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필산전투에서 보면 고구려군 15만이라 나와있지만 이들이 다 전투병이 아니라 보급병을 포함한다고 하면 실제로 전장에 참여한 병력은 6~7만 정도 되었을 겁니다. 사상자가 1만이고 이후 항복병이 3만 6천, 도주한 병사까지 합치면 약 6~7만 정도겠죠.
그런데 이와 맞선 당군의 숫자는 정말 아리송합니다.
장손무기군
1만 1천
이세적군
1만 5천
당태종 중군
4천
예
당시 당나라 군대가 아무리 적은 수로 쳐들어왔다 하더라도 상식적으로 합쳐서 3만밖에 안되는 군사로 7만이나 되는 고구려군을 상대하는 건 당태종이 허파에 바람이 심하게 들어 '나는 한니발의 환생이다!'라고 생각하던가 아니면 극도의 짜릿함을 즐기는 변태가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거점방어작전을 수행한 이세적군과 후방기습을 수행한 장손무기군, 그리고 주필산에 올라서 팝콘 씹으면서 전투 상황 감상하고 있었던 당태종 중군 외에 나머지 당나라군은 어디있었을까요?
제가 확실히 아는지는 모르겠지만-당시 당나라군은 7군 편제, 육화진법을 따르고 있었으며 이때 중군을 다른 6군이 보호하는 형태로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정석적인 편제에서 중군은 4천이고 총 군사는 2만이죠.
당태종이 주필산에 끌고올라간 중군이 4천이란 것을 봐서 당군이 정말 정석편제를 따랐다는 것을 알수 있는데 그렇다면 이 편제대로 보면 당군 총 병력은 2만이고 이는 말도 안되니까 아마 우군 후군 좌군 전군 등을 적절히 증가시켰을 것이란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건 그렇다 치고, 중군은 4천이고 나머지 6군중 이세적군을 제외한 나머지 군대는 어디 있을까요? 장손무기군을 7군 편제의 일원으로 봐도 중군, 장손무기군, 이세적군을 제외한 4군의 존재가 애매합니다.
설마 이들이 이세적군이 고구려군에게 삼면포위되어서 열심히 후드려맞는동안 멀뚱멀뚱 감상만 하고 있었을까요?
'고구려가 주필산에서도 캐발리고 전체적으로 당나라 사상자 고당전쟁에서 2천명밖에 안됬음 ㅋ' 이라고 해놓은 자치통감을 김부식이 삼국사기에서 가열차게 까면서 인용한 유공권의 소설(현대에서 말하는 소설개념은 아니라 합니다)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유공권(柳公權)의 소설에서는 "주필산전투(駐必山戰鬪)에서 고구려가 말갈과 더불어 군사를 합하니 그 군사가 40리나 뻗쳤으므로 태종이 바라보고 두려워하는 기색이 있었다."고 했으며, 또 "황제가 친솔한 6군이 고구려 군사에게 제압되어 거의 위축되어 있을 때 척후병이 영공(瑩公; 李世勣)이 거느린 흑기군(黑騎軍)이 포위되었다고 고하니 황제가 크게 성을 냈다."고 했다. 비록 나중에 몸은 탈출했으나 그와 같이 겁을 냈는데 구당서(舊唐書), 신당서(新唐書)와 사마광(史馬光)의 통감(通鑑)에 이것을 말하지 않은 것은 자기 나라의 치욕을 감추기 위함이 아니겠는가.'
간단히 황제 6군이 고구려군 웃음꺼리가 되어 두들겨 맞고 있자 이세민이 '지금 이세적군 뭐함?'이라 묻자 척후가 '포위되어서 두들겨맞고 있습니다'라고 하자 당태종이 '이런 망할!'했다는 거죠.
음 확실히 전적으로 믿을만한 사료는 아니지만 일단 주필산전투에 6군이 참여했다는 점은 어느정도 사실인 듯 한데,
이들이 고구려군에게 전 전선에 걸쳐서 밀렸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군요.
그런데 자치통감 등의 중국 사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를 통해 본 주필산전투 전개과정은 이렇습니다.

고증따윈 개나줘버린 엉터리 지형입니다

대충 참전 병력과 부대 배치. 장손무기군은 고구려군 눈에 안보입니다

고구려군이 이세적군 병력 적은거보고 이세적군을 노림. 장손무기군은 몰래 협곡 따라 우회.
