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2년 3월 3일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제1독서 : 신명 30,15-20
복 음 : 루카 9,22-25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22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하고 이르셨다.
23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24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25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조명연 마태오 신부
“만일 다시 태어난다면 어떻게 살겠습니까?” 이런 질문을 많이 던집니다.
제게도 “만일 다시 태어난다면 또 사제로 살겠습니까?”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물론 마지막 날에 부활하리라는 희망을 간직하기에,
마치 갓난아기로 다시 태어날 일은 없습니다.
그래도 이런 질문을 받는다면 어떻게 답변하시겠습니까?
아마 지금까지의 후회되는 일을 고치고, 차마 하지 못했던 일을
다시 하는 삶을 살겠다고 대부분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사회학자 토니 캠폴로가 이제 삶의 끄트머리를 살고 있다고 할 수 있는
95세 이상의 어르신에게 위의 질문을 했습니다.
이에 대한 대답은 다음 세 가지의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날마다 반성하며 살겠다.”, “용기 있게 살겠다.”,
“세상을 떠난 뒤에도 무언가를 남기는 삶을 살겠다.”
‘많은 돈을 벌겠다’라는 답변이 없었습니다.
‘높은 지위를 얻겠다’라는 답변도 없었습니다.
세상 안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에 대한 소유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변화를 이야기하고 계셨습니다.
이 생각이 지금을 사는 우리의 모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아마 다시 태어난 것과 같은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요?
오늘 복음의 대목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데 필요한 조건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에게 새롭고도 어려운 결단을 촉구하십니다.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주님의 수난과 떼어서 생각할 수 없기에,
먼저 당신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말씀해 주십니다.
그러면서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곧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이고,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세상의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인간에게 가장 소중하다고 하는 목숨까지도 버릴 용기를 가져야 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 안에서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 욕심과 이기심을 내세우며 사는 것은 오히려 삶의 목표를 잃게 되며,
반대로 진정한 삶은 목숨을 희생하며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 나아가는 데서 그 진가를 발휘합니다. 그래서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루카 9,24)라고 하십니다.
제1독서의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주 너희 하느님의 계명을 듣고,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며 그분의 길을 따라 걷고,
그분의 계명과 규정과 법규들을 지키면, 너희가 살고 번성할 것이다.”(신명 30,16)라는
신명기 말씀이 우리가 가야 할 지표가 됩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재의 수요일’을 지내고 맞이하는 첫 번째 날의 복음 말씀은
예수님께서 첫 번째 수난을 예고하시는 장면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곧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루카 9,20)라는 베드로의 신앙 고백에 이어,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이 땅에 오신 사명,
곧 인류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의 수난을 당하실 분임을 밝혀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었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루카 9,22)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일어날 일 네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수난을 당하신다는 것이요,
둘째는 버림을 받으신다는 것이요,
셋째는 죽임을 당하신다는 것이요,
넷째는 죽은 후에 살아나시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네 가지는 모두 수동형으로 표현되어
하느님의 권능이 개입할 것임을 시사해줍니다.
'반드시'(이백주년 성서; '마땅히')라는 단어는
이 모든 것이 필연성이나 당위성에 의해 다가오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이어서 모든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당신을 따르는 길은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지만, 세 가지를 요구하십니다.
첫째는 자기 자신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요,
둘째는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것이요,
셋째는 이를 지속적으로 날마다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버려야 한다는 것은 자신의 주권이
오직 하느님께만 있음을 믿고 오로지 하느님께만 신뢰를 둔다는 것이요,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것은
어쩔 수 없이 마지못해서 지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기꺼이 진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버린다거나 자기 십자가를 지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왜 지는지’가 중요합니다.
곧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이것들을 행해야 한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루카 9,24)
바로 여기에 우리의 결단이 요청됩니다.
제1독서에서도 생명과 죽음의 길에서 결단을 촉구합니다.
그리고 생명의 길을 이렇게 말해줍니다.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그분께 매달려야 한다.”(신명 30,20)
오늘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하여 사랑으로 그분께 매달려 생명의 길을 가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루카 9,22)
주님!
