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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2월 28일 연중 제8주간 월요일
제1독서 : 1베드 1,3-9
복 음 : 마르 10,17-27
그때에
17 예수님께서 길을 떠나시는데 어떤 사람이 달려와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18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
19 너는 계명들을 알고 있지 않느냐?
‘살인해서는 안 된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횡령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20 그가 예수님께
“스승님, 그런 것들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1 예수님께서는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 이르셨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22 그러나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23 예수님께서 주위를 둘러보시며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24 제자들은 그분의 말씀에 놀랐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거듭 말씀하셨다.
“얘들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25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26 그러자 제자들이 더욱 놀라서,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고 서로 말하였다.
27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바라보며 이르셨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2020년 도쿄 올림픽에서 인상적인 장면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신유빈 선수와 룩셈부르크의 니시아리안 선수의 탁구 경구였습니다.
신유빈 선수는 2004년생, 니시아리안 선수는 1963년생으로
자그마치 41살의 나이 차이였습니다.
결과는 신유빈 선수가 이겼지만, 니시아리안 선수는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오늘의 나는 내일의 나보다 젊어요.
도전을 멈추지 말아야 하지만, 더 중요한 건 즐기는 것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거예요.”
‘~ 때문에’라는 이유를 들어 포기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즐기는 마음을 갖는다면 포기할 이유는 없어지고 맙니다.
즉, 포기할 이유를 찾는 것이 아니라, 즐길 이유를 찾는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신앙생활도 비슷합니다. 많은 이가 신앙생활을 하지 못할 이유를 이야기합니다.
시간이 없어서, 지루해서, 분심이 많아서, 돌 볼 가족이 있어서….
그러나 신앙생활은 즐기는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과의 만남에서 갖는 즐거움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과 더욱 가까운 사이가 됩니다.
부자 청년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그는 계명을 철저히 지키는 올바르고 독실한 종교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영원한 생명에 대해 예수님께 물었던 것입니다.
열심히 사는 그를 보며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 말씀하시지요.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마르 10,21)
인간의 윤리 생활은 하지 말라는 것을 어기지 않는 것만으로는 완전하게 될 수 없습니다.
여기서 멈춰서는 안 됩니다.
완전해지려면 가진 것을 가난한 이에게 줘야 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자기 것을 남에게 준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부자일수록 더 어렵습니다.
부자 청년도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기 것을 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재산의 풍요로움을 차마 버릴 수 없었던 것이지요.
무조건 가난하게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부’도 하느님의 창조물로 하느님께 인간에게 주신 선물이고,
‘부’를 사용하는 것은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 필수 요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부는 생명 유지와 사랑 실천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부에 대한 애착 때문에 주님께 대한 사랑을 버린다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재산만이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걸림돌은 아닙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으로 짓는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죄를 자기 마음대로 멈추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힘이 필요합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이 없이, 모든 것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에서 어떤 부자 청년은
길을 떠나시는 예수님 앞에 달려와 무릎을 꿇고 묻습니다.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마르 10,17)
이 질문은 신앙인에게 있어서 참으로 중요하고 본질적인 질문입니다.
하지만 부자 청년의 이 질문은 '영원한 생명'을 받기 위해서는
‘자신이 무엇인가를 해야 했을 것’이라고 여기는 데서 나오는 질문입니다.
혹 우리도 그렇지 않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본질적으로 당신의 사랑이요, 당신의 선물입니다.
또한 타인과는 무관한 ‘자신의 영원한 생명’에만 관심을 둔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십니다.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르 10,21)
이 대답은 그를 벌거숭이로 만들어 버립니다.
자신을 가리고 있는 껍데기의 옷이 발가벗겨지고, 그의 실상이 드러나게 만들어 버립니다.
사실 부자 청년은 자신의 영생을 위해 율법을 지켜왔고 죄도 짓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비록 율법을 지켰으나 단지 자신을 위하여
죄를 짓지 않았으며 다른 사람에게 선을 베풀지는 안했습니다.
곧 사랑을 행하지는 안 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자기 자신의 결백을 넘어서
오히려 자기 나눔과 선을 실행하라 하십니다.
타자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라 하십니다.
타인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놓는 일, 바로 이것이 당신을 따르는 길이라 하십니다.
한편 이어지는 제자들의 의혹, 곧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마르 10,26)라는 의문은
앞의 부자 청년의 질문과는 달리,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구원에 대한 의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르 10,27)
이는 ‘구원이 하느님으로부터 온다.’는 말씀입니다.
결코 자기 자신의 행실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결코 우리의 능력이나 노력으로는 바늘귀를 빠져나갈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구원은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것, 선사 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에게는 가능합니다.
