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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맑히기(좋은 글) 스크랩 *부처 닮아가는 이가 참불자
태일(太一) 추천 0 조회 13 14.01.27 12:56 댓글 3
게시글 본문내용

 

부처 닮아가는 이가 참불자

제악막작(諸惡莫作)
중선봉행(衆善奉行)
자정기의(自淨其意)
시제불교(是諸佛敎)

모든 악을 짓지 말고
선을 받들어 행하라
스스로 그 뜻을 청정히 하면
이것이 곧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니라

칠불통계게(七佛通戒偈)입니다. 이 안에 불교가 다 있습니다. 
팔만사천 경전에 수많은 내용이 들어있지만, 
그 내용이 전부 마음을 부지런히 닦아 선행을 쌓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수승한 공덕이 있는 것이지요. 
불교는 사람이 살고자 하는 길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불교가 어렵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은데, 불교 자체가 어려운게 아니고
 ‘중선봉행’의 삶이 어렵다는 것이예요. 알면서도 행하지 못하니 어려울 수밖에요. 
우리는 ‘모든 부처님이 왜 악을 짓지 말고 선을 받들어 행하라고 했을까’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선인선과 악인악과(善因善果 惡因惡果)’라는 간단한 답으로 통합니다. 
지금 이 순간 일어나는 모든 현상과 경계는 우연히 생겨난 일이 아닙니다. 
전생에 또는 과거에 지은 모든 행위들이 씨앗이 되어 
현재의 조건들이 관계지어져 지금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지요. 
다시말해 원인이라는 인(因)과 조건이라는 연(緣)이 만나 열매(果)가 맺어진 것이지요. 
이것이 인과법입니다. 누구도 인과의 도리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를 바르게 이해하고 제대로 실천하는 이는 많지 않습니다. 
인과의 도리를 믿는다면 마음 닦는 수행이 뒤따라야 합니다. 
수행은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섭수를 근간으로 합니다. 
섭수가 없다면 수행은 진척이 있을 수가 없어요. 
즐거움도, 괴로움도 모두 받아들이는 가운데 수행이 한걸음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인욕이라 했습니다. 인욕과 섭수를 행하는 수행자에게는 걸림이 없을 것입니다. 
기도를 많이 한다고 해서 괴로움이 비켜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치열한 수행심이 괴로움에 걸리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수행자는 괴로움이 없는 이가 아니라 괴로움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입니다. 수
행에 승속이 따로 있을 수 없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불자라면 응당 마음 닦는 공부를 해야 하는 겁니다.

수구섭의신막범(守口攝意身莫犯)
여시행자능득도(如是行者能得道)

입을 지키고 뜻을 섭수하며 몸으로 범하지 말라
이와 같이 실천하는 이가 능히 도를 얻으리라

선업과 악업의 기준이 되는 것이 계(戒)입니다.
 계는 일률적으로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상황과 처지에 맞는 계를 줍니다.
 스님에게는 스님에 맞는 계가 주어지고, 
재가불자에게는 재가불자에 맞는 계가 주어집니다. 
신라시대 화랑에게는 불교의 5계를 바꾸어 세속 5계를 내렸습니다.
 세속 5계의 내용에는 불살생과는 맞지 않은 
살생유택(살생하되 가림이 있으라)이 들어있습니다. 
여기에 개차(開遮)의 도리가 있습니다. 
보조국사 지눌 스님은 이 개차의 도리를 
<계초심학인문> 첫 구절에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무릇, 처음 마음을 일으켜 수행하는 사람은 모름지기 나쁜 벗을 멀리하고 
어질고 착한 벗을 가까이 하라. 오계 십계를 받아 지키고 범하는데 
열고 닫음을 알아야 하느니라.
 (夫初心之人 須遠離惡友 親近賢善 受五戒十戒等 善知持犯開遮).’ 
언뜻 생각해보아도 이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계를 범하는 것은 죄를 짓는 일일진대 ‘열고 닫음을 알아야 한다’고 
여지를 남기는 것은 모순이 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죄 역시 연기법에서 예외일 수 없습니다. 
죄는 본래 실체가 없이 연기하기 때문에 죄를 짓게 된 잘못된 마음도 사라집니다.
 이렇게 죄를 지은 마음과 죄가 사라지면 그것이 진정한 참회입니다. 
수백겁에 쌓인 죄업이라도 한 생각에 없어져서 
마른 풀이 불에 타버리듯 흔적조차 없어지는 것입니다.

