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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선의 글] “전역후 이색적인 분야의 직업을 경험하다” -내용이 좀 길지만 완독을 권합니다-
1975년도에 군을 전역하고 나는 공군에서 얻은 지식과 경험과는 비교적 소원한 분야에서 영입요청을 받았다. 造船회사며 海運회사가 그 곳이다. 해군 출신들 이 활동하고 있는 무대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그 중에서 해운회사에서 있었던 일들을 소개하고져 한다.
그 회사 이름은 (株) 三和運漕였다. 이 회사는 본사사원이 20여명 밖에 안되고 보유 선박도 한 척밖에 없는 지극히 소형 기업이었다. 그러나 이 회사는 당시 정치적으로 연관된 회사였기 때문에 규모에 비하여 재정이 건실했고 사원들에 대한 보수와 복지도 동종 타회사와 비교해서 결코 뒤지지 않았다. 선박의 명칭은 천우호 (天祐號) 였는데 원유수송 전용 선박으로 270,000톤(DWT)으로서 당시 일회 수입되는 원유량은 우리나라 일주일 분량의 원유 수요량을 담당했을 정도로 VLCC(Very Large Crude Carrier)급 대형 유조선으로서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선박이었다. 삼화운조는 1970년 10월에 설립되었으며 사장에 정태성씨 (김종필씨계열의 전 국회의원)과 미국 Gulf회사를 대표하여 이성호 제독 (해군참모총장 역임/삼화운조에서는 해무이사) 공동으로 설립된 회사다.
천우호는 1971년 10월 스페인 Astano 조선소에서 건조되었으며 진수식을 거행하던 날 박근혜 (당시 19세) 전 대통령이 어린나이로 참석하여 얼음을 깨는 주인공 역할을 하였다. 이 행사에는 정태성 사장, 이성호 제독은 물론 당시 주 스페인 대사로 있던 심흥선 대사가 참석했다.
Astano 조선소는 당시 스페인 해군 기지로서 주로 군함수리 업무를 담당했으나 민간 조선개발이라는 정부정책으로 최초로 상업선박인 천우호를 건조했던 것이다. 당시 Astano에는 乾船渠(Dry Dock)가 없었고 포르튜걸의 수도 Lisbon의 Lisnave Dock에서 선박 수리업무를 수행했다. 당시만 해도 스페인은 구라파 선진국에 비하여 금속공학이나 합금기술이 낙후되어 있었다. 엔진도 Sulzer Diesel Engine 2기를 설치했는데 당시 세계적인 추세는 VLCC급 (20만 DWT) 이상의 선박에는 Turbine Engine 설치가 일반적이었으나 천우호는 선가를 고려하여 Diesel 엔진을 택함으로서 조선 전문가들 사이에서 이론이 분분하였음에도 강행하였으나 Gulf사의 선박 기술자들의 오판으로 Gulf사의 최종 결정이 문제 였다. 결과적으로 엔진의 진동이 심하여 엔진의 Casing에 구열이 가고, 심지어 Main Engine Block에 까지 구열이 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후에 Tele-Printer 같은 최신 장비를 설치하였으나 심한 진동으로 인하여 못쓰게되었다. 보통 시운전 (Sea Trial)은 1회로서 결론을 내리지만 천우호의 경우는 6개월간 수차례에 걸쳐 시운전을 계속하는 동안 상기 구열 현상이 발견되어 장차 천우호의 운명에 어두운 그림자가 이미 드리워지고 있었다.
천우호는 선체 전장이 346m 전폭이 52m 건조비 3,500만불 건조기간 1968~1971년 (3년간), 당시 우리나라 최초의 대형 원유 수송선으로 海運史에 기록 되어있다. 지금은 원유 소요량이 급증하여 VLCC급을 넘어 ULCC (Ultra Large Crude Carrier급 33만 이상 45만) 급의 선박이 많이 늘어나 있다. 역사상 최초로 세계 최대의 원유수송선을 건조한 실적이 있었는데 530,000톤급 선박으로 이란-이라크 전쟁시 이라니안 걸프에서 정박 중 피격되어 한 번도 수송실무를 겪지 못한체 침몰했던 기록이 있다. 천우호의 처녀 수송은 1972년 겨울 카타르의 도나 원유적재장(Crude Loading Point)에서 원유를 적재하고 노터뎀에서 하역을 한 것이 처음이었다.
