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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프로야구의 시작과 함께해야 했지만
역사적인 프로야구의 시작과 함께할 수 없었던
‘마지막 국가대표’ 6인의 1982년
진정성이 묻어나는 ‘야구’ 에세이로 감동을 전하는 작가 김은식의 대한민국 최초 야구팩션이다. 작가 개인적으로도 처음으로 시도하는 스포츠 소설이다. 그가 1982년을 배경으로 야구 국가대표 선수들을 주인공으로 한 이 소설을 집필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흥미진진하다. 김은식 작가가 열 살이던 그 해, 프로야구가 출범했고 같은 해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는 일본을 꺾고 역전 우승을 기록한다. 그가 기억하는 이 두 사건의 짜릿한 추억은 뒤돌아보면 그를 야구 전문 작가로 이끈 출발점이었다. 그래서 이 책은 작가의 전작들이 ‘에세이’라는 형식으로 다룬 한국 야구사에 대한 새로운 형태의 조명 작업을 시작하는 출발점의 의미를 지닌다고 말한다.
소설은 지금으로부터 꼭 30년 전인 1982년을 배경으로 시작한다. 당시 프로야구 출범과 세계야구선수권대회가 있었던 그 해. 한국야구사에 있어 거대한 이 두 사건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국가대표팀 선수들의 이야기이다. 첫 장에서부터 시작되는 갈등의 초점은 바로 국가대표팀 구성이었다. 프로야구가 출범하면서 나누어질 수밖에 없었던 프로 선수와 국가대표 선수들. 특히 국가대표 구성 과정에서 감독과 선수들의 갈등과 고민은 깊어졌는데… 이런 와중에도 국가대표팀이 출전했던 세계야구선수권대회 한일전의 극적인 승리와 우승 등은 연일 신문, 방송 등에서 화제를 모았던 당시 사회의 가장 큰 이슈이기도 했다.
김은식 작가는 이 사실에 픽션을 가미해 자신만의 시선으로 집필, 이제는 코치, 감독 등 지도자로 불리우는 선수들을 비롯 다시 볼 수 없는 선수들의 모습들을 생생하게 되살렸다. 2012년 한국시리즈 못지않게 흥미진진했던 1982년, 지금보다 더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세계야구선수권대회 한일전, 임호균, 이해창, 최동원, 김재박 등 치열했던 선수들의 경기 등 소설을 읽다보면 한 편의 야구경기처럼 손에 땀을 쥐게 한다.
야구 전문 작가 김은식의 대한민국 최초 야구팩션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우승의 감춰졌던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마지막 국가대표’라 불리워진 그 때 그 선수들
#Scean 1 갈등
1982년 최고의 선수들로 짜여진 ‘마지막’ 국가대표의 운명
“프로로 넘어간 사람은 다시는 국가대표가 될 수 없는 건데, 이제 다들 학교 졸업하면 프로로 갈 거니까, 앞으로는 국제대회 나갈 때도 그냥 대학선발팀에다가 군인 몇 명 보태서 나갈 수밖에 없을 거 아니냐고. 천하의 김재박, 천하의 최동원, 천하의 장효조, 천하의 심재원… 응? 또 뭐 천하의 이해창, 천하의 유두열, 천하의 김시진, 또 이 천하의 임호균. 하하. 뭐 이렇게 대한민국 최고의 선수들로 만드는 국가대표팀은 우리가 마지막 아니겠냐고. 안 그렇습니까?”
임호균이 진지한 표정으로 시작해 익살스런 표정으로 맺으며, 이해창에게 말머리를 넘겼다. 이해창 역시 껄껄 웃으며 받았다.
“야… 그거 멋지다. 마지막 국가대표라. 그래, 우리가 마지막 국가대표지. 좋은데?”(137p)
1982년을 배경으로 시작되는 이 소설은 프로야구 출범으로 국가대표로 가야했던 선수들의 갈등과 고민, 세계야구선수권대회 경기를 작가의 상상력을 가미해 실감나게 보여준다.
