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릴 지브란의 ‘예언자’
칼릴 지브란(Kahlil Gibran, 본명 지브란 카릴 지브란 빈 미카일 빈 사드, 아랍어: جبران خليل جبران بن ميخائيل بن سعد, 1883년 1월 6일 ~ 1931년 4월 10일)은 레바논계 미국인으로 예술가이며, 시인, 작가이었다. 그 당시 오토만 시리아의 영토이었던 근대 레바논의 브샤리 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그의 가족은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그는 미국에서 예술을 공부하고,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그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1923년작 예언자는 영어 산문체로 쓴 철학적 에세이 연작 중 하나이다. 영감이 넘치는 창작의 초기 사례에 해당하는 이 책은, 냉담한 비평적 평판을 받았지만, 잘 팔렸고, 1960년대 반(反) 문화의 창작물 중에서 가장 대중적인 작품이 되었다.[1]
지브란은 오늘날 레바논의 북부에 위치한, 기독교 분파인 마론 교회의 신자들이 모여 사는 브샤리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외할아버지는 마론파 가톨릭 성직자이었다.[2] 그의 어머니 카밀라는 서른 살에 지브란을 낳았다. 그의 아버지는 이름이 칼릴이었고, 어머니에게는 세 번째 남편이었다.[3] 가정이 가난했기 때문에, 지브란은 어린 시절에 어떠한 정규 교육도 받을 수 없었다. 그러나 성직자들이 정기적으로 그의 집을 찾아와 그에게 아랍어와 시리아 언어로 기록된 성서를 가르쳐 주었다.
지브란의 아버지는 약국에서 일하기 시작했지만 도박으로 진 빚을 갚을 수 없게 되자, 오토만 정부에서 임명한 지방의 관리[4] 또는 장군으로 일하게 되었다.[5] 그의 통치에 대해 화가 난 백성들의 불만이 확산되었기 때문에, 행정관은 지브란의 아버지를 1891년 경에 관직에서 쫓아냈다.[6]. 지브란의 아버지는 횡령 혐의로 감옥에 갔고,[1] 오토만 황제의 관리들은 그의 가족이 지닌 재산을 몰수하였다. 머무를 집조차 없는 상황에서, 지브란의 어머니는 그녀의 친척을 뒤따라 미국으로 이민 가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지브란의 아버지는 1894년에 감옥에서 풀려 났지만, 카밀라 지브란은 한 번 내린 결정을 바꾸지 않았고, 아들 칼릴과 칼릴의 어린 여동생들인 마리아나와 술타나, 그리고 칼릴의 이복 형제인 피터를 데리고 1895년 6월 25일 뉴욕으로 향했다.[4]
지브란은 보스턴의 사우스 엔드에 정착했다. 그 당시 그 곳에는 미국에서 두 번째로 큰 시리아/레바논계 미국인 공동체가 있었다.[7] 그의 어머니는 여자 재봉사로 일하기 시작했다.[6] 그의 어머니는 레이스 장식이 달린 옷과 아마포로 만든 옷을 팔려고 이 집 저 집을 돌아다녔다. 지브란은 1895년 9월 30일에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다. 학교 당국은 이민자를 위한 영어 학습 과정에 그를 배정하였다. 지브란은 정착촌 주변에 있던 예술학교에도 등록하였다. 그 학교의 교사를 통해서 그는, 아방가르드 보스턴 예술가이자 사진사이며 출판업자이었던, 프레드 홀랜드 데이를 소개 받았다.[1] 프레드는 지브란의 창작 노력을 격려하고 후원했다. 1898년 한 출판업자가 지브란의 그림 중 일부를 책표지로 사용했다. 지브란의 어머니는 지브란의 형인 피터와 뜻을 같이하여, 지브란이 그가 당시에 매력을 느끼던 서구의 심미적인 문화보다 태어난 나라의 전통적인 문화에 더 많이 동화되길 원했다.[6] 15세에 지브란은 베이루트에 있는 고등교육 기관과 마론교회가 운영하는 입시 준비 학교에서 공부하려고 레바논으로 돌아갔다. 그는 학생 문학 잡지를 동급생과 함께 만들기 시작했고, "학교 시인"으로 뽑히기도 했다. 몇 년간 레바논에 머물던 그는 1902년 5월 10일에 엘리스 섬을 통해 보스턴으로 돌아왔다.[8] 그가 돌아오기 2주 전에, 그의 여동생 술타나가 결핵으로 14살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다음 해에는 그의 형제인 브후트로스가 같은 결핵으로 숨졌고, 그의 어머니는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또다른 여동생 마리아나는 자신이 여성복 양장점에서 일하면서, 지브란을 뒷바라지하였다.[1]
지브란은 그의 첫 번째 그림 전시회를 1904년 보스턴에 있는 데이의 스튜디오에서 열었다.[1] 전시회를 여는 동안에, 지브란은 훌륭한 여교장으로 그보다 10년 연상인 메리 엘리자베스 해스켈을 만났다. 해스켈과의 중요한 우정은 지브란의 나머지 생애동안 지속되었다. 해스켈은 지브란의 개인적인 삶과 그의 창작 활동 모두에 영향을 끼쳤다. 지브란은 1908년에 파리에 가서 아우구스테 로딘과 함께 2년동안 예술을 공부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평생 친구이자 예술적 동료이었던 유세프 호와예크(Youssef Howayek)를 만났다. 그는 이후에 보스턴에서 예술을 공부했다.
