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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사 주필산전투의 의문. 당군의 나머지 병력은 어디갔어?
고구려이야기 추천 0 조회 1,518 13.02.02 21:22 댓글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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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삭제된 댓글 입니다.

  • 작성자 13.02.02 23:22

    고연수 휘하라도 적어도 6만은 되죠. 포로가 된 3만 6천+전사자 2만+기타 튀어버린 병력들. 그런데 당태종은 3만을 가지고 6만을 유인해서 섬멸하겠다는 작전이 얼마나 위험하다는 것인지 알고 있었을까요. 알렉산더도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큰 도박을 걸어서 이겼는데 당태종이 아무리 천재 전술가라도, 3만으로 6만을 섬멸해버리겠다 이런 작전을 조기에 짜고 행동했던 건 아무리 봐도 의문이 듭니다.

  • 13.02.02 23:41

    충분히 가능하죠. 연개소문 쿠데타 직후로 지휘가 제대로 안되던 상황이니....... 고연수가 결국 하책으로 전투에 임할 것을 알 정도였으니 고구려 군에 대해 정통했다고 볼 수 있지요. 당시 막장인 고구려군을 보고 이세민이 3만으로도 이를 충분히 격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 작성자 13.02.02 23:44

    하책으로 전투에 임한다고 한 것은, 음 전쟁과 역사라는 책에 따르면 전통적인 중국 제갈공명식 서술법이고 사실 안시성과 연개소문의 내분으로 인해 어짜피 고구려군은 안시성과 연계 못하고 또 대군을 일으킨만큼 보급도 잘 안될 터이니 회전을 택할 것이다.
    이런 말이라고 해석을 하던데요.

  • 13.02.02 23:46

    예. 그러니 그만큼 고구려군 사정에 정통했다는 것이지요.

  • 작성자 13.02.02 23:49

    그러나 우선 고구려군 수만을 앞에 두고 있는 상황에서 3만으로 회전에 임하는 건 상식선에서 이해하기 힘든 행동이네요.
    회전에 임한다면 상대적인 병력우위를 가지고 임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닐까요.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당태종의 만용이라고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 13.02.02 23:54

    애초에 이세민이 동원했던 군대가 10만입니다. 수나라와 비교하면 그야말로 엄청나게 적지요. 이것도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것이지요. 그러나 이 병력으로 고구려군에게 엄청난 피해를 주고 땅까지 빼았습니다. 당 태종이 고구려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고구려가 엉망진창이었따는 것이지요. 주필산 전투도 이와 비슷하다고 봅니다. 완벽한 정보력을 바탕에 두었으니 3만으로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본 것이지요.

  • 작성자 13.02.02 23:58

    한니발의 격언에 말하듯이 회전은 기본적으로 큰 도박이고, 기보가 모두 고구려군보다 병력이 열세인데 그렇게 쉽게 이길 것이라고는 장담하지 못하죠. 실제 3만으로 보기에는 당태종이 너무 자신만만한 감이 있습니다.
    고구려군이 돌도끼 들고 뛰어다니는 야만족이 아닌 이상에야 쉽게 작전에 말려들어줄 것이라고 보장할 수도 없죠.

  • 13.02.03 00:08

    고구려는 완전 분열상태에다가 그에 대한 정보를 제대로 알고 있고 보기도 고구려보다 뛰어나면 뛰어났지 못한 상황이 아니죠. 이런 상황에서 이세민과 이세적 정도의 명장이라면 자신만만할 수 있죠. 굳이 3만이 아니라고 부정할 이유는 하나도 없습니다.

  • 13.02.03 16:22

    신당서에는 당군이 17만으로 나와 있는 걸로 알고 있슴요. 저도 이쪽을 지지함. 구당서에는 육군으로 이세적이 6만+ 당태종이 이끈, 숫자를 알수 없는 '천자의 군대'가 있었다고 하니까 양쪽 합처서 치면 대충 신당서의 병력 규모와 비슷한 정도가 나올거 같고, 17만 정도면 이시기의 당 원정군 중에서 대규모이긴 하지만 최대치인 것도 아니니까...

