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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그는 외치지도 않으며 그 소리가 거리에서 들리게 하지도 않으리라(‘주님의 종’의 첫째 노래).>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42,1-7
1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이, 내가 선택한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그는 민족들에게 공정을 펴리라.
2 그는 외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며
그 소리가 거리에서 들리게 하지도 않으리라.
3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그는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
4 그는 지치지 않고 기가 꺾이는 일 없이 마침내 세상에 공정을 세우리니
섬들도 그의 가르침을 고대하리라.
5 하늘을 창조하시고 그것을 펼치신 분
땅과 거기에서 자라는 온갖 것들을 펴신 분
그곳에 사는 백성에게 목숨을, 그 위를 걸어 다니는 사람들에게 숨을 넣어 주신 분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6 “주님인 내가 의로움으로 너를 부르고 네 손을 붙잡아 주었다.
내가 너를 빚어 만들어 백성을 위한 계약이 되고
민족들의 빛이 되게 하였으니
7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이들을 감옥에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을 감방에서 풀어 주기 위함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1-11
1 예수님께서는 파스카 축제 엿새 전에 베타니아로 가셨다.
그곳에는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라자로가 살고 있었다.
2 거기에서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베풀어졌는데, 마르타는 시중을 들고
라자로는 예수님과 더불어 식탁에 앉은 이들 가운데 끼여 있었다.
3 그런데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다.
그러자 온 집 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였다.
4 제자들 가운데 하나로서 나중에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 이스카리옷이 말하였다.
5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
6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도둑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돈주머니를 맡고 있으면서 거기에 든 돈을 가로채곤 하였다.
7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8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9 예수님께서 그곳에 계시다는 것을 알고 많은 유다인들의 무리가 몰려왔다.
예수님 때문만이 아니라,
그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라자로도 보려는 것이었다.
10 그리하여 수석 사제들은 라자로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
11 라자로 때문에 많은 유다인이 떨어져 나가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의 종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마리아가 당신 발에 향유를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아 드리자, 장례 날을 위하여 기름을 간직하게 하라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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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종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는다. 주님께서는 그를 민족들의 빛이 되게 하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라자로가 사는 베타니아로 가시어 당신을 위한 잔치에 참여하신다. 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은 마리아의 행동을 유다가 비난하자,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장례를 언급하신다. 유다인들은 예수님과 라자로를 죽이기로 결의한다(복음).
오늘의 묵상
복음은 파스카 축제 엿새 전 베타니아의 잔치를 배경으로 합니다. 참혹한 수난이 다가오고 있는 시점에 잔치, 향유, 여성의 머리카락 등의 소재가 다소 이질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미 죽은 지 “나흘”이나 되었음에도 다시 살아난 라자로의 이야기는 오늘부터 엿새 뒤에 있을 예수님의 부활을 암시합니다.
마리아의 이야기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상징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마리아가 삼백 데나리온(1년 치 품삯에 해당)이나 하는 비싼 향유를 한 번에 사용하며 예수님의 발을 닦아 드린 것 때문에 유다 이스카리옷은 분통을 터뜨립니다. “어찌하여 저 향유를 ……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 그러나 본문은 분명하게 그가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도둑이었기 때문”이라고 밝힙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냥 놔두어라.” 하시며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하고 말씀하십니다. 그의 행위와 당신의 죽음을 직접적으로 연결시키신 것입니다. 사실 ‘향유’를 쏟아 ‘예수님의 발을 닦는 행위’는 당신의 ‘피와 물’을 온전히 쏟아 ‘인간의 죄를 닦으신 예수님의 행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온 집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였던 것처럼 십자가 주변도 예수님의 피 냄새가 가득할 것입니다. 그리고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을 닦아 드렸듯 얼마 지나지 않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닦아 주실 것입니다. 그가 허리를 굽혀 예수님의 발을 닦았듯이 예수님께서도 허리를 굽혀 인간의 발을 닦으시고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으시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고, 성실하게 공정을 펴시며, 지치지 않고 기가 꺾이는 일 없이, 마침내 세상에 공정을 세우실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분께서는 “백성에게 목숨을 …… 사람들에게 숨을 넣어 주신 분”이시기에 라자로를 다시 살리신 것처럼 이제 모든 사람에게 새로운 숨과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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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파스카 축제 엿새 전 베타니아에서 일어난 사건을 소개합니다. 예수님께서 축제를 앞두고 예루살렘 가까이 올라가셨다는 이야기와 함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라자로에 대한 언급은 다가올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예시합니다.
