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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y Dipnall 의 그림)
내가 살아 보니까
오늘 아침 무심히 차에서 내리다가 문득 가을을 만났다. 언제 어디서 떨어졌는지 퇴색한 플라타너스 잎 하나가 동그마니 내 차 지붕 위에 얹혀 있었다. 어느새 비껴 내리는 햇살은 한껏 부드러워졌고, 스치듯 지나가는 바람 냄새는 풋풋했으며, 흰 구름 몽실몽실 피어 있는 하늘은 예사롭지 않게 푸르렀다. 새삼 정신을 차리고 유심히 둘러보니 이제는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마다 조금씩 소멸을 준비하는 모습이 완연했다. 아무런 생각 없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내 마음이 이제는 차돌같이 굳어 아무런 틈새가 없는 줄 알았는데 웬걸, 문득 휑한 바람 한줄기가 가슴을 훑고 지나갔다. 아, 가을이구나.
나무와 풀은 이 세상에서의 삶과 사랑이 치열했던 만큼 미련도 남고 아쉬움도 많으련만 이제 생명과의 이별을 저마다 다소곳하게 순명順命으로 준비하고 있었다. 온갖 시련에도 다시 추스르고 일어나 열매를 맺고, 마침내 스스로 마지막 순간을 준비하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생각해보면 나도 내 인생의 가을 문턱에 서 있다. 삶에 대한 애착이야 남겠지만 그래도 있는 날까지 있다가 내 시간이 오면 나무처럼 풀처럼 미련을 버리고 아름답게 떠나고 싶은 마음은 있다.
어제 TV에서는 우리나라의 빈부 차이를 보여주는 특별 프로그램을 방영했다. 병이 들어 직업도 못 얻고 혼자 속절없이 죽어 가고 있는데도 단돈 100만 원이 없어 살던 집에서 쫓겨나야 하는 빈민촌 사람. 그런가하면 골프 연습장까지 갖추고 있다는 강남의 어느 주상복합 아파트는 한 채에 20억을 호가해도 매물이 없어서 못 판다고 했다.
명품 핸드백에 중독에 가까운 증세를 보이는 어느 젊은 여자와의 인터뷰도 있었다. 방에는 온갖 명품 핸드백이 색깔별, 모양별로 가득 있었고 그것도 모자라 일본에서 발행하는 명품에 관한 잡지를 구독해 가면서 새로 나온 디자인을 구입한다고 했다. 최하 50만 원짜리부터 500만 원까지 하는 핸드백도 있었다. 왜 굳이 명품을 들고 다니느냐는 질문에 그 여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이걸 들고 다니면 사람들의 눈길이 느껴져요. 저를 쳐다보는…….”
그 여자의 말에 나는 적이 놀랐다. 단지 다른 사람의 눈길을 느끼기 위해서 그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하다니. 나는 목발을 짚고 다니는 덕에 누구나 다 쳐다보는지라 남의 시선이 별로 달갑지 않은데, 그 여자는 시선 때문에 그 많은 노력도 불사한다는 것이다. 물론 사람들이 그 여자를 쳐다보는 것은 부러워서이고 나를 쳐다보는 것은 불쌍해서라고 하겠지만, 내가 살아 보니까 사람들은 남의 삶에 그다지 관심이 많지 않다. 그래서 남을 쳐다볼 때는 부러워서든 불쌍해서든 그저 호기심이나 구경 차원을 넘지 않는다.
어렸을 때 우리 집 우산 하나가 살이 빠져 너덜거렸는데 그 우산이 다른 우산에 비해 컸기 때문에 어머니가 나를 업고 학교에 갈 때는 꼭 그걸 쓰셨다. 업혀 다니는 것도 자존심 상하는데 게다가 너덜거리는 우산까지……. 그래서 비 오는 날은 학교 가기가 끔찍하게 싫었다. 온 세상 사람들이 다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모르긴 몰라도 그때 내가 찢어진 우산을 쓰고 다녔다는 것을 기억하는 이는 아마 지금 이 세상에 아무도 없을 것이다. 찢어진 우산이든 멀쩡한 우산이든 비 오는 날에도 빼먹지 않고 학교를 다니면서 공부를 했다는 사실만이 중요하다. 그래서 내가 그 여자에게 하고 싶은 말은, 내가 살아 보니까 정말이지 명품 핸드백을 들고 다니든, 비닐봉지를 들고 다니든 중요한 것은 그 내용물이라는 것이다. 명품 핸드백에도 시시한 잡동사니가 가득 들었을 수 있고 비닐봉지에도 금덩어리가 담겨 있을 수 있다. 물론 이런 말을 해봤자 사람들, 특히 젊은 사람들에게 이상한 궤변 말라고 욕이나 먹겠지만, 내가 살아 보니까 그렇다는 말이다.
