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는 백제와 신라를 동족이라고 생각했을까?
요즘 우리 카페가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할 의지가 있었네, 없었네, 하고 시끌벅적하다. 게시글은 조회가 폭주하고 댓글이 수도 없이 달리고 속편까지 올라와있다.
고구려는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었으므로 그들의 제1선은 항상 중국대륙의 이민족이었지 남쪽의 신라나 백제는 아니었다. 고구려는 백제.신라와 달리 훨씬 더 강력한 적을 하나 더 가지고 있었던 셈이고, 그와 대치해야 하는 불리한 여건 속에 있었다. 그 강력한 적에 비하면 백제나 신라는 상대가 안 되는 것이다. 백제나 신라는 배후위협세력에 불과했다. 때문에 백제․신라에 대한 고구려의 1차 목표는 이 배후의 위협 제거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고구려는 백제나 신라, 가야를 정복하려는 야욕은 갖고 있었겠지만 그들을 동족이라고 생각했는지에 대해서는 상당한 의문이 든다.
흔히 우리민족을 기마민족이라고 한다. 부여나 고구려는 확실히 기마민족이었다. 백제나 신라도 기마민족이었을까? 나는 이에 대하여 부정적이다. 백제의 왕가가 부여출신임은 분명하지만 그들이 남하해서 마한의 韓族 위에 군림한 것이므로 백제인의 대다수는 韓族이었지 기마민족이 아니었다. 신라도 마찬가지이다. 신라의 김씨왕가는 出自가 흉노족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들은 前漢의 武帝에 투항하여 그곳에 살다가 왕망의 시절 한반도로 건너와서 몇 세대 뒤 진한의 韓族 위에 군림하게 된 것이라고 본다. 가야의 경우도 그 건국설화나 동복 등 출토유물로 미루어보건대 지배계층은 기마민족출신임이 분명해보이지만, 그 토박이주민은 변한족이었다. 이 삼한의 韓族은 그 뿌리가 남방계라는 것이 최근 DNA검사 등의 과학기술로 속속 밝혀지고 있다. 삼한의 韓族은 남방계 농경민족인 반면 고구려의 예맥․말갈족은 북방계 기마민족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반도중북부와 만주지역에는 말갈족(물길)․예맥족․부여족 등이 살고 있었던 것 같다. 예맥은 濊와 貊으로 나누기도 한다. 아마도 뿌리는 하나이지만 평야지대에 정착하여 수렵과 농경을 병행한 예맥은 濊라고 불리고 산악지대에서 수렵생활을 계속하던 예맥은 貊이라고 불린 것 같다. 고구려는 이 濊을 중심으로 하여, 부여족(지배층)․말갈족(피지배층)으로 그 종족이 구성되어있었다고 생각한다. 반면 동쪽 옥저의 주민은 貊이었다. 맥은 연해주와 함경도, 강원북부에서 살고 있었고 말갈족은 바이칼호수에서 한반도중부지방까지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었던 것 같다. 삼국사기에는 백제와 신라가 말갈과 싸웠다는 기사가 종종 눈에 띈다. 한편 춘천에는 맥이 살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고구려를 구성하고 있던 말갈․예맥․부여족은 남쪽의 韓族과는 종족뿐만 아니라 언어나 풍습도 다르지 않았을까? 고대에는 교통이 불편하여 이들이 교류하는 일은 지금보다 훨씬 적었을 것이다. 따라서 종족이 혼혈되는 일도 적었고 언어도 서로 잘 통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고구려와 신라․백제 사이에 동족의식은 거의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럼 우리는 언제부터 삼국이 동족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일까? 나는 그것이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라고 생각한다. 고구려는 반 밖에 차지하지 못했지만 하여튼 신라는 삼국의 오랜 쟁패에서 최종 승리자가 되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백제․고구려의 故地를 사이에 두고 당과 충돌했다. 그래서 신라는 어느 때보다 내부결속이 필요했을 것이고 그런 가운데 자연스럽게 삼국이 당과는 다른 동족국가였다는 인식이 생겨났을 것이다. 만일 고구려가 멸망하지 않고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면, 그래서 남한은 韓族의 대한민국이, 북한과 만주는 예맥.말갈.부여족의 고구려가 각각 지배하고 있다면 과연 대한민국은 고구려를 동족국가라고 생각할까? 그렇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고려가 북방의 遼나 金을 동족국가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 아닐까?
