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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호16국시대와 고구려
AD 200년경부터 약 100년 간 계속된 위.촉.오 삼국의 쟁패는 晉의 건국과 함께 겨우 수습이 되고 중국은 오랜 전란 끝에 평화가 찾아오는 듯 했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였다. 300년대 초, 晉의 멸망과 함께 중국은 이민족의 五胡十六國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이 5호16국시대는 문자 그대로 난세, 산지옥으로, 이 시대에 수많은 국가, 수많은 민족이 흥망을 거듭했다. 그 중 하나가 고구려와 국경을 맞대고 있던 燕으로, 이 나라는 5호16국시대 내내 고구려에게는 매우 위협적인 존재였다. 따지고 보면 이 시대뿐만 아니라 고구려역사 7백 년 동안 고구려의 제1선은 언제나 남쪽의 백제나 신라가 아니라 서쪽의 이민족이었던 것이다.
燕은 300년경부터 400년대 초까지 100여 년 간 존속했던 선비족(몽고족의 일종) 慕容部의 국가로, 요서의 朝陽을 수도로 하고 북경지역과 요서요동지역을 지배영역으로 하고 있었다. 338년, 河北지역의 강국 後趙(흉노족)의 왕 石虎는 대군을 이끌고 燕을 침공하여 수도 朝陽을 포위 공격하였다. 하지만 끝내 城이 떨어지지 않아 철수하던 도중 燕軍에게 추격당해 오히려 대패하고 말았다. 화가 난 석호는 고구려와 손을 잡고 동과 서에서 燕을 협공하고자 300척의 배로 30만 섬의 곡물을 고구려로 운반하였다.
이에 燕의 왕 慕容皝은 배후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하여 342년 겨울, 친히 정예를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하여 환도성을 함락했다. 고국원왕은 단신으로 겨우 난을 피했지만 왕의 모친과 처는 燕軍에 붙잡혔다. 모용황은 先代 미천왕의 묘를 파헤쳐 시신을 꺼내갔으며, 환도성을 불태우고 포로 5만여 명을 끌고 철수했다. 이듬해 봄, 고국원왕은 아우를 燕에 보내 조공했으므로 모용황은 미천왕의 시신을 돌려주었으나 왕의 모친은 그대로 인질로 삼아 억류하였다. 前燕은 370년, 서북지역의 신흥국 前秦(티베트족)의 공격을 받아 멸망한다.
前燕에는 慕容垂라는 전쟁영웅이 있었다. 모용황의 4남으로, 수많은 戰功을 올렸으나 이를 시기하는 중신들의 모함을 받아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서쪽의 前秦으로 망명한다. 전진의 왕 부견은 그를 후대하고 중용했다. 라이벌 前燕을 멸망시키고 화북을 통일한 부견은 383년, 전 중국을 통일할 야심에 부풀어 100만의 군대를 이끌고 강남의 東晋을 공격했지만 淝水戰에서 대패하였고 前秦은 그로 인해 순식간에 와해되었다. 이때 前秦의 별동대를 이끌고 이 전쟁에 참가했던 모용수는 고향으로 돌아와 자립하여 燕을 부활시킨다. 이것이 後燕이다.
前燕은 왕 모용황이 죽자 내분이 일어나고 모용수가 前秦으로 망명하는 등 혼란에 빠졌다. 이를 틈 탄 고구려의 고국원왕은 369년, 대방군의 故地를 되찾고자 步騎 2만을 이끌고 백제를 공격했다. 백제의 근초고왕은 태자 근구수를 보내 이를 격퇴했다. 371년, 고구려는 다시 백제를 공격했으나 백제군의 매복습격에 걸려 패하였다. 근초고왕 부자는 반격에 나서 3만의 정병을 이끌고 평양성을 공격했다. 고국원왕은 분전했으나 流矢에 맞아 죽었다. 근초고왕은 의기양양하게 철수한 후 수도를 漢山으로 옮겼다.
