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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사도행전의 말씀 16,11-15
11 우리는 배를 타고 트로아스를 떠나 사모트라케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아폴리스로 갔다.
12 거기에서 또 필리피로 갔는데, 그곳은 마케도니아 지역에서 첫째가는 도시로 로마 식민시였다.
우리는 그 도시에서 며칠을 보냈는데,
13 안식일에는 유다인들의 기도처가 있다고 생각되는 성문 밖 강가로 나갔다.
그리고 거기에 앉아 그곳에 모여 있는 여자들에게 말씀을 전하였다.
14 티아티라 시 출신의 자색 옷감 장수로 이미 하느님을 섬기는 이였던 리디아라는 여자도 듣고 있었는데, 바오로가 하는 말에 귀 기울이도록 하느님께서 그의 마음을 열어 주셨다.
15 리디아는 온 집안과 함께 세례를 받고 나서, “저를 주님의 신자로 여기시면 저의 집에 오셔서 지내십시오.” 하고 청하며 우리에게 강권하였다.
복음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 15,26─16,4ㄱ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6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27 그리고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나를 증언할 것이다.
16,1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2 사람들이 너희를 회당에서 내쫓을 것이다.
게다가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할 때가 온다.
3 그들은 아버지도 나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짓을 할 것이다.
4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그들의 때가 오면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기억하게 하려는 것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너희(제자들)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나를 증언할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으로부터 고난과 박해가 오면, 제자들은 오히려 그리스도를 증언하게 될 것이라고 예고하십니다.
증언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 증언의 확실성인데, 그 확실성의 근거는 직접 눈으로 목격한 사실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을 증언하게 될 이들이 둘이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예수님을 직접 본 이들입니다.
첫 번째로 증언하게 될 이는 바로 '성령'이십니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할 것이다.”
(요한 15,26)
그렇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직적 목격한 성령께서 예수님을 증언할 것입니다.
그러니 그 증언은 확실한 것입니다.
두 번째로 증언하게 될 이는 제자들입니다.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나를 증언할 것이다.”
(요한 15,27)
그렇습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예수님을 목격했습니다.
그러니 직접 목격한 그들의 증언은 확실한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직접 목격한 이들이 당신을 증언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예고 말씀에 대한 이유를 ‘우리가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하려는 것’(요한 16,1)이요, ‘당신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게 하려는 것’(요한 16,4)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박해에 대한 예수님의 이러한 예고는 우리를 당혹하게 합니다.
왜냐하면, 단지 박해를 예고만 할 뿐, 박해를 피할 방도나 극복할 방법을 제시하지는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단지 “그러한 때가 오면 내가 한 말을 기억하라고 너희에게 이렇게 미리 말해 두는 것이다.”(요한 16,4)라고만 말씀하십니다.
기껏 '기억하라'고만 할 뿐입니다.
참으로 무력해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예고만 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당신을 따르는 길에서 ‘고통’과 ‘박해’는 없어져야 할 그 무엇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통해 당신이 구세주이심을 증거해야 할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하는 특권을, 곧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위하여 고난까지 겪는 특권을 받았습니다.”
(필리피 1,29)
그러니 고통과 박해는 없어져야 할 그 무엇이 아니라, 우리 신앙생활의 일부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를 증언해야 할 공간이고 배경이 됩니다.
그리스도께 보내신 성령께서 바로 그 고통과 박해를 통해서, 바로 그 속에서 우리의 증언을 동행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때가 오면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기억하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 16,4)
주님!
미움과 박해가 닥치면 피할 방도를 찾기보다 당신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게 하소서.
안정과 편안을 찾기보다 당신의 증인으로 부름 받았음을 기억하게 하소서.
피할 수 없는 고통이 불가항력으로 닥칠 때,
도저히 용서될 수 없을 것 같은 죄와 끝내 치유될 수 없을 것 같은 상처를 당할 때,
바로 그때가 당신을 증거해야 할 때임을 알게 하소서!
바로 그것이 당신을 증언할 수 있는 선물임을 알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께 여지餘地를 드려야>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그리고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나를 증언할 것이다.
