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쥬신제국사3/8-실라의 나당동맹 협정>
羅唐 同盟 協定(나당 동맹 협정)
☯ 실라 김춘추, 남부여멸망 작전 시동, 당나라로
서기 648년. 김춘추가 아직 야뫼도[大和(대화)]에서 신정부를 안정시키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는 동안, 실라의 금성에서는 당시의 과학 기술을 총 집결시킨 천체 관측소인 첨성대(瞻星臺)가 완성되었다.
기어코 남부여를 멸망시키고 말겠다는 김춘추의 계획은 일단 일본에 야뫼도 [大和] 정부를 세움으로써 크게 진전되었으니, 이제 더 이상 남부여와 나라 백제의 연합작전을 염려할 필요가 없어졌다.
서기 648년. 야뫼도에서 돌아온 김춘추는 숨 쉴 여유도 없이 즉각 당나라의 수도 장안(長安)을 향하여 이번에는 황해바다를 건너갔다.
《나당동맹 협정》
0084-1
생각지도 않았던 실라의 최고 실력자 김춘추가 직접 장안까지 온다는 연락을 받은 당나라 정부는 아연 긴장하였다.
당태종(唐太宗)은 대신(大臣) 광록경(光祿卿)과 유정(柳亭)을 장안성(長安城) 밖 5 리에 있는 소성(小城)에 내보내어 이틀 전부터 대기하게 하였다.
김춘추를 비롯하여 문왕(文王), 거련자(居連子), 온군해(溫君解) 그리고 호위군사 120명을 포함한 총 200명의 실라 사절단은 위풍도 당당하게 광록경(光祿卿)과 유정(柳亭)의 정중한 안내를 받으며 당나라의 왕성(王城)인 장안성(長安城)에 도착하였다.
☯ 실라와 동맹으로 가우리 공격이 절실했던 당 태종의 입장
서기 598년 가우리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된 북방의 패권 다툼은 598년과 613년, 614년에 걸쳐 수나라와의 사이에 벌어졌으며, 결국 가우리가 대승(大勝)함으로써 수나라는 멸망하였다.
그 후, 당이라는 새로운 왕조(王朝)를 일으킨 중화족은 패전의 상처를 씻고 다시 국력을 회복하여, 가우리와 또 한 번 천하의 주인 자리를 놓고 일전(一戰)을 벌이니, 서기 645년부터 당태종이 친히 가우리를 침범한 일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도 북호(北虎)라 불리는 용맹한 연개소문의 지휘 아래 고연수, 고혜진, 양만춘의 분전으로 안시성(安市城) 결전에서 참패를 당하였을 뿐만 아니라, 가우리 별동대(別動隊)의 기습을 받아 당태종의 왼쪽 눈에 화살을 맞는 등 참담한 패전으로 소위 대당(大唐)의 황제라는 당 태종은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었을 뿐이었다.
기어코 복수전을 펴려는 당은 서기 647년에 무진달과 이세적을 보냈고, 계속하여 648년 1월, 설만철(薛萬徹)에게 대군을 주어 보냈으나, 역시 가우리의 소부손(所夫孫) 장군에게 패전하여 출정군의 거의 반수를 잃고 쫓겨 오고 말았다.
이러한 때에 김춘추 일행이 나타났으므로 당 태종과 대신들은 김춘추 일행을 특별히 영접하면서 실라를 당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말풍선)
“대당(大唐)의 황제께서 저희 같은 소국 실라의 사신들을 이처럼 융숭하게 접대하여 주시니 감격하옵니다. 황제의 이러한 배려를 소신은 마음 깊이 새겨 앞날에 보은할 수 있을 때가 오기를 기다리겠나이다.” (김춘추)
실라의 도움을 얻어서 기어코 가우리에 복수하겠다는 당 태종과. 당나라의 힘을 빌려서 남부여를 멸망시켜 사랑하는 딸 소랑의 한을 풀어주려는 두 사람은 서로 의기투합할 수밖에 없었다.