370년, 前秦의 공격으로 前燕이 멸망하자 전연의 일부 왕족.장군들이 고구려로 망명했다. 고구려의 소수림왕은 이들을 모두 前秦의 부견에게 넘겼다. 372년, 전진왕 부견은 이에 대한 답례로 고구려에 승려와 불상, 경전을 보내왔다. 양국 간에 우호관계가 성립한 것이다. 하지만 383년, 전진이 멸망하고 후연이 건국되자 요동지방에서 고구려와 후연 사이에 다시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지게 된다.
391년에 즉위한 광개토왕은 즉시 백제를 공격하여 백제의 요충 관미성 등을 빼앗았다. 백제를 제압함으로써 배후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396년, 後燕의 왕 모용수가 죽었다. 그의 뒤를 이은 모용보는 광개토왕에게 平州牧遼東帶方二國王이란 칭호를 주었다. 즉 고구려의 요동영유를 인정한 것이다. 이렇게 후연과 일단 화평을 이룸으로써 서방의 압력에서 해방된 고구려는 396년, 광개토왕이 친히 수군을 이끌고 백제의 수도를 공략하여 아신왕의 城下之盟(항복)을 받아내고 58성을 평정하고 아신왕의 아우 및 대신들을 인질로 붙잡아 데리고 철수했다. 399년에 백제가 성하지맹을 어기고 다시 왜와 손을 잡고 신라를 공격하므로 400년, 광개토왕은 步騎 5만을 보내 이들을 신라에서 몰아낸 후 왜의 본거지인 금관가야까지 쳐내려갔다. 하지만 아라가야의 반격을 받자 일부 군대를 신라에 주둔시킨 후 철수한다. (이 왜가 과연 일본열도에서 바다를 건너온 것인지에 관해서는 의문점이 많다).
하지만 고구려군의 南下는 후연에게 허점을 파고들 기회를 주어, 같은 해인 400년, 후연의 왕 모용성은 3만의 병을 이끌고 고구려를 습격하여 2성을 빼앗고 700여리의 영토를 넓힌 후 철수하였다. 그래서 고구려는 다시 서방의 후연과 치열한 공방을 벌이게 된다. 그러자 404년에 이를 틈탄 왜가 다시 대방국경으로 고구려를 공격해왔다. 왜군은 참패하고 물러났지만 후연의 왕 모용희가 다시 요동성(405년)과 목저성(406년)을 공격해 와 고구려를 괴롭혔다. 하지만 407년이 되자 龍城(朝陽)에서 쿠데타가 발생하여 모용희가 살해당하고 高雲이 즉위하였는데 다행스럽게도 그는 고구려왕가의 친척이었다. 이리하여 양국은 즉시 화해하였고 고구려에 대한 서방의 위협은 해소되었다. 그래서 동년, 고구려는 다시 창끝을 남쪽으로 돌려 步騎 5만의 대군을 보내 백제를 공격한다.
409년, 후연의 高雲이 측근에게 암살당한 뒤 馮跋이라는 장군이 왕으로 추대되는데 이때의 연을 北燕이라고 한다. 馮跋은 430년에 죽고 그의 동생 馮弘이 왕이 되었지만 서방의 신흥강국 北魏(선비족 拓跋部)의 잦은 공격에 국가의 존망이 위태롭게 되자 그는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했다. 436년, 고구려군은 북위군보다 한발 앞서 북연의 수도 용성에 입성하여 연왕 馮弘과 함께 용성의 전 주민을 이끌고 요하를 건너 무사히 고구려로 돌아왔다. 그때 그 대열의 길이가 무려 80여리에 달했다고 한다. 이리하여 고구려와 燕 사이의 끈질겼던 숙명의 대결은 끝이 나고 燕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439년 화북을 통일한 北魏는 北周(선비 宇文氏)를 거쳐 隋로 바뀌었으며(581년), 隋의 文帝는 강남의 陳을 멸망시키고 중국을 통일하였다(589년). 위.촉.오의 삼국 이래 3백년 이상 계속된 전란과 분열의 시대는 이로써 종지부를 찍는다. 화북에서 5호16국과 북위.북주 등(北朝)이 흥망을 거듭하는 동안 강남에서는 東晉을 비롯한 宋, 齊, 梁, 陳의 5왕조(南朝)가 교체되었다. 曹丕가 魏를 건국하고 중국이 삼국으로 분열된 때부터 수의 문제가 陳을 멸망시키고 중국을 재통일할 때까지의 시기를 통틀어 魏晉南北朝時代라고 한다.