  • 13.02.03 18:26

    <<신당서>>가 10만입니다. <<구당서>>에 이세민이 6군을 이끌고 낙양을 출발했다는 기록이 있지요. 6군이 금군인지 아니면 <<주례>>에 나오는 군 편제단위인지는 모르지만, 금군을 육군이라고 부른 것은 현종 이후이니 전통적인 군 편제단위로 보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이 군이 <<주례>>에서는 1만 2천 5백, <<국어>>에서는 1만명이지요. <<구당서>>가 무종 이전에는 각 황제의 실록을 참고한 것을 생각하면 신뢰를 할 수 있으나 <<구당서>>를 참고한 사마광이 <<자치통감>>에서 이 기사를 빠뜨린 것을 보면 뭔가 좀 애매합니다. 이 부분은 좀 더 신중히 다룰 필요가 있지 않나 합니다.

  • 13.02.03 19:54

    신당서도 처음에는 장량의 4만, 이적의 6만을 언급하지만, 뒤에는 병사는 10만 중 1천, 선사는 7만 중 수백이 상했다는 기록이 있지 않나요?

  • 13.02.03 20:41

    병사 10만 중 천여명이, 수부 7만 중 수백명이 사망했다고 나오기는 합니다. 士와 船師를 구분한 것으로 봐서는 장량과 이세적의 총 전투요원을 10만, 오지방 선박 500척을 모는 수부를 7만명 동원한 것 같습니다. 다만 수부같은 비전투요원까지 센다면 당나라 군대는 50만 이상으로 잡아야 되는 좀 그런게 있습니다. 안시성 때 떡하니 하부 50만을 동원하여 토산을 쌓았다는 기록이 등장하니 말입니다.

  • 13.02.03 21:13

    안시성 토산 50만명은 연인원 개념이라 하루에 사역하는 인원은 1만이 채 되지 않는 걸로 압니다.
    안시성이 엄청나게 큰 성도 아닌데다 산성일 확률이 높은 이상 50만명이 한곳에서 일할 공간이 날 것 같지도 않고요.

    거기다 이적이 6만을 이끌고 갔는데(삼국사기 등) 육군 전체가 6만이라면 당태종은 병사를 거의 끌고 가지 않은게 됩니다. 당이 이시기 의외로 적은 군대로 전쟁을 벌여왔지만 아무리 그래도 원정 전에 설연타에게 '병력 싹 끌고가는데 비었다고 어디 반란 한번 일으켜 보시지?' 할 정도로 군사력을 빼 왔는데 정작 황제가 병력을 거의 끌고 가지 않았다는 것도 이상하고요.

  • 13.02.03 21:14

    중국 기록은 아니지만, 승려 각종(覺從)의 기록에는 소정방이 船師를 이끌고 미자진에 진을 쳤다고 하는데, 이를 보면 선사를 단순히 수부로만 보기보다는 수군으로 해석할 여지가 크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이적의 군대도 신당서에는 騎士라고 하여 구당서의 보,기 6만과 좀 차이가 있고, 또 신당서에서도 이적의 6만 군대가 출발한 이후 또 거란, 해, 백제, 신라등의 군사를 징발했다는걸 보면 당시 태종의 군대를 10만으로 확정하는 것도 논란의 여지가 있을것 같습니다.

  • 13.02.03 21:22

    실제로 당태종이 요수를 건넌 후 교량을 철거해 사졸들의 결의를 굳게 했는데, 이적은 개모성을 점령한 후 남하하여 요동성으로 도달하였으니 당태종이 건넌 교량으로 넘어왔다고 보긴 힘들다고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당태종은 이적의 군과는 별도로 군을 이끌고 있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 13.02.03 23:59

    수군이라는 단어는 水師가 있습니다. 동시대 문헌을 봐도 船師는 수부의 개념이지 수군이나 수병의 뜻이 보이지 않지요. 선사를 데리고 진을 쳤다는 것은 수부를 전투원으로 쓸만큼 예외적인 상황이라고 봐야지 옳지 않을까 합니다.
    그리고 좀 더 살펴보니 騎士가 보기로 사용된 예를 찾을 수 없군요. <<자치통감>>과 <<구당서>>, <<삼국사기>>에 보기로 표시되어 있어서 기와 사로 표시한 줄 알았는데, <<자치통감>>이나 다른 사서를 봐도 보병, 기사 이렇게 나누어 집니다. 아무래도 실록을 참조한 <<구당서>>이니 보기가 더 가까울 듯 한데, <<신당서>>에서 기사로 표시한게 좀 의문이군요.