내가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 15,26─16,1)
오늘 복음의 말씀은 다 미래형의 말씀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신이 돌아가시고 난 뒤를 예고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돌아가시고 나면 당신이 성령을 보내주실 것인데,
성령께서는 한편으로는 진리의 영으로서 당신의 진실을 증언하실 겁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당신이 돌아가신 뒤 박해를 받게 될 제자들을 보호해주실 터인데,
그것은 제자들이 당신에게서 떨어져 나가지 않고 제자들도 당신을 증언케 하기 위함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박해가 제자들을 떨어져 나가게 할 것이라는 말씀은 우리가 충분히 예상하고 수긍할 수 있는 말씀인데,
그런데 그런 제자들이 당신을 증언하게 될 거라는 말씀이 일단은 이해가 안 됩니다.
그렇습니다.
일단은 이해가 안 됩니다.
그런데 일단이라는 말이 많은 경우 일단一旦의 뜻으로 쓰이지만, 이 경우엔 일단一段이라는 뜻으로 제가 쓴 것이며, 다음에 이단二段이 있다는 것을 내포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당신의 말씀과 달리 제자들이 당신을 모른다고 하고 도망쳤으니 일단은 주님의 말씀과 어긋나는 결과이고, 그래서 그런 제자들이 당신을 증언할 거라는 말씀이 일단은 이해가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일단은 인간의 단계段階입니다.
그리고 이단은 성령의 단계段階입니다.
일단은 연약한 인간이기에 도망치고 봤는데, 이런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성령을 보내주시자 새로운 단계 곧 이 단계인 성령의 단계에 돌입하게 됩니다.
그런데 일 단계에서 이 단계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소위 중간 단계라고 할 수 있는 중요한 것이 제자들에게 요구됩니다.
유다 이스카리옷처럼 하느님도 손쓸 수 없게 자기가 완전히 끝장을 내지 말아야 하는데,
그런데 열한 제자는 주님을 배반했지만 그리고 비록 두려움 때문에 다락방에 숨어있었을지라도 다행히 완전히 떨어져 나가지는 않았지요.
여기에 우리가 오늘 배울 것이 있습니다.
정말 끝이라고 생각될 때도 내가 끝장내지 않고 하느님께 여지를 드리는 것 말입니다.
우리에게 하느님을 위한 여지는 없습니까?
하느님께 여지를 드릴 여유가 나에게 없습니까?
나로 가득하여 우리에게 하느님을 위한 여지는 없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께 여지랄까 말미를 드리면, 그 여지에 하느님께서 성령과 작당하여 모의하실 것이고,
그래서 성령을 받은 제자들이 다락방을 박차고 나와 마침내 주님의 예언대로 주님을 증언하게 될 것이며,
오늘 리디아의 마음을 연 바오로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바꿔 주님을 믿게 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뭐든 우리가 끝장내려고 하지 말고, 하느님께 여지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
저는 두 마음을 품을 때가 많습니다.
그야말로 양다리 걸치기를 합니다.
하느님을 갈망하면서도 마음과는 달리 세상 것을 그리워하고 쫓아갑니다.
이웃사랑을 말하면서도 손발에 이르지 못합니다.
정의를 말하면서도 정의롭지 못한 궁리를 합니다.
남을 판단하지 말라고 하면서 이미 심판을 내립니다.
그러면서 때때로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나는 내가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을 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합니다.
...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
(로마 7,15. 19)
그리스도인은 세상 속에 살면서도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약육강식 논리를 따르지 않고 진리를 추구합니다.
마음을 천상에 둡니다.
빛과 사랑을 추구합니다.
몸이 힘들고 고달프더라도 끊임없이 하느님의 선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결정적으로 선과 진리에 어긋나는 것은 분명히 거부합니다.
당장은 손해를 보더라도 선을 선택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생명을 함부로 하는 낙태법, 사형제도를 반대합니다.
그래서 권력자들은 그것을 싫어할 수 있고 우리는 세상의 미움을 받게 됩니다.