고구려는 魏, 公孫氏, 燕, 隋, 唐 등 서방의 국가들과의 투쟁 속에 온갖 시련을 극복하면서 성장을 하고 발전을 했다. 그것은 국가의 사활이 걸린 싸움이었다. 남쪽의 백제나 가야, 신라에 대한 고구려의 1차적인 목표는 배후의 위협을 제거하는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고구려는 백제, 신라와 달리 중국과 직접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이와 같은 고구려의 방파제역할 덕분에 남쪽의 백제와 신라는 성장할 수 있었지만 이로 인하여 역설적으로 고구려는 점점 배후의 위협을 제거하기 어렵게 되었던 것이다.
영웅은 시대가 만든다고 한다. 광개토대왕은 우리민족이 낳은 불세출의 영웅이지만 그도 역시 5호16국이라는 난세가 만든 시대의 아들이었다. 그가 영웅이 된 것은 후연의 강자 모용수가 죽고 후연의 국력이 약해진 결과라는 측면이 있다. 그가 30대라는 젊은 나이에 죽지만 않았더라도...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5호16국이라는 난세 속에 수많은 나라와 민족이 흥망을 거듭했지만 고구려는 이를 극복하고 끝까지 살아남았다. 7백년 고구려의 역사는 기본적으로 중국을 포함한 이민족들과의 투쟁사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첫댓글 전연이 멸망하였으면 고구려 고국원왕이 공격해야 할 대상은 백제가 아니라 전연의 잔당이겠죠.
고국원왕은 전연에게 뼈아픈 고통의 기억이 있지요.
아버지 미천왕의 무덤을 도굴당하고 어머니가 붙잡혀갔으며 드디어 복수할 기회가 도래한 것이죠.
고국원왕이 복수할 대상은 백제가 아니라 전연인데, 삼국사기에는 고구려가 백제에게 먼저 싸움을 걸어 온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삼국사기에는 전연의 멸망 다음해에 고국원왕이 백제를 공격하였다가 역습당하여 전사당했다고 나옵니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그대로 믿자면 뭔가 이상한데, 남당유고에는 고국원왕이 서토를 정벌하러 군사를 일으키자,
백제가 갑자기 남쪽에서 침입해 온다고 합니다.
그래서 고구려가 양쪽에서 적을 맞이하여 고국원왕이 직접 군대를 지휘하다가 유시에 맞아 죽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진서엔가 보면 백제왕 여구(여귀)를 동진에서 진동대장군낙랑태수로 임명합니다.
근초고왕대의 일이라서 근초고왕의 이름을 여구(여귀)로 보지만, 근구수왕을 귀수 혹은 구수라고 읽지요.
앞의 '근'자는 크다 혹은 가깝다 혹은 후(뒤)라는 뜻이죠.
그러므로 여구(여귀)가 근구수일 가능성도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전연을 멸망시킨 전진을 치기에는 고구려는 역부족이었을 겁니다.
삼국사기에 근초고왕이 372년 동진에 견사조공했다고 나옵니다. 前年의 대 고구려전의 승리를 자랑할 겸 동방의 신흥강국임을 신고하러 보낸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므로 백제왕 여구는 근초고왕이죠.