30년 전. 프로야구가 출범했다. 암울했던 5공화국의 계획적인 프로구단 출범이었지만, 이후 프로야구는 걸출한 스타 선수들을 배출했고, 지금까지 그 인기는 여전하다. 그런데 당시 처음 프로야구가 출범하면서 그 해 세계야구선수권대회가 우리나라에서 열렸고, 그 경기는 역시 국가뿐 아니라 선수, 팬들에게도 중요한 경기가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 참여한 선수들은 바로 국가대표. 프로로 갈 수 없었던 당대 최고의 선수들로 구성된 국가대표팀은 스스로 생각하기에 ‘마지막’ 국가대표가 되었다. 연봉에서부터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차이가 많이 났던 국가대표와 프로의 경계에서 갈등했던 국가대표 선수들의 고민은 그대로 스토리 속에 녹아들었다. 그리고 임해야 했던 세계야구선수권대회 경기. 특히 한일전은 두말할 필요 없이 국민 모두에게 굉장히 중요한 게임이었다.
#Scean 2 절정
세계야구선수권대회의 치열했던 역전 우승!
“홈런.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것만 같던 경기를 단숨에 5대 2로 뒤집는 역전의 스리런 홈런이었다. 6구가 던져지는 순간 스타트를 끊어 이미 3루 베이스를 밟고 선 채 제발 파울라인을 벗어나지만 말아달라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공의 궤적을 응시하던 이해창은 어느새 흘러내린 눈물이 땀과 섞여 번들거리는 얼굴로 3루를 돌아 홈으로 들어와 환호했고, 1루에서 출발해 2루 베이스를 한참 지나쳐있던 장효조 역시 두 팔을 번쩍 들어 감격을 만끽하며 3루와 홈 플레이트를 차례로 밟았다. 그리고 한대화, 그 날의 가장 화려하고 빛나는 지점에 선 사나이가 묵묵히 다이아몬드를 누비고 홈 플레이트로 귀환했다.”(233p)
9월 14일 잠실구장. 3만 관중이 꽉 찼고, 함성소리는 순간순간 구장이 떠나갈 듯 했다. 올 한국시리즈보다 더 치열하고 흥미진진했던 경기. 구장뿐 아니라 모든 국민들을 TV 앞에 모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을 경기. 특히나 그 유명한 ‘개구리번트’란 말이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그 경기. 바로 30년 전인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한일전 경기다. 8회까지 지고 있던 우리나라 팀이 극적인 역전으로 우승한, 야구팬들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로 손꼽히는 바로 그 경기다.
당시 팀을 이끌었던 어우홍 감독은 그 우승이 지금까지 프로야구가 인기를 끄는 초석이 되었으며, 북경올림픽 우승, WBC 준우승 등에도 간접적으로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당시 유격수 김재박 선수 역시 그 날의 경기를 결코 잊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 날의 경기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조차도 치열했던, 국민 모두가 흥분했던 그 순간은 글로 되살아나 감동을 준다.
#Scean 3 오늘
이젠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30년 전 야구의 추억!
“그러고 보니까 잠실야구장도 서른 살이 넘었구나. 이게 그 대회 때문에 지은 건데. 지금은 동대문야구장도 없어졌고, 여기가 명실상부한 한국야구의 메카야. 그치?”
“그 메카에 첫 번째 전설을 우리가 썼으니까, 어디에 우리 이름도 좀 새겨주고 그래야 되는데, 안 그렇십니까?”
이해창이 감회가 새로운 듯 가늘게 눈을 뜨고 말했고, 역시 유두열이 웃으며 받았다.(238p)
이제는 회상할 수밖에 없는 30년 전의 치열했던 순간들. 그리고 잊을 수 없던 경기들과 선수들. 그 모든 것을 추억할 수 있어서, 현실과 상상을 넘나들어 소설은 재미있다.
■ 『마지막 국가대표』 등장인물
이해창 : 서른 살. 대표팀 최고참. 호타준족의 외야수지만 어깨에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어 주로 지명타자로 기용되었다. 훗날 MBC, 삼성, 태평양 등에서 한 차례 도루왕 타이틀을 차지한 바 있다.
심재원 : 서른 살. 70년대 중후반 국가대표팀 주전포수로서 대표적인 수비형 포수로 꼽히며, 뒤늦게 뛰어든 프로야구에서도 아홉 시즌을 뛰며 0.424의 훌륭한 도루저지율 기록을 남겼다. 1994년, 41세에 폐암으로 사망했다.