원래 민족이란 개념은 근대 이후에 형성된 것이다. 고대에는 민족이라는 말 자체가 없었다. 중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어 그 문물을 한발 먼저 흡수할 수 있었던 고구려는 백제나 신라보다 문화수준이 높다고 자부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언어도 다르고 풍습도 다른 백제나 신라를 야만국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고구려는 신라․백제를 병합하려는 야욕은 갖고 있었겠지만 그들을 동족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흔히 우리자신을 韓民族 또는 단일민족이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남방계의 韓族과 북방계의 예맥․말갈․부여족이 혼합되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첫댓글 '기마민족' 이라는 게 무엇인지 잘 모르겠네요.(아마 일본 학자 에가미의 '기마민족론' 에 나오는 개념을 차용하신 게 아닌가 합니다만...) 민족 개념이 근대에 형성되었다고 하신다면 고대에 기마민족이 있다는 말이 좀 이상하지 않을까요? 게다가 기마민족이 유목민과 어떤 관계에 있을까요? 기마민족이 유목민을 지칭하는 것이라 본다면, 반농-반목의 만주 지역 종족을 기마민족이라 말하는 것도 좀 고려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민족이란 용어는 현대에 널리 쓰이고 있으므로 현대에 사는 내가 그 용어를 썼다고해서 모순은 아니라고 봅니다. 만주지역종족이 반농반목임에는 틀림없겠지만 그 근본은 수렵유목이었고 농경은 나중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민족이 기마민족이라는 것은 우리나라사람들 중에는 그렇게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고있는 사람이 많다는 뜻입니다. 기마민족과 유목민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을 지칭한다고 생각합니다.
부여의 근본이 수렵유목이라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부여에 관한 다음 기록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夫餘.....其民土著, 有宮室·倉庫·牢獄. 多山陵·廣澤, 於東夷之域最平敞. 土地宜五穀, 不生五果(부여는.... 그 백성이 '토착' 생활을 하고 있으며, 궁실과 창고, 뇌옥이 있고, 산과 구릉이 많고 연못이 넓으며 동이의 지역 중에서 가장 평평하다. 토지는 오곡에 알맞다.) - <삼국지 위지 동이전 '부여'>
유목민이라 도저히 생각하기 어려운 마한의 경우에도 부여와 비슷한 구조의 다음 기록이 있습니다.
馬韓....其民土著(마한은... 그 백성이 '토착' 생활을 한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한'>
부여의 경우 유목도 가미하였지만, 농경과 무관한 곳이 아니었으며 그 백성들이 토착생활을 하고 있다면 유목민이라 보기는 무리가 아닌가 합니다. 반면 유목민으로 보이는 오환 같은 경우에는 (비록 주석에서의 언급이긴 하지만) 다음과 같이 묘사하기도 합니다.
烏丸者, .... 隨水草放牧, 居無常處, 以穹廬爲宅(오환이란..... 물과 풀을 따라 (가축을) 방목하며 한 곳에 일정하게 머무르지 않고 천막을 집으로 삼는다)
남방 한족농경민 북방 부여족 기마유목민이라는 등식은 일제식민사학자의 주장에 바탕을 둔것입니다 시경한혁및 기타 사료에는 기원전 7세기경 예맥한 거주일대는 요동 요서 하북성일부까지 걸쳐 있었으므로 이같은 이분법 은 타당하지 않다고 볼수있습니다. 더우기 호태왕비문에는 동부여 백제 신라를 고구려 구시속민으로 비려 왜 등은
적대 세력으로서
표현되어 있고 왜는 이같은 고구려 세력권에 불법침입한 세력으로 취급되는 만큼 고구려와 동질적인 영역과
그렇지 않은 영역을 구분하고 있는 만큼 동족또는 동질의식이 없었다고 할수 없지요 한과 부여가 이질적이라는것도
맞지 않을뿐 아니라 신라 통일 이전에 동족의식이 없었다는것도 사실과 다름니다
"민족"이란 단어는 근대 이후에 단어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렇지만 민족"이란 개념은 존재했다고 봅니다.