자기 잇속을 챙기는 정치인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그러나 세상의 미움에 승리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우리네 현실은 믿음의 수련기관이고, 그동안 단순히 육체적 고통만이 아니라 우리 영혼의 아픔 또한 겪어 내야 합니다.(박병규)
미움받는 또 하나의 이유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증언하는 것은 예수님을 처형한 세상의 권력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권력자들은 교회를 박해하였습니다.
미움은 결국 폭력에까지 다다르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홀로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떠나신 후의 일을 예견하시며 제자들에게 성령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먼저 시련과 박해의 시간에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누구나 시련과 고통이 생기면 마음이 흔들리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마음을 아시기에 당신의 협조자 성령을 약속하셨고, 성령께서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향한 신앙을 북돋아 주시어 혹독한 박해 속에서도 용기 있게 그리스도를 증언할 힘을 주셨습니다.
바로 그 성령께서 오늘 우리의 믿음을 새롭게 해 주시고 우리의 마음을 지켜주실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시작한 모든 사람이 성령의 손길을 통해 어려움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함과 그리스도의 평화를 간직할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아울러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성령 안에서 예수님을 향한 열망을 키워감으로써 시련과 역경 안에서도 흔들림 없는 참 신앙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거룩하게 사는 이들은 그분을 추구합니다.
그분은 성령이십니다.
성령께서는 당신 입김으로 그들에게 생기를 주시고 도움을 주십니다.”
(성 바실리오)
“성인들은 자기가 받은 은총에 늘 만족하며 살았고, 하느님이 주시는 시련과 고통도 그분의 뜻으로 알고 살았습니다.”
(아빌라의 성 요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시련이 벌이 아니고 오히려 은총의 기회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련을 이겨 내십시오.
“시련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렇게 시험을 통과하면, 그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화관을 받을 것입니다.”
(야고 1,12)
이 시간 위로의 성령을 통해 우리의 삶이 변화되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내가 누구인가를 증명해 줄 수 있는 것은 피밖에 없다>
영화 ‘수상한 그녀’(2013)는 일찍 남편을 잃고 평생을 아들 하나 키우며 살아온 욕쟁이 오말순 할머니의 이야기입니다.
오말순 할머니는 싸움닭입니다.
며느리는 시어머니인 오말순 할머니 때문에 쓰러져 병원 신세를 집니다.
손자들은 엄마를 위해서라도 할머니를 요양원에 보내는 게 낫겠다고 말합니다.
이 말을 들은 오말순 할머니는 쓸모없어진 자신을 한탄하며 한 사진관에서 영정사진을 찍습니다.
그런데 50년이 젊어진 것입니다.
처음엔 가족도 걱정이 되었지만, 이젠 자신이 하고 싶었던 가수의 꿈을 찾아 행복하게 살아보려 합니다.
점점 유명해지고 사랑도 싹틉니다.
그런데 자신이 속한 밴드에 자기 손자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손자가 교통사고를 당하고 수술을 위해 긴급히 피가 필요합니다.
손자와 피가 맞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
그러나 피가 빠지면 다시 늙게 되는 것을 압니다.
젊어진 오말순 할머니는 손자를 위해 수혈하기로 합니다.
이때 그 젊은 여자가 자기 어머니인 것을 안 아들은 어머니에게 떠나라고 말합니다.
자기 아들은 자기가 알아서 살릴 테니까, 이젠 자신들 위해 희생하지 말고 당신 인생을 살아보라고 합니다.
붙들이라고 불리던 아들의 대사입니다.
“갓난쟁이를 남편도 없이 키우던 젊은 여자가 있었어요.
근데 그 갓난쟁이가 병이 났는데 도통 낫질 않아서 하루에도 몇 번씩 목숨줄을 놓으려고 했지요.
근데 그 갓난쟁이 엄마는 너무 가난해서 해줄 것이 없었어요.
그래서 가슴으로 끌어안고 눈물로 말했어요.
‘붙들어라. 목숨처럼 붙들어라.’
그냥 가세요.
그냥 가셔서 남이 버린 시래기도 주워 먹지 말고 그 비린내 나는 생선 장사도 하지 말고 자식 때문에 아귀처럼 살지 말고 명 짧은 남편도 얻지 말고 나처럼 못난 아이도 낳지 마세요.