당태종은 팝콘씹으며 주필산에서 전투 감상.

장손무기군이 고구려군 뒤로 돌아오자 당태종 중군에서 호각불고 쌩난리를 침.
고구려군 약간 당황. 그리고 당태종 중군이 고구려군 측면 공격 시작. 장손무기군에 신경 못쓰는도중
장손무기군은 열심히 고구려군 뒤로 기동

고구려군 장손무기군 보고 깜놀.
병력 3개로 나누어 당태종군 장손무기군 상대하려 했다가 결국 개판되고 포위. 망함.
대충 이렇습니다.
그런데 일단 이렇게 되면 당태종은 3만으로 7만을 공격해 이겼단 것이 되고,
처음부터 돌궐기병을 이용해 유인작전을 펼치는 등을 한것을 보아 아예 3만으로 7만 상대해 보겠다! 라고 마음먹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당태종이 실제로 이런 미친짓을 벌이진 않았을거 같습니다.
그렇다면 실제 당나라군 병력배치는 어땠을까?
유추하기 어렵고 또 사료도 없지만 그냥 허접하게 제 생각을 말해보겠습니다.
우선 당태종은 중군 4천을 이끌고 올라간것은 맞지만 기타 군대들도 끌고 주필산위로 올라갑니다.
아마 이때 주필산 위에 있었던 당태종의 병력은 대략 4만 정도였을 겁니다.

당태종의 전략은 이렇습니다. "고구려군은 필시 수가 적은 이세적군을 노릴것임. 그리고 이세적군은 고구려군을 맞아싸워서 장손무기군이 고구려군 배후에 돌아올때까지 시간을 벌어주면 됨. 그때가 되면 주필산 위에 진치고 있는 주력인 나의 군대와 함께 고구려군을 삼면 포위 한다"는 골자의 전술이죠. 보기엔 그럴듯해 보입니다.
그리고 전투가 시작됩니다.
고구려군 7만이 무지막지한 기세로 돌격해오고, 이세적군과 고구려군 전위가 마침내 교전에 들어갑니다.
이때 상대적으로 수가 적은 이세적군은 고구려군 전위의 공세에 좀 밀립니다.
그리고 당태종은 느긋하게 주필산 위에서 홍차 한잔하며 싸움 전개과정을 지켜보고 있으나 갑자기 뜬금없이 말갈기병 5천이 이세적군을 향해 달려가는척 하더니 급격히 방향을 틀어 주필산에 있는 당태종의 본진으로 짓쳐들어옵니다
(이건 당태종이 전투 끝나고 '말갈 너네가 감히 황제 진을 범하다니 니들 다 생매장임'이라 한 거에 대해 생각해본 것입니다. 말갈기병이 당태종의 진을 범했던 게 사실이라면, 적어도 중국측 사서의 기록에서 그러한 정황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당태종군은 장손무기군이 도착한 뒤에야 자신의 군대에 공격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죠. 그리고 이미 그때는 사실상 당군이 승기를 잡았을 상황이고 말갈이 진을 범할 기회는 없었을 겁니다.)
선봉대인 말갈기병을 뒷따라 수만에 달하는 고구려군 후위가 대량으로 흙먼지를 일으키며 주필산으로 달려옵니다.

(대충 이러지 않았을까~라는 망상입니다)
당태종군은 크게 당황하고 (고구려군이 부대를 죄다 이세적군 공격에 투입할줄 알았지 자기에게 달려올줄은 몰랐겠죠) 말갈기병의 급습에 사기가 떨어져 당태종군이 갑자기 서서히 동요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어 맹렬하게 고구려군 후위가 짓쳐들어오죠.
전 전선에 걸쳐 당나라군이 밀립니다.
당태종은 이때 '고구려군 본진이 혹시 이세적군 포기하고 나에게 덤벼드나?' 하는 생각을 가지고 척후를 보내 이세적군의 상황을 묻습니다.
만일 이세적군이 쌩쌩하다면 고구려군 측면을 쳐서 당태종군에 가해지는 압력을 좀 줄여볼 요량이었겠죠.
근데 고구려군 전위에 의해 이세적군이 포위되었단 말을 듣고 입에 거품을 뭅니다.
이대로 가다간 그냥 다 망할 상황이었죠.