복음은 마리아의 행동을 바라보는 유다와 예수님의 반응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마리아는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약 320그램)를 가져와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닦아 드렸습니다. 삼백 일의 품삯에 상응하는 삼백 데나리온의 값어치 지닌 향유였습니다. 값비싼 향유를 부어 드린 행위는 마리아가 예수님께 드린 최고의 사랑을 표현합니다.
이러한 마리아의 행위에 유다는 부정적입니다. 그는 마리아가 값비싼 향유를 낭비한다고 여기며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쓰지 않는다고 비판하지만, 사실 물질에 대한 탐욕이 있었고 정직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의 행위에 의미와 정당성을 부여하십니다.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이 말씀은 향유를 붓는 행위를 예수님의 죽음을 예고하는 상징적 행위로 설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당신의 죽음이 가까이 왔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이는 수석 사제들이 예수님과 함께 라자로를 죽이기로 결의함으로써 확인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와 유다의 모습은 대조적입니다. 마리아가 헌신적 봉헌의 표양을 보여 주었다면, 유다는 탐욕에 빠진 배반자였습니다. 우리는 마리아의 모습에서 신앙의 모범을 찾아야 합니다.(정진만 안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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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하나의 장례처럼 여기는 상징적인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복음서들에 따르면, 향유를 붓는 행위는 장례 의식의 일부로 여겨졌습니다(마태 26,12; 마르 14,8; 요한 12,7 참조). 고대 유다교 전통에서도 장례는 당시 유다인들과 유다교 출신 그리스도인들에게까지 권장되었던 선행 가운데 하나였습니다(토빗 1,17-18; 사도 9,36-37 참조).
후대 유다교 라삐들에게 장례는 단순한 자선을 뛰어넘는 것으로서, 빈부 격차에 상관없이 산 이들과 죽은 이들 모두에게 베풀 수 있는 선행으로 이해되었습니다(마태 25,35-45; 마르 15,42-47; 사도 8,2 참조). 이런 맥락에서 오늘 복음을 묵상합니다. 라자로의 누이, 마리아가 향유 한 리트라, 곧 320그램 정도를 부어 예수님의 발을 닦아 드립니다. 이는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는 예언적 행위이며, 그분의 장례를 미리 준비하는 선행을 상징합니다.
마리아의 이 선행은 예수님께서 늘 제자들과 ‘물리적으로 함께 계시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종말론적 행위를 의미합니다(마태 26,11; 마르 14,7; 요한 12,8 참조). 그러나 예수님께서 겪으실 수난과 죽음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유다, 예수님께서 다시 일으키신 라자로를 하나의 ‘표징’으로 확인하려고 몰려든 유다인들, 그리고 라자로 때문에 많은 유다인이 예수님을 믿게 되자 그분과 함께 라자로까지 죽이기로 결의하는 수석 사제들이 있습니다. 성주간 월요일에 우리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앞에 어떤 준비를 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모습은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 가운데 누구에 가깝습니까?(김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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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간 첫 사흘의 독서는 파스카 신비의 도입으로 ‘주님의 종’의 처음 세 노래에서 뽑은 구절을 봉독합니다. 이 신비로운 표상은 한 개인과 이스라엘 백성을 나타냅니다. 교회 전통은 ‘주님의 종’의 노래들을 줄곧 메시아적이고 그리스도론적 의미로 봉독해 왔습니다.
