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통신 84/200211]푸성귀 노놔먹는 “쏠쏠한” 재미
아버지쪽으로는 유일한 친척집이 ‘작은집’이다. 할아버지가 참으로 고독한 집안의 5대 독자이기 때문이다. 어릴 적에는 고모와 당숙이 있는 친구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숙부는 3년 전 84세로 돌아가셨고, 83세 숙모가 어제 전주에서 인공관절 수술을 하셨다. 고향에 있으니 병문안이야 당연한 일. 아버지가 슬그머니 봉투를 내미셨다. 봉투 겉면에 “제수씨, 쾌유를 빔니다”라고 쓰여 있다. 형제가 모두 필체가 아주 좋다. 중종때의 ‘기묘명현己卯明賢’, 정암 조광조 선생과 함께 ‘낙중군자회 洛中君子會’ 멤버로 지치주의至治主義를 꿈꾸었던 중시조 신재新齋 최산두崔山斗 할아버지가 ‘조선명필 100인’에 뽑힐 정도로 글씨가 빼어나셨다는데, 그 유전자遺傳子 덕분일까. 우리 형들도 글씨를 참 정갈하게 쓴다. 어찌된 일인지 나만 졸필拙筆에 속필速筆이어서 알아보기가 힘들다.
올해 환갑인 사촌동생이 제수와 조카와 함께 일산에서 내려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의술醫術이 발달된 덕분으로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무릎수술. 오른쪽 무릎에 이어 2주 후 왼쪽 무릎을 해야 하니, 한 달은 꼬박 입원을 해야 한다. 당신도 그렇겠지만, 2남2녀 자식들의 마음은 두엄자리일 것이다. 초등 고학년때부터 중고등학교를 작은집에서 다녔다. 친동생이나 진배없는 사촌동생하고는 여러가지 추억이 많다. 친구들과 놀러 갈 때마다 따라오지 말라며 돌멩이를 던져도 악착같이 따라다녔던 게 가장 먼저 생각난다. 다음으로, 발 뒤꿈치를 들어 상대방의 허벅지를 부지불식간에 틈만 나면 교묘하게 ‘찍던’ 일이다. 틈만 나면 발뒤꿈치로 서로의 허벅지를 공격하는데, 지금도 붙기만 하면 그 ‘장난’하기에 여념이 없다. 어른들이나 아내가, 제수씨가 있어도, 그 악습惡習은 여전해 ‘도대체 언제 철이 들 거냐’는 입방아에 오르곤 한다. 동생과 수많은 재살이(말썽)을 피우면, 숙부는 항상 동생으 종아리만 때리는 것이 너무 가슴이 아팠다. 나는 형님의 아들, 조카이니 직접 당신이 때리는 게 그랬던 모양이나, 동생과 같이 때려주면 동생한테도 덜 미안하고 좋을텐데라는 생각을 을 많이 했었다. 그러니 그 동생이 반갑지 않겠는가.
동생은 지방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85년 당시는 내로라하는 기업 삼양사에 입사하여 34년간 반듯하고 충직하게 일을 해 임원이 되었고, 지난해말 퇴직을 했다. 만나면 늘 하던 말이 “나는 큰집이니 동아일보에, 너는 작은집이니 삼양사에 다니나보다”고 말했다(동아일보 인촌 김성수와 삼양사 수당 김연수는 친형제). 나보다 헌칠하게 크고, 외모도 숙부(배우 신성일보다 더 잘 생긴 듯)를 뺨쳤다. 말하자면, 부족한 형의 자랑스런 아우이다. 동생이 백부伯父께 세배도 드려야한다며 나를 태웠다. 나는 또 동생 가족에게 새 고향집을 구경시켜 드릴 생각에 마음이 설렜다. 부리나케 저녁밥을 안치고 밥상을 차리는데, 마음이 부자나 된 듯 뿌듯했다. 전날 여동생이 만들어놓은 여러 가지 반찬 덕분에 예상치 못한 만찬은 ‘진수성찬’이 되어 얼마나 다행이었던가.