그러니 제발 가세요. 엄마.”
그냥 가면 엄마가 아닐 것입니다.
엄마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니. 난 다시 태어나도 똑같이 살란다.
아무리 힘들어도 하나도 다름없이 똑같이 살란다.
그래야 내가 네 엄마고 네가 내 자식일 테니까.”
아들에게 어머니의 정체성을 깨닫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어머니의 ‘피’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성령이십니다.
성령께서 오시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그리스도를 알게 됩니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피는 곧 성령이다.”
저도 어렸을 때 어머니가 의심될 때 어머니께서 흘리시는 피를 보았습니다.
단팥빵과 흰 우유, 그리고 삼겹살과 휘어진 발가락과 굳은살.
이것이 그분이 누구인지 증명합니다.
내가 누구인지 증명해 주는 것은 어머니의 피입니다.
어머니의 피는 곧 아버지의 피이기도 합니다.
그 피를 통해 나는 어머니가 누구인지 알게 됩니다.
영화 ‘닥터 지바고’에서 자기 아버지를 전쟁 통에 잃은 딸에게 친척은 “아버지는 딸의 손을 절대 놓지 않아!”라고 말해줍니다.
이것이 진짜 아버지를 증명해 줍니다.
얼마 전에 “수술 4번 받고 교실 왔는데…‘눈물 버튼’ 눌러버린 선생님”이란 동영상이 많은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아이는 휠체어를 타고 한 달 만에 반에 왔지만, 반 아이들이 신경을 써 주지 않습니다.
서러움에 울컥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이를 놀래주기 위한 이벤트였습니다.
케이크도 준비되어 있었고 노래도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아이는 엉엉 웁니다.
선생님과 아이들이 준비한 그 노력이 성령님입니다.
그 성령님은 아이에게 이 아이들과 선생님이 진짜 자신의 친구들과 선생님임을 알게 했습니다.
이것이 진리의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고, 이 진리의 성령을 주는 방법은 곧 피 흘림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피를 흘려 죽으셨기 때문에 그분이 누구셨는지는 오직 성령으로만 알 수 있고 그리스도를 우리가 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1)
두 번이나 반복되어 있는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이라는 말씀에서 ‘이 말’은 앞의 15장 18절-25절에 있는 “세상의 미움과 박해 예고 말씀‘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세상의 미움과 박해를 예고하신 이유는, 제자들이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즉 신앙을 버리는 일이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하십니다.
제자들이 세상의 미움과 박해를 받게 된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미리 알고 예고하셨다는 것은 그 모든 일이 ‘하느님의 뜻과 계획’에 의한 일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동시에 최후의 승리는 예수님과 그리스도교 쪽에 있음을 나타냅니다.
물론 하느님의 뜻과 계획에 의한 일이라는 말이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모든 일이 다 하느님의 손 안에(하느님의 섭리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제자들이 깨닫고 믿는다면, 어떤 미움과 박해를 받아도 흔들리지 않고 신앙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이 예수님 말씀의 뜻입니다.
2)
“성령께서 증언하실 것이다.” 라는 말씀은 공관복음에 있는 다음 말씀과 뜻이 같은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마태 10,19-20; 마르 13,11; 루카 21,13-15)
이 말씀은 제자들이(신앙인들이) 박해자들 앞에서 신앙을 증언할 때 성령께서 도와주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성령께서 신앙인들을 대신해서 증언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사도행전 4장을 보면, 유대인들이 베드로 사도와 요한 사도를 붙잡아서 최고의회에 세웠을 때, 두 사도가 증언하는 모습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였습니다.
'그때에 베드로가 성령으로 가득 차 그들에게 말하였다.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의 담대함을 보고 또 이들이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임을 알아차리고 놀라워하였다.
그리고 이들이 예수님과 함께 다니던 사람들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사도 4,8ㄱ.13)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이었던 사도들이 최고의회에서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신앙을 증언하면서 의원들을 압도할 수 있었던 것은 ‘성령으로 가득 찼기 때문’입니다.