김재박 : 스물아홉 살. 한국야구 역대 최고의 유격수이며, 1977년 실업야구 야수 전관왕에 빛나는 슈퍼스타. 프로에서도 한 차례 도루왕을 지냈고, 유격수 부문 골든글러브를 다섯 차례(4년 연속 기록 포함) 차지했다.
임호균 : 스물일곱 살. 대표팀 투수조 최고참. 1970년대 후반 국가대표팀 마운드를 책임졌다. 역대 최고의 제구력을 가졌던 투수로 프로야구에서도 세 차례 10승대 기록, 역대 최소투구수 완봉승(73구) 등의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장효조 : 스물일곱 살. 경리단에서 복무하던 중 참가한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 4번 타순에 기용됐다. 이듬해 프로무대로 진출해 10년간 활약하며 네 차례 타격왕을 지냈고 역대 최고기록인 .331의 통산타율을 남겼다.
김시진 : 스물다섯 살. 직구와 슬라이더가 위력적이었으며 안정적이고 꾸준한 제구력이 특기였다. 대학을 졸업하던 1976년에 군입대를 해 경리단에 적을 두고 있었는데, 이듬해 프로무대에 데뷔하게 된다.
최동원 : 스물다섯 살. 경남고 시절 노히트노런으로 주목을 받았고, 시속 150킬로미터 대의 강속구와 낙차 큰 커브를 주무기 삼아 연세대 1학년 시절부터 국가대표팀 에이스로 활약했다. 프로무대인 1984년 롯데 자이언츠의 첫 우승을 이끌었다.
유두열 : 스물다섯 살. 큰 경기에 강하고 찬스에 강한 면이 있어 실업무대에서도 올스타전 MVP에 선정된 적이 있었다. 1984년 한국시리즈 7차전에서 역전 3점 홈런을 때려내 롯데 우승의 주역이 되기도 했다.
저자 김은식
1973년 충북 음성에서 태어나 대학에서 정치학과 사회학을 공부했다. 월간 '우리교육과' 인터넷신문 '오마이뉴스'를 비롯한 여러 매체에 글을 썼다. 라디오에서 한국 프로야구 선수들을 재조명하는 '야구의 추억'을 방송했고, 현재는 EBS, '초암논술아카데미', '풀로 엮은 집', '한겨레문화센터'에서 글쓰기 강의를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이회영, 내 것을 버려 모두를 구하다', '장기려, 우리 곁에서 살다 간 성자', '야구의 추억', '해태 타이거즈와 김대중', '두산베어스 때문에 산다' 등이 있다.
1982년, 우리가 기억하는 야구는 어디까지인가?
누구보다 프로야구의 시작과 함께해야 했지만
역사적인 프로야구의 시작과 함께할 수 없었던
‘마지막 국가대표’ 6인의 1982년
진정성이 묻어나는 ‘야구’ 에세이로 감동을 전하는 작가 김은식의 대한민국 최초 야구팩션이다. 작가 개인적으로도 처음으로 시도하는 스포츠 소설이다. 그가 1982년을 배경으로 야구 국가대표 선수들을 주인공으로 한 이 소설을 집필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흥미진진하다. 김은식 작가가 열 살이던 그 해, 프로야구가 출범했고 같은 해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는 일본을 꺾고 역전 우승을 기록한다. 그가 기억하는 이 두 사건의 짜릿한 추억은 뒤돌아보면 그를 야구 전문 작가로 이끈 출발점이었다. 그래서 이 책은 작가의 전작들이 ‘에세이’라는 형식으로 다룬 한국 야구사에 대한 새로운 형태의 조명 작업을 시작하는 출발점의 의미를 지닌다고 말한다.
소설은 지금으로부터 꼭 30년 전인 1982년을 배경으로 시작한다. 당시 프로야구 출범과 세계야구선수권대회가 있었던 그 해. 한국야구사에 있어 거대한 이 두 사건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국가대표팀 선수들의 이야기이다. 첫 장에서부터 시작되는 갈등의 초점은 바로 국가대표팀 구성이었다. 프로야구가 출범하면서 나누어질 수밖에 없었던 프로 선수와 국가대표 선수들. 특히 국가대표 구성 과정에서 감독과 선수들의 갈등과 고민은 깊어졌는데… 이런 와중에도 국가대표팀이 출전했던 세계야구선수권대회 한일전의 극적인 승리와 우승 등은 연일 신문, 방송 등에서 화제를 모았던 당시 사회의 가장 큰 이슈이기도 했다.