내가 살아 보니 남들의 가치 기준에 따라 내 목표를 세우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나를 남과 비교하는 것이 얼마나 시간 낭비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내 가치를 깎아 내리는 것이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인 줄 알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은 결국 중요하지 않은 것을 위해 진짜 중요한 것을 희생하고, 내 인생을 잘게 조각내어 조금씩 도랑에 집어넣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도 어렸을 때 주위 어른들이 겉모습, 그러니까 어떻게 생기고 어떤 옷을 입고가 중요한 게 아니라 마음이 중요하다고 할 때 코웃음을 쳤다. 자기들이 돈 없고 못생기고 능력이 없으니 그것을 합리화하려고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내가 살아 보니까 정말 그렇다. 결국 중요한 것은 껍데기가 아니고 알맹이다. 겉모습이 아니라 마음이다. 예쁘고 잘생긴 사람은 TV에서 보거나 거리에서 구경하면 되고 내 실속 차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 재미있게 공부해서 실력 쌓고, 진지하게 놀아서 경험 쌓고, 진정으로 남을 대해 덕을 쌓는 것이 결국 내 실속이다.
내가 살아 보니까 내가 주는 친절과 사랑은 밑지는 적이 없다. 내가 남의 말만 듣고 월급 모아 주식이나 부동산 투자한 것은 몽땅 다 망했지만, 무심히 또는 의도적으로 한 작은 선행은 절대로 없어지지 않고 누군가의 마음에 고마움으로 남아 있다. 소중한 사람을 만나는 것은 1분이 걸리고 그와 사귀는 것은 한 시간이 걸리고 그를 사랑하게 되는 것은 하루가 걸리지만, 그를 잊어버리는 것은 일생이 걸린다는 말이 있다. 그러니 남의 마음속에 좋은 기억으로 남는 것만큼 보장된 투자는 없다.
어차피 세월은 흐르고 지구에 중력이 존재하는 한 몸은 쭈글쭈글 늙어 가고 살은 늘어지게 마련이다. 내가 죽고 난 후 장영희가 지상에 왔다 간 흔적은 별로 없을 것이다. 어차피 지구상의 65억 인구 중에 내가 태어났다 가는 것은 아주 보잘것없는 작은 덤일 뿐이다. 그러나 이왕 덤인 김에,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덤이 아니라, 없어도 좋으나 있으니 더 좋은 덤이 되고 싶다.
하지만 아무리 내가 입 아프게 말해도 이 모든 것은 절대로 말이나 글로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다. 진짜 몸으로 살아 내야 깨달을 수 있다. 그래서 먼 훗날, 내가 이 땅에서 사라진 어느 가을날, 내 제자나 이 책의 독자 중 한 명이 나보다 조금 빨리 가슴에 휑한 바람 한줄기를 느끼면서 “내가 살아보니까 그때 장영희 말이 맞더라”라고 말하면, 그거야말로 내가 덤으로 이 땅에 다녀간 작은 보람이 아닐까.