  • 13.02.04 00:27

    아, 좀 더 뒤져보니 <<자치통감>>에 이세민이 여러 군대를 이끌고 낙양을 출발했다는 기사가 있군요. <<구당서>>와는 다르게 추상적인 표현이기는 하지만, 6만과 4만 외에 다른 군대를 이세민이 직접 이끌고 갔다는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근데 50만 부분은 좀 이해가 안되는군요. 원문이 "築山晝夜不息,凡六旬,用功五十萬,山頂去城數 丈,下臨城中,道宗使果毅傅伏愛將兵屯山頂以備敵." 인데, 쌓은게 60일이고 노동자 50만을 사용했다는 뉘앙스지 연인원 50만 투입이라는 뉘앙스는 아니거든요. 혹시 '用功五十萬'을 연인원 50만으로 해석할 수 있는 근거나 다른 사료가 있는지요?

  • 13.02.04 00:37

    유공//연인원 문제로 언젠가 이글루스 역밸에서 난장판이 벌어진 적이 있죠. 실제 用功의 용례 자체가 연인원을 뜻한다고 직접 명시되어 있는 문헌을 레퍼런스로 제공하신 블로거가 계셨는데, 그 주소로 가보니 지금은 폭파되었더군요. 그 외에도 조선왕조실록에서도 用功을 연인원으로 사용한 것이 명백한 기록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50만 명을 일시에 동원해서 60일이 걸리는 수준의 공역이면 쿠푸의 대피라미드 정도는 저리가라 할 규모입니다. 피라미드 공사의 평균 동원인력도 4만 명이 안되는데 말이죠... ㅡㅡ;;;

  • 13.02.04 03:41

    옥편을 찾아보니 工에 "한 사람의 정상적인 작업 일의 노동단위. 평균적인 사람이 날마다 이루어 낸다고 가정한 일종의 단위." 라고 버젓히 적혀있군요. 한문에서 工과 功은 서로 통하니 功을 工으로 봐도 크게 상관없을 듯 합니다. 즉, 평균적인 한 사람이 하루마다 이루는 노동단위, 즉 연인원을 50만 투입했다는 것이 맞는 말이군요. 그냥 옥편만 찾아보면 끝날 것을 괜히 功에 매달려 이리저리 사료 찾아해맸습니다.

  • 삭제된 댓글 입니다.

  • 작성자 13.02.02 23:35

    음 그런데 항복한 군대는 고연수의 군대라는게 명백하지 않나요?
    그리고 당군이 추격섬멸을 좋아하지만 기본적으로 고구려는 적진인데다가 산지가 많고 요새가 군데군데 있어서 섣불리 추격전을 벌일 수 없습니다(라고 임용한 교수가 말하더라고요)
    일단 고연수군이 당태종과 결전벌인 병력은 6만으로 보는게 맞을듯합니다. 그리고 당태종이 장손무기군에게 '고구려군 후미를 치되 뒤쪽 길은 좀 열어놔라'라고 한 기록이 있는데(어딘지 기억이 ..) 이건 완벽한 포위섬멸이 안 된 것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기사라고 봅니다. 고구려군이 완벽한 포위가 안 되어 다수가 탈출했고 그걸 그대로 적긴 쪽팔리니 당태종 횽아의 아량이었다 이런식이죠

  • 작성자 13.02.02 23:38

    뭐 대충 이런 기사였던 것으로 아는데... "동쪽 계곡으로 나와 길이 합쳐지는 곳에서 적의 뒤쪽을 막아 그 목을 잡되 그 귀로를 좀 틔어 줘라."
    어딘지 기억이 안나네요. 전당문인가?

    그리고 통주 전투에서도 고려군 30만이 성종군과 회전벌일때 10%에 불과한 3만이 전사했는데도 전투불능 되어서 뿔뿔히 흩어진 거 보면 군대의 절반만 피해가 생기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은 됩니다. 통주전투땐 중군이 돌파되었고 사령관이 사로잡히는 사태가 벌어졌음에도 뒤에 고려 요새가 있어서인지 요군이 추격전을 열심히 벌이지 않아 사상자가 상대적으로 적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13.02.02 23:45

    그게 포위된 이후 장손무기에게 이세민이 교랑을 치워서 퇴로를 완전히 차단시켜 버립니다. 이는 고연수와의 전투 이후 퇴로가 열렸거나 그런 상황이 아니라 주위를 신경 쓸 정도로 고연수 휘하 군대를 잘 포위하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퇴로가 뚫려있다면 고연수가 항복하기보다는 고구려군과 같이 후퇴할 가능성이 크지요.