그 첫째 노래에서 예언자는 외치지도 않고,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성실하게 공정을 펼치며,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주는 자비롭고 온화한 종에 대하여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런 종, 곧 하느님께서 당신 영으로 기름을 발라 주시고 당신 백성인 교회를 위하여 계약을 맺으신 분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민족들의 빛이 되시고,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시며, 갇힌 이들을 감옥에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을 감방에서 풀어 주실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매우 사랑하신, 한 가정집에서 쉬고 계시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곳에는 그분 친구들과, 라자로와 마르타와 마리아 자매도 있습니다. 유다인들이 미워하는 중에도 이런 진솔한 우정은 예수님께 큰 위로를 줍니다. 라자로의 부활은 그 자체로 예수님의 신적 권능을 드러내기에 유다인들은 라자로까지 죽이기로 결의합니다.
파스카 축제 엿새 전, 예수님께서 저녁을 드실 때 마리아가 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립니다. 유다 이스카리옷은 이런 행위가 쓸데없는 낭비라며 향유를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다고 비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비난에 개의치 않으시고 마리아를 옹호하시며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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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라자로를 맞아들이는 가족들의 기쁨은 형용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맞이하는 마리아와 마르타의 마음은 사랑이 흘러넘쳤습니다. 마르타의 사랑은 손님을 맞이하고 시중드는 봉사로 나타납니다. 마리아의 사랑은 비싼 순 나르드 향유로 표현됩니다. 그 사랑은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닦아 드리는 헌신으로 나타납니다. 라자로의 가족들은 예수님께 사랑과 감사를 표현하는 모범이 되고 있습니다.
유다 이스카리옷은 이러한 사랑과 감사의 모습을 보면서도 자신의 ‘이해관계’를 앞세웠습니다. 왜 비싼 향유를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느냐고 하면서 자신의 이익을 챙길 궁리를 하였습니다.
마침내 예수님께서는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라자로의 소생으로 기뻐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과 향유로 적셔질 당신의 몸을 관조하셨습니다. 당신의 고통과 죽음이 사람들에게 부활의 기쁨으로, 사랑 가득 찬 감사로 피어날 것을 미리 아셨습니다.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는 당신의 사랑으로 십자가의 죽음을 준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온유한 종으로서 세상의 죄를 끌어안고 십자가를 지고자 하셨습니다.
이 거룩한 성주간에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은 어떠합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대해 지극한 사랑과 감사를 느끼고 있습니까? (류한영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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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라자로를 맞아들이는 가족들의 기쁨은 형용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맞이하는 마리아와 마르타의 마음은 사랑이 흘러넘쳤습니다. 마르타의 사랑은 손님을 맞이하고 시중드는 봉사로 나타납니다. 마리아의 사랑은 비싼 순 나르드 향유로 표현됩니다. 그 사랑은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닦아 드리는 헌신으로 나타납니다. 라자로의 가족들은 예수님께 사랑과 감사를 표현하는 모범이 되고 있습니다.
유다 이스카리옷은 이러한 사랑과 감사의 모습을 보면서도 자신의 ‘이해관계’를 앞세웠습니다. 왜 비싼 향유를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느냐고 하면서 자신의 이익을 챙길 궁리를 하였습니다.
마침내 예수님께서는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라자로의 소생으로 기뻐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과 향유로 적셔질 당신의 몸을 관조하셨습니다. 당신의 고통과 죽음이 사람들에게 부활의 기쁨으로, 사랑 가득 찬 감사로 피어날 것을 미리 아셨습니다.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는 당신의 사랑으로 십자가의 죽음을 준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온유한 종으로서 세상의 죄를 끌어안고 십자가를 지고자 하셨습니다.