다시 시작하기
오늘 들어온 이메일 목록 중 ‘다시 시작합니다.라는 제목이 눈에 띄었다. 어디에선가 내 글을 읽고 가끔씩 소식을 주는 고등학생 기준이의 메시지였다. 원하던 대학에 불합격해서 내년을 기약하고 다시 시작하기로 했고, “그런 저의 결정이 올바른 것이기를 기도합니다. 선생님 격려해 주십시오”라고 적혀 있었다. 비장한 각오이지만 어쩐지 자신 없고 슬프게 들렸다. 나는 “잘 결정했군요. 나중에 후회하지 않도록 다시 시작해 보세요. 오히려 좋은 기회로 삼으세요.라고 짤막한 답을 적어 보냈다. 그러나 사실 지금 기준이에게 그런 메시지는 그저 듣기 좋으라고 하는 립서비스로만 들릴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다시 시작할 의도도, 필요도 없는 사람의 여유 있는 호기로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래전 나는 정말 뼈아프게 ‘다시 시작하기’의 교훈을 배웠고, 그 경험은 내 인생의 가장 소중한 기억 중 하나이다. 1984년 여름 뉴욕 주의 주도州都 올버니에 있는 뉴욕 주립대학교에서 6년째 유학 생활을 하던 나는 학위 논문을 거의 마무리 짓고 심사만 남겨 놓은 채 행복한 귀국을 꿈꾸고 있었다. 지도교수 거버 박사가 워낙 깐깐하고 정확한 분인 데다가 논문 주제가 ‘물리적 세계와 개념 세계 사이의 자아 여행’이라는 너무나 추상적인 것이어서, 2년간 그야말로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끝에 어느 정도 만족스러운 논문을 완성할 수 있었다.
그런데 심사를 얼마 안 남기고 당시 LA에 살던 언니가 아프다는 소식이 왔다. 나는 어차피 곧 떠날 것이므로 차제에 기숙사 방을 비우고 LA로 가서 언니와 함께 있기로 했다. 짐을 가볍게 하기 위해 그동안 책상 위에 높이 쌓였던 논문 초고들을 과감하게 다 버리고, 내 전 재산 ― 옷 몇 벌, 책 몇 십 권, 그리고 논문 최종본 ― 을 모조리 트렁크 하나에 집어넣었다. LA에서 마지막 원고 수정을 한 후 논문 심사 날짜에 맞춰 돌아올 셈이었다.
그러나 내가 LA에 도착하자마자 언니는 한국에 가서 쉬었다 오기로 결정하고 서울로 떠났고, 같은 날 나는 다시 뉴욕행 비행기를 탔다. 케네디 공항까지 마중 나와 준 친구는 올버니로 가기 전에 차나 한잔하자며 나를 그린위치 빌리지에 있는 자기 집으로 데려갔다. 그 친구 집에 들어가서 10분쯤 지났을까, 막 커피를 마시려는데 열 살짜리 친구 딸이 들어와 도둑이 차 트렁크를 열고 내 짐 꾸러미를 몽땅 훔쳐 달아났다고 전했다. 내 논문, 내 논문……. 나는 그 자리에서 기절했다.
어떻게 올버니로 돌아왔는지 기억이 없다. 친구가 함께 와준다는 것을 뿌리치고 깜깜한 밤에 기차를 타고 어찌어찌 기숙사로 돌아와서 방문을 잠갔다. 전화도 받지 않고, 아무것도 먹지 않은 채 꼬박 사흘 밤낮을 지냈다. 두꺼운 비닐 커튼은 내가 닫고 간 그대로였고, 8월 중순이었으니 무척이나 더웠을 텐데 더위나 배고픔을 느낄 기력도 없이 그냥 넋이 나간 채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 무거운 책가방을 메고 목발을 짚고 눈비를 맞으며 힘겹게 도서관에 다니던 일, 엉덩이에 종기가 날 정도로 꼼짝 않고 책을 읽으며 지새웠던 밤들이 너무나 허무해 죽고 싶었다. 무엇보다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 외롭고 힘들어도 논문을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일만을 희망으로 삼고 살아왔는데, 이제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간 셈이었다.
닷새째쯤 되는 날 아침, 눈을 뜨니 커튼 사이로 한줄기 햇살이 스며들어 어두침침한 벽에 가느다란 선을 긋고 있었다. 그런데 문득 이상한 호기심이 일었다. 잃어버린 논문과는 상관없이 사람이 닷새 동안 먹지 않고 누워 있으면 어떤 모습이 되는지, 지금의 내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어지러움을 참고 일어나 침대 발치에 있는 거울을 보았다. 헝클어진 머리에 창백한 유령 같은 모습이 나타났다. 가만히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하게도 내 속 깊숙이에서 어떤 목소리가 속삭이는 것이었다.
