 이 산을 ‘꽁매(꿩매)’라고 했을지도 모르고, 이를 한자 표기로 ‘치악’으로 했을지도 모른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지악산’이란 이름은 전설 속이 꿩과는 아무 관계가 없을 것이라는 얘기다.
<동물 이름에서 유래했다고 오해하기 쉬운 땅이름>
땅이름
이름이 변하고 뜻이 잘못 간 과정
가잿말
갓+마을. ‘가(갓)’는 ‘가장자리’의 뜻
곰나루
검-큰 (큰 나루) 검>곰
까치울
갓+울 (가장자리 마을) 갖이+울 >가지울 >까치울
꿩말
구억+말 > 구엉말 > 공말(꽁말) (구석의 마을)
노루고개
너르+고개 (늘어진 고개) 너르>노루
매봉
뫼(山)+붕. 매=산(山) (매는 새 종류의 매가 아님)
말골
말+골. 큰 마을 (큰 골짜기)
뱀골
벤+골 > 벤골 > 뱀골 (비탈이 심한 골짜기)
벌고개
봉현(峰峴). 벌=들 (벌판 가의 고개)
범개
번(벋은)+개. 범개(호계 虎溪) (벋어내린 내)
수릿골
수리(꼭대기)+골. 취봉(鷲峯) (꼭대기 마을)
제비울
좁이 > 조비 > 제비 (좁은 골짜기 마을)
조개우물
조개(족애)+우물 (족(좁)=작음). 작은 우물
---------
<친척말>
갓(가장자리), 구억(구석), 뫼(매), 수리(정수리), 좁쌀, 작다(좁다)
<친척 땅이름>
검내(곰내. 웅천). 전남. 화순군 동복면 유천리, 충남 논산시 양촌면 모촌리
곰말(몽촌. 夢村). 서울 송파구 이동
공마루. 인천 옹진군 대부면 동리
공말(꽁말). 경기 이천시 모가면 서경리
구엉말(구억멀). 충북 충주시 직동
꽁매. 경남 하동군 양보면 감당
꿩너미. 전북 임실군 신덕면 조월리
꿩논. 광주시 광산구 연산동
꿩마(꿩매). 경북 안동시 녹전면 원천리, 전남 강진군 칠량면 단월리
꿩머리. 전남 신안군 안좌읍 한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