이 거룩한 성주간에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은 어떠합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대해 지극한 사랑과 감사를 느끼고 있습니까? (류한영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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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타니아에 있는 라자로의 집에서 그의 동생 마리아는 비싼 순 나르드 향유를 가져다가 예수님의 발을 씻어 드립니다. 예수님을 배반한 유다는 이런 행동을 낭비라고 개탄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녀의 행동을 받아들이십니다. 마리아의 이 행동은 신앙의 표현이며,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깊은 사랑의 표현입니다. 물론 가난한 사람을 소홀히 대하면서 예수님의 말씀만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진실이 있습니다.
만누치(V. Mannucci)라는 성서 학자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느님이시요 인간이신 그분에 대한 경배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투쟁보다 훨씬 더 가치가 있다. 흔히 말하듯, 위를 향한 가난이 있고, 우리의 가난이 바로 그것이다. 이 가난을 알게 되면 그분께 경배라는 몸짓을 표현하게 되고, ‘무익한’ 것처럼 여겨지는 전례에 참여하게 되며, 가장 귀한 것을 자기 품에서 꺼내어 하느님께 봉헌한다.”
세상에는 낭비처럼 보이지만, 신앙인의 삶에는 피할 수 없는, 너무나 소중한 것이 있습니다. 아무 의미 없는 것처럼 보여도 거기에 숨을 불어넣는 것입니다. 수많은 남녀들이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며 스스로를 포기하고, 기도에 온통 시간을 바칩니다. 돈주머니를 차고 있는 유다는 이해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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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주간 월요일 아침에 고요한 마음으로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입니다. 태풍 전야의 정적과 긴장이 동시에 느껴집니다. 미사 뒤에 잠시 마음을 가다듬으며 조용히 자리에 앉아 묵상합니다. 한 해의 전례주년에서 어느 때와도 비길 수 없는 경건한 시기인 이 성주간을 지낼 마음의 준비를 합니다.
예 수님의 수난과 죽음이라는 놀라운 사건이 이어지건만 먼저 떠오르는 것은 이상하게도 온화한 바람에 부드럽게 눕는 들풀이었습니다. 괴로움도 있으시련만 흐트러지시거나 동요하시지도 않고 조용히 마리아에게 당신의 발을 맡기시며 당신의 죽음과 장례를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부드럽지만 흔들리지 않는 사랑을 느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러한 심상과 함께 인상적인 장면 하나가 문득 떠올랐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장례 미사 광경입니다. 전 세계에서 모인 수많은 사람으로 가득 찬 미사였지만 지금 제 기억에 떠오른 바티칸 광장은 텅 빈 것 같고 시간이 멈춘 듯했습니다. 다만 특별한 장식 없는 관 위에 놓인 복음서가 바람에 나부낍니다. 며칠 전인 4월 2일이 교황님이 선종하신 지 아홉 해가 되는 날이었기에 이 모습이 기억났을지도 모르나, 이번 성주간을 위한 큰 선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길을 따라나서리라 다짐합니다. 오랫동안 딱지처럼 몸에 달라붙어 있는 의심과 주저함, 두려움에서 벗어날 것을 다짐합니다. 끊임없이 애착했던 헛된 장식이나 치장을 치우리라 마음먹습니다. 이러한 길에 조용하지만 변함없는 사랑이 놓여 있다는 것을 압니다. 이 길이 바로 부활과 생명의 길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님께서 가신 길을 저도 운명으로 여길 수 있기를 기도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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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는 죽음과 부활, 섬기는 것과 섬김을 받는 것이 대조됩니다.
첫 번째는 죽음과 부활의 대조입니다. 죽었던 라자로를 살리신 예수님을 환영하는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이야기의 중심은 거기에 있지 않고,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닦아 드리는 장면에 있습니다. 향유를 붓고 닦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분의 ‘장례’를 위한 것입니다. 사실 라자로를 살리신 직후 최고 의회에서는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였습니다(요한 11,45-53 참조). 라자로를 살리신 것이 오히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게 된 계기가 된 것입니다. 이는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고 하신 당신의 말씀대로 지상에서의 최고의 사랑을 보여 줍니다.