김은식 작가는 이 사실에 픽션을 가미해 자신만의 시선으로 집필, 이제는 코치, 감독 등 지도자로 불리우는 선수들을 비롯 다시 볼 수 없는 선수들의 모습들을 생생하게 되살렸다.
2012년 한국시리즈 못지않게 흥미진진했던 1982년, 지금보다 더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세계야구선수권대회 한일전, 임호균, 이해창, 최동원, 김재박 등 치열했던 선수들의 경기 등 소설을 읽다보면 한 편의 야구경기처럼 손에 땀을 쥐게 한다.
야구 전문 작가 김은식의 대한민국 최초 야구팩션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우승의 감춰졌던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마지막 국가대표’라 불리워진 그 때 그 선수들
#Scean 1 갈등
1982년 최고의 선수들로 짜여진 ‘마지막’ 국가대표의 운명
“프로로 넘어간 사람은 다시는 국가대표가 될 수 없는 건데, 이제 다들 학교 졸업하면 프로로 갈 거니까, 앞으로는 국제대회 나갈 때도 그냥 대학선발팀에다가 군인 몇 명 보태서 나갈 수밖에 없을 거 아니냐고. 천하의 김재박, 천하의 최동원, 천하의 장효조, 천하의 심재원… 응? 또 뭐 천하의 이해창, 천하의 유두열, 천하의 김시진, 또 이 천하의 임호균. 하하. 뭐 이렇게 대한민국 최고의 선수들로 만드는 국가대표팀은 우리가 마지막 아니겠냐고. 안 그렇습니까?”
임호균이 진지한 표정으로 시작해 익살스런 표정으로 맺으며, 이해창에게 말머리를 넘겼다. 이해창 역시 껄껄 웃으며 받았다.
“야… 그거 멋지다. 마지막 국가대표라. 그래, 우리가 마지막 국가대표지. 좋은데?”(137p)
1982년을 배경으로 시작되는 이 소설은 프로야구 출범으로 국가대표로 가야했던 선수들의 갈등과 고민, 세계야구선수권대회 경기를 작가의 상상력을 가미해 실감나게 보여준다.
30년 전. 프로야구가 출범했다. 암울했던 5공화국의 계획적인 프로구단 출범이었지만, 이후 프로야구는 걸출한 스타 선수들을 배출했고, 지금까지 그 인기는 여전하다. 그런데 당시 처음 프로야구가 출범하면서 그 해 세계야구선수권대회가 우리나라에서 열렸고, 그 경기는 역시 국가뿐 아니라 선수, 팬들에게도 중요한 경기가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 참여한 선수들은 바로 국가대표. 프로로 갈 수 없었던 당대 최고의 선수들로 구성된 국가대표팀은 스스로 생각하기에 ‘마지막’ 국가대표가 되었다. 연봉에서부터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차이가 많이 났던 국가대표와 프로의 경계에서 갈등했던 국가대표 선수들의 고민은 그대로 스토리 속에 녹아들었다. 그리고 임해야 했던 세계야구선수권대회 경기. 특히 한일전은 두말할 필요 없이 국민 모두에게 굉장히 중요한 게임이었다.
#Scean 2 절정
세계야구선수권대회의 치열했던 역전 우승!
“홈런.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것만 같던 경기를 단숨에 5대 2로 뒤집는 역전의 스리런 홈런이었다. 6구가 던져지는 순간 스타트를 끊어 이미 3루 베이스를 밟고 선 채 제발 파울라인을 벗어나지만 말아달라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공의 궤적을 응시하던 이해창은 어느새 흘러내린 눈물이 땀과 섞여 번들거리는 얼굴로 3루를 돌아 홈으로 들어와 환호했고, 1루에서 출발해 2루 베이스를 한참 지나쳐있던 장효조 역시 두 팔을 번쩍 들어 감격을 만끽하며 3루와 홈 플레이트를 차례로 밟았다. 그리고 한대화, 그 날의 가장 화려하고 빛나는 지점에 선 사나이가 묵묵히 다이아몬드를 누비고 홈 플레이트로 귀환했다.”(233p)
9월 14일 잠실구장. 3만 관중이 꽉 찼고, 함성소리는 순간순간 구장이 떠나갈 듯 했다. 올 한국시리즈보다 더 치열하고 흥미진진했던 경기. 구장뿐 아니라 모든 국민들을 TV 앞에 모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을 경기. 특히나 그 유명한 ‘개구리번트’란 말이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그 경기. 바로 30년 전인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한일전 경기다. 8회까지 지고 있던 우리나라 팀이 극적인 역전으로 우승한, 야구팬들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로 손꼽히는 바로 그 경기다.