지브란과 알고 지낸 사람이었던 줄리엣 톰슨은, 지브란의 여러 일화를 기록했다.[9] 그녀는 지브란이 바하이 신앙의 리더로서 대략 1911년[4]에서 1912년 경에 미국을 방문한[9] 압둘-바하를 만났다고 적었다.
지브란의 초기 작품은 거의 대부분 아랍어로 기록되었고, 1918년 이후에 출간된 그의 작품은 거의 대부분이 영어로 기록되었다. 그의 첫 번째 책은 알프레드 노프 회사에서 1918년에 "미친 사람"이란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두께가 얇은 그 책은 성서적 운율을 따른 경구와 비유를 담고 있으며, 시와 산문의 중간 쯤에 해당하는 문체를 지니고 있었다. 지브란은 또한 뉴욕 펜 연맹에서도 일정한 역할을 담당했으며, "이민자 시인"으로 이름을 떨친 레바논계 미국인 작가들과 친분을 쌓았다.
지브란은 작품에서 기독교를 많이 다루었는데, 특히 영적인 사랑의 주제를 즐겨 다루었다. 그의 시는 영감이 충만한 말로 삶의 화두에 대한 통찰을 보여주었고, 그뿐 아니라 형식적인 언어의 사용으로도 주목받았다. 지브란의 작품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예언자"는, 스물 여섯 편의 시적인 산문으로 이루어진 책이다.
지브란 박물관과 지브란의 무덤, 레바논 브샤리에 있다.
지브란은 뉴욕에서 1931년 4월 10일에 세상을 떠났다. 사망의 원인은 간경변과 폐결핵이었다. 죽기 전에 그는 레바논에 묻히고 싶다고 말했다. 그 소원은 1932년에 이루어졌다. 메리 해스켈과 그의 언니 마리아나가 레바논에 있는 마르 사르키스 수도원을 구입했고, 그 곳에 지브란을 묻고, 지브란 박물관을 세웠던 것이다.
칼릴 지브란은 아랍 지식계에서 가장 칭송받는 작가로 꼽힐 만큼 떠오르고 있었다. 기독교 교육을 받으며 자랐지만 이슬람교, 수피즘, 유대교의 교리에도 관심이 많았다. 지리적 믿음과 종교적 믿음 간의 전통적 관계에서 탈피하려 했다. 이런 사상은 삽화가 들어간 그의 영문 산문시 모음집 ‘예언자’에 나타났다.
지브란은 이 작품에서 경전에 나오는 문체를 사용하여 예언자 알무스타파가 도시를 떠나기 직전에 사람들에게 주제별로 짤막하게 설명한 내용들이다. 에세이들은 인간관계를 강조한다. 하나의 신념에 얽메이지 말고 범애와 다양성을 망라하여 주제로 삼았다.
* 예언자의 여러 에세이 중에 한 편을 올리겠다.
-사랑에 대하여-
그러자 알미트라는 말했다.
사랑에 대하여 말씀해 주소서.
그는 머리를 들어 사람들을 보았고, 그런 그들 위로 잠시 동안 고요가 머물렀다.
마침내 그는 목소리를 높여 말하기 시작했다.