즉 성령께서 두 사도를 도와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령께서 도와주신다고 해서 신앙인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성령께서 다 알아서 하시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성령의 도움은 능동적으로 받으려고 하는 사람만 받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신앙을 증언하는 일은 신앙인들 자신들이 하는 것이고, 성령께서는 그 신앙인들을 도와주신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신앙인들이 아무것도 증언하지 않고 가만히 있다면, 성령의 도움은 없을 것입니다.
안 도와주시는 것이 아니라, 신앙인들 쪽에서 아무것도 안 해서 못 받는 것입니다.
3)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나를 증언할 것이다.” 라는 말씀에서 ‘증언’은 ‘복음 선포’를 뜻합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나를 증언하여라.”, 즉 “복음을 선포하여라.”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에서, 마티아를 사도로 뽑을 때 했던 베드로 사도의 말이 연상됩니다.
"주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지내시는 동안 줄곧 우리와 동행한 이들 가운데에서, 곧 요한이 세례를 주던 때부터 시작하여 예수님께서 우리를 떠나 승천하신 날까지 그렇게 한 이들 가운데에서 한 사람이 우리와 함께 예수님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사도 1,21-22)
사도들은 ‘처음부터’ 예수님과 함께 지낸 사람들이고, 예수님의 모든 일과 말씀을, 또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증언한 증인들이기 때문에 우리 교회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분들입니다.
4)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할 때가 온다.” 라는 말씀에서 바오로 사도가 금방 연상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나는 유다 사람입니다.
킬리키아의 타르수스에서 태어났지만 이 도성 예루살렘에서 자랐고, 가말리엘 문하에서 조상 전래의 엄격한 율법에 따라 교육을 받았습니다.
오늘날 여러분이 모두 그렇듯이 나도 하느님을 열성으로 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또 신자들을 죽일 작정으로 이 새로운 길을 박해하여,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포박하고 감옥에 넣었습니다."
(사도 22,3-4)
"나는 전에 그분을 모독하고 박해하고 학대하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믿음이 없어서 모르고 한 일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1티모 1,13)
‘하느님을 열성으로 섬기기 위해서’ 라는 명목으로 그리스도교를 박해했던 사람이 어느 날 예수님을 만나서 갑자기 사도로 변화된 것을 본 열두 사도는 아마도 예수님 말씀을 기억해냈을 것이고(요한 16,4ㄱ), 자신들의 신앙에 대해서 더욱더 큰 확신을 갖게 되었을 것입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환대(hospitality)와 보호자 성령(the Paraclete) - 교회 선교의 본질적 두 요소>
"내 영혼, 하느님을, 생명의 하느님을 애타게 그리건만
그 하느님 얼굴을 언제나 가서 뵈오리까."
(시편 42.3)
일기 쓰듯 편안하게 쓰는 강론을 지향합니다.
오늘은 한국 103위 순교성인 시성 기념일입니다.
꼭 40년 전인 오늘 1984년 5월 6일, 오전 10시25분, 순교자들이 피로 신앙을 증거한 절두산과 새남터 성지가 내다보이는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보편교회의 수장이자 그리스도의 대리자, '평화의 사도' 성 요한 바오로 2세(1920-2005)는 황금빛 곤룡포를 입고 미사주례 중 100만명 신자들 앞에서 라틴어로 103위 순교복자의 시성을 선언했습니다.
이 교황님 황금빛 곤룡포 제의는 요셉수도원을 참으로 사랑했던 매듭전문가 김희진 자매가 만들었고, 후에 자매님은 남은 황금빛 천으로 제의를 만들어 우리 요셉 수도원에 기증하여 자주 대축일에 입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이에 앞서 교황님이 1984년 5월 3일 김포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내려 땅에 엎드려 겸손히 친구(親口, 존경을 담은 입맞춤)하던 장면은 얼마나 감동적이었는지요!
1984년 5월 6일 이날은 평신도 92명(여성47명, 남성45명), 성직자 11명(한국외방전교회10명 포함)이 성인이 된, 참으로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적 순간이었습니다.
전 국민이 TV 생중계를 통해 그 감동을 생생히 느낀 국민의 축제같은 날이었습니다.
저는 당시 장충동 분원에 머물러 연학중이던 청원자 신분으로 이 행사에 참여했습니다.
