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설교를 잘하기에
칼에 찔리는가
1790년 8월 10일, 종로의 한 담배 가게 앞에서 느닷없는 살인 사건이 벌어진다. 어느 날 정조는 규장각에 있는 이덕무를 불러 이 살인사건에 대해 들려주었다. 종로의 담배 가게 앞에서 어떤 전기수가 《임경업전》을 낭독하고 있는데, 간신 김자점이 임경업에게 누명을 씌워 죽이는 대목에 이르자 갑자기 한 남자가 담배써는 칼을 들고 뛰어나와서는 "네가 그 김자점이냐?" 하며 전기수를 찔러 죽였다는 것이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김홍도가 그린 풍속화를 보면 시골 사랑방에서 목청 좋아 보이는 한 사람이 마을 사람들 앞에서 부채를 부치며 책을 읽는 장면이 있다. 바로 전기수에 관한 그림이다. '전기수'(傳奇叟)는 조선 후기에 나타난 이야기꾼으로, 한자의 뜻을 풀이하면 '기이한 이야기를 전해주는 노인'이다.
18-19세기의 조선 후기는 영조와 정조의 선정으로 문예 부흥이 일어나던 시대였다. 눈부신 사회 발전과 서학의 확산, 실학사상의 대두로 변화와 성장이 일어나면서, 글을 모르던 평민에게도 문화 향유의 열망이 커지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평민들 뿐 아니라 궁중에서도 소설을 읽을 만큼 소설 읽는 문화가 유행처럼 퍼져 있었다. 바로 이런 소설의 시대, 사람이 많이 모인 곳이면 전기수는 어김없이 나타나 관중을 쥐락펴락하는 신통한 재주로 실감 나게 책을 읽어주었다.
전기수는 소설뿐만 아니라 구전으로 전해오는 옛날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사랑방뿐만 아니라 저잣거리나 시장 한복판에서 사람들을 모아놓고 소설을 낭독했기 때문에 이들을 다른 말로 강독사(講讀師)라고도 불렀다.
서울 곳곳을 돌며 정기 낭독을 하던 이도 있었고, 여장(女裝)을 하고 부잣집에 불려가 책을 읽어주는 이도 있었다. 재상가의 부름을 받고 소설을 읽어주는 '방문형' 전기수도 있었다.
이들은 많은 사람이 들락거리는 담배 가게나 활터, 약국 같은 곳을 주요 활동 무대로 삼았다. 서울에서는 종로 일대로 오늘날의 보신각에서 종로 6가 사이였고. 한양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 사람의 왕래가 많은 곳에 자리를 펴고 입답을 풀었다.
실력 좋은 전기수들은 슈퍼스타 대접을 받았고 돈벌이도 좋았다. 김호주 같은 인물은 수년간 전기수로 일해 모은 돈으로 집을 샀을 정도라고 한다.
청중들은 영운의 활약상을 담은 소설을 가장 좋아했다. 청중의 마음과 생각을 읽을 줄 알았던 전기수는 당시 대중과 가깝게 교류했던 소통의 달인이자 만능 엔터테이너(entertainer)였다. 연회거리가 별로 없던 시절에, 사람들은 전기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울고 웃으며 위로를 받고 즐거워했다.
전기수는 번화가 모퉁이에 사람들을 모아놓고 이야기 속 인물들을 1인 다역으로 연기하면서 청중을 쥐락펴락했다. 책을 읽다가 가장 긴요한 대목에 이르면 문득 소리를 멈춘다. 그러면 청중이 그다음 대목이 궁금해 서로 다투어 돈을 던진다.
그 연기력이며 낭송 실력이 얼마나 좋았는지, 소설 속의 인물을 연기하는 전기수를 실제 인물로 착각하면서 칼로 찌르는 일까지 일어난 것이다. 칼을 맞을 정도로 실감이 났고 공감이 있었던 것이다.
전기수와 같이 자기 일에 영혼을 실어 일할 때, 그것이 이웃을 섬기고 축복하는 좋은 길이다. 그것이 우리 삶을 '삶의 예배', 즉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 것이다.
가령 빵 만드는 직업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주일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렸다면 다음 한 주간 동안 그 어떤 제빵사보다도 더 정성스럽게 빵을 만드는 것이 진정한 산 예배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서 '역시 그리스도인이 일하면 달라! 하는 감동이 일어날 때가 바로 전도의 시작이다.
시인은 한 사물을 표현하는 데 있어, 우주에 하나밖에 없는 한 단어를 기어코 찾아내 자기의 영혼을 실어 시를 쓴다. 이 세상 어떤 꽃도 불성실하게 피는 꽃은 없다. 며칠 피었다가 곧 낙화(洛花)할 줄 알면서도, 저마다 혼신의 열정을 다해 피느라 꽃은 저토록 아름답다.
이 세상 바람이 모두 곧 허무하게 사라져버리지만, 온 힘을 다해 불어 바다와 강과 대지를 울렁거리게 한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은 꽃과 바람보다도 더욱 자신의 일에 영혼을 실어 이웃을 축복한다.
설교도 그래야 하지 않을까. 목회자로서 전기수 이야기를 듣고 '예배도 그렇게 실감 나고 공감 있게 드리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예배가 드려지는 순간, 푸른 초장 쉴 만한 물가가 나타나고, 하늘 보좌에서 찬양하는 천군 천사의 노래가 들리고, 눈물을 닦아주는 주님의 따뜻한 손길이 느껴지는 그런 예배.
마치 천국의 현장에 와 있는 듯한 실감 나는 예배.
세상과 나도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님만 보이는 예배.
인공지능으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영성· 지성·감성이 모두 충만한 은혜의 예배.
그런 예배를 인도하고 싶다.
예수님의 설교는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설교와 달랐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마 7:28,29
사람들은 예수님의 설교에 놀라고, 감동을 받았다. 예수님의 설교는 그 뿌리가 '하늘에 닿아' 있었기에 달랐다. 그리고 너무나 친숙하고 공감 있는 '땅의 언어'를 사용하시며 우리를 이해하시고 안아주셨기에 달랐다.
하늘에 닿은 영성, 땅의 마음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공감성, 혼돈스러운 세상 속에서 그런 설교를 하고 싶어 늘 고개 숙여 기도한다.
첫댓글 아멘.!!
주님께서 하십니다.!!
주님께 영광.!!
예배 드리는 자세를 다시한번 깨우치게 됩니다
주님의 따뜻한 손길이 느껴지는 예배
세상과 나는 간곳 없고 구속한 주님만 보이는 예배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예배를 드리게 하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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