오늘도 피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반드시 걸어야 하는 길을 갑니다.
당신께서 ‘반드시’ 걸어야 했던 길이기에
당신을 따르는 이도 ‘반드시’ 걸어야 하는 길입니다.
한두 번 겪고 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많은 고난을 죽을 때까지 겪는 일입니다.
어쩔 수 없어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흔연히 끌어안고 겪는 일입니다.
배척받으면서도 배척하지 않는 일입니다.
죽어 사라지기까지 사랑하는 일입니다.
아멘.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 것이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시면서
당신을 따르는 길이 어떤 길인지,
그리고 우리가 세상에서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가르쳐 주신다.
인간은 세상에서 더 많이 가지고 싶어 하고 무언가 더 누리려는 욕심이 있다.
그러나 온 천하를 얻을 수 있더라도 자기 목숨과 바꾸려고 하는 사람은 없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우선 내가 살아있고 나서야 가치가 있는 것이지,
내가 없으면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당신을 따르라고 하신다.
당신을 닮는 것만이 우리에게 참된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 인간은 하느님 안에 있을 때만이 진정으로 행복과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즉 한마디로 한다면 우리 인간은 하느님을 떠난 삶으로는
절대로 행복할 수 없고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하느님 안에서만 자유로운 것이다.
이 행복과 자유를 누리면서 살아갈 수 있을 때, 우리는 하느님의 모습이 된다.
하느님의 모습을 완성할 수 있다는 말이다.
하느님의 모습은 매일 우리 자신의 십자가를 잘 짐으로써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즉 주님의 말씀대로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면서,
주님을 닮아가면서 이룰 수 있다.
자기를 버린다는 것은 과거를 모두 잊고,
자신의 의지를 완전히 내맡기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지고 가는 십자가는 다름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이기기 힘든 상대는 다른 사람이나, 환경이 아니고
바로 나 자신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나 자신이 가장 큰 십자가이며, 이 십자가는 다른 누구도 대신 져줄 수가 없는
나만이 지고 갈 수 있는 것이다.
나의 인생을 누가 대신 살아줄 수 없는 것처럼,
나의 십자가도 꼭 나만이 질 수 있고, 그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는 우리 자신을 완성해야 한다. 이것이 하느님의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헛되이 보내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이다.
우리의 생명은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다.
이 생명을 우리가 마음대로 취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생명이 살아 있는 한 자신의 안일만을 위해 이기적인 삶을 살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시간과 능력을 그리고 가진 것을 나누어야 한다.
그래야 자신의 생명을 영원히 살릴 수 있다는 말씀이다.
우리가 입으로만 주님을 부르고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 마음이 주님으로부터 멀리 있다면 주님으로부터 우리도 외면을 당할 것이다.
주님께서 외면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마 우리가 그분을 외면하여 바라볼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이 사순시기가 이제 진정으로 우리에게 은총의 때가 될 수 있도록,
즉 우리 자신이 근본적으로 변화하는 시기가 될 수 있도록,
그래서 영광의 부활에 우리도 기쁘게 참여할 수 있도록
우리의 십자가를 잘 지고 갈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시편 137장에 대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저는 신학교에 가기 전에 시편 137장에 대한 노래를 먼저 들었습니다.
하나는 주세페 베르디의 오페라 ‘나부꼬’입니다.
다른 하나는 미국의 가수 보니엠의 ‘바빌론의 강가(Rivers of Babylon)’입니다.
오페라 나부꼬에서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은 바로 이 시편의 내용을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보니엠의 노래 바빌론의 강가는 시편의 내용을 가사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오페라의 음악이 장엄하다면, 보니엠의 노래는 흥겹습니다.
그러나 시편의 배경은 이스라엘 백성의 슬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저버리고, 우상을 숭배했던 이스라엘은
바빌론의 침공을 받고 철저하게 파괴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은 당시 강력한 나라였던,
최고의 문화를 자랑했던 바빌로니아로 유배를 가게 되었습니다.
