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필>
영전에 고운 국화꽃 한 송이 올려 드립니다!!
(박 대 규. 시인, 수필가)
보리밭 사이 길로 걸어가면 뉘 부르는 소리 있어 나를 멈춘다
옛 생각에 외로워 휘 파람 불면 고운 노래 귓가에 들려온다
돌아보면 아무도 보이지 않고 저녁놀 빈 하늘만 눈에 차누나
이 윗글은 누구나 다 아는 가곡 “보리밭”의 가사다.
중년을 넘긴 40대 이상의 대한민국 국민들이라면 70년대 초에 한 번쯤은 즐겨 불러본 가곡 보리밭은 얼마 전 타계하신 고 박 화목시인님의 작시에 작곡가 윤 용하님께서 곡을 붙여 지은 노래로 50년대 초에 처음 지어져 전쟁폐허의 그 시점에는 정서가 맞지 않아 이 노래가 별로 불려지지 않았으나 70년대 초에 들어 대중가수 문 정선이 이 노래를 불러 그 당시엔 모두가 즐겨 부르던 국민가요가 되었다.
가곡 보리밭이 한창 유행을 하던 그 당시 그 무렵에 사춘기 학창시절을 보낸 나는 어느 지방보다 유난히 보리밭이 많은 경북의 김천에서 살았다.
가난한 집안에서 자라면서 난 용돈벌이로 토끼 몇 마리를 키우고 있었는데 방과 후면 곧 토끼풀을 뜯으러 가까운 들판으로 나가야 했다.
자주 나가보는 그 들판은 지금의 경부선과 경북선의 두 철로가 이어지는 삼각주 같이 생긴 철길을 지나면 철길 뚝 에서부터 낙동강지류인 직지천까지 널리 펼쳐진 푸른 들판이 나온다.
그때까지만 해도 지금처럼 국가경제기반이 공업화가 되기 이전이었기에 당시 중소도시를 낀 웬 만한 들녘의 농번기에는 농부들이나 또 이들의 바쁜 일손을 돕기 위해 나선 사람들이 들판에 제법 모습을 보일 그 무렵이었다. 지금은 모두들이 도회지로 떠나 살고 있어 농촌엔 별로 사람만나기가 어렵지만 당시엔 시골이라도 그나마 농촌사람들의 밀도가 제법 높았다. 또 그 무렵엔 새마을운동의 여파로 농촌에서 일하는 농민들의 무료함을 달래주기 위해 정부에서 들판 곳곳에 유선스피커를 달아 주어 라디오뉴스와 함께 새마을노래나 건전가요와 당시의 유행하던 노래를 농민들에게 들려주던 시절이었다.
그 당시 고향인 김천에서의 저녁때가 되어 들녘에 서면 추풍령으로 지는 붉은 저녁놀을 바라보며 들판의 스피커에서 은은히 들려오는 가곡 “보리밭”의 노래는 정말 듣기도 좋을 뿐더러 보리밭이 많은 당시의 고향의 들녘과 정서가 딱 맞는 가사였다. “돌아보면 아무도 보이지 않고 저녁노을 빈 하늘만 눈에 차누나~”
토끼풀을 뜯어야 하는 현실을 순간 망각하고 가수 문 정선의 목소리로 흘러나오는 그 가사를 몇 번씩 따라 부르고도 또 휘파람으로 몇 번이고 되 뇌이던 그때의 추억이 생각난다.
지금은 멀어진 그 노래의 추억과 함께 나에게서 멀어지는 또 하나의 사연이 있다. 다름 아닌 필자인 나와 고인이 되신 박 화목시인님 과의 사연이 있기 때문이다.
당시엔 좋아서 부르던 노래였지만 그 노래 보리밭의 작시가 바로 원로시인 고 박 화목시인님의 글이라는 걸 그땐 정말 잘 알지도 못했다. 더욱이 동요 “동구 밖 과수원 길”도 박 화목시인님의 노래 글이며 한때 인기가수 서 수남, 하 청일이 함께 부르기도 했었다.
노래 글의 주인공으로서의 박 화목시인이라기 보다 제가 아는 그 분은 교육자이시며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또한 자녀들까지 목사가 된 모범적인 기독교 집안으로 지내셨다.
특히 문학생활도 왕성히 활동하여 해방이후부터 여러 문단의 중책을 맡으시면서 특히 조선청년문학가협회 아동문학위원과 죽순문학 동인 및 기독교방송부장과 한국아동문인협회 아동문학분과회장과 국제펜클럽한국본부 이사와 열린문학회장등 임종 전까지 완성한 활동을 하시다 이젠 고인이 되셨다.
또 고인께서는 살아생전에 문학박사 김 선교수님과 성 기조펜클럽회장님과 수필가 피 천득교수님 과도 친분이 두터우시며 이 분들과 자주 어울릴 땐 항시 맥주를 즐겨 드시던 분이시며 특히 나의 은사님이신 김 선교수님을 통해 소개를 받고 또 김 선교수님의 추천으로 내가 문단에 등단 할 때에도 직접 심사위원을 맡으셨고 손수 육필로 심사평을 써 주셨던 분이시라 고인이 되신 그 분의 영전 앞에서 누구보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명복을 빌고 있다.
나를 손수 문인으로 등단을 시키면서까지 하면서 자신이 회장 직을 맡고 있는 열린문학의 주필 “김 선박사님을 잘 보필하면서 훌륭한 문인으로 대성하길 바란다.” 면서 항상 나를 다독거려 주시며 맥주잔을 따라 주시던 분이신데......,
지금의 나는 고인의 분부대로 김 선교수님의 지도로 어느 듯 문인으로서의 자리매김을 하고 있으며 문학 활동과 작품으로 몇몇 유명문학회로부터 문학상도 수상 받기도 하고 있지만 아직은 고인의 바램에 비하면 아직은 너무 보잘 것 없는 소인이다. 그래도 고인의 분부대로 열심히 문학에 정진하여 언젠가 문인으로서의 금자탑을 높이 쌓아 고인에게 보답할 것을 기약하며 님께서 뉘 부르는 소리 들으시며 보리밭 사이 길을 마지막 지나가시는 길에 고운 국화꽃 한 송이를 영전에 올려 드립니다. 부디 편안히 가시옵소서......!
-열린문학지 2005. 9월호에 추모수필 게제-
첫댓글 참 많이 불렀던 노래인데...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네~! 도원경님, 반가워요... 인사가 너무 늦었습니다. 미안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