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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8월 25일(성령강림절 후 열네 번째 주일)
로마서 1:8~17
교회와 복음
하늘사랑교회 주일오전예배 설교문
김규태 목사
다음주일이면 우리교회가 설립된 지 13주년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대전 지역에 하늘사랑교회를 세우시고, 지금까지 우리를 인도해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저는 어제 교회 권사님들 몇 분과 함께 교회당 곳곳을 깨끗이 청소했습니다.
한 권사님은 이번 주일에 이웃교회 성도님들이 우리교회를 방문하신다는 소식을 듣고 새 실내화 여러 켤레를 준비해 주셨습니다. 저는 성도님들의 작지만 소중한 헌신이 우리교회를 세워가는 원동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교회 청년부에 ‘틱’ 증세을 가진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 청년은 틱 중에서도 욕을 하는 ‘음성 틱’을 가졌다고 합니다. 그 교회 청년부 전도사님이 교회에 부임하기 전에, 틱을 가진 청년이 있다고 살짝 듣기는 했는데 막상 그 청년을 마주하니 만만치가 않았다고 합니다.
전도사님이 설교하는데, ‘아멘’이 나올 법한 타이밍에 이 청년은 계속 큰 소리로 쌍욕을 했습니다. 무섭기도 하고 거슬리기도 했습니다. 키도 제법 크고, 인상도 강해 보여서 전도사님은 자기로 모르는 사이에 그 청년에 대해 부정적인 선입견이 형성되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이 전도사님이 이 청년과 반년 정도 함께 지내다 보니, 조금씩 적응이 되었습니다. 키는 컸지만 허당이었고, 인상은 강해 보였지만 센 척이었습니다. 어느 순간 전도사님은 이 청년을 편한 동생처럼 대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전도사님이 그 청년에게 어쩌다 교회를 오게 되었는지, 왜 교회를 다니고 있는지를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그 청년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솔직히 하나님이나 예수님에 대한 믿음 그런 건 아직 잘 모르겠는데, 여기 교회는 저를 그냥 받아줘서 오는 거예요.” 그때 전도사님은 이 청년이 교회 공동체의 중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한번은 전도사님이 다른 교회 청년부와 연합수련회를 준비하면서 몇몇 청년들에게 이 친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자기 교회 청년부는 이미 오랜 시간 동안 익숙해져서 그러려니 하고 있지만, 그 청년이 다른 교회 청년부와 섞이게 되면 스스로 더 힘들어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한 청년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전도사님, 저는 아무개가 이번 수련회 때 무조건 우리와 함께 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게 우리 공동체의 가장 중요한 정체성이니까요. 만약 우리가 아무개를 품고 함께 가지 못한다면, 우리 교회가 존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 우린 교회잖아요.”
-출처: 김정주, 「안녕, 기독교」(토기장이, 2019); 「생명의 삶 플러스」(두란노, 2024년 6월호), 147쪽에서 재인용.
여러분은 이 청년의 이야기를 듣고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우리는 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늘사랑교회로 불러주신 이유는 우리 교회 안에 있는 연약한 지체들을 품고 함께 가길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감사와 기도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과연 바울이 무엇 때문에 감사하고 있을까요?
바울이 감사하는 이유는 로마교회 성도들의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얼굴로는 로마교회 성도들을 직접 만나본 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믿음의 소문은 온 세상에 전파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교회를 방문할 기회가 자신에게 주어지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바울은 로마교회를 방문해 그들에게 나누어 줄 것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11절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
바울이 나누어 주기 원했던 것은 ‘신령한 은사’였습니다. 여기서 ‘은사’는 ‘은혜의 선물’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로마교회를 방문해서 그들에게 은혜의 선물을 나누어 주기 원했습니다.
교회는 은혜의 공동체
은혜는 주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세워입니다. 그 때문에, 바울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나누어서 로마교회를 견고히 세워주기 원했습니다.
유기성 목사님이 지은 「예수님의 사람」이란 책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마산 어느 교회의 목사가 부목사로 섬긴 지 5년째 되던 해, 담임목사를 나가기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손등에 부스럼이 생긴 것을 발견했습니다. 종합병원에 가서 정밀검사를 받아보니 피부암이었습니다. 그래서 담임목회는커녕 부목사직마저 내려놓고 항암치료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항암치료를 받던 어느 날, 충북 음성에 있는 한 교회에서 주일예배 시간에 설교를 해 달라는 부탁이 들어왔습니다. 그 교회를 담임하던 목사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면서 후임자로 친구인 이 목사를 추천했던 것입니다.