바빌로니아의 문화, 역사, 사상, 종교는 당대 세계 최고였습니다.
반면에 이스라엘의 삶은 척박하였습니다.
포로로 끌려가던 이스라엘 백성은 비로소 이스라엘에서의 삶을 그리워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뜻을 저버리고 우상을 숭배했던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치게 됩니다.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정확히 70년 후에 페르시아 황제 고레스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이끌어 주셨습니다.
시편 137장의 내용은 우리민족의 역사에도 적용됩니다.
반만년이 넘는 우리의 역사에도 외세의 침략이 많았습니다.
고려시대에는 원나라의 침략이 있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일본과 청나라의 침략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정든 고향을 떠나야 했고, 포로로 끌려가야 했습니다.
대한제국 시대에는 일본에 의해서 36년간 식민 지배를 받아야 했습니다.
위안부로, 학도병으로, 징용으로 끌려가야 했습니다.
멀리 타국에서 조국의 독립을 염원하며 슬픈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념과 사상의 대립으로 한반도는 남과 북으로 분단되었고,
3년간의 한국전쟁을 겪어야 했습니다.
한국전쟁 이후 세계에서 가장 가난했던 나라 대한민국은
지금은 세계 8위의 경제대국이 되었습니다.
한국의 문화와 한국의 기술은 선진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습니다.
기름진 땅에서 자라는 나무는 크게 자라지만, 바람에 쉽게 넘어지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척박한 땅에서 자라는 나무는 크기는 작지만,
나무가 단단하고 바람이 불어도 쉽게 넘어지지 않습니다.
고난과 역경을 통해서 더욱 강해졌기 때문입니다.
풍족하고 평탄한 삶을 살아가는 것도 좋지만
힘들고 어려운 가운데 하느님께 의지하며 길을 찾는 삶도 가치가 있습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보아라, 내가 오늘 너희 앞에 생명과 행복, 죽음과 불행을 내놓는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주 너희 하느님의 계명을 듣고,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며 그분의 길을 따라 걷고,
그분의 계명과 규정과 법규들을 지키면, 너희가 살고 번성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의 마음이 돌아서서 말을 듣지 않고,
유혹에 끌려 다른 신들에게 경배하고 그들을 섬기면,
내가 오늘 너희에게 분명히 일러두는데,
너희는 반드시 멸망하고, 요르단을 건너 차지하러 들어가는 땅에서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
풍족한 환경이 우리를 하느님께 이끌어 주는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계명과 규정과 법규를 지킨다면 비록 고난과 아픔이 있을지라도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구원으로 이끌어 주신다고 이야기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십자가와 고난은 하느님과 함께 할 때 우리를 영광에로 이끌어 주는 등대가 될 것입니다.
오늘 시편 137장을 묵상하면서 하느님께 의탁하는 사순시기를 보내면 좋겠습니다.
“바빌론 강 기슭 거기에 앉아 시온을 생각하며 우네.
거기 버드나무에 우리 비파를 걸었네.
우리를 포로로 잡아간 자들이 노래를 부르라,
우리의 압제자들이 흥을 돋우라 하는구나.
"자, 시온의 노래를 한 가락 우리에게 불러 보아라.“
우리 어찌 주님의 노래를 남의 나라 땅에서 부를 수 있으랴?
예루살렘아, 내가 만일 너를 잊는다면 내 오른손이 말라 버리리라.
내가 만일 너를 생각않는다면
내가 만일 예루살렘을 내 가장 큰 기쁨 위에 두지 않는다면
내 혀가 입천장에 붙어 버리리라.
주님, 에돔의 자손들을 거슬러 예루살렘의 그날을 생각하소서.”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송영진 모세 신부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루카 9,22).”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수난과 부활 예고 말씀’을 하셨을 때,
‘부활 예고 말씀’은 흘려듣고, ‘수난 예고 말씀’만 들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을 말리다가
크게 혼났습니다(마태 16,22-23).
(아마도 다른 제자들도 베드로 사도와 같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부활’에 초점을 맞춰서 읽어야 합니다.