‘괜찮아. 다시 시작하면 되잖아. 다시 시작할 수 있어. 기껏해야 논문인데 뭐. 그래, 살아 있잖아……. 논문 따위쯤이야.’
선택의 여지가 없어져 본능적으로 자기방어를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 절체절명의 막다른 골목에 선 필사적 몸부림이 아니었다. 조용하고 평화롭게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일어서는 순명順命의 느낌, 아니, 예고 없는 순간에 절망이 왔듯이 예고 없이 찾아와서 다시 속삭여 주는 희망의 목소리였다.
나는 이제 지구상에 내게 남은 단 한 가지 소유물인 내 손가방을 뒤져 보았다. 껌 두 개, 조카에게 주려고 LA공항에서 샀던 레이커스 농구팀 티셔츠, 체크북 그리고 손지갑 속에 든 20달러 한 장이 전부였다. 우선 샤워를 하고 레이커스 티셔츠로 갈아입은 다음 캠퍼스 스낵바에 가서 닭튀김을 한 열 조각쯤, 거의 토할 지경까지 먹었다. 그러고 나서 논문 지도교수인 거버 박사를 찾아갔다.
미리 연락드려 사정을 알고 있었던 거버 박사는 두 팔 벌려 반갑게 맞아 주셨다. “오늘쯤 올 줄 알았다. 아닌 게 아니라 웨스트부룩 박사와 함께 점심을 먹으며 영희는 그대로 주저앉을 사람이 아니라고, 곧 올 거라고 얘기했었지. 넌 뭐든 극복하는 사람이니. 이제 경험이 많으니까 더 좋은 논문을 쓸 수 있을 거야.” 거버 박사는 올버니로 오는 기차 안에서 울다가 잃어버린 콘택트렌즈를 새로 사라고 100달러를 주셨다. 거버 박사의 주선으로 과에서는 다시 강사 자리를 주었고, 도서관에서는 잃어버린 몇십 권의 책 반납을 면제해 주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정확히 1년 후 나는 다시 논문을 끝냈다.
15년이 흐른 지금 생각해도 여전히 가슴이 내려앉을 정도로 힘든 경험이었다. 그러나 그 경험을 통해서 나는 절망과 희망은 늘 가까이에 있다는 것, 넘어져서 주저앉기보다는 차라리 다시 일어나 걷는 것이 편하다는 것을 배웠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끝낸 내 논문은 이제 반짝거리는 젊은 학자들의 논문에 비하면 내놓을 만한 것이 못 될지 모르지만, 맨 첫 페이지만큼은 누가 뭐래도 자랑스럽다. 헌사에서 나는 ‘내게 생명을 주신 사랑하는 나의 부모님께 이 논문을 바칩니다. 그리고 내 논문 원고를 훔쳐 가서 내게 삶에서 가장 중요한 교훈 ― 다시 시작하는 법을 가르쳐 준 도둑에게 감사합니다’라고 적었다.
누군가 지금 기준이처럼 불합격과 실패의 좌절을 안고 다시 시작하면서 슬퍼하는 사람이 있다면, 도둑에게 헌정한 내 논문을 보여 주면서 “인생이 짧다지만 ‘다시 시작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1년은 충분히 투자할 가치가 있습니다.라고 말해 주고 싶다.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샘터》의 오랜 독자들은 나를 기억할지도 모른다. 2003년 12월 ‘아름다운 빚’이라는 글로 나는 당시 4년간 연재하던 ‘새벽 창가에서’를 닫았다. 그리고 꼭 3년 만에 다시 나타났다. ‘다시 나타났다’는 말을 쓰니 정말 홀연히 바람처럼 사라졌다가 불현듯 모습을 드러낸 느낌이 드는데, 어쩌면 그건 나의 ‘공백기’를 설명하기에 가장 적합한 말인지도 모른다.