이때 장손무기군이 고구려군 뒤쪽에 도착하자 당태종은 급히 호각과 기치를 들어 이쪽으로 와서 황제좀 도우라고 합니다.
이때 고연수는 실책을 범해 고구려군 후위의 방향을 돌려 장손무기군을 향해 공세를 하려 하는데 이때 혼선이 빚어지면서 고구려군 부대편제가 이리저리 뒤섞입니다. 아무래도 한창 주필산으로 신나게 쳐들어가서 전투를 벌이고 있는 도중이었으니 단숨에 방향전환하는 것은 심각하게 무리였겠죠.
그리고 말갈기병은 너무 깊이 들어가서 방향 전환이 불가능해서 그대로 포로.
삼선짬뽕마냥 부대편제가 뭉그러져서 노수와 궁수, 부월수와 기병 등등이 이러저리 뒤섞인 고구려군은 앞뒤에서 장손무기군과 태종군의 공세를 맞고 그대로 붕괴. 고연수는 튑니다.
이세적군 몰아붙이던 고구려군은 이거보고 가우가멜라에서 다리우스 도망가는 거 본 페르시아군마냥 헐ㅋ 하면서 그냥 튀어버립니다.
음 나름 생각해 봤는데 너무 고구려에 유리하게 썼군요.
그래도 이렇게 안 하면 도저히 전투에 참여안한 나머지 5군(장손무기군을 7군편제의 일원으로 치면 4군)의 존재를 설명 못할것 같습니다.
다른분들 생각은 어떠하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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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연수 휘하라도 적어도 6만은 되죠. 포로가 된 3만 6천+전사자 2만+기타 튀어버린 병력들. 그런데 당태종은 3만을 가지고 6만을 유인해서 섬멸하겠다는 작전이 얼마나 위험하다는 것인지 알고 있었을까요. 알렉산더도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큰 도박을 걸어서 이겼는데 당태종이 아무리 천재 전술가라도, 3만으로 6만을 섬멸해버리겠다 이런 작전을 조기에 짜고 행동했던 건 아무리 봐도 의문이 듭니다.
충분히 가능하죠. 연개소문 쿠데타 직후로 지휘가 제대로 안되던 상황이니....... 고연수가 결국 하책으로 전투에 임할 것을 알 정도였으니 고구려 군에 대해 정통했다고 볼 수 있지요. 당시 막장인 고구려군을 보고 이세민이 3만으로도 이를 충분히 격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책으로 전투에 임한다고 한 것은, 음 전쟁과 역사라는 책에 따르면 전통적인 중국 제갈공명식 서술법이고 사실 안시성과 연개소문의 내분으로 인해 어짜피 고구려군은 안시성과 연계 못하고 또 대군을 일으킨만큼 보급도 잘 안될 터이니 회전을 택할 것이다.
이런 말이라고 해석을 하던데요.
예. 그러니 그만큼 고구려군 사정에 정통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선 고구려군 수만을 앞에 두고 있는 상황에서 3만으로 회전에 임하는 건 상식선에서 이해하기 힘든 행동이네요.
회전에 임한다면 상대적인 병력우위를 가지고 임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닐까요.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당태종의 만용이라고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애초에 이세민이 동원했던 군대가 10만입니다. 수나라와 비교하면 그야말로 엄청나게 적지요. 이것도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것이지요. 그러나 이 병력으로 고구려군에게 엄청난 피해를 주고 땅까지 빼았습니다. 당 태종이 고구려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고구려가 엉망진창이었따는 것이지요. 주필산 전투도 이와 비슷하다고 봅니다. 완벽한 정보력을 바탕에 두었으니 3만으로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본 것이지요.
한니발의 격언에 말하듯이 회전은 기본적으로 큰 도박이고, 기보가 모두 고구려군보다 병력이 열세인데 그렇게 쉽게 이길 것이라고는 장담하지 못하죠. 실제 3만으로 보기에는 당태종이 너무 자신만만한 감이 있습니다.
고구려군이 돌도끼 들고 뛰어다니는 야만족이 아닌 이상에야 쉽게 작전에 말려들어줄 것이라고 보장할 수도 없죠.