“나는 부활한다. 수난과 죽임을 당하더라도.”
부활을 먼저 생각하고, 부활을 먼저 믿는다면,
그 앞에 있는 수난과 죽음은 충분히 참고 견딜 수 있습니다.
(수난과 죽음이 대단히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긴 하지만,
부활 신앙이 있다면 극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혹시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려고 죽으셨을까?” 라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부활하시려고 일부러 죽으신 것으로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은 하나의 사건이고,
부활이 있어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이 의미를 갖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우리 자신에게 적용하면, 이 말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에 참여하려고 신앙생활을 합니다.
예수님처럼 우리도 부활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우리 앞에 놓은 고난과 시련들을 받아들입니다.
<목적지는 정해져 있고, 그곳까지 가는 과정은 우리 자신의 선택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루카 9,23-25)”
이 말씀은, 예수님의 부활에 참여하는 방법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우리가 이 가르침대로 살면 예수님의 부활에 참여하게 됩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게 된다는 것은 이미 정해져 있는 일이고,
“이 가르침대로 살 것인가?”는 우리 자신이 선택하고 결단해야 하는 일입니다.
여기서 ‘누구든지’라는 말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부활 전의 십자가를 면제 받는 경우는 없다는 뜻이기도 하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았는데도 부활에 참여하지 못하는
‘억울한’ 경우는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특권도 없고, 차별 대우도 없고, 불공평한 일도 없습니다.
“내 뒤를 따라오려면”은 “내가 주는 부활과 생명을 얻으려면”입니다.
예수님의 초대는 ‘십자가의 길’을 함께 걸어가자는 초대가 아니라,
부활과 생명을 함께 누리자는 초대입니다.
십자가는 신앙생활의 목적이 아니라, 목적지까지 가는 과정입니다.
“자신을 버리고”는 “모든 것을 버리고”입니다.
철학 용어와 신학 용어를 동원해서 복잡하게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부활과 생명을 얻는 일을 방해하는 것들을 모두 버리고,
모두 물리치는 것이 곧 자신을 버리는 것입니다.
(가장 크게, 가장 많이 방해하는 것이
내 안에 있는 육적이고 속된 욕망과 욕심들입니다.
그것부터 버려야 하기 때문에 ‘자신을 버린다.’ 라는 표현이 사용됩니다.)
“날마다”는 “끊임없이” 입니다.
신앙생활은 하고 싶을 때만, 또는 하기 쉬울 때만 해도 되는 생활이 아니라,
단 한 순간도 중단하지 않고 꾸준히 해야 하는 생활입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라는 말씀은, “신앙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만나는 십자가를 피하지 말고 받아들여야 한다.”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은, 그래야만 예수님을 잘 따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고 끝나버린 분이 아니라 부활하신 분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것은
예수님처럼 죽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처럼 살아나기 위해서입니다.
<부활이 없으면 십자가는 아무런 의미도 없고 가치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려고 오신 분이지 죽이려고 오신 분이 아닙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라는 말씀은,
“세속적이고 육적인 것들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한다.
그 집착을 버리고 영원한 생명만을 추구하는 사람이 그 생명을 얻는다.”라는 뜻입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라는 말씀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온 세상’을 버려라.” 라는 뜻입니다.
‘온 세상’도 얻고 ‘영원한 생명’도 얻는 경우가 있다고 오해하면 안 됩니다.
이 말씀을, “온 세상을 얻으려고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는 것은
참으로 허망하고 어리석은 일이다.”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는 일과
지상에서 ‘온 세상’을 얻는 일은 비교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영원’과 ‘허무’는 비교 대상이 아닙니다.)
먼지처럼 사라질 허무한 것을 영원한 것과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일입니다.
신앙인은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만이
인생의 목표의 전부인 사람입니다.
따라서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는 것은 모든 것을 잃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도 안 믿고, 영원한 생명도 안 믿는 사람들은?