그 증거는 많은 고대 사서들에서 족[族]이란 단어를 볼 수 있습니다.
현대에서의 민족개념과 같은것이라고 봅니다.
민족이란 개념이 없다면 전 세계에서는 민족의 구분도 없는것입니다.
그러므로 상고,고대시대에도 현대의 민족 개념인 족[族]을 사용하지 않았을까요?
고구려, 백제, 신라가 당시 동족이라고 생각했는지는 초기에는 있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동족개념은 없어지지 않았을가 생각합니다. 그리고 신라 이후 부터는 고구려,백제,신라를 삼국 또는 삼한으로 같은 동족으로 보았을거란 생각입니다.
귀거래사님 고구려가 신라, 백제를 동족으로 생각을 했든 안 했든 그게 고구려의 삼국통일 의지와 무슨 연관이 있을까요? 고구려 나라 자체가 거란, 여진 등등의 이민족들을 포함한 나라였는데요.. 같은 동족이다 아니다 하는 건 삼국통일의지완 상관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 의지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국가전략이나 군사전략적인 관점이 더 합당하다고 보여지네요. 같은 동족에 대한 시기심이나 경쟁심, 우열감 등으로 이민족보다 더 증오하고 치열하게 싸웠던 기록은 다른 민족의 역사에서도 볼 수 있으니 고구려가 신라,백제를 동족으로 인정했다고도 볼 수 있을까요?
호태왕시절 신라는 고구려의 보호를 받고 있었습니다. 백제를 구시속민이라고 하고 '백잔'이라고 한 것은 그 지배층이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부여출신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민족은 종족과 같은 개념이라고 할 수 있지만 거기에 '국가'의 개념이 더 플러스되어 있는 게 아닐까요? 고구려가 신라.백제를 동족국가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본다면 삼국통일이란 용어는 적절치 않고 백제.신라의 병합 또는 평정이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고구려가 신라.백제를 병합할 의지를 갖고 있었음은 말할 것도 없지만 1차 목표는 배후위협제거에 있었다고 봅니다.
고구려는 백제나 신라보다 오히려 燕, 隋, 唐 등과 더 치열하게 싸웠다고 봅니다.
삼국통일기나 현재 보는 관점에서 '삼국통일'이란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 것 같고 말씀하신대로 1차목표 배후위협제거가 더 부합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고구려의 아쉬움이 많고요..
미주가효님의 지적을 받고 저도 다시 살펴봤는데 역시 맞군요. 저의 짧은 지식이 들통이 났군요. 부여는 유목도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농업국가였던 것 같습니다. 예맥족이 언제부터 부여평야에 정착했는지가 문제일 것 같군요. 또 예맥 가운데 맥은 역시 수렵 위주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기원전 200년 경 東胡가 흉노의 공격을 받고 멸망합니다. 동호는 서쪽으로 도망가 오환이 되었다고 합니다만 일부는 동으로 흘러와 부여의 지배층이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중국 사서를 보면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언어와 풍속이 같거나 비슷하다고 쓰여 있습니다. 언어도 다르고 풍습도 다른 백제나 신라 라는 결론은 성급하게 내린 것 같습니다.