3년 ― 젊은 사람들에게 3년은 인생의 드라마를 창출할 만큼 긴 시간이다. 군에 입대한 남학생이 전역할 만한 시간이고, 새 신부가 아기 둘을 낳을 만한 시간이고, 신입 사원이 잘하면 대리가 될 수 있는 시간이고, 아, 그리고 우리 학생들을 보면 누군가를 만나 사랑하고 아픈 이별을 하고 또다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하기에도 충분할 만큼, 3년이라는 기간은 의미심장할 수 있다.
하지만 내 나이에 3년이란 세월은 그렇지 않다. 신상에 무슨 커다란 변화를 기대하기보다 이미 오랜 세월에 걸쳐 설정된 삶의 자리가 그냥 ‘조금 더’ 깊어지는 기간이다. ‘조금 더’ 늙어 가서 ‘조금 더’ 눈가에 주름이 잡히고 ‘조금 더’ 내 살아가는 모습에 길들여지고, ‘조금 더’ 포기하고 ‘조금 더’ 집착의 끈을 놓고…….
그럼에도 《샘터》에서 사라졌던 지난 3년 동안 나는 내 인생의 가장 큰 변화를 겪었다. 칼럼을 닫고 나서 얼마 후에 척추암 선고를 받았고, 2004년 9월 8일 나의 영명축일에 갑작스레 병원에 입원했고, 2006년 5월 도합 스물네 번의 항암 치료를 마칠 때까지, 거의 2년에 가까운 시간을 긴긴 투병 생활로 보냈다.
돌아보면 그 긴 터널을 어떻게 지나왔는지 새삼 신기하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지난 3년이 마치 꿈을 꾼 듯, 희끄무레한 안개에 휩싸인 듯 선명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다. 통증 때문에 돌아눕지도 못하고 꼼짝없이 침대에 누워 있던 일, 항암 치료를 받기 위해 백혈구 수치 때문에 애타던 일, 온몸의 링거 줄을 떼고 샤워 한번 해보는 것이 소원이었던 일, 방사선 치료 때문에 식도가 타서 물 한 모금 넘기는 것조차 고통스러워하며 밥그릇만 봐도 헛구역질하던 일, 그런 일들은 의도적 기억 상실증처럼 내 기억 한편의 망각의 세계에 들어가 있어서 가끔씩 구태여 끄집어내야 잠깐씩 회생되는 파편일 뿐이다.
그 세월을 생각하면 그때 느꼈던 가슴 뻐근한 그리움이 다시 느껴진다. 네 면의 회벽에 둘러싸인 방 안에 세상과 단절되어 있으면서 나는 참 많이 바깥세상이 그리웠다. 밤에 눈을 감고 있을라치면 밖에서 들리는 연고전 연습의 함성 소리, 그 생명의 힘이 부러웠고, 창밖으로 보이는 파란 하늘 아래 드넓은 공간, 그 속을 마음대로 걸을 수 있는 무한한 자유가 그리웠고, 무엇보다 아침에 일어나 밥 먹고 늦어서 허둥대며 학교 가서 가르치는, 그 김빠진 일상이 미치도록 그리웠다. 그리고 그런 모든 일상 ― 바쁘게 일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누군가를 좋아하고 누군가를 미워하고 ― 을, 그렇게 아름다운 일을, 그렇게 소중한 일을 마치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태연히 행하고 있는 바깥세상 사람들이 끝없이 질투 나고 부러웠다.
하루는 저녁 무렵에 TV를 보는데 유명한 보쌈집을 소개하고 있었다. 보쌈 만드는 과정을 보여 준 다음, 손님 중 한 중년 남자가 목젖이 다 보이도록 입을 한껏 크게 벌리고는 큰 보쌈 하나를 입에 넣더니 양 볼이 불룩불록 움직이게 씹어서 꿀꺽 삼키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상갓집에 가면 보통 육개장, 송편, 전 등 자금자금한 음식들이 나오고 상추쌈이나 갈비찜 같은 음식은 나오지 않는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는데, 상갓집에서 입을 크게 벌리고 먹는 것은 죽은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한다. 미련을 남긴 채 이 세상을 하직하고 이제는 아무리 하찮은 음식일지라도 먹을 수 없는 망자 앞에서 보란 듯이 입을 쩍 벌리고 어적어적 먹는 것은 무언無言의 횡포라는 것이다. 보쌈을 먹고자 입을 크게 벌린 그 남자의 격렬한 식탐, 꿀꺽 삼키고 나서 그의 얼굴에 감도는 찬란한 희열, 그 숭고한 삶의 증거 앞에 나는 지독한 박탈감을 느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바깥세상으로 다시 나가리라. 그리고 저 치열하고 아름다운 일상으로 다시 돌아가리라.