그들은 자기들이 모든 것을 잃는다는 것을 모르는 채로 살다가 허무하게 사라집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십자가가 너무 크고 무겁다고 느껴질 때가 있고,
그 큰 십자가가 목적지를 가려서 그곳을 잊어버리게 만드는 때도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너무 멀리 있는 것 같고, 실감나지도 않고,
눈앞의 십자가만 생생한 현실일 때도 많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필요합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해 주는 힘이고,
막연한 이론 같은 교리를 현실로 만들어 주는 힘이고,
십자가를 극복하고 부활과 생명을 향해서 나아가게 해 주는 힘입니다.
‘믿음’은 나를 살아 있게 해 주는 힘이고, 죽음에서 살아나게 해 주는 힘입니다.>
하느님께서 피를 흘리실 수밖에 없는 이유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은 예수님께서 당신 죽음과 부활에 대한 예고를 하십니다.
예수님은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 그리고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은 왜 인간을 창조하고 또 인간을 위해 피를 흘리시는 것일까요?
하느님의 피 흘림 없이는 인간이 구원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느님께서 피를 흘리셨는데 모든 인간이 구원받을 수는 없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하느님의 피를 흘리게 한 장본인이 나 자신이라는 것을
깨달은 사람만 구원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내가 사는 세상에 나오기 위해 반드시 나의 창조자의 피를 흘리게 했음’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어머니의 태중에서 나올 때 어머니를 피 흘리게 했습니다.
누구도 이를 부정할 수 없습니다.
다만 알아야 할 것은 내가 어머니의 피를 흘리게 했음을 깨닫는 자만이
어머니의 세상에서 살아갈 힘을 얻는다는 사실입니다.
유튜브 채널 ‘우와한 비디오’에 ‘누워서 수업 듣는 아이, 엄마와 아들의 위대한 등교’가 있습니다.
성우는 척수근위축증을 앓고 있습니다.
17살 성우는 몸을 움직이지 못할 뿐 아니라 휜 허리 때문에 왼쪽 세상밖에는 보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의 꿈은 의사가 되는 것입니다.
몸을 움직일 수 없어서 정신과 의사가 되겠다고 합니다.
어머니가 성우를 학교에 데리고 갑니다.
체력이 안 되어 오전만 수업하고 오후는 집에 와서 과외를 합니다.
어머니는 쉽지 않은 가정 살림에도 과외 선생님을 붙여 아이가 공부할 수 있게 합니다.
성우는 왜 이렇게까지 공부에 매달리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그가 어머니에게 타인의 손을 빌려 쓴 편지로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엄마에게. 엄마, 아들 성우에요. 요즘 많이 힘드시죠?
엄마도 다른 엄마들처럼 놀러도 가고 영화도 보고 자유로운 생활도 하시고 싶을 텐데
저 때문에 아무것도 못 하시잖아요. 가끔씩 그런 생각을 해요.
제가 아프지 않게 태어났으면 엄마도 마음이 안 아팠을 텐데….
공부 때문에 스트레스받아서 짜증 내고 투정 부려서 미안해요.
마음은 그렇지가 않은데 나 자신을 못 이기나 봐요.
엄마에게 투정 부린 날은 하루 종일 마음이 안 좋아요.
엄마 힘든 거 누구보다 제일 잘 아는 놈이 저인데
자꾸 몸이 힘들고 아프니까 저도 모르게 그러는 것 같아요.
엄마한테 말은 한 했지만, 하루하루 더 늙어가는 어마 얼굴이 너무 속상하고 죄송해요.
내가 아프지만 않았어도….
공부한다고 너무 유난 떨고 엄마 힘들게 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공부를 잘해야지 엄마도 호강시켜 드릴 수 있잖아요.
꼭 성공해서 호강시켜 드릴게요. 우리 조금만 참고 힘내요.
사랑해요, 엄마. - 이 세상에서 엄마를 가장 사랑하는 성우가.”
우리가 나의 처지에 대해 불평하고 남의 탓을 하는 이유는
진정으로 나의 창조자를 찔러보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아니 분명히 찔렀는데 기억하지 못해서입니다.