사랑이 그대들을 부르면 그를 따르라, 비록 그 길이 험하고 가파를지라도.
사랑의 날개가 그대들을 싸 안을 땐, 몸을 내어 맡기라,
비록 사랑의 날개 속에 숨은 칼이 그대들에게 상처를 줄지라도.
사랑이 그대들에게 말할 땐 그 말을 믿으라,
비록 북풍이 저 뜰을 폐허로 만들어버리듯 사랑의 목소리가 그대들의 꿈을 망가지게 하더라도.
왜? 사랑이란 그대들에게 영광의 관을 씌우는 만큼 또 그대들을 괴롭히는 것이니까.
사랑이란 그대들을 성숙시키는 만큼 또 그대들을 베어 버리기도 하는 것이니까.
심지어 사랑은 그대들 속의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가 햇빛에 떨고 있는 그대들의 가장 부드러운 가지를 껴안지만,
한편 사랑은 또 그대들 속의 뿌리로 내려가 대지에 엉켜 있는 그것들을 흔들어대기도 하는 것이기에. 사랑은 마치 곡식단과 같이 그대들을 자기에게로 거두어 들이는 것,
사랑은 그대들을 두드려 벌거벗게 하는 것.
사랑은 그대들을 채로 쳐 쓸데없는 모든 껍질들을 털어 버리게 하는 것,
사랑은 그대들을 갈아 순백(純白)으로 변하게 하는 것.
사랑은 그대들을 유연해질 때까지 반죽하여,
그런 뒤 신의 거룩한 향연을 위한 거룩한 빵이 되도록 성스러운 자기의 불꽃 위에 올려놓는 것. 사랑은 이 모든 일들을 그대들에게 행하여 그대들로 하여 마음의 비밀을 깨닫게 하고,
그 깨달음으로 사람의 가슴의 한 파편이 되게 하리라.그러나 그대들 오직 두려움 속에서 사랑의 평화, 사랑의 즐거움을 찾으려 한다면,
차라리 그땐 그대들 알몸을 가리고 사랑의 타작 마당을 나가는 게 좋으리라.
계절도 없는 세계로,
그대들 웃는다 해도 실컷 웃을 수는 없는, 그대들 운다 해도 실컷 울 수는 없는 곳으로. 사랑은 저 외에는 아무것도 주지 않으며, 저 외에는 아무것도 구하지 않는 것.
사랑은 소유하지도, 소유 당할 수도 없는 것.
사랑은 다만 사랑으로 충분할 뿐. 사랑할 때 그대들 이렇게 말해서 안 되리라, '신은 나의 마음속에 계시다' 라고.
그보다 '나는 신의 마음속에 있다' 라고 말해야 하리라.
또한 결코 그대들 사랑의 길을 지시할 수 있다고 생각지 말라,
그대들 가치 있음을 알게 된다면 사랑이 그대들의 길을 지시할 것이므로. 사랑은 스스로 충족시키는 것 외에 다른 욕망은 없는 것.
그러나 그대들 사랑하면서도 또다시 숱한 욕망을 품지 않을 수 없다면, 다음의 것들이 그대들의 욕망이 되게 하라 --
녹아서, 밤을 향하여 노래하며 달려가는 시냇물처럼 되기를.
지나친 다정함의 고통을 알게 되기를.
스스로 사랑을 깨달음으로써 그대들 상처받게 되기를.
그리하여 기꺼이, 즐겁게 피 흘리게 되기를.
날개 달린 마음으로 새벽에 일어나 사랑의 또 하루를 향하여 감사하게 되기를,
정오에는 쉬며 사랑의 황홀한 기쁨을 명상하기를,
황혼엔 감사하는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오게 되기를.
그런 다음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마음속으로부터 기도하고 그대들의 입술로 찬미의 노래를 부르며 잠들게 되기를.
첫댓글 "사랑은 소유하지도,
소유 당할 수도 없는 것.
사랑은 다만 사랑으로 충분할 뿐. 사랑할 때 그대들 이렇게 말해서 안 되리라.
'신은 나의 마음속에 계시다' 라고.
그보다
'나는 신의 마음속에 있다' 라고 말해야 하리라.
또한 결코 그대들 사랑의 길을 지시할 수 있다고 생각지 말라."
가슴에 와 닿는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