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오름 달 3月에, 그리고 향,서원에 제향을 올리는 시기에
~~~서울 성균관 "석전대제"에 관람하다~~~
언 제 ; 2019년 3월 11일(음 2月 초5日)
갔는곳 ; 서울특별시 종로구 성균관로 31
<명륜동 3가 53>
양력 3月은 음력 2月 初月(丁卯), 初日(丁未)은 전국 향교며
서원 그리고 성균관에서도 년간 2회 (2월과 8월) 상정일에 향제를 거행함에
성균관 석전교육원장(金時晃 교수)의 초청으로 훌륭한 옛 문화를 관람하고 중식 대접과
원장님의 사무실에 방문, 다과 대접에 감탄을 하며 몇분 동안의 토론에 보람된 시간을 장식하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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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전교육원장 초청에 사)한국인성교육예절교육원의 주관으로 성균관 석전대제 관람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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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성교육예절원장(임귀희여사)의 오늘 행사 내용을 설명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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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산휴게소에서 잠시 휴식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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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은==
설립년도 1289년
설립목적 조선시대 최고의 교육기관.
한국 최고의 학부기관으로서 '성균'이라는 명칭이 처음 사용된 것은
고려 충렬왕 때인 1289년에 그때까지의 최고 교육기관인 국자감(國子監)의
명칭을 '성균'이라는 말로 개칭하면서부터이다. 충숙왕대인 1308년에 성균관으로
개칭되었고, 공민왕대에는 국자감으로 명칭이 바뀌었다가, 1362년에 다시 성균관이라는
이름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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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건국 이후 성균관이라는 명칭은 그대로 존속되어,
1395년부터 새로운 도읍인 한양의 숭교방(崇敎坊) 지역에 대성전(大聖殿)과
동무(東)·서무(西)·명륜당(明倫堂)·동재(東齋)·서재(西齋)·양현고(養賢庫) 및 도서관인
존경각(尊敬閣) 등의 건물이 완성되면서 그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성균관은 태학(太學)으로도 불리었으며,
중국 주나라 때 제후의 도읍에 설치한 학교의 명칭인 '반궁(泮宮)'으로 지칭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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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에는 최고의 책임자로 정3품직인 대사성(大司成)을 두었으며,
그 아래에 좨주(祭酒)·악정(樂正)·직강(直講)·박사(博士)·학정(學正)·학록(學錄)·
학유(學諭) 등의 관직을 두었다. 조선시대의 교육제도는 과거제도와 긴밀히 연결되어서,
초시인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한 유생(儒生)에게 우선적으로 성균관에의 입학 기회를
주었다. 성균관 유생의 정원은 개국 초에는 150명이었으나, 1429년(세종 11)부터
200명으로 정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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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한 유생을 상재생(上齋生)이라 하였으며,
소정의 선발 시험인 승보(升補)나 음서(蔭敍)에 의해 입학한 유생들을
하재생(下齋生)이라 하였다. 성균관 유생은 기숙사격인 동재와 서재에서
생활하였으며, 출석 점수 원점(圓點)을 300점 이상 취득해야만이 대과 초시에
응시할 수 있었다. 유생의 생활은 엄격한 규칙에 의해서 이루어졌으며,
자치적인 활동기구로 재회(齋會)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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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생은 기숙사생활을 하는 동안 국가로부터 학전(學田)과 외거노비(外居奴婢) 등을
제공받았으며, 교육 경비로 쓰이는 전곡(錢穀)의 출납은 양현고에서 담당하였다.
유생은 또한 당대의 학문·정치현실에도 매우 민감하여 문묘종사(文廟從祀)나
정부의 불교숭상 움직임에 대해 집단 상소를 올렸으며, 그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권당(捲堂:수업거부) 또는 공관(空館)이라는
실력행사를 하기도 하였다. 조선 전기 학문의 전당으로서 관리의
모집단으로 주요한 기능을 한 성균관은 조선 후기에 이르면서
교육재정이 궁핍화하고 과거제도가 불공정하게 운영되면서
그 기능이 약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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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의 갑오개혁은 성균관의 역사에서 중요한 굴절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
갑오개혁이 단행되면서 과거제도가 폐지되고, 근대적인 교육개혁이 추진되면서
일정한 변모를 겪게 되었다. 성균관은 개화의 흐름 속에서 한국의 전통적인
유학과 도덕을 지켜 나가는 방향으로 전환되었으며, 1946년 성균관대학의
설립으로 그 전통은 계승되었다. 1785년(정조 9)에 편찬된 《태학지(太學志)》
에는 성균관의 건물 배치도 및 성균관 제도의 변천과정, 유생의 활동내용 등이
기록되어 있어서 조선시대 성균관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많은 참고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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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문묘는 조선 태조 7년(1398)에 처음 세우고 정종 2년(1400)에 불에 탄 것을
태종 7년(1407)에 다시 지었으나, 이 역시 임진왜란으로 타버렸다.