그러기에 중요한 것은 '어디로부터 떠나왔느냐?'보다
'어디를 향하여 나아 가느냐?'입니다.
사실, 제자들은 이미 떠나온 이들입니다.
그러나 떠나왔다고 해서 반드시 따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집과 고향을 떠나온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와서 나를 따라라.” (마르 10,21)
그렇습니다.
이제는 이미 떠나온 자기마저 버려야 할 일입니다.
사실 수도자인 우리는 이미 집과 부모를 떠나왔지만,
떠나온 자신을 아직 떠나지 못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진정 떠나왔다면, 오늘도 자신의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따르느라 여념이 없을 것입니다.
자신의 신변 안전이 아니라 자신을 주님께 넘기고
주님께 속한 주님의 소유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마르 10,21)
주님!
약하지 않으려 함이 제게는 부족함입니다.
부족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바로 부족함입니다.
약할 줄을 알고 부족할 줄을 알게 하소서.
약하고 부족한지라 당신께 매여 있게 하소서.
아멘.
부자 청년의 이야기
조욱현 토마스 신부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17절).
율법을 잘 지켰다 해서 교만해진 젊은이가
율법의 주님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알아 뵙지 못한 채
행동으로 의롭게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젊은이는 믿음이 없이 율법만으로 구원될 수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18절) 하셨다.
당신을 하느님으로 여겨 그렇게 불렀다면
‘선하다’라는 표현을 거절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생명으로 나아가고 싶거든 계명들을 지켜라.
고약한 악의와 사악함을 버려라.
살인하지 마라. 간음하지 마라. 도둑질하지 마라. 거짓 증언을 하지 마라.
그리하여 ‘마른 땅’(느헤 9,11; 시편 66,6)이 드러나
어머니와 아버지를 공경하는 일과 이웃을 사랑하는 일”(19절 참조)이
싹트게 하라고 하신다.
“스승님, 그런 것들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왔습니다.”(20절)고 그는 대답하였다.
율법의 계명들을 잘 지킨 것처럼 보이던 청년은 슬퍼하며 떠나갔다.
계명들을 잘 지켰다고 하는 그의 대답은 진실이라기보다 교만이었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어렵다.
하느님 나라의 시민은 어디에도 묶이지 않고 짓눌리는 일이 없이
높이 솟아오르는 가벼운 날개 같은 영혼을 지닌 사람들이다.
예수님께서는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21절)
친구나 친척이나 가족이나 아내나 자녀가 아니라 가난한 이들에게 주리고 하신다.
주님은 하늘의 보화를 열어 주시면서 선의 책무를 실현하셨고,
몸소 거기에 이르는 길잡이가 되어 주셨다.
자기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부자 청년은 떠나갔고,
주님께서는 그가 자기 뜻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신다.
모든 사람은 자기의 의지대로 선택하고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는 슬퍼하며 떠나갔고 그분을 따라가지 않았다.
그는 자기 욕심에 묶인 채 슬퍼하며 떠나갔다.
자기 탐욕의 무거운 짐을 어깨에 짊어진 채 슬퍼하며 떠나갔다(22절).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23절)
제자들도 이 말씀을 듣고 매우 슬퍼져서 말한다.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26절) 부자라는 것은
하느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욕심이나 욕망으로 가득 찬 사람을 의미한다.
진정한 부자는 재물의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재물을 맡겨주신 분의 뜻에 따라 잘 사용하는 사람이다.
재물이라는 말 자체가 ‘소유하다’라는 데서 나오지 않고
‘사용하다’라는 말에서 나온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유일한 선(善)이신 하느님을 받아들이기 위해
다른 이차적인 선(善)의 유혹이나 매력을 극복하면서
주님을 따르고 있는지 나를 돌아보아야겠다.
그리고는 부족한 것이 있다면 그것을 채워 나가는 삶을 살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유일한 선(善)이신 하느님을 추구하면서 기도하여야 하겠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이기우 사도 요한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부자 청년을 만나셨습니다.
예수님 앞에 달려온 그는 무릎을 꿇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에 대해 여쭈었습니다.
병을 고치거나 배불리 먹는 일 따위에만 관심을 보이던
여느 중생과는 사뭇 다른 구도적인 태도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선 십계명을 지키라고 권하셨습니다.
그랬더니 그는 그런 것들은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다고 자신만만하게 대답했습니다.