그 다음은 우리 어머니의 ‘고질병’이었던 ‘보따리 싸주기’에 나섰다. 먼저, 100% 도토리묵 한 모와 큼직한 배추 한 포기, 마늘고추장 한 종지, 사과 5개, 노지露地시금치 한 보따리(작년 가을 씨뿌리기를 정말 잘했다. 요즘 무쳐먹어야 달달하고 맛있다. 벌써 열 집도 더 주었다)에 무 몇 개를 쑤셔넣고도 ‘뭐 더 줄 게 없는가’ 머리굴리기에 바빴다. “어머, 큰어머님 같아요” 제수씨가 놀라는 소리도 듣기에 좋다. 보라!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지 않는가. 무엇인들 아깝겠는가. 하나밖에 없는 내 친구같은 동생의 가족인 것을. ‘보따리 싸주기’에 질린 여동생들을, 오라버니인 내가 또 질리게 한다. “평생 그 꼴을 보고 싫어했으면서도 ‘씬-물’도 안나느냐”는 아내의 지청구도 요란하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유전자가 그런 것을. 올해는 누구에게나 더 많이 무엇이든 챙겨줄 것이다. 아무리 내가 허릅숭이(일을 실답게 하지 못하는 사람)이지만, 여러 가지 채소도 가꾸고, 5월이 되면 고사리도 죽어라고 캐 삶아 말려서 오는 사람들에게 한 보따리씩 앵겨야지, 대봉시도 감꽃 필 때 농약을 해 허벌나게 달리게 해야지, 속으로 궁시렁거린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나는, 누구든 오면 서재로 달려가 이런저런 책을 훑어보며 줄 책이 없는가를 생각한다. 그동안 사놓고 읽어보지도 않은 책을 준 것만도 몇 십권이 된다. 동생과 조카에게 나의 영원한 애독잡지 ‘전라도닷컴’ 과월호와 지난해 어린이신문에 20회 연재한 기사를 엮은 <기록의 나라, 대한민국> 소책자를 몇 권 주면서 “내 성의를 봐서라도 꼭 읽어야 한다”며 신신당부한다. 조카에게는 독후감을 쓰라고 했지만, 그게 ‘현실’이 된다면 얼마나 흐뭇하고 좋을까.
부르릉, 사위가 어둑해진 초저녁, 동생가족이 떠났다. 그래도 이렇게 ‘한 보따리’ 챙겨주니, 이렇게 기분이 좋은 것을. 엄마도 그러하셨으리라. 이제에야 내가 피부로 느낀다. 실실 웃음이 나온다. 기부 등 자선행위도 이런 기분과 이런 까닭으로 하지 않을까 싶다. 거창하게는 해마다 연말에 전주 노송동주민센터에 수년째 불우이웃 돕기 성금을 내는 주인공이 대표적일 것이나, 나는 친척과 친구들에게 내가 심어 가꾼 소소한 푸성귀들이나마 나눠주는 재미로라도 ‘나의 존재의미’가 있는 게 아닐까를 생각해 본다.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를 준다는 것은, 정말 아름다운 일이다. 무슨 조건이 있겠는가. 주고나서 곧 줬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것은 더더욱 좋은 일. ‘왼손이 한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이 성경에 나온다던가. 가능하다면, 내 머리 속에 든, 피가 되고 살이 될 수많은 상식과 교양이 담긴 책들과 인문학적 지식들을 몽땅 다 전해주고 싶다. 그것보다 ‘사람 사는 도리’ 즉, 인륜人倫에 대해 생각해 보자고 역설力說하고 싶은 걸을 어찌 하랴.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마땅히 어질고(仁), 의롭고(義), 예의 바르고(禮), 슬기롭고(智), 믿음직스러워야(信) 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공자님 앞에서 ‘문자文字’ 쓰는 나는 분명히 ‘윤똑똑이’인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