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과 타이타닉의 악사들 직업윤리가 있는가? 趙甲濟
요사이 윤석열 대통령의 집무방식을 보고 있노라면 이 분이 공직자의 윤리가 있는 사람인지 의심이 간다. 대통령이란 직업에 대한 윤리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국민들에 대한 보고 의무이다. 그는 중요한 사건에 대하여 직접 보고하지 않고 간접화법을 쓴다. 기자회견도 하지 않는다. 보고 내용도 정확하지 않다. 부인의 명품백 사건처럼 부인 본인의 직접 해명이 필요한 부분도 뭉갠다. 직업에 대한 충성은 국가에 대한 충성 못지 않게 중요하다. 노블리스 오블리주 정신에 입각하면 직위가 높을수록 직업에 대한 충성의 강도는 높아진다. 그는 군 복무를 하지 않았다. 국가를 위한 충성이 무엇인지 체감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던 것이 요사이 행동에서 엿보인다고 하면 지나친 추론일까? 타이타닉 호 침몰 때 영국과 미국의 상류층, 그리고 8명의 악단이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소개한다. 1912년 4월14일 밤 세계최대의 여객선인 타이타닉호가 처녀항해중 대서양에서 氷山과 충돌, 15일 이른 새벽에 침몰하였을 때 2223명이 타고 있었다. 31.8%인 706명만이 살아남고 1178명이 사망하였다. 여자승객의 74%, 어린이의 52%가 살아남았는 데 반하여 남자승객의 20%만이 구조되었다. '여자와 어린이 우선(Women and children first)' 원칙이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이 원칙이 알려진 것은 1852년 영국 군함 빌켄헤드호가 침몰할 때 수병들이 모범을 보인 이후이다. 타이타닉호 사고 때 이 원칙을 너무 엄격하게 해석한 선원들이 救命보트에 빈 자리가 있음에도 남자를 태우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타이타닉에 준비된 구명보트는 1178명을 태울 수 있었는데, 706명만이 구조된 것은, 다 태우지 않고 출발한 보트가 많았다는 이야기이다. 일부 승객들은 큰 배에 남아 있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생각하였다. 1등석에 있던 일곱 어린이들중 여섯 명, 2등석의 어린이들 전부가 구조되었으나 3등석의 어린이들중 34%만이 구조되었다. 영국 남자 승객들의 사망률이 미국남자들보다 훨신 높은 것은 '紳士道'를 실천한다고 救命보트에 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월래스 하트레이가 지휘하던 8명의 樂團은 전원 사망하였다. 이들은 기울어가는 갑판에서 계속 연주를 하였다. 공황상태에 빠진 승객들의 마음을 안정시키는 효과가 있었다고 한다. 배가 거의 수직으로 기울어 침몰을 시작할 때까지 연주를 했다고 하여 타이타닉호를 다루는 영화에마다 등장하는 장면이 되었다. 이 樂團이 마지막으로 연주한 곡목에 대하여는 이견이 많으나 찬송가 '내 주를 가까기 하게 함은'이라는 게 定說이다. 하트레이는 평소에도 "만약 내가 탄 배가 침몰하면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을'을 연주하겠다"고 친구들에게 말하곤 했다고 한다. 타이타닉호에서 살아남은 남자들은 '비겁자'라는 욕을 먹을까 봐 눈치를 보면서 살았다고 한다. 뉴욕항을 목표로 처녀항해를 시작한 이 배에는 영국과 미국의 상류층이 많이 타고 있었다. 이들이 生死의 갈림길에서 보여준 紳士道는 두 나라의 엘리트가 가졌던 '노블레스 오블리제' 정신의 한 예일 것이다. 타이타닉호에 救命보트가 적었던 이유는 승객수가 아니라 톤수에 따라 구명보트의 의무적 보유척수를 결정하였기 때문이다. 사망자의 대부분은 영하 2도의 바닷물에 노출된 후유증으로 죽었다. 살아난 남자중엔 타이타닉호를 보유한 화이트스타라인 회장 브루스 이스메이도 있었다. 이스메이는 선장에게 속도를 더 내도록 압박, 사고의 한 원인을 제공하였다는 비판을 받았다. 氷山(빙산)과 충돌한 뒤에도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고) 속도를 늦추지 말라고 선장에게 지시, 침몰을 앞당겼다는 주장도 있다. 그에 대한 비방의 핵심은 최종책임자가 어떻게 살아났느냐였다. 선장도 죽고 수많은 영국과 미국의 부자들이 구명정 탑승을 포기, 배와 같이 침몰하였다. 미국 최고 부자중 한 사람이었던 구겐하임은 애인을 데리고 탔었는데 애인을 구명정에 태워 보내고 자신은 남아 '신사답게'(바에서 술잔을 비우면서) 최후를 맞았다. 이스메이는 구명정 C를 탔는데, 그는 "배를 탈 때 둘러봤더니 아무도 없었다"고 변명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타이타닉호가 거의 수직으로 침몰할 때 얼굴을 돌렸다고 한다. 그가 만든 배가 처녀항해에서 비참한 꼴을 당하는 걸 차마 볼 수 없었다고 한다. 영국과 미국의 언론은 이스메이를 '타이타닉호의 비겁자'라고 부르면서 조롱하였다. 한 작가는 그를 비방하는 詩를 썼다. "캄캄한 밤중의 바다에서 끔찍한 죽음을 맞는 건 바닷사람의 의무이고, 군중과 함께 도망치는 건 船主(선주)의 고귀한 권리인가?"라는 문장도 있었다. 영국의 上流(상류)사회도 그를 파문하다시피 하여 상대해주지 않았다. 그는 곧 해운회사에서 은퇴, 아일란드에서 은둔생활을 하다가 1937년에 74세로 죽었다. 월남전 때 미군 사령관이었던 웨스터모어랜드 장군은 미국의 정예 공정사단의 사단장으로 근무했던 적이 있었다. 이 부대가 낙하 훈련을 했다. 물론 그도 뛰어내렸다. 그날 강풍에 휘말려 부대원 7명이 죽었다. 다음날도 강풍이 불었으나 웨스트모어랜드 장군은 낙하 훈련을 중단하지 않는다고 발표했다. 다만, 자신이 먼저 뛰어내려 강풍을 확인해볼테니 기다려보라고 했다. 사단장이 홀로 낙하했다. 着地(착지)엔 성공했으나 낙하산이 强風(강풍)에 휩쓸려 끌려가다가 겨우 정지했다. 그는 부하들에게 지시하여 훈련을 중단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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