두 번째 대조는 섬기는 것과 섬김을 받는 것입니다. 요한 복음에는 다른 이의 발을 씻는 장면이 두 번 나옵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손수 씻어 주시는 장면입니다(요한 13,4-5 참조). 또 다른 하나가 바로 오늘 복음으로,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을 씻어 드리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가실 때가 되자 손수 제자들의 발을 손으로 씻어 주십니다. 그러나 제자들 가운데 예수님의 발을 씻어 드린 이는 없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예수님의 죽음을 예감하고 예수님의 발을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닦아 드립니다. 마리아처럼 예수님을 극진하게 섬기는 모습은 요한 복음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신비에 참으로 깊이 동참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주간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 또한 마리아처럼, ‘친구’를 살리시고자 죽음을 각오하신 예수님을 온전히 섬기며 그분의 수난과 죽음의 신비를 깊이 묵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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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서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을 관계적 존재라고 합니다. 사람 사이의 관계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려고 애쓰는 가운데 조금씩 깊어집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마음과 하나가 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마르타가 예수님과 맺었던 관계를 생각해 봅니다. 마르타는 아무리 비싼 향유라도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아깝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과 진정한 사랑으로 맺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예수님께 사랑을 듬뿍 받았고, 그녀 또한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어떠한 관계를 맺으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돌아볼 일입니다. 신앙은 예수님과 만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변화되고자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이 만남은 예수님을 닮으려고 할 때 더욱 성숙해집니다. 예수님처럼 살려고 할 때 부딪히는 어려움과 고통이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과 만난 인연 때문에 십자가를 기꺼이 지는 것이 진정으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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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라자로를 찾아가십니다. 그는 정성을 다해 모십니다. 한때 죽었던 자신을 ‘다시 살리신 분’이 오셨기 때문입니다. 라자로의 가족 역시 남다른 마음으로 맞이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마리아는 고급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닦아 드립니다. 애틋한 정성입니다. 사람들은 숙연해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 이스카리옷은 어색한 표정이 됩니다.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 그는 이렇게 되뇝니다. 정성을 ‘정성으로’ 보지 못한 것이지요.
마리아는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오빠를 살려 주신 예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분의 발에 향유를 부은 것은 감사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방문에 감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향유가 ‘아무리 비싼들’ 마리아에게는 조금도 아깝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유다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돈을 먼저 생각합니다. 마리아의 마음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마리아의 순수함을 헤아려 보지 않았기에 낭비라고 판단합니다. 살면서 ‘쉽게 빠지는’ 잘못입니다. ‘너무나 쉽게’ 걸려드는 유혹입니다.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모두를 배려하시는 말씀입니다. 모든 것을 덮어 주시는 예수님의 따뜻함입니다.
우리는 어느 쪽인지요? 마리아입니까? 유다의 모습입니까? 성주간 동안 우리는 우리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어느 마을에 두 농부가 있었습니다. 둘 다 곡물의 씨앗을 뿌리려고 준비하고 있었지요. 그리고 씨앗을 뿌리려는데, 곡물 씨앗 안에 다른 씨앗이 섞여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너무 많아서 일일이 가려내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이때 한 농부는 “나는 다른 씨앗이 섞여 있는 이 씨앗을 뿌리지 않겠다.”라며 씨 뿌리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반면 다른 농부는 그럼에도 씨앗을 밭에 정성껏 뿌렸습니다. 시간이 지나, 곡물을 얻을 수 있었던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다른 씨앗이 섞여 있어도 씨앗을 뿌린 사람이 분명합니다.