천우호는 2기의 10,300hp 디젤엔진을 장착 (합계 20,600hp) 했는데 당시 10,000hp 이상은 최대형 엔진으로서 조선업계에서는 주목의 대상이었다. 엔지의 가동자료는 Tele-Printer로 기록 되어 자료를 제공함으로서 당시 기술로는 최고의 기술로 자랑거리였으며 천우호가 최초로 보유하였다. 회사와 선박에 대한 소개를 이 정도로 마치고 나의 활동을 중심으로한 일들을 설명 하기로 한다.
나는 뒤늦게 삼화운조에 참여하여 1975년 말경에 감사로 영입되었는데 회사내에서 천우호에 관한 잡다한 소문이 회자되고 있었다. 선원들이 게을러 낮잠만 자고 주어진 작업이나 업무에 소홀하며 외항하면서 호화호식하며 선박 운영비가 타 선박회사에 비하여 너무 높고 배가 1척빢에 없어서 경쟁력이 없다는 등 불만이 많았다. 나는 감사로서 그들과 불평불만 만 하고있을 수는 없었다. 어느 날 실행 계획서를 첨부한 선박 감사를 승인해달라는 건의서를 사장에게 제출했다. 사장은 시기 적절한 좋은 건의라면서 이를 승인하였다. 천우호가 내년 1월 중에 입항 예정이니 그 때 원유를 하역하고 재 출항할 때 이 감사가 승선하여 모든 분야의 선무를 감사해 주기 바란다는 사장 말씀이다.
나는 76년 1월 아주 추운 어느날 울산으로 내려갔다. 그 곳에서 울산 외항에 정박해 있는 천우호에 승선했는데 浮上해있는 선박의 높이가 어찌나 높은지 타랍을 걸어 올라가는데 많이 힘들었다. 해상에 떠있는 선체의 높이는 어름잡아 아파트 15층은 족히 되어 보였다. 선장이 안내해 주는 내가 묵을 선실은 정말 호화롭기 이를데가 없었다. 선주실이었는데 바닥에는 호피가 깔려있고 냉장고에는 희귀한 고급 과일, 과자류, 음식등이 가득했고 와인 셀라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주류, 와인들이 즐비해있고 세계적으로 이름난 영화, 음악 등 비데오와 디스크가 가득했다. 선장의 말에 따르면 여기에 있는 영화와 비데오만 보드라도 항해가 끝나기 전에 다 볼 수가 없을 것이라고 했다.
이제 원유 하역작업이 끝나고 모든 선원들은 재출항 준비에 분주했다. 출항전 선장은 나에게 쿠에이트 원유 적재장까지의 항해 일정을 브리핑해 주었다.
천우호가 출항을 하면 울산에서 대한 해협-동중국 해 -다이완 해협- 남중국 해 -말레이반도와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사이에있는 마라카 해협을 지나 –스리랑카 남쪽을 거쳐-아라비아 해로 들어서게 된다.
오만과 이란 사이에있는 호르므스 해협-페르시아 만-쿠웨이트 미나 알 아마디 원유적재장에 도착하게 되는데 총 40일이 소요된다고 한다. 항해 도중 싱가포르 대리점에 기착하여 담수, 식량, 과일, 주류, 생활용품, 소화기 등 선원 생활과 선박운용 기자재를 적재하는 등 업무로 10시간 정도 지체하였던 것 같다. 1월 25일에 울산을 떠났으니 3월 6일에나 목적지에 도착할 것이라는 설명이다. 출항하자 선내를 둘러봤다. 무엇보다 내가 40일을 무얼 하며 보낼것인가를 파악하기위해서 였다. 식당, 휴게실, 소형 풀장, 골프 연습장, 그리고 船橋(Bridge), 기관실, 그 다음 갑판위를 걸었다. 축구장 2개 넓이는 족히 되어 보이는 갑판위를 걷는데 충분한 운동량이 되는 것 같았다. 항해하는 동안 풀장과 골프연습장을 많이 이용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싱가포프 대리점에서 Mr. Brown이라는 Gulf사의 기술요원이 탑승을 했다. 선장 말에 의하면 이 배 자체가 Gulf사 소유기 때문에 수시로 Gulf 요원이 탑승하여 여러 가지 상태를 점검하곤 한다는 설명이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심상치않은 활동을 하는 것을 보곤 했는데 아주 주도면밀하고 철두철미한 사람이었다. 언제부터인가 낯설은 나를 발견하고는 꼬치꼬치 나에관한 여러 가지를 캐묻곤 했다. 몇일 지나 자기와 비슷한 임무를 수행하고있다고 판단했는지 아주 친근해 졌다. 그는 나에게 여러번 이 선박에 승선을 했는데 대단히 치명적인 약점들이 허다하다고 말하며 특히 선원들 기강은 다른 선박에서는 볼 수 없을 정도로 허술하다고 일러주는 것이 아닌가.