아마도 그는 유복한 바리사이 집안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엄격한 가정 교육을 받은 젊은이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를 대견스럽게 여기시면서도 한 마디를 덧붙이셨습니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르 10,21).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철저하게 지킬 정도의 도덕성을 자부했던 그가
재물에 대한 집착도 심해 보여서인지 한 가지가 부족하다고 보셨습니다.
그것은 가난한 이들과의 나눔이었습니다.
이는 그 당시 돈을 좋아했던 유다교의 엘리트 계층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루카 16,14).
평소에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가
가난한 이들의 것이라고 선포하시던 가르침에 비추어 보면,
그들은 예수님께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빼먹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태도는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려는 것과도 같은 무모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제자들도 스승의 말씀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믿고 그분께 회개한다는 것이
삶의 태도에서 과연 어떠한 것을 의미하는지 잘 몰랐던 것 같고,
재물이 하느님의 축복이라고 가르치던
바리사이들의 신앙관에 물들어 있었던 듯합니다.
여기서 복음서에서 나오는 예외적인 인물이 있으니,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처럼이나
힘들고 중요한 일을 해 낸 예리코의 세관장 자캐오입니다(루카 19,1-10).
그는 자신의 집을 찾아주신 예수님 앞에서
거의 전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을 했습니다.
세리라는 직업 때문에 공적 기피인물로 따돌림받던 그를
예수님께서 받아주시자 벌어진 기적 같은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재물에 대한 욕심으로 가득 찬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 진정으로 귀의한 사람에게는 가능하다는 예수님 말씀이 입증된 셈입니다.
예수님부터 재물 소유에 대한 집착에서 자유로우셨거니와(마태 8,20),
제자들에게도 집과 직업과 가족까지도 모두 버리고 따르기를 요청하셨습니다(마태 4,20.22).
그들을 전국으로 파견하실 때에도
마찬가지로 철저한 청빈의 태도를 요청하셨던 이유는(마태 10,9-10),
그렇게 하더라도 곳곳에 흩어져 살고있는 토박이 지지자들이
그들을 환대해 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마태 10,11).
이렇듯 재물 소유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예수님의 태도와 가르침은
초대교회의 공동체 생활을 낳았습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고”(사도 2,44),
재산과 재물을 팔아 모든 사람에게 저마다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곤 하였습니다(사도 2,45).
그래서 그들 가운데에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사도 4,34).
이것이 예수님과 그분을 믿고 따르는 이들의 교회가 걸었던 정통 노선입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그 부자 청년이 처음에 그분을 부른 호칭은
“선하신 스승님!”(마르 10,17)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마르 10,18)고
바로잡아 주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 속에는 그 당시 유다교에서
최상급에 속하는 인물이 행해 온 선행의 허접한 수준에 대한 판단이 들어 있습니다.
유복하게 살면서도 가난한 이들과의 나눔은 외면하던 그 사람,
그래도 자신들은 의롭고 선하다고 자처하면서 영원한 생명까지 얻어 누리려던
이 부자 청년의 처지는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진 문명을 이룩했을 뿐만 아니라
나름대로 도덕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지만
하느님의 선에는 턱없이 못 미치는 삶을 영위하고 있는
많은 현대인들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의 양심에 입각한 도덕성만으로
재물에 대한 탐욕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마귀가 소유욕을 미끼로 해서 잡아당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인들도 이러한 어중띠기 인생들 가운데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재물의 결핍에 대한 공포에서 해방되려면
소유욕을 미끼로 유혹하는 마귀와의 고리를 끊어내고,
부활 신앙으로 살아가야 합니다(1베드 1,3-4).
그러니까 가진 재물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는 행위보다도
더 근본적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한 가지는 부활 신앙이고
그리하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은 하느님께서 채워주시리라는 확신이라는 뜻입니다.
초대교회의 신앙인들이 입증해 보였듯이,
하느님을 믿는 이들끼리 부활 신앙으로 서로 나누는 삶이 그 해답입니다.
교우 여러분!
재물에 대한 집착은 우상숭배에로 우리 마음을 기울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부족한 한 가지는
나눔 이전에 우리를 하느님께로 붙들어 매어 줄 부활에 대한 확신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눈이 내리는 것은 자연현상입니다.
하지만 내리는 눈을 바라보는 것은 사람의 마음입니다.
첫사랑을 시작한 연인들에게 내리는 눈은 하느님의 축복일 것입니다.
예술 하는 사람에게 눈은 작품에 영감을 주는 선물일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눈 내린 마당은 신나는 놀이터가 될 것입니다.
적당히 내리는 눈은 제게도 즐거움입니다.
하지만 10인치 이상 눈이 내리면 장난이 아닙니다.