그리고 난 이렇게 다시 태어났다. 나의 본래 자리로 돌아왔다. 다시 강단으로 돌아왔고, 아침에 자꾸 감기는 눈을 반쯤 뜬 채 화장실에 갔다가 밥을 먹고, 늦어서 허겁지겁 학교로 가는 내 편안한 일상으로 돌아왔고, 이젠 목젖이 보이게 입을 크게 벌리고 보쌈도 먹고 상추쌈도 먹고 갈비찜도 먹는다. ‘어부’라는 시에서 김종삼 시인은 말했다.
바닷가에 매어 둔 작은 고깃배
날마다 출렁인다.
풍랑에 뒤집힐 때도 있다
화사한 날을 기다리고 있다
(…)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된다
사노라면
많은 기쁨이 있다.
맞다. 지난 3년간 내가 살아온 나날은 어쩌면 기적인지도 모른다. 힘들어서, 아파서, 너무 짐이 무거워서 어떻게 살까 늘 노심초사했고 고통의 나날이 끝나지 않을 것 같았는데, 결국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열심히 살며 잘 이겨냈다. 그리고 이제 그런 내공의 힘으로 더욱 아름다운 기적을 만들어 갈 것이다. 내 옆을 지켜주는 사랑하는 사람들, 그리고 다시 만난 독자들과 같은 배를 타고 삶의 그 많은 기쁨을 누리기 위하여…….
희망을 너무 크게 말했나.
인터뷰를 할 때마다 질문자가 내게 빼놓지 않고 하는 질문이 있다. 신체장애, 암 투병 등을 극복하는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가이다. 그럴 때마다 난 참으로 난감하다. 그래서 그냥 본능의 힘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의지와 노력으로 가질 수 있는 힘이 아니라 내 안에서 절로 생기는 내공의 힘, 세상에서 제일 멋진 축복이라고, 난 그렇게 희망을 아주 크게 떠들었다. 여러분이여 희망을 가져라. 희망을 갖지 않는 것은 어리석다.
에피소드도 인용했다. 두 개의 독에 쥐 한 마리씩을 넣고 빛이 들어가지 않도록 밀봉한 후 한쪽 독에만 바늘구멍을 뚫는다. 똑같은 조건 하에서, 완전히 깜깜한 독 안의 쥐는 1주일 만에 죽지만 한줄기 빛이 새어 들어오는 독의 쥐는 2주일을 더 산다. 그 한줄기 빛이 독 밖으로 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되고, 희망의 힘이 생명까지 연장시킨 것이다.
대학교 2학년 때 읽은 헨리 제임스의 『미국인』이라는 책의 앞부분에는, 한 남자 인물을 소개하면서 ‘그는 나쁜 운명을 깨울까봐 무서워 살금살금 걸었다’라고 표현한 문장이 있다. 나는 그때 마음을 정했다. 나쁜 운명을 깨울까봐 살금살금 걷는다면 좋은 운명도 깨우지 못할 것 아닌가. 나쁜 운명, 좋은 운명 모조리 다 깨워 가며 저벅저벅 당당하게, 큰 걸음으로 걸으며 살 것이다, 라고.