그가 지적해 준 점을 대략 요약하면;
1. 선원들이 게으르다. 전혀 일할 의욕들이 없다.
2. 소화기, 소화장비의 상태가 최악이다. 어쩌다 화재라도 나면 생 존이 불가능하다.
3. 구명 보트가 2척이 있는데 가동이 안된다. 비상시 탈출 방법이 없다.
4. 고급 주류, 양담배, 과일, 식품들이 너무 호화롭다.
위의 4가지를 지적하면서 이 것들만 개선 된다면 이 배는 쇄신될 수있다는 것이며 나의 활동을 기대한다는 충언이었다. 나는 늘 그의 충고를 명심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그는 나에게 보여 줄 것이 있다면서 밤12시에 휴게실에서 만나자고 제의했다. 나는 12시 정각에 휴게실로 가서 그를 만났다. 그랬더니 나와 같이 船橋(Bridge) 조타실로 가자고 인도하면서 조타실로 갔다. 이 곳에는 야간 운항에는 특히 안전 순항을 위해 주의를 집중해야하는 조타수가 조타업무를 수행하고 있어야 하는데 조타수는 옆에 목침대를 펴놓고 자고있지 않은가. 나는 순간 충격을 받고 이 칠흑같은 밤에 조타수가 이럴 수가 있는가. 침대를 걷어찼다. 이 배는 마치 해적선 같지 않은가 질책을 했더니 조타수는 변명을 했다. 자동항해장치가 설치되어있고 선박의 船橋(Bridge)상에 대형 전등 (Huge Vessel Light)이 설치되있어 소형선이 알아서 회피하도록 되어 있다는 변명이다. Mr. Brown 말로는 아무리 좋은 기기가 설치되어 있더라도 조타수가 야간에 조타를 방치하고 잠을 자는 경우는 전세계를 찾아봐도 결코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Mr. Brown이 지적해 준 사항 중 1항과 4항은 나의 활동과 역할이 제한될 수 밖에 없었고 다만 그런 현실을 보고서에 포함해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2항과 3항은 기어히 상세한 상황을 파악해야 되겠다는 결심을 굳히고 있었다. 어느날 선장에게 통보한 후 소화기와 소화시설을 점검했다. 포터블 소화기가 총 70개와 여분 20개 모두 90개가 있었다. 전부를 점검한다는 것은 불가능했고 약 10% 정도를 무작위로 점검을 했는데 단 한 개도 정상으로 작동하지 않았다. 이미 유효기간이 지난 것들이었다. 소화기 종류로는 3가지였는데;
분말 소화기-전기 누전시 사용
포말 소화기-원유 화재시 사용
CO2 소화기-일반용 소화기
무엇보다 중요한 소화기기로는 포말을 사출하는 대형 분사기가 갑판위 4곳에 설치되어 있었다. 사출을 시도했으나 3기는 전혀 작동이 안되었으며 단 1기만 사출되었지만 사출량이나 속도가 미달해서 역시 작동 불가능한 상태였다. 더우기 포말 저장 용기내에 있어야할 포말 자체가 거의 비어있었다. 이 모든 상태를 보면 이 선박에 화재가 발생하면 어떤런지 독자의 상상에 맡긴다.
선장의 경험담을 이야기 하던 중 1971년도 중반에 발생한 삼양해운 소속 유조선 12만 6,000톤의 유조선이 페르시아 만의 흐르므츠 해협에서 희랍의 50,000톤급의 유조선과 충돌하여 화재참상이 일어났던 사건을 들려 주었다. 화재가 확대되자 선원들 중 일부는 갈팡질팡 하다가 바다로 뛰어드는 선원들은 모두 익사 또는 부상을 입었으나 선장의 지시를 따른 선원들은 모두 무사했다는 이야기였다. 선박의 엔진을 끄고 관성으로 진행하다가 멈추는 거리는 대개 8마일 정도 되는데 그 선장은 그 원리를 이용했던 것이다. 먼저 구명조끼를 착용하고 물에 뜰 수 있는 모든 물체 즉 널빤지 스티로폴 등을 지참하라고 지시한 다음 선수에 모이도록 해서 선체가 정지하자 하선을 서둘러 모두 안전하게 도피할 수가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그런 이야기를 할 정도의 선장의 지식과 경험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 천우호의 화재예방 상태는 빵점이었다.