신문사 마당의 눈을 치워야 차가 다닐 수 있습니다.
신문사 앞의 길에 쌓인 눈을 치워야 사람들이 편하게 다닐 수 있습니다.
다행히 옆 본당의 신부님이 눈이 많이 내리면 눈 치우는 장비를 가져와서
마당의 눈을 치워 주시니 감사할 일입니다.
대부분의 집은 사람이 다닐 수 있도록 눈을 치워 놓습니다.
하지만 휴가를 갔거나, 여의치 않은 집은 눈이 그대로 쌓여 있습니다.
믿음의 목적인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내 마음에 쌓인 허물과 죄를 깨끗이 치워야 합니다.
내리는 눈은 보이기 때문에 치울 수 있고, 이웃을 위해서 치워야 합니다.
그러나 마음에 쌓인 허물과 죄는 눈에 보이지 않기에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방치하기 마련입니다.
허물과 죄로 무거워진 마음은 하느님을 멀리하게 됩니다.
눈을 치우기 위해서는 장비와 삽이 있어야 합니다.
마음에 쌍인 허물과 죄를 치우기 위해서는 10계명이라는 기준이 있습니다.
10계명을 충실하게 지키는 사람은 깨끗해진 마음으로 하느님께 나갈 수 있습니다.
10계명은 해야 할 것이 3가지 있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이 7가지 있습니다.
하느님을 흠숭하고, 주일을 지키고,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은 해야 할 계명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말고,
살인하지 말고, 간음하지 말고, 도둑질 하지 말고, 거짓 증언하지 말고,
남의 아내를 탐하지 말고, 남의 재물을 탐하지 말아야 합니다.
10계명 중에 2가지가 연관된 것들이 있습니다.
이성에 대한 욕망은 간음하지 말고, 남의 아내를 탐하지 말라고 합니다.
재물에 대한 욕심은 도둑질 하지 말고, 남의 재물을 탐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 두 가지는 우리를 하느님과 멀어지게 하는 큰 유혹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왕은 이성에 대한 욕망 때문에 충실한 부하인 우리아를 죽게 하였습니다.
아합왕은 욕심 때문에 나봇을 죽이고 포도밭을 빼앗았습니다.
인간을 비참하게 하고, 하느님과 멀어지게 하는 것은
욕망과 욕심이 만들어낸 죄와 죽음입니다.
욕망의 덫에 걸려 넘어지는 성직자와 수도자도 있습니다.
욕심의 덫에 걸려 평생 이루어 놓은 명예가 무너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성에 대한 욕망을 품는 것만으로도 죄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를 지나가는 것이 더 쉽다고 하셨습니다.
그만큼 욕망과 욕심의 유혹이 크기 때문에 하신 말씀입니다.
며칠 전에 문자를 하나 받았습니다.
‘그대의 꿈은 무엇인가요?’ 저는 문자를 받으면서 잠시 생각했습니다.
‘나의 꿈은 무엇일까?’ 주교가 되는 꿈을 가진 적이 없습니다.
더 높은 자리, 권력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도 별로 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제게 문자를 보낸 분은 ‘자신의 꿈’은 무엇인지를 생각하였던 것 같습니다.
결혼을 하고, 아이들은 자라고, 이런저런 봉사를 하지만
채워지지 않는 갈망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각자의 꿈은 누군가가 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각자의 꿈은 자신이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계명을 지키는 것, 가진 것을 팔아서 가난한 이웃들에게 나누어주는 것과
같은 행위를 통해서 ‘꿈’을 이룰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열역학 제1법칙은 모든 에너지의 총량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한한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 ‘영구기관’은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내가 가진 꿈은, 결국 내 삶이라는 에너지를 통해서만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제자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불로 단련을 받는 아름다운 금을 봅니다.
아름다움은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주어진 순간 최선을 다하고 싶습니다. 그 순간들에 감사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최선을 다한 시간들은 아름다운 과거가 될 것이고,
최선을 다할 시간은 희망찬 미래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하느님 은총의 빛으로 순간을 충실하게 살면 ‘꿈’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얼마 동안은 갖가지 시련을 겪으며 슬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로 단련을 받고도 결국 없어지고 마는 금보다
훨씬 값진 여러분의 믿음의 순수성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밝혀져,
여러분이 찬양과 영광과 영예를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믿음의 목적인 영혼의 구원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낙타가 바늘귀로
송영진 모세 신부
“예수님께서 길을 떠나시는데 어떤 사람이 달려와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마르 10,17-18)
여기서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는 질문은,
“특별히 실천해야 할 율법이 무엇입니까?” 라는 뜻입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특별히 실천해야 하는 율법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자주 토론했습니다.)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 라는 말씀은,
당신에 대한 그의 태도를 지적하신 말씀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존경한다는 표시로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었지만,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은 것은 아니었고, 그냥 ‘랍비’ 가운데 한 사람으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을 ‘선하신 스승님’이라고 불렀는데,
당시에는 ‘선하신...’이라는 호칭은 하느님께만 사용하던 호칭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말씀은,
“너는 나를 사람으로만 생각하면서 왜 그런 호칭을 사용하느냐?”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그 사람이 달려왔다는 것은,
예수님을 꼭 만나고 싶어 했다는 뜻일 뿐이고, ‘절박함’을 나타내는 것은 아닙니다.)