지금 있는 건물들은 임진왜란 이후에 다시 지은 것이다.
문묘는 대성전을 비롯한 동무·서무 등 제사를 위한 공간인 대성전 구역과
명륜당, 동재·서재 등 교육을 위한 공간인 명륜당 구역으로 크게 나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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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전(大成殿)은 선조 34∼35년(1601∼1602)에 지은 건물로,
공자를 비롯해 증자·맹자·안자·자사 등 4대 성인과 공자의 뛰어난
제자들인 10철, 송조 6현, 그리고 우리나라 명현 18인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4칸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건물의 두 옆면과 뒷면 벽 아랫부분에 돌아가며 낮게 벽담을 쌓았는데,
이는 중국 건축 기법을 느끼게 한다. 대성전 앞에 마주해 있는 동무와 서무는
공자의 제자와 중국과 우리나라 선현들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선조 36∼37년
(1603∼1604)에 세웠다. 동무와 서무 끝에서 시작하여 주위로 담장을 둘러
대성전 구역과 명륜당 구역을 나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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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공간인 명륜당(明倫堂)은 대성전의 뒤편에 위치해 있는데,
선조 39년(1606)에 지은 건물로 가운데 중당과 양옆에 있는 익실로 구분하는데,
중당은 옆면에서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고 익실은 팔작지붕으로
중당보다 조금 낮게 구성되어 위계(位階)를 나타내 주고 있다. 지붕과 처마의
높낮이와 전체적인 건물의 균형이 우리나라 건축의 특색을 잘 나타내고 있다.
명륜당 앞에 마주하여 남북으로 길게 배치되어 있는 동재·서재는 기숙사
공간으로 성균관(成均館)이라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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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문묘는 조선시대 공자를 비롯한 선현들의 제사와 유학교육을 담당하던 곳이며,
또한 건축사 연구의 자료로서 전통과 역사가 깊이 배어있는 곳이다.
정의=서울의 성균관이나 지방의 각 향교에 부설되어 있는 강학당(講學堂).
개설=‘명륜(明倫)’이란 인간사회의 윤리를 밝힌다는 뜻으로, 『맹자』 등문공편
(滕文公篇)에 “학교를 세워 교육을 행함은 모두 인륜을 밝히는 것이다.”라 한 데서
유래한 것이다. 성균관의 유생들이 이곳에서 글을 배우고 익혔으며, 또한 왕이 직접
유생들에게 강시(講試)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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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1398년(태조 7)에 성균관 대성전(大成殿) 북쪽에 건립한 것이 시초이다.
좌우에 협실(夾室)이 있고 중간에 당(堂)이 있어 총 18칸이며,
앞에는 각각 18칸의 동재와 서재가 있는데 성균관의 유생들이 기거하던
재실(齋室)이다. 지방의 명륜당이 대성전 앞에 건립되어 있는 데 반하여
성균관의 명륜당은 대성전 뒤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이곳에서 조선 말엽까지 많은 학자와 정치인들이 배출되었을 뿐 아니라,
국민의 도의정신과 사회정의를 부식하고 교화하는 근원(首善之地)이 되었다.
그리고 역대 왕이 때때로 행차하여 대성전에 참배하고 유생들을 격려하기도
하였으며 왕세자가 입학할 때에는 문묘에 석채례(釋菜禮: 석존례)를 올리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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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하여 동양사상과 문화의 진수를 우리의 오랜 전통 속에 심어
고전정신을 북돋워 새로운 역사 창조의 바탕을 마련한 곳이며,
경전의 이해도를 측정하는 시험이나 소과(小科)·대과(大科)를
행하는 장소로도 사용되어왔다.
명륜당 안에는 이황(李滉)의 『성학십도(聖學十圖)』 중의 하나로 수록되어
있는 주희(朱熹)의 ‘백록동규(白鹿洞規)’ 현판이 있고, 2개의 어필 현판,
송준길(宋浚吉)이 쓴 「심잠(心箴)」과 「경재잠(敬齋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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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밖에 ‘夙興夜寐箴(숙흥야매잠)’ 등 여러 현판이 걸려 있는데,
모두 궁리수신(窮理修身)과 처사접물(處事接物)의 정주사상(程朱思想)을
기본으로 삼은 것들이다. 이러한 게시문들은 명륜당에서 학문을 탐구하는
유생들에게 항상 눈에 뜨이게 하여 지식 습득에만 치우치지 않고 마음공부를
일깨우려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건물 추녀 밑에 있는 ‘明倫堂(명륜당)’ 글씨는 1606년(선조 39)에 명나라의 사신
주지번(朱之蕃)이 우리나라에 왔을 때 쓴 것이라고 전하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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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국악고등학교의 일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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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내 독축 영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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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참여 기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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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림회관 전체 건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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