밀과 가라지의 비유 말씀을 떠오르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가라지는 독보리라고 불리는 잡초로, 밀의 뿌리와 뒤엉켜 자라기 때문에 이 가라지를 뽑으면 밀까지 뽑히게 됩니다. 그래서 추수 때까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우리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결점과 약점을 얼른 뽑아 버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는 불가능합니다. 부정적인 모든 것을 없애 버리려는 완벽주의자의 모습을 가지려고 하지만, 이 부정적인 모습도 받아들이면서 밀과 같은 좋은 모습을 성장시켜야 합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우리는 부족함을 가지고 있다면서 대충 막살면 될까요? 아닙니다. 그래서 회개가 필요한 것입니다. 자기의 부족함과 나약함을 인정하고 하느님께 되돌아갈 수 있는 용기 있는 겸손이 필요했습니다. 이런 겸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시각도 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가라지를 억지로 뽑으려 하지 않습니다. 즉, 함부로 판단하고 단죄하는 것이 아닌, 있는 그대로 모습을 받아들이고 그를 위해 하느님께 기도합니다.
다행스럽게도 이 잡초의 힘을 빼앗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은 잡초를 솎아내고 그 힘을 빼앗습니다. 물론 전부 제거하거나 완전히 깨끗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날 하느님께서 그 불순물을 제거해 주실 것입니다. 하느님께 매달리며 사랑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 발에 향유를 붓는 마리아의 모습을 떠올려 보십시오. 유다는 이 모습을 이해하지 못하지요. 쓸데없는 낭비를 하고 있다고 판단합니다. 이렇게 사리사욕이 가득 찬 계산속에서 예수님을 은돈 서른 닢에 팔아넘기게 됩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그렇지 않습니다. 진정으로 회개하는 마음으로 예수님 발에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립니다.
여기서 보이는 것이 무엇입니까? 낭비일까요? 아닙니다. 사랑만이 보입니다. 이 사랑을 예수님께서는 받아주십니다. 주님 앞에서는 완벽주의자가 굳이 될 필요가 없습니다. 오로지 사랑의 삶만이 필요합니다.
오늘의 명언: 사람들은 행복을 찾아 헤매고, 행복은 누구의 손에든지 잡힐 만한 곳에 있다. 그러나 마음속에서 만족을 얻지 못하면 행복을 얻을 수 없다(호라티우스).
오늘 우리는 사랑하는 주님을 위해 도대체 무엇을 봉헌하고 있습니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예수님께도 유난히 가깝고 편안하고 절친한 가족이 있었으니, 바로 라자로와 그의 누이 마르타, 마리아네 집이었습니다.
공생활 기간동안 예수님께서는 끝도 없이 늘어선 환자들의 치유, 적대자들과의 거듭되는 논쟁으로 온 몸과 마음이 녹초가 될 때가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즐겨 찾던 집이 베타니아의 라자로, 마르타, 마리아의 집이었습니다.
휴대폰도 없던 시절, 예수님과 제자들은 갑작스레 우르르 들이닥치곤 했었는데, 그럴 때 마다 세남매는 그들을 극진히 환대하였습니다. 냉장고를 탈탈 털어 식사를 준비했고, 감춰두었던 값진 포도주를 내어놓곤 했습니다.
베타니아의 그 집은 예수님과 제자들에게는 일종의 오아시스이자 베이스 캠프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난과 죽음을 목전에 두신 성주간 첫날 베타니아의 그 집을 또 다시 찾아 오셨습니다. 여느 때처럼 마르타는 마음이 급해지고 손길이 바빠졌습니다. 지지고 볶고, 삶고 굽고 정신없었습니다. 라자로는 예수님 맞은 편에 앉아 귀빈 접대를 하느라 바빴습니다.
반면에 마리아는? 그 누구보다도 예수님과 영적으로 깊이 일치하고 있었던 마리아였습니다. 그녀는 직감으로 알아차렸습니다. 이제 드디어 사랑하는 주님과 작별할 날이 가까이 다가왔구나. 이제 드디어 그분을 떠나보내 드려야 하는구나.
뭐라도 해드려야겠다는 마음에 마리아는 자신의 소지품들 가운데 가장 값진 것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즉시 찾아냈습니다. 자신의 소지품 가운데 가장 아끼던 물건,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챙겼습니다.
식사 중이던 예수님 발치 앞에 엎드린 마리아는 그 비싼 순 나르드 향유를 아낌없이 통째로 예수님 발 위에 부어드렸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습니다.