다음 날은 비상 탈출 보트의 상태를 점검했다. 船橋 양쪽으로 2기의 탈출 보트가 있었는데 전 선원의 탈출이 가능한 용량의 소형 선박이다. 그러나 탈출 스위치를 눌렀으나 찍찍 소리만 나고 구명보트는 움직이지 않았다. 消火 능력도, 탈출 능력도 전무한 이 선박은 비상시 어떻게 될 것인가 역시 독자의 상상에 맡긴다.
나는 이 감사내용을 선장과 협의했다. 선장은 이미 결과를 짐작했는지 침통하게 듣고 있었지 만 원유를 싣고 귀항길에 싱가포르 대리점에서 모든 결함을 개선할 수있는 기자재를 공급받아 개선에 최선을 다 하겠으니 그 결과를 가만해서 보고내용을 어느 정도 감안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 때까지 유예하기로했다.
우리 배는 드디어 3월 6일 정확하게 쿠웨이트의 '미나 알 아마디' 원유 적재장(Crude Loading Point)에 도착했다. 크웨이트 당국의 선내 조사를 간단히 받았는데 조사요원들이 요구하는 것은 한결같이 위스키였다. 술 한 방울 마실 수 없는 나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이 아이로니 하게도 바로 위스키였던 것이다. 한 사람에게 두 병씩 주었더니 아무말 않고 검사를 마치고 하선하였다.
나는 여기까지 40일을 오는 동안 감사활동을 하는 시간 외에는 정말 외롭고 무료했으며 그 고독은 아무리 좋은 것으로도 위로가 되지 못했다. 나는 풀장에서 수영을 하고 골프연습장에서 골프체를 휘두르는 것과 휴계실어서 독서 하고 때때로 비데오 영화 감상 이외에는 하는 일이 없었다. 브릿치 위에 올라서 바다 사방을 둘러 보아도 수평선일 뿐 망망 대해상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나는 술을 잘 못하지만 그런 때에는 가끔 양주를 마셨다. 그리고는 낮잠도 잤다.
원유 적재는 앞으로 약 48시간 정도가 소요된다고 한다. 나는 선장이 소유하고있는 낚시대를 빌리고 바켓 하나를 들고 선원들이 알려주는 낚시장소로 갔다. 물 속을 보니 흑도미가 물반 고기반이었다.
순식간에 바켓으로 가득 잡았다. 나는 자랑할려 선내로 돌아왔으나 그들은 생선은 싱싱하나 기름냄새가 나서 먹기에는 좀 부담스럽다고 하며 나의 수확에 시들해 했다. 나는 조리사 에게 부탁하여 회를 떴다. 기름냄새는 좀 났지만 먹을 만 했다. 그 날 저녁 회며 튀김 그리고 매운탕으로 전 선원이 만족한(?) 식사를 즐겼다. 이 원유적재장에서 얼마 안되는 거리에 조그마한 도시가 있는데 같이 가보자고 선장이 제의 하기에 함께 갔다. 지금쯤은 화려하고 큰 도시로 변모 했겠지만 당시에는 정말 작은 마을로 임시 건물의 상점이 즐비해 있었는데 대부분의 길과 상점은 가난이 묻어있는 보기에 흉한 곳이 많았지만 어떤 곳은 자기들 나름대로 현대화 한다고 길바닥과 벽에 각종 화려한 타일로 단장한 곳이 함께 섞여 있어 이제 점차 발전하고있는 거리고나 생각하였 다. 어느 식당에서 점심을 하기로 했는 데 식사는 꾀 먹을만 했지만 역시 주위환 경은 청결하지 못했다. 선장은 벌써 원유 적재가 거의 끝나가니 내일이면 출항할 것이라고 했다. 해상에 떠있는 선박의 높이가 공선일 때에는 아파트 15층 정도의 높이라고 했는데 원유로 만선된 선박의 높이는 거의 해수면과 비슷해 보였다. 원유의 중량으로 수면 이하로 가라 앉은 것이다.