근초고왕이나 근구수왕은 실은 초고왕, 구수왕이었다고 봅니다. 하지만 先代에 초고왕과 구수왕이 별도로 있으므로 혼란을 피하기 위해 김부식이 '近'자를 붙인 것아닐까요? 일본서기에는 그들이 肖古王, 貴須王 또는 速古王, 貴首王(백제본기 인용)으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370년에 전연이 멸망하자 모용평이 고구려로 달아납니다.
고구려는 선대의 일로 문제삼아 모용평을 붙잡아 전진으로 보냅니다.
이로 인하여 고구려와 전진사이에는 화친이 고구려와 전연사이에는 화친이 깨집니다.
전연이 전진에게 나머지 땅을 바치려 하였다면 옛날에 원수를 찾아가는 일조차도 없었을 것입니다.
이제 전연의 잔당이 선택할 수 있었던 길은 동진을 찾아가서 군대와 군량을 내어달하고 하였을 것입니다.
일이 이정도가 되었다면 전진은 전연을 상대하기가 까다로워졌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전진은 고구려로 하여금 전연의 변방을 쳐달라고 요청하였을 것입니다.
고구려 또한 이를 거절할 하등의 이유가 없죠.
당시에 고구려는 연(전연)을 멸망시킨 이후에 백제를 멸하고 그 이후에 신라를 멸하여 삼한을 통일한 의지를 가지로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전연의 멸망을 백제가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기에, 고구려가 전연의 잔당을 공격하러 군사를 움직이고 있는 도중에 갑자기 고구려를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그 와중에 고구려 고국원왕이 유시에 전사하는 바람에 고구려의 서토정벌은 중단되기에 이릅니다.
근초고왕이 고국원왕 전사이후에 전쟁을 멈추었던 것은 백제가 고구려보다 결코 강했기 때문이 아니라 빈틈이 있었으므로 일시적인 승리에 불과한 것입니다.
근초고왕이 원했던 것은 동북아의 균형이 아니었나 합니다.
晉書 卷九 帝紀第九 簡文帝 孝武帝
簡文帝 昱 : 咸安二年(372년) 六月 遣使拜百濟王餘句為鎭東將軍領樂浪太守
孝武帝 曜 : 太元十一年(386년) 夏四月 以百濟王世子餘暉為使持節都督鎭東將軍百濟王
여휘(餘暉)가 누구인지 찾아보시길 바랍니다. 1)진사왕 2)진사왕의 아들 3)아신왕 4)기타
안제(安帝) 의희(義煕) 12년 전지왕(腆支王) 12년 백제 왕 여영(餘映)을 살펴보건대, 여영(餘映)이 《문헌통고》에는 여전(餘腆)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전지왕으로, 영(映)이 전(腆) 자와 글자가 비슷하여서 잘못 와전된 것이다. 사지절 도독백제제군사 진동장군 백제왕(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鎭東將軍百濟王)으로 삼았다. 《송서》
○ 송(宋)나라 고조 영초(永初) 원년 전지왕 16년 7월 갑진에 진동장군 백제왕 부여영(夫餘映)에게 조서를 내려 호를 진동대장군(鎭東大將軍)으로 올리고 지절도독(持節都督) 및 왕공(王公)은 예전대로 두었다. 《상동》
370년 전연이 망한 것은 고구려로서는 백제를 치기에 절호의 찬스였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고국원왕이 너무 서둘렀나요, 아니면 백제의 실력을 너무 과소평가했나요, 하여튼 결과는 패전이었고 본인의 전사였습니다. 역사란 뜻대로만은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진서 효무제 조는 이상하군요. 386년이면 진사왕 재위시 같은데... 餘暉가 누구인지가 문제겠군요. 한번 조사해봐야겠습니다.
여휘가 누구인지를 파악하려면 진사왕의 나이와 백제가 동진에 사신을 보내어 돌아오는데 걸리는 시간을 알아야 합니다.
남당유고에 의하면 진사왕의 형 침류왕의 출생은 351년이며, 침류왕의 아들 아신왕과, 아신의 아들 전지왕의 출생기록이 보이지 않으나, 전지왕의 아들 구이신왕이 섬에서 출생했다는 기록으로 보아서 405년생입니다.
