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벨의 도서관
신해욱
소실된 입구를 지나. 소실된 계단을 따라. 우리는 소실된 서고에서. 깜짝이야.
동생이 책 속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맞다. 우리의 동생이야. 하나는 반색을 했다. 맹점을 찾는 것 같아.
맹점이라. 맹점이라면…… 하나는 몰래 동생의 책을 넘겨다보았다. 까막 눈이 되어야 보인댔는데. 보르헤스가 그랬지. 두근거리는 페이지를 지나. 달아오른 페이지와 누락된 페이지를 지나.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모서리에서 짜릿한 모서리로.
모서리의 접힌 귀로. 바스러지는 귀로. 귀의 실체와 간지러운 그림자. 키득거리는 목소리. 몰입의 가속도를 따라. 탐독의 절정에서 이야기가 터지고, 문장이 부서지고. 마디가 흩어지고. 하나는 마른 침을 삼켰다. 비로소 까막눈이 뜨인댔어.
타버린 의미. 까만 재. 까만 획. 까만 부호. 탈구된 토씨 사이에서. 보일 거랬는데. 맹점은. 초흑색이라는데. 하나는 돋보기를 꺼냈다. 보르헤스는 실패했대. 왕년의 빛이 고여 눈이 멀어버렸다지.
동생의 손등을 타고 개미가 기어갔다.
소실된 그늘 아래. 개미는 뜨겁고. 개미는 잘록하고. 머리. 가슴. 배. 개미는 삼등분이지. 소실된 미로를 따라. 소실된 서고에서. 겨우 남은 구석에서. 동생의 손가락이 한군데를 짚었다.
이크. 저건 마침푠데. 하나는 몰래 탄식을 흘렸다.
보르헤스의 가호를 빌어야겠어. 하나는 몰래 동생의 머리를 쓸어주었다.
우리는 마음을 졸였다.
까만 머리. 까만 가슴. 까만 배. 개미가 꿈틀거렸다.
ㅡ계간 《창작과 비평》(2025,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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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 소개
바벨의 도서관 / 신해욱
김수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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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24 08:46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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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런 시와 같은 시조를 쓰고 싶다. 정형성을 유지하면서 이처럼 읽히는 작품을 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