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르헤스의 작품을 읽으면 그의 가짜 인용과 주석에 따른 '허구의 사실화 기법'이 동시대에 살았던 프랑스의 미술가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 1887~1968)을 연상케 만든다. 이는 뒤샹의 기성품(Ready-made)이라 불리는 것인데, 뒤샹은 1917년 뉴욕에서 열린 ‘독립미술가'전에 가명으로 남성용 병기를 출품한다. ‘샘’이라고 지칭된 이 작품은 기존 미술의 엄격성과 가치를 파괴하는 혁명적인 사건으로 주목받으며 ‘개념미술’이라는 장르로 불리게 된다. 이 사건에는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덧붙는데 가명으로 작품을 제출한 남자와, 미술전의 심사위원으로 ‘샘’을 격렬하게 비판한 미술인, 잡지에 ‘샘’을 옹호하는 글을 올린 기자 모두 동일인 마르셀 뒤샹이라는 사실이다. 한 편의 완벽한 시나리오를 짜서 기존 미술계의 엄숙성을 파괴 전복하는 전위적 퍼포먼스가 보르헤스의 허구 인용과 주석을 연상케 만드는 부분이다.
그리고 책에 실린 비교적 짧은 단편 ‘칼의 형상’에 대해서 살펴 보겠다. ‘칼의 형상’은 얼굴에 긴 흉터가 있는 사내의 이야기인데, 앞서 말한 보르헤스의 몽타주 같은 시점이 적용된 작품으로, 중남미 문학 특유의 시점의 파괴(태아의 시각 혹은 죽은이의 시각으로 묘사)가 잘 나타난 작품이기도 하다.
‘영국인’이라고 불리는 사내는 얼굴에 반달처럼 긴 흉터가 있다. 책에는 이 흉터가 ‘관자놀이에서 시작해 턱의 광대뼈로 이어진 잿빛의 거의 완벽한 활 모양의 흉터’라고 묘사 되어 있다. 사내는 작품 가운데 잔인할 정도로 염격하며 공정하지만 얼음처럼 차가운 모습으로 비추어 진다. 어느 날 밤 그는 흉터가 생긴 연유에 대하여 나에게(보르헤스) 긴 이야기를 털어 놓는다.
사내는 1922년 아일랜드의 독립을 위해 영국과 싸운 공화주의자이며 가톨릭교도이기도 했다. 이 아일랜드인들의 반란은 이름 없는 전투에서 대부분 희생당하며 드물게 벌이는 국지적에서 지루한 싸움을 이어 나간다. 전투가 이어지던 날, 빈센트 문이라는 공화주의자 청년이 무리를 찾는다. 문은 세계사를 야비한 경제 투쟁의 역사로 비난하는 강력한 맑시스트이며 혁명은 성공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에 힘을 싣는다. 문은 강력한 이상과는 별개로 겁이 많고 전투에는 서툴러서 화자인 사내를 종종 위험에 처하게 만든다. 적에게 쫓기던 나와 문은 버클리 장군의 별장 안으로 달아나는데, 보르헤스가 종종 사용하는 허구적 배경의 특성상 버클리 장군도 역시 가상의 인물이다. 별장으로 도망친 둘은 초조함 속에 아흐레를 하루처럼 보내게 된다. 그 와중에도 문은 비판적이고 사변적인 논쟁으로 나를 피곤하게 만든다. 열흘째 되던 밤, 나는 별장 밖으로 정찰을 나가고, 광장에서 꼭두각시를 세워 넣고 사격 연습을 하는 영국군을 보게 된다. 순찰에서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신변에 대한 안전을 보장을 받고 나를 밀고하는 문을 목격 한다. 이 비겁한 이상주의자를 응징하기 위해 나는 문을 쫓아가 장군의 반월도로 얼굴에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피의 반달을 새겨 넣는다. 그리고 문은 브라질 어딘가로 도망가고 나는 광장에 놓인 꼭두각시처럼 총살당하게 된다. 이 부분에 와서 누구나 짐작할 수 있지만, 사내는 “내가 바로 빈센트 문이요. 이제 나를 마음껏 경멸하도록 하시오.”라고 고백하며, 시점의 대변환을 보여준다.
큰 기복 없이 무난히 조성된 이 짧은 작품에서 시점의 다양화 기법은 충격적인 반전을 제시한다. 작품에서 말하고자 하는 부분이라면 근본적인 죄의식에서 벗어날 수 없는 개체는 고백을 통해 죄의 원형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비밀은 말해지는 방법을 통해 그 가치를 이어나가며, 어떤 희생이라도 원형적 죄의식에 묻힌다는 심리학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치욕의 표적’을 달고 사는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를 말한다. 또 보르헤스의 적극적인 현실참여 의식을 엿볼 수 있으며, 빈센트 문으로 대변되는 명백한 '이성의 한계'를 비난하고 실천의 가치를 주창한다.
사실 보르헤스의 작품은 난해하다. 이 난해함은 단순히 문체의 어려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작품에 자유로운 기법을 도입한 실험적인 면모와, 복층으로 짜인 구조의 어려움에 근거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제약 없이 자유롭게 뛰어다니는 개인의 독백 때문이기도 한데, 이 기법은 세계 문학사에서 난해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독일 작가 프란츠 카프카나 토마스 만의 공통적인 면모이기도 하다.
특히 보르헤스의 난해함은 그의 광범위한 독서 습관으로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용되는 저서와 작가들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의 현학적인 감상을 엿볼 수 있는 부분임과 동시에 단편임에도 불과하고 상호텍스트 즉 하이퍼텍스트 적인 성격으로 단일 텍스트의 경계를 무너뜨리며 광범위하게 확장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보르헤스의 분량은 가벼우면서 또 무겁다. 개인적으로 문학작품으로서 보르헤스를 온전히 읽기 위해서는 작품에 거의 1/3이상 차지하는 주석이 불필요하게 느껴진다. 고유 명사를 해석 없이 어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조차 문학의 한 부분이어서 그렇다.
분량적인 제약으로 보르헤스의 많은 작품을 다룰 수 없음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혹시 기회가 생긴다면 보르헤스의 작품을 진지하게 공부해 보았으면 한다. 그의 작품을 해석하는 것은 복잡한 일이지만, 그만큼 보람 있는 일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