고구려는 완전 분열상태에다가 그에 대한 정보를 제대로 알고 있고 보기도 고구려보다 뛰어나면 뛰어났지 못한 상황이 아니죠. 이런 상황에서 이세민과 이세적 정도의 명장이라면 자신만만할 수 있죠. 굳이 3만이 아니라고 부정할 이유는 하나도 없습니다.
신당서에는 당군이 17만으로 나와 있는 걸로 알고 있슴요. 저도 이쪽을 지지함. 구당서에는 육군으로 이세적이 6만+ 당태종이 이끈, 숫자를 알수 없는 '천자의 군대'가 있었다고 하니까 양쪽 합처서 치면 대충 신당서의 병력 규모와 비슷한 정도가 나올거 같고, 17만 정도면 이시기의 당 원정군 중에서 대규모이긴 하지만 최대치인 것도 아니니까...
<<신당서>>가 10만입니다. <<구당서>>에 이세민이 6군을 이끌고 낙양을 출발했다는 기록이 있지요. 6군이 금군인지 아니면 <<주례>>에 나오는 군 편제단위인지는 모르지만, 금군을 육군이라고 부른 것은 현종 이후이니 전통적인 군 편제단위로 보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이 군이 <<주례>>에서는 1만 2천 5백, <<국어>>에서는 1만명이지요. <<구당서>>가 무종 이전에는 각 황제의 실록을 참고한 것을 생각하면 신뢰를 할 수 있으나 <<구당서>>를 참고한 사마광이 <<자치통감>>에서 이 기사를 빠뜨린 것을 보면 뭔가 좀 애매합니다. 이 부분은 좀 더 신중히 다룰 필요가 있지 않나 합니다.
신당서도 처음에는 장량의 4만, 이적의 6만을 언급하지만, 뒤에는 병사는 10만 중 1천, 선사는 7만 중 수백이 상했다는 기록이 있지 않나요?
병사 10만 중 천여명이, 수부 7만 중 수백명이 사망했다고 나오기는 합니다. 士와 船師를 구분한 것으로 봐서는 장량과 이세적의 총 전투요원을 10만, 오지방 선박 500척을 모는 수부를 7만명 동원한 것 같습니다. 다만 수부같은 비전투요원까지 센다면 당나라 군대는 50만 이상으로 잡아야 되는 좀 그런게 있습니다. 안시성 때 떡하니 하부 50만을 동원하여 토산을 쌓았다는 기록이 등장하니 말입니다.
안시성 토산 50만명은 연인원 개념이라 하루에 사역하는 인원은 1만이 채 되지 않는 걸로 압니다.
안시성이 엄청나게 큰 성도 아닌데다 산성일 확률이 높은 이상 50만명이 한곳에서 일할 공간이 날 것 같지도 않고요.
거기다 이적이 6만을 이끌고 갔는데(삼국사기 등) 육군 전체가 6만이라면 당태종은 병사를 거의 끌고 가지 않은게 됩니다. 당이 이시기 의외로 적은 군대로 전쟁을 벌여왔지만 아무리 그래도 원정 전에 설연타에게 '병력 싹 끌고가는데 비었다고 어디 반란 한번 일으켜 보시지?' 할 정도로 군사력을 빼 왔는데 정작 황제가 병력을 거의 끌고 가지 않았다는 것도 이상하고요.
중국 기록은 아니지만, 승려 각종(覺從)의 기록에는 소정방이 船師를 이끌고 미자진에 진을 쳤다고 하는데, 이를 보면 선사를 단순히 수부로만 보기보다는 수군으로 해석할 여지가 크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이적의 군대도 신당서에는 騎士라고 하여 구당서의 보,기 6만과 좀 차이가 있고, 또 신당서에서도 이적의 6만 군대가 출발한 이후 또 거란, 해, 백제, 신라등의 군사를 징발했다는걸 보면 당시 태종의 군대를 10만으로 확정하는 것도 논란의 여지가 있을것 같습니다.
실제로 당태종이 요수를 건넌 후 교량을 철거해 사졸들의 결의를 굳게 했는데, 이적은 개모성을 점령한 후 남하하여 요동성으로 도달하였으니 당태종이 건넌 교량으로 넘어왔다고 보긴 힘들다고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당태종은 이적의 군과는 별도로 군을 이끌고 있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수군이라는 단어는 水師가 있습니다. 동시대 문헌을 봐도 船師는 수부의 개념이지 수군이나 수병의 뜻이 보이지 않지요. 선사를 데리고 진을 쳤다는 것은 수부를 전투원으로 쓸만큼 예외적인 상황이라고 봐야지 옳지 않을까 합니다.