또 교회 뉴스를 보니 지난주 4월 29일에는 90세로 선종한 부산교구의 저명한 진보적 신학자 서공석 신부의 장례식이 있었습니다.
서인석 신부와 사촌간이자 마르틴 아빠스와 절친관계에 있던 분이셨습니다.
세월이 지나니 대개는 90세 전후로 세상을 떠납니다.
긴듯 하나 짧은 인생입니다.
어제 교황청 베드로 광장에서 레지나 첼리 삼종기도 후 교황님의 강론도 인상적이었습니다.
특히 교황님은 “나는 더 이상 너희를 종이라 부르지 않고, 친구들이라 부르겠다” 대목을 중심으로 주님과의 아름다운 우정의 성장을, 그리고 그 우정을 다른 이들과 나눌 것을 강조했습니다.
주님과의 우정, 얼마나 아름답고 정겨운 말마디인지요!
날로 주님과 깊어지는 우정의 관상적 삶인지 뒤돌아 보게 합니다.
정말 우리의 친구가 되시는 예수님과의 깊어지는 우정과 더불어 웬만한 소원도 다 이루어지리란 생각이 듭니다.
어제부터 내린 하루종일 내린 봄비가 지금도 계속 오고 있습니다.
어제 수도원을 찾아 미사에 참석했던 어느 자매는 빗소리에 감격을 토로하기도 했습니다.
빗소리 듣기도 힘든 아파트 주택구조라 그럴 것입니다.
빗소리를 들으며 23년 전 써놨던 "대화"란 시가 생각났습니다.
“바라봄의 관상만으로는 부족하다
여기에 때로 둘만의 깊고 긴 대화가 필요하다
하늘님과 땅,
멀리서 보기만 했지 못다한 이야기들 너무 많았다
하루종일 두런두런 소리내며 내리는 비
나눠도 나눠도 끝없이 이어지는 하늘님과 땅의 정다운 대화
사랑의 일치
아! 때로 나누고 싶다
관상적 삶중에 주님과의 끝없는 대화를”
-2001.7.5
오랜만에 내린 충분한 봄비로 흐르는 불암산 계곡 물소리도 반갑습니다.
하늘님과 땅의 대화를 상징하는 봄비 소리처럼 주님과의 관상적 대화는 신자들의 내적생활을 참으로 풍요롭게 합니다.
이런 관상적 삶과 긴밀한 관계에 있는 환대와 파라클레토 보호자 성령입니다.
이 둘은 교회 선교 활동에 본질적 요소에 속합니다.
표면에 드러나지 않고 활동하는 역할의 겸손한 환대, 겸손한 보호자 성령입니다.
바로 제1독서 사도행전의 필리피에서의 리디아의 환대가 그 빛나는 모범입니다.
초대교회의 선교활동이 원활할 수 있었음은 이런 자발적 겸손한 환대에 있음을 봅니다.
하느님은 리디아의 마음을 열어 주시어 바오로와 그 선교 일행을 환대하게 하십니다.
다음 대목의 묘사가 참 아름답습니다.
‘티아티라시 출신의 자색 옷감 장수로 이미 하느님을 섬기는 이였던 리디아는 온 집안과 함께 세례를 받고, “저를 주님의 신자로 여기시면 저의 집에 오셔서 지내십시오.”하고 청하며 우리에게 강권하였다.’
아마도 분명 바오로와 그 선교 일행은 리디아의 환대에 응해서 그의 집에 머물렀을 것이며 자연스럽게 가정교회가 이뤄집니다.
초대교회는 이런 환대에 바탕한 가정교회가 주류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보이지 않는 숨겨져 있는 겸손한 환대 없이 초대교회의 선교활동은 불가능했습니다.
이리하여 필리피는 바오로와 그 선교 일행의 활약에 힘입어 지역선교에서 유럽 대륙 선교의 영광스러운 교두보이저 전초기지가 됩니다.
물론 당시의 바오로와 그 일행은 몰랐겠지만 하느님의 계획에는 유럽 대륙의 선교가 있었던 것입니다.
겸손한 관상적 환대에 이어, 겸손한 파라클레토 진리의 영이 또 절대적 역할을 합니다.
