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지금 어디에
김영심
해질 녘 내 좁은 뜰에 그늘이 내려앉으면 바람이 찾아와 무더위
에 지친 꽃과 나무들을 흔들어 깨운다. 나는 차 한잔을 들고 나
와 그들과 대화를 즐긴다. 때론 술과 안주 룰 마련하여 갖은 폼
을 잡으며 나만의 시간을 만끽 할 때도 있다. 태양이 내 정원
나무 뒤로 숨어 버리고 바람 마저 숨을 고르는 시간, 햇살이 사
그러진 하늘가에 석양의 쓸쓸함이 남아 있다. 잔디밭을 뛰어 다
니는 곤충들의 미세한 움직임까지도 감지 할 수 있는 이런 시간
을 참 좋아한다. 아침의 희망찬 시간도 한낮의 그 치열한 삶의
순간 다 지나고 자신과 마주 할 수 있는 시간. 언제부터였을까!
나를 외워 싸고도는 이 텅 빈 적막함. 생각해보니 그 많던 제비
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모두 다 어디로 갔을까? 내
생활에 바빠서 잊고 살았던 세월.
2-3년 전만 해도 저녁 무렵이면 마당 위 전기 줄에 가득 앉아 귀
가 따갑도록 조잘거리던 그들의 모습이 이젠 찾아 볼 수가 없다.
인간 세상이 싫어져 버린 것일까! 해마다 봄이 오면 당연히 찾아
와 주리라 믿었었는데 오늘 이렇듯 하늘을 보니 그들이 떠난 자
리가 더욱 허전하다. 옛 친구를 그리워하듯 그들이 앉았던 전기
줄을 보며 다시 돌아오길 고대해본다.
학창시절 꽤 절친한 친구가 있었다. 같이 시청각 공부를 하면서
알게된 예술대학 방송학과에 다니던 목소리가 아름다운 학생 이
였다. 그녀의 영향으로 한 때는 연극을 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완
고한 부모님 때문에 한번의 외도로 끝나고만 젊은 날의 일이지만
늘 가슴속에 아쉬움으로 남기도 한다. 가난한 그 시절, 재건 데이
트가 유행하던 때, 우리들도 만나면 백화점 아이쇼핑과 명동 거
리를 무작정 돌아 다녔다. 때론 음악 감상실 에 앉아 잘 알지 못
하는 클래식을 들으며 제법 센티 한 척도 했던 날들. 그땐 연극
과 영화광인 우리였는데 그런 문화 생활을 즐긴 지가 언제였는
지......내가 평범한 주부가 되고 그녀는 방송국 성우로 서로의 길
을 달리 했었다. 그래도 서울에 살 때 에는 보고싶을 때면 자주
만날 수가 있었지만 청주로 이사를 하면서 그런 기회가 거의 없
었고 어쩌다 친정 나드이 길에 그녀를 가끔 만날 수 있었다.
어느 해 여름 흑석동 언덕 위에 있는 그녀의 집 대청 마루에 나
란히 누워 젊은 날의 꿈과 사랑, 현실이 주는 좌절과 갈등을 얘
기하며 하루를 보냈다. 한 여름날의 소낙비 쏟아지는 소리를 들
으면서..... 그때 오동나무 잎에 떨어지던 비 소리. 지금도 그날의
모습과 감성이 선연히 남아 그리움으로 가슴이 뛴다. 그후 우린
어쩌다 다시 만날 수가 없었는지.......서로의 생활에 쫓기어 챙기
지 못한 채 세월이 흘러가 버렸다. 추억이 그리운 나이가 되어서
야 그녀를 찾으려고 방송국에 알아보니 몇 해 전 뉴질랜드로 이
민을 떠난 후였다. 그녀가 그곳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내게 마침 그곳을 여행한 다른 친구로부터 그녀와 비슷한
사람이 살고 있다는 소식을 바람결처럼 들었을 뿐이다.
혼자 이렇듯 조용한 시간이면 그녀가 몹시 보고 파진다. 아직도
내 가슴속에 오동잎에 떨어지는 비 소리가 음악처럼 흐르고 있는
데. 지금 그녀는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그녀를 생각하면
대청 마루에서 바라본 비속의 오동나무가 떠오른다. 내 뜰에다
한 그루 오동나무 룰 심어야겠다고 하면서도 좁은 뜰이 허락지
않아 내 가슴 깊이 오동나무를 심어 놓았다. 그 나무는 자라 흘
러간 세월만큼 무성한 잎을 드리우고 아름다운 추억이 봉황 되어
넘나들고 있다. 무심한 시간마저도 그 그늘 아래 쉬었다 가건만
그리운 나의 친구여 그대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내 안에 잎이
지기 전에 우리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만남 보다 더 긴 이별 앞
에 그리움의 열매가 익어 감은 우리의 기다림이 얼마나 가슴 아
픈지. 친구여 훌쩍 떠나고 싶구나. 타성적인 일상의 되풀이에서
벗어나 너 있는 먼 곳으로 가고 싶은 마음.
우리 다시 만나 그 그늘 아래서 음악 같은 비 소리들을 수 있다
면......
앞산 뻐꾸기 우는소리가 나를 부르는 너의 목소리처럼 들리는
구나. 슬프고도 아름다운 너의 목소리를 다시 한 번 들을 수 있
다면. 오랜 세월과 함께 온갖 풍상에 시달려 가면서도 푸른 기상
이 돋보이는 오동나무처럼 언제까지나 그런 젊음과 의연함을 지
니고 살고 싶구나. 비록 우리의 외모는 변하여 간다 해도 늘 추
억과 함께 푸른 오동나무로 서 있는 우리.
그 나무처럼 영원히 변치 않으리.
2002년 12집
첫댓글 오랜 세월과 함께 온갖 풍상에 시달려 가면서도 푸른 기상
이 돋보이는 오동나무처럼 언제까지나 그런 젊음과 의연함을 지
니고 살고 싶구나. 비록 우리의 외모는 변하여 간다 해도 늘 추
억과 함께 푸른 오동나무로 서 있는 우리.
내 안에 잎이 지기 전에 우리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만남 보다 더 긴 이별 앞
에 그리움의 열매가 익어 감은 우리의 기다림이 얼마나 가슴 아픈지.
친구여 훌쩍 떠나고 싶구나. 타성적인 일상의 되풀이에서 벗어나
너 있는 먼 곳으로 가고 싶은 마음.
우리 다시 만나 그 그늘 아래서 음악 같은 비 소리들을 수 있다면......
김영심 작가님은 안타깝게도 몇년 전에 故人이 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