그 교회 교인들은 담임목사가 추천한 목사가 온다고 해서 잔뜩 기대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주일이 되어 교회에 나타난 목사의 모습을 본 교인들은 크게 실망을 했습니다. 머리카락은 다 빠지고 뼈만 앙상하게 남은 암 환자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목사가 주일 설교를 한 후, 교회에서는 다시 담임목사 청빙위원회가 열렸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어느 교인이 오늘 설교한 목사를 담임으로 모시자는 의견을 냈습니다. 어떻게 암 환자이신 분을 담임목사로 모시자고 하느냐며 다들 깜짝 놀랐지만, 그 교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 예배 때, 저는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은혜를 받았습니다. 목사님이 비록 암 환자이시지만 우리가 한 주 설교를 듣고 장례를 치러드리더라도 우리 교회는 복 받은 것 아니겠습니까?”
결국, 교회는 그 목사를 담임으로 모시기로 결정하고 청빙서를 보냈습니다. 청빙서를 받아 든 목사는 울었다고 합니다. 그러고는 사모와 함께 기도원으로 들어가 금식기도를 했습니다.
그들은 그 교회에 갈 생각이 없었습니다. 자신들의 처지를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들은 암 환자인 자기를 담임목사로 청빙 하겠다는 교인들의 마음이 고마워서, 그 교회에 정말 훌륭한 목회자를 보내 달라는 기도를 드리고 싶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금식하며 기도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암이 치유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는 자신의 병이 치유된 것을 하나님의 계시로 여기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교회의 청빙을 받아들였습니다.
-출처: 유기성, 「예수님의 사람2」(위드지저스, 2020).
여러분, 이 이야기를 듣고 어떤 느낌을 받으셨습니까? 참 감동적인 이야기가 아닙니까? 교회는 은혜의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견고히 설 수 있습니다. 우리 하늘사랑교회가 더욱 견고히 서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간절히 사모해야하고, 그 은혜를 다른 사람과 나누어야 합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선물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하나님께 받은 물질도, 시간도, 건강도, 재능도 모두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선물로 주신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께 받은 물질과 시간과 건강과 재능을 다른 사람과 나누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한 주간 말씀을 묵상하다가 깨달은 은혜도 나누고, 여러분이 삶 속에서 체험한 간증도 다른 사람과 나누어야 합니다. 행복한 교회, 건강한 교회는 나눔이 풍성한 교회입니다. 저는 우리 하늘사랑교회 성도님들이 주님이 주신 은혜를 다른 사람과 나누어서 우리교회가 더욱 행복하고 건강한 교회로 세워지기를 소원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주님께 받은 신령한 은사를 다른 사람과 나눈다면, 그 일이 다른 사람에게 큰 격려가 될 것입니다. 12절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안위함’을 <표준 새번역 성경>에서는 ‘격려’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주신 은혜를 다른 사람과 나누어서 피차 격려를 주고 받아야 합니다. 한 주간 세상 살이에 지치고 힘들었던 분들이 교회에 나와서 위로와 격려를 받도록, 우리는 주님의 은혜를 다른 사람과 나누어야 합니다.
빚진 자의 마음으로
우리가 주님의 은혜를 다른 사람과 나눌 때 기억해야 할 마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빚진 자의 마음으로’ 은혜를 나누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학자들은 바울이 고린도에 머물러 있을 때 로마서를 기록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로마서에는 고린도에 있던 사람들의 이름이 많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제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을 거쳐 로마로 향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당시 ‘땅 끝’이라고 여겨졌던 서바나 지역 즉, 지금의 스페인 지역까지 방문해서 주의 복음을 전하기 원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오늘 본문에서는 로마를 방문하기 원하는 바울의 마음이 여러 차례 표현되어 있습니다(11;13;15절).
그중에서도 저의 눈길을 끄는 구절은 15절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15절).”
저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다음과 같은 궁금증을 느꼈습니다. 왜 바울은 이미 복음을 듣고 교회가 세워진 로마에 다시 복음 전하기를 원했을까요?
혹시 바울은 다른 사역자들이 전한 복음이 시원치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까요?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부질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14절에서 바울은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라고 고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바울의 고백에는 영적인 우월감을 전혀 느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바울은 ‘빚진 자의 마음’으로 로마교회를 방문해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를 만나기 이전에 극심한 박해자였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께서 바울에게 찾아오셨을 때, 그의 인생은 극적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는 박해자였던 바울을 전도자로 바꾸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도 은혜에 빚진 자의 마음으로 전했습니다.
과연 저와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저와 여러분은 모두 복음에 빚진 자입니다.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기 전의 바울처럼 예수믿는 사람들을 박해하지는 않았을지라도, 우리는 빛 되신 예수님을 외면하며 나의 만족과 유익을 위해 살았던 존재였습니다.
저는 몇해 전에 전도 현장에서 다음과 같은 소감을 가졌습니다.
저는 오늘 전도현장에서 젊은이 전도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교회가 위치한 둔산동 지역은 대전에서 주로 중산층이 모여 살고 있는 안정된 지역이고, 젊은이들이 많이 살고 있는 지역입니다.