바로 2주 후에는 진리의 영, 성령님이 오시는 성령강림 대축일이 있고 불교와 사이 좋은 관계를 상징하듯 그 앞 5월15일은 부처님 오신 날입니다.
앞서 오시는 부처님이 성령님의 형님처럼 생각됩니다.
참으로 교회의 삶에 결정적 영향을 주는 성령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교회의 중요한 행사때는 전례시 성령님이 임하기를 간청합니다.
이미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진리의 영을 보내주실 것을 예고하십니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할 것이다.”
(요한 15,26)
지금도 여전히 주님을 증언하시는 진리의 영, 성령의 역할입니다.
다양한 형태로 우리를 위로하시고 조언하시며 강화하시고 지지하시는 성령입니다.
그대로 성령은 교회 공동체내의 예수님의 현존이 됩니다.
참으로 역설적으로도 온갖 박해중에도 위로자 성령의 도움으로 사랑과 용서, 평화와 정의의 활동에 항구했던 교회였음을 봅니다.
코린토 2서의 다음 말씀이 이를 입증합니다.
“그분은 인자하신 아버지시며 모든 위로의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환난을 겪을 때 마다 위로해 주시어, 우리도 그분에게서 받은 위로로, 온갖 환난을 겪는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치듯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내리는 위로도 넘칩니다.”
이래서 우리는 주님의 현존인 성령을 우리의 희망이자 참 좋은 위로자, 조력자로 고백합니다.
참으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환대와 더불어 성령과의 친교로 바람직한 관상적 선교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끝으로 환대와 주님과의 친교를 고백한 자작 좌우명시를 나눕니다.
교회는 물론 우리 모두가 지녀할 환대의 앞문과 친교의 뒷문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활짝 열린 앞문, 뒷문이 되어 살았습니다.
앞문은 세상에 활짝 열려 있어
찾아오는 모든 손님들을 그리스도처럼 환대歡待하여 영혼의 쉼터가 되었고
뒷문은 사막의 고요에 활짝 열려 있어
하느님과 깊은 친교親交를 누리며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맛과 멋>
댈러스에 있으면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제가 속한 서울대교구의 ‘경조사’에 함께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손희송 베네딕토 주교님은 서울대교구 총대리 주교님으로 있다가 의정부교구 교구장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지난 4월 4일에 송별미사가 있었는데 함께 하지 못했습니다.
손 주교님은 1993년부터 1994년까지 용산 성당에서 함께 지냈습니다.
신부님은 본당신부였고, 저는 보좌신부였습니다.
온화하고, 합리적인 신부님께 많이 배울 수 있었습니다.
2013년부터 2018년까지는 교구청에서 함께 지냈습니다.
주교님은 사목국장 사제로 있다가, 2015년에 서울대교구 보좌주교가 되었고, 2024년에는 의정부교구 교구장이 되었습니다.
주교님은 제가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지사장과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에서 지낼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습니다.
온화하고, 합리적인 주교님께서 의정부교구의 교구장으로서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드러내시리라 생각합니다.
송별미사에 함께 하면서 아쉬움을 나누고, 축하의 인사를 드리지 못했지만 멀리서나마 기도를 드렸습니다.
지난 4월 16일에는 이홍근 스테파노 신부님의 장례미사가 있었습니다.
신부님은 1983년 신학교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저는 2학년이었고, 신부님은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한 5학년이었습니다.
신부님은 자치회 간부를 맡았습니다.
후배들에게는 엄격하였지만, 성소에 대해 고민하는 후배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 주었습니다.
신부님과 함께 본당에서 지낸 경험은 없지만 사제의 맛과 멋을 아는 신부님의 이야기를 자주 들었습니다.
사제의 맛은 무엇일까요?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는 사제입니다.
교우들을 위해서 헌신하는 사제입니다.
동료 사제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사제입니다.
교회의 가르침에 충실한 사제입니다.
이런 사제가 사제의 맛을 아는 것입니다.
사제의 멋은 무엇일까요?
세상의 것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신부님은 두 번이나 춘천교구의 공소사목을 지원하였습니다.