죄무자성종심기(罪無自性從心起)
심약멸시죄역망(心若滅時罪亦亡)
죄망심멸양구공(罪亡心滅兩俱空)
시즉명위진참회(是則名爲眞懺悔)

죄는 본래 자성이 없어 마음 따라 일어나고 
허망한 마음이 사라지면 죄업 또한 없어지나니 
죄와 허망한 마음 둘 다 비워지면 
이를 일러 진실한 참회라 하느니라.

안타깝게도 우리 불교는 기복적인 모습을 많이 갖고 있습니다. 
불자들은 절에 오면 부처님 앞에서 
나와 내 가족에게 좋은 일만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나쁜 일은 부처님이 다 가져가라고 합니다. 
복을 바라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에 앞서 자신이 복을 지었는지 되돌아 보세요. 
복을 지으면 복이 돌아오기 마련이거든요. 절에 가서 인과법을 공부했으면 
절을 나서서도 인과의 도리를 믿고 작복을 해야 합니다. 
기복과 작복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복을 빌기만 하면 기복이고 복을 지으면 작복입니다. 
작복불교는 기복을 한차원 높인 신앙이예요. 복 짓는 불교가 되기 위해서는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스스로에게 당당해져야 합니다. 
선한 씨앗에서 선한 열매가 열리듯 복을 지음으로써 복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은 변하지 않는 진리입니다.
불교를 믿는 사람은 부처님을 닮아가는 사람입니다. 어렵고 힘들때만 
부처님에게 매달리는 것을 바른 믿음이라 할 수는 없는 거예요.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세상을 슬기롭게 살아가는 지혜를 배우는 것 또한 
불자된 도리가 아닐까요? 슬기롭게 산다는 것은 분수에 맞게 산다는 뜻입니다. 
분수에 맞지 않는 삶은 불행을 가져다 줍니다. 
마치 물고기가 물을 벗어나면 죽는 것과 같아요. 
요즘 세상이 참 무섭다고들 합니다. 각종 사회통계를 보면 종교를 믿는 인구는 
갈수록 늘어나는데 나타나는 현상은 정반대의 모습이거든요. 이것은 종교가
 제역할을 못하고 있거나 종교의 가르침을 형식적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다시말해 수많은 종교인들이 바른 믿음을 갖고 있지 않다는 반증 아닐까요? 
종교는 인간이 지녀야할 양심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파사현정(破邪顯正)과 지악수선(止惡修善)을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지요. 
삼척 삼장사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어느 방송국에서 매주 교양강좌 프로그램을 만드는데 저와 목사, 신부를 초청해 
매번 같은 시간대에 만났습니다. 그런데 서로 안면식이 있는데도 아는 척을 하지 않아요. 
사람들에게 세상을 바르게 살라고 가르치는 성직자 세 사람이 만나서 
서로 먼 산만 바라보고 있는 겁니다. 우리 사회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축소판 같았어요. 
그래서 제가 먼저 말을 걸었습니다. 
그랬더니 보이지 않던 무수히 많은 벽들이 일시에 무너져 내렸습니다. 
어색함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분위기가 밝게 바뀌더군요. 세상 사는 이치는 이렇습니다. 
내가 먼저 마음을 열고 다가서면 벽이 있을 수 없는 것이지요. 
없는 벽도 있게 만드는 것이 마음인데, 이 마음이란 것이 쉽게 열리질 않습니다. 
어떤 현상 앞에 서면 자신이 작게 보이고 초라하게 느껴져 위축되고 말지요. 
수행은 마음을 열어주는 최상의 방법입니다. 수행을 열심히 하는 사람은 당당해집니다.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아도 그렇게 되는 것이에요. 
사람들은 ‘수행’ 하면 단박에 부처를 이룬다고 생각하지만 
수행의 결과는 그렇게 단박에 나올 수가 없습니다. 
수행을 하면 서서히 몸에서 배어나오는 것입니다. 
정작 본인은 이 작은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자연과 가깝게 지내세요. 자연을 마음으로 대하고 잘 살피면 
비로소 몸과 마음이 깨끗해지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마당가의 풀을 뽑는 가운데 불교가 있고, 숨을 쉬는 가운데 불교가 있습니다. 
이처럼 불교는 내안에도 있고, 내 옆에도 있으며 내가 없는 곳에도 있습니다.

재덕스님 
정리=박봉영 기자·사진=박재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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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4.01.27 15:27

    첫댓글 큰 느낌을 담은 법문 고맙습니다...

  • 14.01.27 22:13

    죄무자성종심기 심약멸시죄역망 죄망심멸양구공 시즉명위진참회, 천수경 중에서도 자주 되새기는 구절입니다.
    나무관세음보살 ()()()

  • 17.07.12 09:04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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