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작가 피터 셰퍼의 희곡 '아마데우스'는 안토니오 살리에리의 고백으로부터 시작됩니다. 1979년 11월 영국의 유서 깊은 올리비에 극장에서 초연된 이 연극은 이듬해인 1980년 12월 미국으로 넘어가 1181회 공연 기록을 세웠고, 권위 있는 공연예술상인 토니상까지 거머쥐었어요. 마침 영국에 머무르고 있던 체코 출신 음악영화의 거장 밀로시 포르만은 첫 시사회 무대를 보고 바로 원작자 피터 셰퍼에게 연락해 영화로 제작하자고 제안하죠. 그렇게 탄생한 영화가 1984년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비롯해 8부문을 수상한 명작 '아마데우스'입니다.
◇천재 음악가의 죽음
제목 '아마데우스'는 음악가 모차르트(1756~1791)의 이름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죠. 아마데우스는 '신의 사랑을 받은 자'라는 뜻이에요. 이름처럼 모차르트는 신의 은총을 입은 것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놀라운 작품을 후세에 남겼죠. 서른다섯 살이라는 짧은 생애 동안 626곡의 걸작을 만들었습니다.
▲ 1981년 연극 ‘아마데우스’에서 살리에리(오른쪽)와 모차르트의 부인 역을 맡은 배우들이에요. /위키피디아
천재 음악가 모차르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세간의 화제였어요. 모차르트는 그의 유작인 '레퀴엠'을 채 완성하기 전인 1791년 12월 5일, 당시 유행한 악성 장티푸스에 걸려 심하게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알려졌어요. 그러나 모차르트의 정확한 사인은 지금도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비극적이게도 모차르트의 유해는 빈 근교 공동묘지 어딘가에 비석도 없이 묻혀 현재 그의 무덤을 찾을 길이 없답니다. 모차르트의 후손도 끊겨버렸지만, 사람들은 천재 음악가를 위해 오스트리아 빈 인근 중앙묘지에 시신 없이 비어 있는 무덤과 석상으로 모차르트를 기리고 있죠.
◇살리에리를 독살범으로 지목
연극은 모차르트 죽음에 독살설을 제기합니다. 모차르트 독살설이 공식적으로 제기된 것은 1830년이었어요. 러시아 문호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희곡 '모차르트와 살리에리'라는 작품이 독살설에 불을 지폈죠. 극작가 피터 셰퍼 역시 푸시킨의 희곡에서 영감을 얻었어요. 두 사람은 모두 오스트리아 궁정 작곡가 안토니오 살리에리를 모차르트 독살범으로 지목해요. 살리에리가 모차르트의 천재적인 재능을 시기해 그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거죠. 극 중 살리에리는 모차르트의 음악을 흠모하고 경탄하면서도 자신에게는 이런 재능을 허락하지 않은 신을 원망하고, 결국 신이 선택한 모차르트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인물로 나옵니다. '천재 모차르트와 질투의 화신 살리에리'라는 이 극적인 대립은 극에 팽팽한 긴장감을 더하는 라이벌 구도를 만들어냈죠. '살리에리 증후군'이라는 심리학 용어까지 만들어졌습니다. 1인자의 뒤를 잇는 2인자가 느끼는 자신의 평범함, 좌절 및 무기력, 질투의 감정으로 생겨나는 심리를 설명하는 용어예요.
◇살리에리는 베토벤·슈베르트의 스승
안토니오 살리에리(1750~1825)는 이탈리아 베네치아 공화국의 레냐노에서 태어났어요. 어려서부터 음악적 재능을 보였던 그는 열네 살에 고아가 됐지만, 작곡가 플로리안 가스만의 눈에 들어 오스트리아로 가는 기회를 얻게 돼요. 그리고 당시 오스트리아 황제였던 요제프 2세의 인정을 받아 24세 때 궁정 오페라 감독으로 임명됐습니다. 38세 때는 황실의 예배와 음악 교육을 책임지는 '카펠마이스터' 자리까지 차지하죠. 음악가로서는 오스트리아 제국 최고의 직위였어요.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살리에리의 업적 중 지금까지도 크게 평가를 받는 것은 바로 교육자로서의 면모였어요. 베토벤과 슈베르트도 그의 제자였죠. 베토벤은 그를 위해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위한 3곡의 소나타(작품 12)'를 바쳤다고 해요. 슈베르트는 많은 편지에서 '감사한 살리에리 선생님'으로 부르며 스승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할 정도였어요. 살리에리는 살아생전 35편의 오페라를 썼고 대부분의 작품이 당대에 큰 성공을 거두며 인정받는 작곡가였습니다. 하지만 연극 속에서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뛰어넘지 못한 자신의 범작들은 사라지고 모차르트만이 그 명성을 이어나갈 것이라는 자신의 예견처럼 그의 인기는 19세기 들어 사그라들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