저는 오늘 전도의 현장에서 많은 젊은이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 그들이 복음에 대해서 무관심하거나 심하게 거부하는 모습을 자주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대중매체나 SNS(Social Network Service)를 통해서 목회자의 부도덕한 모습이나 교회의 부정적인 기사들을 접하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젊은이들이 기독교 복음에 대해서 쉽게 마음을 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저와 함께 전도한 분들도 대부분 그 의견에 공감대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사모님의 말이 저에게 큰 도전이 되었습니다. 그 사모님은 젊은 시절에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분은 기독교 신앙을 갖는데 가장 큰 걸림돌은 ‘전도’였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분은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길거리에 나와 다른 사람에게 예수님을 믿으라고 전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다음과 같은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왜 저 사람들은 저렇게 전도할까? 믿으려면 자기 혼자만 믿으면 되지 왜 종교를 남들에게 강요하지? 어차피 신앙은 자유인데 나에게까지 찾아와서 예수를 믿으라고 하는 것은 나를 불편하게 해!”
그러던 어느 날, 이 분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었고, 기독교 신앙에 입문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신앙이 자라 지금은 목사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분은 길거리에서 복음을 거부하고, 전도하는 모습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젊은이들을 보면 예전의 자기 모습을 보는 것 같다고 고백했습니다.
이 사모님의 말 중에 우리가 귀담아 들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젊은이들이 전도대원들을 거부한다고 해서 그들이 기독교 자체나 복음에 대해서 거부하는 것은 아니에요. 만약 전도자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심각한 오해를 한 거지요. 젊은이들이 거부하는 것은 단지 그들이 젊은 사람이기 때문이에요.”
저는 이 분의 이야기를 듣고 청년 전도에 대한 우리의 관점을 바꿀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전도자는 비판의식이 강하고 독립적인 성향을 가진 청년들을 보고 낙심하거나 그들을 부정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 청년들의 성향을 잘 이해하고 넓은 마음으로 포용해 주어야 합니다.
그들이 전도하는 분들에 대해서 거부감을 표현한다고 해서 그들이 기독교 복음 자체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단지 그들이 젊은 사람이기 때문에 그러한 반응을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빚진 자의 마음으로 교회를 섬겨야 하고, 세상을 섬겨야 합니다. 우리는 상대방이 어떤 사람이던지, 그들이 어떤 태도를 보이던지 관계 없이, 빚지 자의 마음으로 그들을 섬겨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피가 이 세상 모든 사람을 위한 속죄의 피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복음만이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이야기 하나를 전해 드리고 설교를 마치고자 합니다.
어느 교회 집사님의 큰아들이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집사님은 ‘목사님의 주례로 교회에서 결혼식을 하면 며느리와 아들을 전도할 수 있겠지’라는 소망에서 목사님에게 주례를 부탁했습니다.
“목사님, 평생 남편과 5남매를 위해 기도했는데, 왜 나는 한 식구도 구원하지 못할까요?” “집사님, 너무 걱정 마세요. 저도 전도하겠습니다.”
결혼식은 토요일 11시였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아침 7시에 그 집사님이 연탄가스 중독으로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목사님은 가족 중 한 사람만 시신을 지키는 것이 좋겠다고 설득해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식이 끝나자마자 목사님은 신랑과 신부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신부는 놀라지 말고 들으세요. 시어머니는 오늘 새벽 사망하셨어요. 이제 예복을 벗고 상복을 입고 시어머니 장례식을 합시다. 목사인 내가 도와줄 테니 너무 걱정 마세요.”
그런데 장례식에서 반전이 있었습니다. 세 아들이 목사님에게 찾아와서 무릎을 꿇고 회개했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는 이랬습니다. 결혼 전날 밤이었습니다. 손님이 많이 와서, 쓰지 않던 방에 연탄불을 피우고 삼형제가 자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금요 철야기도를 하고 새벽 2시쯤 들어와 곤히 자고 있는 아들들을 깨웠습니다.
“내가 너무 춥구나. 너희는 아버지 방에 가서 자렴. 엄마는 기도하며 몸을 녹일 테니.”
어머니의 청에 못이겨 아들들은 다른 방으로 건너가서 잠을 잤습니다. 결국, 어머니는 세 아들이 마실 연탄가스를 홀로 마셨습니다. 그 일을 통해 온 가족이 교회에 나와서 세례를 받고, 지금은 집사로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어머니는 가족을 전도한 것입니다.
-출처: 김병태, 「하나님의 퍼즐」(브니엘, 2014); 「생명의 삶 플러스」(두란노, 2024년 7월호), 41쪽에서 재인용.
여러분은 이 이야기를 듣고 무엇을 느끼셨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는 은혜의 공동체이며, 오직 은혜로만 교회가 세워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은혜를 다른 사람과 나눌 때, 서로에게 큰 격려가 될 뿐만 아니라 행복한 교회, 건강한 교회를 세워나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빚진 자의 마음으로 은혜를 나누십시오. 교회에 세상에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오직 복음만이 모든 믿는 자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됩니다.
저는 우리 하늘사랑교회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교회가 되기 원합니다. 우리교회가 더 많은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나누는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