“너는 계명들을 알고 있지않느냐?
‘살인해서는 안 된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횡령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마르 10,19)
예수님의 답변은 간단합니다.
“특별히 실천해야 할 율법이나 계명은 따로 없다.
네가 알고 있는 십계명을 잘 실천하면 된다.”
“그가 예수님께 ‘스승님, 그런 것들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 이르셨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르 10,20-21)
예수님께서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셨다는 말은,
어려서부터 십계명을 다 지켜 왔다는 그의 말을 인정하셨다는 뜻이고,
또 그가 위선자가 아니고, 진실하고 경건한 신앙인이라는 것을 인정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의 십계명 실천에는 한 가지 부족한 점이 있었습니다.
‘재물에 대한 애착심’이 크다는 것, 그것이 그의 부족한 점입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라는 말씀은,
‘재물에 대한 애착심을 버리는 방법’을 가르쳐 주신 말씀입니다.
“나를 따라라.”라는 말씀은
“나의 제자가 되어라.”, 즉 “나를 믿어라.”라는 뜻입니다.
이 이야기의 바로 앞에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마르 10,15)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만 믿고, 하느님에게만 의지하는
어린이 같은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재물의 힘으로는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또 사람의 힘으로는 들어갈 수 없고, 하느님께서 허락해 주셔야 합니다.
그 나라에 들어가는 일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은총이고 자비입니다.
한 가지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 나라에 들어가려면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이 이야기에 나오는 사람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도 아니었고,
자기 힘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마르 10,22)
그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이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영원한 생명과 현세의 재물, 그 두 가지를 모두 차지할 수는 없다는 것 때문에
울상이 되어서 슬퍼하며 떠났는데, 그가 재물 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받기를,
또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포기했다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에게는 평생의 숙제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의 뒷이야기는 알 수 없지만, 모든 가능성이 열려있습니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는
“재물에 대한 그의 애착심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입니다.
(이 말에는, 예수님을 믿기가 싫어서 떠난 것은 아니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그는 경건한 신앙인이었기 때문에 재물을 하느님처럼 섬기지는 않았을 것이고,
또 당시의 경건한 유대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불우이웃 돕기도 잘했을 것입니다.
(물론 재산이 축나지 않는 범위에서.)
그러나 재산을 전부 가난한 이들에게 주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에게는 너무나도 실천하기가 어려운 말씀이었습니다.
여기서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앞의 9장에서, 예수님께서는
“......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않을 것이다.”(마르 9,41)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마실 물 한 잔’의 선행으로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가능한 것 같은데,
왜 꼭 전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야만 하는가?
잘 생각해 보면, 예수님께서 모순되는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자기 소유물에 대한 애착심을 버리지 않으면
‘물 한 잔’을 주는 것도 아까워하게 됩니다.
또 예수님께서 ‘지금 당장’이라고 말씀하신 것도 아닙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자마자 모든 것을 버렸지만,
다른 사람들의 경우에는 사람마다 모든 것을 버린 시점이 달랐습니다.
<‘지금 당장’은 아니어도, 어떤 결정적인 시간이 왔을 때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도록 평소에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이 중요하고, 또 필요합니다.
모든 것을 버리지 않아도, 어차피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이 세상을 떠날 때에는 모든 것을 놓아 두고 떠나야 합니다.(1티모 6,7)>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을 사도들과 같은 급의 제자로 삼고 싶어서
사도들에게 하셨던 것과 같은 요구를 하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래도 어떻든 ‘재물에 대한 애착심’을 버리는 것은
모든 사람이 실천해야 할 일입니다.
그 애착심을 버리지 못하면 바늘귀로 빠져나가지 못하는 낙타가 됩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낙타라고 해도, 회개하고,
예수님의 도우심을 받아서 변화되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꾸준히 실천하면,
누구나 바늘귀 같은 하느님 나라의 문을 통과할 수 있습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