누구도 내가 어머니 밖으로 나올 때 어머니를 피흘리게 했음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영영 기억해내지 못한다면 그 자녀는 어머니의 세상에서 살 힘을 얻을 수 없습니다.
부모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세상의 무게를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이들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그 이유는 이들은 하느님이 자신들을 위해
피를 흘리셨음을 의지적으로 믿기를 거부하는 이들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하느님 나라에서 살 힘을 얻지 못합니다.
성우가 이 세상에서 살아갈 힘을 어머니의 희생을 깨달으며 얻어가는 것처럼
우리도 하느님의 세상에서 살아가려면 하느님의 희생에서 힘을 얻어야만 합니다.
하느님의 돌아가심을 인정하지 못하면 진짜 하느님의 죽음을 죽이는 인간이 되어버립니다.
여러 번 말씀드렸지만, 이 같은 경우입니다.
지금은 돌아가신 임언기 신부가
어느 임종 직전의 냉담 신자에게 병자성사를 주러 간 적이 있었습니다.
간암 말기 환자였는데 본인이 청한 것은 아니고,
주위 신자들이 그가 끝까지 성사를 거부하는 것이 안타까워 청했던 것입니다.
배에 이미 복수가 차 있고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있었습니다.
그는 오랜 냉담을 하고도 병자성사를 거부하고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고해할 것이 없느냐고 묻는 신부님의 질문에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말을 못 하나 싶어 십계명을 일일이 읊어주며 해당하는 것이 있다면 고개를 끄덕이라고 했습니다.
그래도 병자는 미동이 없었습니다.
결국, 신부님은 고해성사와 병자성사를 거부하는 것에 대해 확신하고 방을 나섰습니다.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뒤에서 환자가 크게 소리쳤습니다.
“나 죄 없어!”
바오로 사도는 “의로운 이가 없다. 하나도 없다.”(로마 3,10)라고 말합니다.
천사도 하느님 앞에서는 부끄러워 얼굴을 가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인간이 어떻게 죄가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는 내 죄가 하느님을 피흘리게 했음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이것이 진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일입니다.
그분의 희생을 무가치하게 만들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전에 자신의 어머니를 친구를 시켜 차로 치게 하여 보험금을 타내려던 아들이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다행히 돌아가시지는 않고 휠체어를 타셨습니다.
아들이 살인미수죄로 재판을 받을 때 어머니는
그 아들을 위해 자신을 대신 감옥에 보내 달라고 탄원을 했습니다.
아들을 잘못 키운 자신의 죄가 크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습니다. 내가 태어나기 위해 어머니가 피를 흘리셨음을 깨닫지 못하면
그 아이는 또 어머니를 죽이려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어머니의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가정과 세상에 적응하려면 내가 어머니와 아버지를 피 흘리게 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부모가 해 주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아이를 낳을 때만이 아니라 계속 피를 흘려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이는 부모의 끊임없는 작은 피 흘림을 통해 자신이 태어날 때
엄청난 피를 흘리게 했다는 사실까지 다다를 수 있습니다.
평소에 사랑을 보여주지 못하면 나를 낳기 위해
그런 고통을 겪었음을 믿는 것은 매우 힘이 듭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끊임없이 미사로 기억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저에게도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는 말씀을 해 주심으로써,
하느님의 죽음이 나를 당신 세상에 살게 할 힘을 주시기 위함임을 조금은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분이 다 주셨다는 말은 나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번 사순 동안은 내가 주님을 찌르는 한 번의 은총이라도 달라고 청해야 합니다.
그러면 누구도 심판할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서도 우리는 그 엄청난 은총을 받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내가 못 박았음을 깨달으려고 노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 번이라도 내가 주님을 죽였음을 깨닫지 못하면
우리는 하느님을 진짜로 죽이는 사람이 되어 유대 지도자들처럼
하느님 나라에서 살 자격을 잃게 됩니다.
내가 주님의 피를 흘리게 했음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은
진짜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입니다.
아기에게 세상이 자신이 찢은 어머니의 배 다음에 있듯,
하느님 나라는 내가 찢은 그리스도의 심장 뒤편에 있습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