아닌 게 아니라 내 발자국 소리는 10미터 밖에서도 사람들이 알아들을 정도로 크다. 낡은 목발에 쇠로 된 다리보조기까지, 정그렁 찌그덩 정그렁 찌그덩, 아무리 조용하게 걸으려 해도 그렇게 걸을 수 없다. 그래서 그런지 돌이켜 보면 내 삶은 요란한 발자국 소리에 좋은 운명, 나쁜 운명이 모조리 다 깨어나 마구 뒤섞인 혼동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인생은 새옹지마라고, 지금 생각해 보면 흑백을 가리듯 ‘좋은’ 운명과 ‘나쁜’ 운명을 가리기는 참 힘들다. 좋은 일이 나쁜 일로 이어지는가 하면 나쁜 일이 다시 좋은 일로 이어지고…… 끝없이 이어지는 운명행진곡 속에 나는 그래도 참 용감하고 의연하게 열심히 살아왔다.
그래도 분명 ‘나쁜 운명’으로 규정지을 수 있는 것은 아마 지난 2001년 내가 암에 걸린 일일 것이다. 방사선 치료로 완쾌 판정을 받았으나 2004년에 다시 척추로 전이, 거의 2년간 나는 어렵사리 항암 치료를 받았다. 그리고 2006년 5월, 중단했던 월간지 칼럼 ‘새벽 창가에서’로 나는 다시 돌아왔다. 그때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이라는 글에서 썼듯이 나는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 3년 만에 ‘홀연히’ 다시 나타난 것이다.
나는 그게 희망의 힘이라고 떠들었다. 내 병은 어쩌면 더 좋은 사람이 되어가는 ‘아름다운’ 경력일 거라고 쓰기도 했다. 췌장암에서 기적처럼 일어난 스티브 잡스를 흉내 내, 죽음에 대한 생각은 어쩌면 삶을 리모델링해서 더욱 의미 있고 깊이 있는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전제 조건일지 모른다고도 썼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에 대한 생각에는 추호도 변함이 없다. 돌이켜 보면 나는 나의 희망 이야기를 스스로 즐겼다. 미국 사람들은 좋은 일을 크게 말하면 공기 속에 떠다니는 나쁜 혼령이 시샘해서 훼방을 놓는다고 믿는다. 난 나쁜 혼령이 듣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고 크게 떠들었다. 그런데 나는 암이 다시 척추에서 간으로 전이되었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래서 지금 난 다시 나의 싸움터, 병원으로 돌아와 있다. 살금살금 조심조심 삶의 눈치를 보며 살아야 했는데, 나는 저벅저벅 큰 발자국으로 소리내며 걸었고, 그래서 다시 나쁜 운명이 깨어난 모양이다.
지난번보다 훨씬 강도 높은 항암제를 처음 맞는 날, 난 무서웠다. ‘아드레마이신’이라는 정식 이름보다 ‘빨간약’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항암제. 환자들이 빨간색을 보기만 해도 공포를 느끼고, 한 번 맞으면 눈물도 소변도, 하다못해 땀까지도 빨갛게 나온다는 독한 약. 온몸에 매캐한 화학물질 냄새와 함께 빨간약이 내 몸에 퍼져 갈 때, 최루탄을 맞은 듯 눈이 따가웠다.
그날 밤 문득 잠을 깼다. 갑자기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옆 침대에서는 동생 둘이 간병인용 침대 하나에 비좁게 누워 잠이 들었고, 쌕쌕 숨 쉬는 소리가 들렸다. 가만히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밖에서 들어오는 희미한 불빛에 천장의 흐릿한 얼룩이 보였다. 비가 샌 자국인가 보다.
그런데 문득 그 얼룩이 미치도록 정겨웠다. 지저분한 얼룩마저도 정답고 아름다운 이 세상, 사랑하는 사람들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는 이 세상을 결국 이렇게 떠나야 하는구나. 순간 나는 침대가 흔들린다고 느꼈다. 악착같이 침대 난간을 꼭 붙잡았다. 마치 누군가 이 지구에서 나를 밀어내듯. 어디 흔들어 보라지, 내가 떨어지나, 난 완강하게 버텼다.
이 세상에서 나는 그다지 잘나지도 또 못나지도 않은 평균적인 삶을 살았으니 무슨 일이 있어도 그다지 길지도 짧지도 않은 평균 수명은 채우고 가리라. 종족 보존의 의무도 못 지켜 닮은 꼴 자식 하나도 남겨두지 못했는데, 악착같이 장영희의 흔적을 더 남기고 가리라. ‘나중에 돈 많이 벌면 그때……’ 생각하고 좋은 일 하나 못했는데 손톱만큼이라도 장영희가 기억될 수 있는 좋은 흔적 만들리라.