당시 팀을 이끌었던 어우홍 감독은 그 우승이 지금까지 프로야구가 인기를 끄는 초석이 되었으며, 북경올림픽 우승, WBC 준우승 등에도 간접적으로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당시 유격수 김재박 선수 역시 그 날의 경기를 결코 잊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 날의 경기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조차도 치열했던, 국민 모두가 흥분했던 그 순간은 글로 되살아나 감동을 준다.
#Scean 3 오늘
이젠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30년 전 야구의 추억!
“그러고 보니까 잠실야구장도 서른 살이 넘었구나. 이게 그 대회 때문에 지은 건데. 지금은 동대문야구장도 없어졌고, 여기가 명실상부한 한국야구의 메카야. 그치?”
“그 메카에 첫 번째 전설을 우리가 썼으니까, 어디에 우리 이름도 좀 새겨주고 그래야 되는데, 안 그렇십니까?”
이해창이 감회가 새로운 듯 가늘게 눈을 뜨고 말했고, 역시 유두열이 웃으며 받았다.(238p)
이제는 회상할 수밖에 없는 30년 전의 치열했던 순간들. 그리고 잊을 수 없던 경기들과 선수들. 그 모든 것을 추억할 수 있어서, 현실과 상상을 넘나들어 소설은 재미있다.
■ 『마지막 국가대표』 등장인물
이해창 : 서른 살. 대표팀 최고참. 호타준족의 외야수지만 어깨에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어 주로 지명타자로 기용되었다. 훗날 MBC, 삼성, 태평양 등에서 한 차례 도루왕 타이틀을 차지한 바 있다.
심재원 : 서른 살. 70년대 중후반 국가대표팀 주전포수로서 대표적인 수비형 포수로 꼽히며, 뒤늦게 뛰어든 프로야구에서도 아홉 시즌을 뛰며 0.424의 훌륭한 도루저지율 기록을 남겼다. 1994년, 41세에 폐암으로 사망했다.
김재박 : 스물아홉 살. 한국야구 역대 최고의 유격수이며, 1977년 실업야구 야수 전관왕에 빛나는 슈퍼스타. 프로에서도 한 차례 도루왕을 지냈고, 유격수 부문 골든글러브를 다섯 차례(4년 연속 기록 포함) 차지했다.
임호균 : 스물일곱 살. 대표팀 투수조 최고참. 1970년대 후반 국가대표팀 마운드를 책임졌다. 역대 최고의 제구력을 가졌던 투수로 프로야구에서도 세 차례 10승대 기록, 역대 최소투구수 완봉승(73구) 등의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장효조 : 스물일곱 살. 경리단에서 복무하던 중 참가한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 4번 타순에 기용됐다. 이듬해 프로무대로 진출해 10년간 활약하며 네 차례 타격왕을 지냈고 역대 최고기록인 .331의 통산타율을 남겼다.
김시진 : 스물다섯 살. 직구와 슬라이더가 위력적이었으며 안정적이고 꾸준한 제구력이 특기였다. 대학을 졸업하던 1976년에 군입대를 해 경리단에 적을 두고 있었는데, 이듬해 프로무대에 데뷔하게 된다.
최동원 : 스물다섯 살. 경남고 시절 노히트노런으로 주목을 받았고, 시속 150킬로미터 대의 강속구와 낙차 큰 커브를 주무기 삼아 연세대 1학년 시절부터 국가대표팀 에이스로 활약했다. 프로무대인 1984년 롯데 자이언츠의 첫 우승을 이끌었다.
유두열 : 스물다섯 살. 큰 경기에 강하고 찬스에 강한 면이 있어 실업무대에서도 올스타전 MVP에 선정된 적이 있었다. 1984년 한국시리즈 7차전에서 역전 3점 홈런을 때려내 롯데 우승의 주역이 되기도 했다.
첫댓글 김은식 지음 / 출판사 브레인스토어 | 2012.1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