최민순 신부님의 ‘두메꽃’이라는 시처럼 주님만 아신다면, 해님만 아신다면, 시골의 공소에서도 기쁘게 사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런 사제가 사제의 멋을 아는 것입니다.
신부님의 장례미사에는 함께 하지 못했지만, 멀리서나마 천상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시기를 기도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티아티라 시 출신의 자색 옷감 장수로 이미 하느님을 섬기는 이였던 리디아라는 여자도 듣고 있었는데, 바오로가 하는 말에 귀 기울이도록 하느님께서 그의 마음을 열어 주셨다.
리디아는 온 집안과 함께 세례를 받고 나서, ‘저를 주님의 신자로 여기시면 저의 집에 오셔서 지내십시오.’하고 청하며 우리에게 강권하였다.'
바오로 사도는 신자로서 맛과 멋을 아는 리디아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리디아는 세례를 받기 전에도 하느님을 알았고, 세례를 받은 후에는 더욱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이방인의 도시에서 공동체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은 이렇게 신앙인으로서 맛과 멋을 아는 신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도 본당에서 그런 교우들을 자주 만났습니다.
드러나지 않게 숨은 곳에서 봉사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지난번 성지순례 때도 그런 분들을 보았습니다.
키레네 사람 시몬처럼 힘들어 하는 분들의 짐을 들어주는 분이 있었습니다.
베로니카처럼 지친 분들의 땀을 닦아 드리는 분이 있었습니다.
신앙인으로서 맛과 멋을 아는 분들이 함께 했기에 은혜로운 성지순례가 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사제로서의 맛과 멋을 아는 사제들이 예수님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신앙인으로서의 맛과 멋을 아는 교우들이 예수님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책상에 앉아 책을 읽다가 잠시 눈을 감고 책의 내용을 음미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뜨는 순간 깜짝 놀랐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제 책상 위가 너무 지저분한 것이 딱 보이는 것이 아닙니까?
어떻게 된 것일까요?
눈을 감고 있는 사이에 누가 와서 난장판으로 만든 것일까요?
당연히 아닙니다.
원래 지저분했는데 느끼지 못했고 또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눈을 감고 책 내용을 되새기고 나서 눈을 떴을 때 그 지저분함이 보인 것입니다.
이 눈을 감고 뜨는 것이 우리 신앙인에게는 성찰의 시간과 같지 않을까요?
성찰해야 주님과의 관계가 보입니다.
그러나 많은 이가 성찰 없이도 주님과의 관계가 가까워질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예수님도 바쁜 일정 가운데에서도, 심지어 식사할 시간조차 없었는데도, 외딴곳에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세상 안에 있지만 하느님과 만나는 시간이 별도로 필요하다는 것을 당신께서 직접 모범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주님을 느끼지 못할 때, 그리고 주님의 뜻보다 세속적인 마음이 더 크게 일어날 때, 잠시 눈을 감고 스스로를 바라보며 주님께 향하는 시간이 우리에게 필요했습니다.
그래야 세상 안에 있지만,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을 느끼며 큰 기쁨과 행복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특히 이런 사람이 주님께서 보내신 보호자, 진리의 영, 성령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 성령은 세상에 주님을 힘차게 증언할 힘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 의해 내쫓겨도, 죽음의 위험 속에서도 진리의 영을 통해 용기를 얻어 힘차게 이 세상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실제로 많은 순교자가 이런 삶을 사셨고, 우리에게 그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라는 희망 안에 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새롭게 보는 우리의 시선이 필요합니다.
과거만을 바라보면서 지금을 제대로 살지 못하는 시선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또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현재를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도 벗어던져야 합니다.
세상만을 바라보는 시선이 아닌, 주님을 바라보는 시선 역시 우리가 간직해야 하는 시선이었습니다.
우리의 시선을 바꾸는 것, 성찰을 통해 또 성령을 통해서만 가능했습니다.
저절로 이루어지길 바라는 착각은 모두 벗어 던지고, 깊은 성찰과 성령의 도움을 통해 우리의 시선을 철저히 주님께 향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새로운 시선으로 지금을 더 기쁘고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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