언젠가 어려운 처지에 있는 어느 학생이 내게 물었다. “한 눈먼 소녀가 아주 작은 섬 꼭대기에 앉아서 비파를 켜면서 언젠가 배가 와서 구해 줄 것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녀가 비파로 켜는 음악은 아름답고 낭만적인 희망의 노래입니다. 그런데 물이 자꾸 차올라 섬이 잠기고 급기야는 소녀가 앉아 있는 곳까지 와서 찰랑거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앞이 보이지 않는 소녀는 자기가 어떤 운명에 처한 줄도 모르고 아름다운 노래만 계속 부르고 있습니다. 머지않아 그녀는 자기가 죽는 것조차 모르고 죽어갈 것입니다. 이런 허망한 희망은 너무나 비참하지 않나요?”
그때 나는 대답했다. 아니, 비참하지 않다고. 밑져야 본전이라고. 희망의 노래를 부르든 안 부르든 어차피 물은 차오를 것이고, 그럴 바엔 노래를 부르는 게 낫다고. 갑자기 물때가 바뀌어 물이 빠질 수도 있고 소녀 머리 위로 지나가던 헬리콥터가 소녀를 구해 줄 수도 있다고. 그리고 희망의 힘이 생명을 연장시킬 수 있듯이 분명 희망은 운명도 뒤바꿀 수 있을 만큼 위대한 힘이라고.
그 말은 어쩌면 그 학생보다는 나를 향해 한 말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난 여전히 그 위대한 힘을 믿고 누가 뭐래도 희망을 크게 말하며 새봄을 기다린다.
(장영희 에세이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중에서)
▣ 저자 장영희 교수는?
1971년 서강대학교 영문과에 입학, 1975년 졸업하고 뉴욕주립 대학에서 영문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1985년) 미국여성학사회(AAUW)에서 주는 국제여성지도자 연수자로 뽑혀 컬럼비아 대학에서 1년간 번역학을 공부했으며 서강대학교 영문과 교수이자 번역가, 교육부 검정 초·중고교 영어교과서 집필자로 활동하였다.
생후 1년 만에 두 다리를 쓰지 못하는 소아마비 1급 장애인이 됐지만 거뜬히 장애를 딛고 영미문학자이자, 수필가의 길을 걸어온 그녀는 2001년에 유방암 선고를 받은 후 완치되었지만, 2004년 척추에서 암이 재발하고, 간암판정까지 받는 등 연이은 시련을 겪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혹독한 병마와 싸워오면서도 세상 사람들에게 희망과 긍정적인 삶을 보여주었고, 투병기간 중에도 『문학의 숲을 거닐다』, 『축복』, 『생일』 등 책과 일간지 칼럼을 통해 희망과 감동을 선사하였다.
그중 대표작인 『문학의 숲을 거닐다』는 조선일보의 ‘문학의 숲, 고전의 바다’ 코너에 실렸던 장영희 교수의 북칼럼 모음집으로 척추암 선고를 받기까지 약 3년간 연재된 글들을 모았으며, 세계의 고전문학들이 그녀 자신의 삶을 얼마나 풍요롭게 하였는지에 대해 작가 특유의 편안한 문체로 쓴 책이다. 그리고 마지막 수필집인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을 완성해 암과 장애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의 빛을 남기고, 2009년 5월 9일 낮 12시 50분, 향년 57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첫댓글 장영희님,
당신은 덤으로 살다 가신것이 아니라
한 인생을 치열하고 당당하게 굳세게
살아 내셨습니다.
주옥같은 당신의 글들은
독자들의 심금을 울리기에 충분하고 되새김질 하게 만듭니다.
당신께서 이땅에 살다 가신것은
장애를 가진분들의 희망이며 자랑입니다.
그러나 님이시여!
지금, 그곳에선 편안하시지요?
편견도 고통도 불편한 시선도 없는 그곳에서 영면하소서.
당신의 삶은 후세에 귀감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