  • 작성자 13.02.02 23:47

    그런데 그건 고연수군이 산 위로 올라가서 주둔한 이후의 상황이 아닌가요.
    우선 패배한 상황에서 질서정연하게 후퇴는 잘 안 될거고, 그냥 진을 치고 병력을 수습하려 한 고연수의 행동은 충분히 이해가 되는 행동이라 보이는데요.

  • 13.02.02 23:50

    진을 친 상태에서 병력이 3만 6천명이죠. 퇴로가 열려있었다면 그 병력을 가지고 퇴로를 뚫는 것이 먼저죠. 진의 수비를 다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도 도망갈 곳이 하나도 없는 산 위에서 진을 쳤다고 나오니 그 만큼 당나라 군대의 포위망이 견고했다는 것이지요.

  • 작성자 13.02.03 00:00

    당장 패한 병력을 가지고 퇴로를 뚫는 것은 그리 현명한 행동이 아니라 보이는데요. 언제 당군이 추격해올지 모르는 위태위태한 상황에서 먼 거리를 행군할 수는 없지 않을까요.
    게다가 고연수군은 선봉대이며 후발대와 꽤나 거리가 떨어져있는 상황이 아닌가요?
    안시성에는 들어갈수가 없고요.
    사실상 고립 상태에서 취한 제대로 된 판단으로 보입니다.

  • 13.02.03 00:05

    우선은 신당서나 자치통감이나 삼국사기나 구당서나 퇴로를 열어주었다, 포위망이 약했다라는 기사는 없습니다. 장손무기의 공격 때문에 병력을 나누어 방어하려다가 제대로 하지 못하고 3만명이 죽은 것으로 되어 있지요. 애초에 퇴로가 뚫려있다면 3만명이나 죽고 3만 6천명이 항복하는 그런 사태가 벌어질 수 없지요.

  • 13.02.03 03:32

    제가 보기엔 숫자가 문제라기 보다는 김부식도 지적했듯이 중국측 사서가 중립적인 시각을 유지하고 있는지가 문제겠죠. 주필산 싸움도 그렇고, 1차 여당전쟁의 당 진격도 중국측이나 삼국사기에 곧대로 기록된 것처럼 수월하고 당의 연승으로 끝나지는 않았을 것이라 추측만 하고 있는데 지금은 딱히 뒷받침할만한 사료가 없습니다;

    다만 김부식이 사론을 단 것과 지금껏 군을 쪼개고 파죽지세로 전격전을 펼치던 당군이 안시성 싸움을 앞두고는 신성을 함락하지 못했다며 신중해 하는 부분을 보아 아마 당군 본대도 주필산 싸움에서 만만찮은 피해를 입었고, 신성을 압박하고 공격하던 당군도 공격에 힘을 잃었다고 볼수 있지 않겠습니까?

  • 13.02.03 03:24

    그러니까 사족을 다시 풀어 말해서 애초에 당군에 택한 전략은 요동방어선을 일시에 공격해 성을 함락시키거나 (신성의 경우처럼) 고립시키거나 해서 요동성-안시성-건안성-평양 이런 식으로 일종의 통로(Corridor)를 만들어 돌파를 꾀했던 것이라는 것을 본다면, 당군이 요동 상류의 신성이 지키는 수월한 길로 철수하지 않고 요택을 통해 철수한 건 그때까지 신성이 당시 동진하던 당군에게 만만찮은 위협을 가해 당군의 통로가 열려있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쩌면 신성을 공격하던 당군이 반격으로 인해 요하 하류까지 무너져 내렸을 가능성도 있겠죠. 애초에 사서에 나온 당군 숫자는 상대적으로 좀 적은 편이니까요..

  • 13.02.03 03:38

    덧붙여서 서영교 교수는 여당전쟁에 대해 쓸때 전당문(全唐文)을 자주 인용하던데 이거이 이너넷에서는 구할 길이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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