♬(말풍선)
“김춘추 공(金春秋公), 참으로 중요한 시기에 잘 오시었소. 그대는 곧 실라의 대왕 자리를 이을 몸이니, 우리 서로 마음을 터놓고 국사를 의논해도 좋을 테지. 하하하!”
“오늘은 부담 없이 쉬고, 국사는 내일 나와 단 둘이서 만나 따로 의논하기로 합시다.” (당태종)
☯ 김춘추와 당태종의 나당동맹 합의
당 태종과 실라의 재상 김춘추의 단독회담은 다음날부터 수일간에 걸쳐 진행되었다. 우선 양국이 처해 있는 입장이 세밀히 분석, 비교되었고, 그 다음으로 어떻게 북방의 패자인 가우리와 강력한 백제연합의 일원인 남부여를 정벌할 것인지에 초점이 모아졌다.
자연스럽게 양국이 동맹을 맺고 연합군을 형성하기로 전격 합의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문제는 나당(羅唐)연합군이 대 가우리 작전을 먼저 할 것인지 아니면 대 남부여 작전을 먼저 할 것인지 결정하는 것이었다.
양국의 이해가 엇갈려 상당한 격론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역사가 시작된 이래 항상 대결해 왔던 동이족(東夷族)과 중화족(中華族)이 서로 다른 이해관계로 최초의 동맹군을 결성하기에 이르렀으나, 그 지휘권과 작전권 등 풀어야할 난제가 하나 둘이 아니었다. 그러나...,
결국 수일간의 회합 끝에 모든 난제에 대해 기적같이 공통분모를 찾아낼 수 있었다.
이미 여덟 번에 걸쳐 적게는 18만, 많게는 무려 200만에 이르는 엄청난 병력을 동원하면서 백 수십만의 희생을 치렀고, 그 여파로 수(隋) 제국이 멸망하고, 중국의 경제가 파탄에 이르렀으며, 심지어 태종 자신은 왼쪽 눈까지 잃기도 했다.
더욱이 요택에서는 연개소문에게 포위당하여 치욕적인 항복으로 동부 4성[山西(산서), 河北(하북), 山東(산동), 江左(강좌)]을 전쟁 배상으로 빼앗겼던 경험도 있었다.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가우리의 멸망을 보고야 말겠다는 당 태종의 결심은 너무나도 당연하였다.
결국 당 태종은 실라와 연합군을 형성하여 최종적으로 가우리를 멸망시킨다는 굳은 약속을 받아내고, 김춘추의 뜻대로 대 남부여 작전을 먼저 행하기로 합의하였다.
실라 김춘추의 대 당 외교는 나·당 동맹의 성립으로 성공한 셈이다.
아무리 남부여가 밉더라도 그래도 그들이 동족임에 틀림없는데, 집안싸움에 동네 깡패를 불러들이려는 실라의 재상 김춘추의 행위는 과연 옳다고 할 수 있을까?
☯ 귀국 항로 김춘추, 가우리 해군의 공격에서 구사일생
어째든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김춘추 일행은 서로들 성공을 자축하며 귀국 길에 올랐다.
그런데 장안성까지 침투해 있던 가우리의 간자(間者)들이 김춘추 일행의 귀국을 본국에 알렸고, 긴급히 출동한 가우리의 해군 감시선들이 김춘추의 선단을 바다에서 포착하고 빠른 속력으로 추격해왔다.
실라의 배로는 그들을 당할 수 없었다. 김춘추는 재빨리 의복을 부하의 것으로 바꿔 입고, 온군해(溫君解)로 하여금 주선(主船)을 지휘하게 한 다음, 자신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녀 수행시켰던 쾌속선으로 바꾸어 탔다.
결국, 실라선은 가우리의 해군선에 걸려 변변히 대항 한 번 못해 본 채 격침되고 말았다. 온군해는 이미 탈출해 버린 김춘추를 위하여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가우리 해군선들은 실라의 대장선을 격침시킴으로써 거기 타고 있던 김춘추도 물고기 밥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되돌아갔다.
위기일발! 김춘추는 부하들의 희생 위에 구사일생으로 살아 실라로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 §
2020.6.19.편집
一鼓 김명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