그리고 좀 더 살펴보니 騎士가 보기로 사용된 예를 찾을 수 없군요. <<자치통감>>과 <<구당서>>, <<삼국사기>>에 보기로 표시되어 있어서 기와 사로 표시한 줄 알았는데, <<자치통감>>이나 다른 사서를 봐도 보병, 기사 이렇게 나누어 집니다. 아무래도 실록을 참조한 <<구당서>>이니 보기가 더 가까울 듯 한데, <<신당서>>에서 기사로 표시한게 좀 의문이군요.
아, 좀 더 뒤져보니 <<자치통감>>에 이세민이 여러 군대를 이끌고 낙양을 출발했다는 기사가 있군요. <<구당서>>와는 다르게 추상적인 표현이기는 하지만, 6만과 4만 외에 다른 군대를 이세민이 직접 이끌고 갔다는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근데 50만 부분은 좀 이해가 안되는군요. 원문이 "築山晝夜不息,凡六旬,用功五十萬,山頂去城數 丈,下臨城中,道宗使果毅傅伏愛將兵屯山頂以備敵." 인데, 쌓은게 60일이고 노동자 50만을 사용했다는 뉘앙스지 연인원 50만 투입이라는 뉘앙스는 아니거든요. 혹시 '用功五十萬'을 연인원 50만으로 해석할 수 있는 근거나 다른 사료가 있는지요?
유공//연인원 문제로 언젠가 이글루스 역밸에서 난장판이 벌어진 적이 있죠. 실제 用功의 용례 자체가 연인원을 뜻한다고 직접 명시되어 있는 문헌을 레퍼런스로 제공하신 블로거가 계셨는데, 그 주소로 가보니 지금은 폭파되었더군요. 그 외에도 조선왕조실록에서도 用功을 연인원으로 사용한 것이 명백한 기록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50만 명을 일시에 동원해서 60일이 걸리는 수준의 공역이면 쿠푸의 대피라미드 정도는 저리가라 할 규모입니다. 피라미드 공사의 평균 동원인력도 4만 명이 안되는데 말이죠... ㅡㅡ;;;
옥편을 찾아보니 工에 "한 사람의 정상적인 작업 일의 노동단위. 평균적인 사람이 날마다 이루어 낸다고 가정한 일종의 단위." 라고 버젓히 적혀있군요. 한문에서 工과 功은 서로 통하니 功을 工으로 봐도 크게 상관없을 듯 합니다. 즉, 평균적인 한 사람이 하루마다 이루는 노동단위, 즉 연인원을 50만 투입했다는 것이 맞는 말이군요. 그냥 옥편만 찾아보면 끝날 것을 괜히 功에 매달려 이리저리 사료 찾아해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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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그런데 항복한 군대는 고연수의 군대라는게 명백하지 않나요?
그리고 당군이 추격섬멸을 좋아하지만 기본적으로 고구려는 적진인데다가 산지가 많고 요새가 군데군데 있어서 섣불리 추격전을 벌일 수 없습니다(라고 임용한 교수가 말하더라고요)
일단 고연수군이 당태종과 결전벌인 병력은 6만으로 보는게 맞을듯합니다. 그리고 당태종이 장손무기군에게 '고구려군 후미를 치되 뒤쪽 길은 좀 열어놔라'라고 한 기록이 있는데(어딘지 기억이 ..) 이건 완벽한 포위섬멸이 안 된 것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기사라고 봅니다. 고구려군이 완벽한 포위가 안 되어 다수가 탈출했고 그걸 그대로 적긴 쪽팔리니 당태종 횽아의 아량이었다 이런식이죠
뭐 대충 이런 기사였던 것으로 아는데... "동쪽 계곡으로 나와 길이 합쳐지는 곳에서 적의 뒤쪽을 막아 그 목을 잡되 그 귀로를 좀 틔어 줘라."
어딘지 기억이 안나네요. 전당문인가?