우리는 예정대로 3월 8일경 출항을 했다. 우리는 페르시아 만과 호르므스 해협을 무사히 지나 아라비아 해로 드러섰다. 아라비아 해에 들어서던 그 날 밤에 비상이 걸렸다. 선장을 비롯해 전 선원이 분주했다. 당초부터 염려해 오던 主機 (Main Engine)에 이상이 있어 한쪽 엔진이 작동을 멈추었다는 것이다. 큰일이다. 이제 엔진 상태를 개선하지 않고 한쪽엔진으로 무리하게 항해를 계속하면 그나마 ,남은 엔진도 고장을 이르킬 수 있고 한개의 엔진으로 한국까지 가려면 두배 이상의 시간이 소요되니 큰 낭패라 는 것이다. 기관실 요원은 모두 동원 되어 몇일 낮밤을 새우면서 고장 수리 를 시도했으나 수리 를 포기하고 말았다. 그 이후는 서행으로 60여일을 가야한 다니 모두 아연실색 이었다. 그런 와중에 본사에서 전보가 도착했다. 기관고장으로 장시간 지연되니 이 감사는 감사도 끝났고 임무를 맞쳤으니 기착지인 싱가포르 대리점의 안내를 받아 그 곳에서 하선하여 항공편으로 귀국하라는 지시였다. 나야 다행이지만 그 동안 함께 하던 선원들을 뒤에 두고 더우기 고장난 선박을 뒤에 남겨두고 나만 도중 에 귀국하게 되다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나는 그 곳에서 대리점이 하는 일들을 점검하고 이만하면 천우호의 현상태를 개선하는데 만족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대리점에서 마련해 준 항공편으로 귀국 길에 올랐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싱가포르 주재 대사가 우리 공군의 선배 이규성씨가 아닌가. 나는 대리점 의 도움을 받아 한국 대사관으로 전화를 걸었다. 마침 대사님 이 직접 받으셨다. 그 분은 현역 당시 공군 본부 군수국장을 지낸 분으로 같은 특기 분야였음으로 그 분은 나를 잘 알고계신 분이었다. 반가히 맞아주시고 대사관 소개도 해 주시고 시내 한 바퀴 드라이브며 이곳저곳 보여 주시고 저녁식사도 사 주시고 대사관 숙소에서 하루 밤을 지내고 다음 날 공항으로 대려다 주시어 항공편으로 서울에 장기간의 여정 끝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다음날 나는 회사 간부들이 모인 가운데 감사보고를 했다. 모두 한 숨을 쉬면서 우리 회사와 천우호의 운명이 어떻게 될는지 걱정에 쌓이기 시작했다. 몇일 후 Gulf사에서 일단의 요원들이 드리닥쳤 다. 회사와 선박의 운명을 결정하는 중대한 임무를 띠고 내한했음이 분명했 다. 연일되는 합동회 의를 통하여 내린 결론은 우선 고장난 천우호는 일본 고베 인근에 있는 '아요이' 조선소에 예약을 했으니 그리로 가서 수리를 한다음 Gulf사가 회수하겠다. 삼화운조는 페이퍼캄퍼니로서 감액된 일정수준의 경비만 지원하고 모든 관계는 그 것으로 마므리 짓겠다. 일본에서의 수리만은 삼화운조가 맡아달라. 그렇게 합의하고 그들은 미국으로 되돌아 갔다.
다음날 사장은 일본에 선박을 옮기는 일부터 수리완료 되어 선박을 울산 외항에 정박까지 이 감사가 총지휘해서 실행토록 하라는 지시를 하달했다. 나는 울산으로 내려가 선장과 협의한 후 지체없이 일본으로 갔다. 그 선박 검사를 끝낸 아이오이 조선소 사장은 이 선박 수리에 최소 45일이 소요될 것으로 판단하며 총 수리비는 50,000여불이 될 것이라고 했다. 수리비를 포함해서 지연항해로 인한 손해 경비 등 총 10만불 이상의 손해를 본 것이다. 그 당시 10만불은 상당히 큰 금액이 었다. 나는 계속 그 곳에 기거하면서 선박수리 공사에 임하면서 조선소측과 협의하는 등 임무를 수행하고 수리가 완료된 후 배를 끌고 울산 외항에 정박하 고 본사에 복귀하였 다. 그리고 몇일 후 Gulf사 요원이 다시 내한하여 천우호를 미국 Gulf사로 몰고 가버렸다.이렇게하여 삼화운조는 선박없는 페이퍼캄퍼니로 전락하게 되었다. 그 후 얼마 지나지않아 정태성 사장이 지병 으로 사망하고 이성호 제독은 삼환기업으로 전직하면서 삼화운조는 그 운명을 끝내고 말았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