침류(351생) - 아신 - 전지 - 구이신(405생)인데 18년차이로 배분하면,
침류(351생) - 아신(369생) - 전지( 387생) - 구이신(405생)정도로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본다면 비유왕을 구이신의 아들로 볼수 없으며, 전지왕의 서자로 봄이 타당합니다.
진사왕의 즉위 시점을 385년 11월 침류왕의 사망시점을 기준으로 두면 아신왕의 나이가 대략 15세에 해당합니다. 아신왕이 어려서 숙부인 진사가 즉위하였다는 말에는 약간의 의구심이 생깁니다.
남당유고에는 별말이 없지만 침류왕의 어머니 아이부인이 그 때까지 살아 있었지 않았을까요?
이는 또한 침류와 진사가 어머니가 같을 경우를 염두해 두고 있으나 기록은 없습니다.
나이 어린 손자보다 차남에게 승계토록 하여 나라를 굳건히 하자는 의도는 아니었을까?
그런 의미에서 여휘는 진사왕이고, 동진으로부터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의심합니다만, 이건 저의 생각일 뿐입니다.
여휘는 진사왕이 맞는 것 같습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침류왕이 죽었을 때 그의 맏아들(아신왕)이 너무 어려 즉위를 못하고 대신 숙부인 진사왕이 즉위한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때문에 진사왕은 침류왕이 죽고 자신이 새로 즉위했음을 중국에 보고하러 사신을 보냈을 때 정식으로 왕이라고 하지못하고 왕세자라고 한 것 같습니다. 전지왕의 서자가 중국에 견사조공했을 리도 없고 중국에서 그를 백제왕으로 책명할 이유도 없습니다.
다시 생각해보니 효무제 태원11년(386)조에 나오는 백제왕세자 여휘는 진사왕이 아니라 침류왕의 맏아들(아신왕)인 것 같습니다. 백제의 사신으로부터 진사왕의 즉위경위를 들은 효무제는 진사왕을 적법한 왕으로는 인정 안 하고(대리 또는 섭정 정도로 인정하고) 침류왕의 어린 아들(왕세자)을 정식 왕으로 인정하여 그에게 '사지절도독진동장군백제왕'의 칭호를 내린 것 같습니다. 진사왕을 왕세자라고 했을 리는 없으니까요.
백제왕세지 여휘는 침류왕도 아니고 진사왕도 아닙니다.
침류왕이나 진사왕은 모두 해씨이고, 여휘는 여씨죠..
여구 여휘 여영 여비(비유왕)로 이어지는 여씨입니다.
해씨는 근초고~근구수~침류~진사~아신~전지~구이신으로 대가 끊어지게 됩니다.
얼마전에 어느분이 4~5세기 광개토왕과 장수왕의 대신라정책이 미온적이였다고 주장한 적이 있지요. 어느정도 공감을 하면서도, 동일 선상에서 광개토왕의 대후연정책이 미온적이였다고 생각됩니다. 신라도 속국으로 잡아두었고, 백제의 하수인 임나가라도 붕괴시켰고, 백제의 왕을 굴복시켜 후방의 모든 위협을 제대로 제거해놓은 최적의 상태에서 다 망해서 날로 먹을수 있었을 후연을 요동 진출 이후로는 수세적인 태도를 취하며 왜 가만히 내버려 두었는지 납득이 가지를 않습니다. 적어도 광개토왕의 후연 정벌에 대해서는 호전적인 정복군주라는 느낌보다는 최소한의 이득만 취한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호태왕비문에 의하면 400년 고구려군 보기 5만이 임나가야까지 쳐내려가 성을 함락시켰습니다. 하지만 아라가야의 반격을 받고 물러납니다. 말하자면 고구려는 주력을 남쪽의 전선에 장기간 주둔시킬 수 있는 입장이 못 되었던 것 아닐까요? 남쪽을 공격하면 서쪽에서 달려들고, 서쪽을 치면 남쪽에서 몰려오고...