그리고 통주 전투에서도 고려군 30만이 성종군과 회전벌일때 10%에 불과한 3만이 전사했는데도 전투불능 되어서 뿔뿔히 흩어진 거 보면 군대의 절반만 피해가 생기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은 됩니다. 통주전투땐 중군이 돌파되었고 사령관이 사로잡히는 사태가 벌어졌음에도 뒤에 고려 요새가 있어서인지 요군이 추격전을 열심히 벌이지 않아 사상자가 상대적으로 적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게 포위된 이후 장손무기에게 이세민이 교랑을 치워서 퇴로를 완전히 차단시켜 버립니다. 이는 고연수와의 전투 이후 퇴로가 열렸거나 그런 상황이 아니라 주위를 신경 쓸 정도로 고연수 휘하 군대를 잘 포위하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퇴로가 뚫려있다면 고연수가 항복하기보다는 고구려군과 같이 후퇴할 가능성이 크지요.
그런데 그건 고연수군이 산 위로 올라가서 주둔한 이후의 상황이 아닌가요.
우선 패배한 상황에서 질서정연하게 후퇴는 잘 안 될거고, 그냥 진을 치고 병력을 수습하려 한 고연수의 행동은 충분히 이해가 되는 행동이라 보이는데요.
진을 친 상태에서 병력이 3만 6천명이죠. 퇴로가 열려있었다면 그 병력을 가지고 퇴로를 뚫는 것이 먼저죠. 진의 수비를 다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도 도망갈 곳이 하나도 없는 산 위에서 진을 쳤다고 나오니 그 만큼 당나라 군대의 포위망이 견고했다는 것이지요.
당장 패한 병력을 가지고 퇴로를 뚫는 것은 그리 현명한 행동이 아니라 보이는데요. 언제 당군이 추격해올지 모르는 위태위태한 상황에서 먼 거리를 행군할 수는 없지 않을까요.
게다가 고연수군은 선봉대이며 후발대와 꽤나 거리가 떨어져있는 상황이 아닌가요?
안시성에는 들어갈수가 없고요.
사실상 고립 상태에서 취한 제대로 된 판단으로 보입니다.
우선은 신당서나 자치통감이나 삼국사기나 구당서나 퇴로를 열어주었다, 포위망이 약했다라는 기사는 없습니다. 장손무기의 공격 때문에 병력을 나누어 방어하려다가 제대로 하지 못하고 3만명이 죽은 것으로 되어 있지요. 애초에 퇴로가 뚫려있다면 3만명이나 죽고 3만 6천명이 항복하는 그런 사태가 벌어질 수 없지요.
제가 보기엔 숫자가 문제라기 보다는 김부식도 지적했듯이 중국측 사서가 중립적인 시각을 유지하고 있는지가 문제겠죠. 주필산 싸움도 그렇고, 1차 여당전쟁의 당 진격도 중국측이나 삼국사기에 곧대로 기록된 것처럼 수월하고 당의 연승으로 끝나지는 않았을 것이라 추측만 하고 있는데 지금은 딱히 뒷받침할만한 사료가 없습니다;
다만 김부식이 사론을 단 것과 지금껏 군을 쪼개고 파죽지세로 전격전을 펼치던 당군이 안시성 싸움을 앞두고는 신성을 함락하지 못했다며 신중해 하는 부분을 보아 아마 당군 본대도 주필산 싸움에서 만만찮은 피해를 입었고, 신성을 압박하고 공격하던 당군도 공격에 힘을 잃었다고 볼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사족을 다시 풀어 말해서 애초에 당군에 택한 전략은 요동방어선을 일시에 공격해 성을 함락시키거나 (신성의 경우처럼) 고립시키거나 해서 요동성-안시성-건안성-평양 이런 식으로 일종의 통로(Corridor)를 만들어 돌파를 꾀했던 것이라는 것을 본다면, 당군이 요동 상류의 신성이 지키는 수월한 길로 철수하지 않고 요택을 통해 철수한 건 그때까지 신성이 당시 동진하던 당군에게 만만찮은 위협을 가해 당군의 통로가 열려있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쩌면 신성을 공격하던 당군이 반격으로 인해 요하 하류까지 무너져 내렸을 가능성도 있겠죠. 애초에 사서에 나온 당군 숫자는 상대적으로 좀 적은 편이니까요..
덧붙여서 서영교 교수는 여당전쟁에 대해 쓸때 전당문(全唐文)을 자주 인용하던데 이거이 이너넷에서는 구할 길이 없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