『후한서 권 85 고구려』
"동이족들은 서로 전하기를 부여의 별종인 까닭에 언어와 법제가 많이 같다고 한다"
"동이의 옛 말에 부여의 별종이라 하여 언어와 여러 일들이 부여와 더불어 같다"
『삼국지 권30 예』
"언어와 법속이 대개 고구려와 같다"
『양서 권54 신라』
"(신라의) 언어는 백제를 기다린 뒤에야 (중국과) 통한다"
『양서 권54 백제』
"지금의 언어와 복장은 대개 고구려와 같은데 다닐 때 두 손을 맞잡지 않고 절할 때, 다리를 펴지 않는 점이 다르다"
『남사 권79 백제』
"언어와 복장은 대개 고구려와 같다"
예맥도 퉁그스어를 썼다고 하니까 語順 등 중국어보다는 韓族의 언어에 가까웠을 것입니다. 마한시절은 고구려와 언어와 복장이 많이 달랐지만 부여계가 백제의 지배층이 되고부터 언어와 복장이 비슷해진 것 아닐까요? 梁書에서 말하는 '지금의 언어와 복장 운운'은 그런 의미가 아닐까요? 하여튼 이점에 있어서는 지적하신 대로 제가 너무 성급한 결론을 내린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부여.고구려는 예맥.말갈족이고 백제.신라.가야는 韓族으로, 서로 종족이 달랐다는 것입니다.
기록상으로도 수백년, 수천년 동안 다른언어, 다른 풍습 이라는 기록이 없을 뿐더러, 역사에 문외한 이라도 수백년, 수천년 같은 언어, 같은 풍습을 공유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동족의식, 민족의식이 없었을 거라고 한다면..동족의식, 민족의식의 기준이 뭔가요..
종족이란 언어.문화를 공유하는 집단을 말합니다. 종족명이 다르다는 것은 언어.문화가 다르다는 의미입니다. 중국역사서에 한반도북부.만주지역의 사람들을 예맥.말갈족이라고 했고 한반도남부지역의 사람들을 韓族이라고 했습니다. 삼국지진한전에는 '진한의 언어는 마한과 같지 않다'라고 했습니다. 100% 달랐다, 라는 의미는 아니라고 봅니다만 하여튼 삼한 내에서도 그런데 하물며 북쪽의 예맥.말갈과는 언어와 문화가 많이 다르지 않았겠습니까?
신라의 삼국통일의 의의 중 하나는 이들 이질집단이 동일 언어.동일문화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렇게 때문에 신라의 삼국통일의 의미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삼국지위지동이전 진한전.. 원로들에 의하면 이라는 ~카더라 통신을 인용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언어는 마한과 같지 않다고 하면서 나라를 방, 활을 고, 적을 구, 행주를 행상 , 서로를 도라고 부르며 진어와 비슷하지만 연이나 제나라의 명칭은 아니다
라고 하고 있죠...즉, 방언으로써 외래어인 진어를 사용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예 이죠..
그리고..
진서 진한전에선 진한의 풍습중에 편두을 얘기하고 있죠..하지만 진한지역의 유골에선 편두는 나오지 않고 변한, 가야인의 유골에서 편두가 발견되고 있죠
중국서가 말하는 초기삼국의 기록은 어디까지나 ~~ 카더라 통신으로써 정확성 보다는 유추 쯤으로 해석을 해야죠.
민족과 종족의 차이점은 역사적으로 형성된 사회집단 이라고 해서 민족을 얘기할땐 역사가 반드시 포함되지만 종족을 얘기할땐 역사적 의미는 민족 개념 보다는 희미하죠..역사적으로 만주와 한반도는 하나의 공동체엿음을 고인돌등 역사적 의미가 큰 유물들이 말해주고 잇죠.
정말 좋은 지적입니다. 그 점 내가 간과했네요. 종족이 다르다는 것에만 정신이 팔려서... 아마도 북방의 전쟁 등 혼란을 피해 남쪽으로 이주해온 사람들이 많이 있었겠지요. 그래서 마한인들은 언어와 문화가 어느 정도는 북방의 예맥족과 동화되었겠지요.
지석묘는 전북을 경계로 북방식과 남방식으로 나뉘는데 이를 보면 전라도지방의 마한인들은 그 묘제를 그대로 받아들인 게 아니라 그들 실정에 맞게 변형한 것 같습니다.
호태왕비문에 백제를 '舊是屬民'이라고 하고 '백잔'이라는 멸칭으로 부른 것은 과거에 많은 예맥인들이 백제로 이주했던 것을 고구려지배층이 알고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