사실 407년 후연에 고운이 왕이 된 이후 광개토왕은 백제를 멸망시킬 절호의 찬스를 맞습니다. 그래서 곧 대대적으로 백제를 공격한 것 같지만 역시 성공하지 못하고 끝납니다. 그러다 412년 왕은 38세의 젊은 나이에 죽습니다. 고구려는 백제에 힘의 우위에 있었음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절대적 우위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호태왕비문의 영락17년(서기 407년)조 기사의 작전 대상에 대해서는 후연설과 백제설로 나뉘고 학계에서는 대체로 백제설을 따르지만 근거가 미약하다고 생각하며 소수설인 후연설도 마찬가지라 생각됩니다. 하여튼, 당시 한반도가 4세기에 이루어진 광개토왕의 작전에 의해 고구려로 치고 올라갈 여건이 아니였고, 후연도 완전히 망가젔는데 광개토왕은 전통적인 위협세력이였던 서쪽(중원 방면)과 신흥 위협세력인 남쪽(한반도 방면) 어느쪽도 끝장을 보지 않습니다.
더구나 후연이 망할때쯤 중원을 잡고 있던 북위도 심각한 내란에 빠저 타 세력이 북위를 공격했다면 멸망시키는 것도 가능했을 지경이였습니다. 모험을 벌였으면 고구려는 북위를 제치고 최초의 침투왕조 또는 정복왕조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다면 지금의 중국 동북 변방 세력이라는 이미지와는 비교도 안되는 높은 위상과 인지도를 가지게 되었을 것이며, 북위가 그랬든 누구도 넘볼수 없는 세계 최강의 국가로 군림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또한 중국의 프랑크라는 북위의 별명을 고구려가 가저갔겠지요.
중원을 차지한 다른 이민족들이 그랬듯 중국과 동화되고 중국의 역사로 남았겠지만, 그것은 지금의 한국인에게나 민감하게 작용하는 것이지 당시의 고구려인들은 후세의 한국인들은 고려대상이 아니고, 자신들의 입장에서는 중원을 차지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좋은 일이지요. 어쨋건 광개토왕이 굴러들어온 절호의 기회를 처다보지도 않으신 덕분에 북위가 중원의 최강자로 군림하게 되고 화북,화남을 통일한 수,당에게 얻어맞다가 결국 그렇게 업신여기던 신라에게 멸망당하는 역사를 장식하게 되었습니다. 대륙과 반도중 어느 한 쪽은 끝장을 봤어야 이런 역사가 벌여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일리 있는 말씀입니다. 중국 주변의 이민족들이 다 한번씩 중원을 차지했는데..
하지만 중원에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에 오히려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볼 수도 있지요.
운명이란 게 참 묘해서 광개토왕은 조부 고국원왕의 피맺힌 한을 풀어드리고 싶었을 터인데...
그 좋은 찬스가 찾아왔는데 그 대업을 이루기 전에 명이 다 되었으니...
역시 영웅은 하늘이 내리는 것 같습니다.
요즘 사극 근초고왕은 소설을 쓰고있는 것 같아 볼 생각이 안 납니다.
차라리 고국원왕을 그렸으면 좀 더 역사에 충실한 극을 만들 수 있었을 텐데,...
그의 피맺힌 원한, 파란만장한 일생은 시청자들의 심금을 울리고 남을 텐데,...
말년에는 정복사업을 관두고 내정에만 치중하는걸 보면 고구려가 전통적으로 꿈꿔오던 지역들을 차지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그이상으로 욕심을 부리지 않은것 같습니다. 아직 고대사 사극의 소재로 성공을 거둔 영웅이 주로 선택되는 추세인데 고대사 사극의 수준이 좀더 난숙해지면 조선시대 사극에서 다채로운 소재가 다루어지는 것처럼 비극적인 영웅,당대 민중의 생활상 등 좀더 다양한 소재를 다루게 될 것이라 기대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