둘러 앉아 있던 사람들은 웅성대기 시작했습니다. 저런저런 저게 얼마나 비싼 향유인데...저런 행위는 아무 사이나 하는 행위가 아닌데...공개석상에서 무슨 꼴불견이람.
그러나 마리아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너무나 당당하고 거리낌없이 자신의 긴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드렸습니다.
여인들이 아주 중요시 여기는 머리카락으로 누군가의 발을 닦아드린다는 것, 보통 일이 아니겠습니다. 너무나 그를 사랑한다는 표현, 내 모든 것을 다 주어도 아깝지 않은 대상이라는 표현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사실 마리아가 보여준 특별한 행위는 일종의 장례 절차였습니다. 돌아가시고 나서 해드리는 것도 좋지만, 살아생전 해드릴 수 있는 가장 극진한 예를 주님께 바치는 마리아의 모습이 참으로 갸륵해보입니다.
가장 사랑하는 주님을 위해 자신이 지니고있는 가장 귀한 것을 봉헌하는 마리아의 모습이 참으로 크게 다가옵니다.
오늘 우리는 사랑하는 주님을 위해 도대체 무엇을 봉헌하고 있습니까? 내가 지닌 가장 귀한 것을 대체 어떻게? 어디에? 사용하고 있습니까?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예전에 교구 사목국에서 일할 때입니다. 당시 서울대교구는 ‘복음화’를 중심으로 소공동체 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교육담당 사제였기에 복음화에 대한 교육을 각 지구로 돌아다니면서 하였습니다. 교재는 반장학교 1 단계, 2단계, 3단계가 있었습니다. 시간이 많이 흘러서 모든 것이 기억나지 않지만 두 가지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신앙인들은 모두 예수님의 사랑을 배우고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사랑의 첫 번째는 ‘죄인까지 품어 주는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악인들도 자기들의 자식은 사랑한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선한 사람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하나 때문에 더 기뻐하신다.’라고 하셨습니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지만 아픈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다.’라고 하셨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죄인까지 품어주는 사랑이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하셨습니다.
두 번째는 ‘조건 없는 사랑’입니다. 예전에 ‘무조건’이라는 노래가 있었습니다. 가사 중에 ‘당신을 향한 나의 사랑은 무조건 무조건이야’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어미가 어찌 젖먹이 아이를 잃어버리겠느냐? 설령 어미가 자식을 잃어버릴지라도 나는 너희를 결코 잃지 않겠다.’ 예수님의 사랑은 조건이 없었습니다. 죄인일지라도, 이방인일지라도, 마귀 들린 사람일지라도, 아픈 사람일지라도 예수님께서는 모두 다 사랑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배반하여 다락방에 숨어 있을지라도 제자들에게 ‘성령과 평화’를 주셨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조건 없는 사랑이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세 번째는 ‘수난과 고통까지 감수하는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부귀보다 가난을 택할 수 있는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건강보다 질병을 택할 수 있는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오래 사는 것보다 일찍 죽는 것을 택할 수 있는 사랑입니다. 성인과 성녀들은 바로 이런 사랑을 실천하였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수난과 고통까지 감수하는 사랑이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네 번째는 ‘끝까지 믿어 주는 사랑’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 이렇게 물었습니다. “주님 제 이웃이 제게 잘못을 하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충분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일곱 번씩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해 주어야 한다.” 비록 둘째 아들이 유산을 탕진하고 거지가 되어서 돌아 왔을지라도 아버지는 그 아들에게 반지를 주고, 잔치를 벌여 주는 사랑입니다. 우리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눈과 같이 희게 해 주시는 사랑입니다. 우리 죄가 진홍같이 붉어도 양털처럼 희게 해 주시는 사랑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끝까지 믿어주는 사랑이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다섯 번째는 ‘열정적인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참새도 둥지가 있고, 여우도 동굴이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누일 자리조차 없다.”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 끝까지 가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복음을 선포하여라.”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나를 위하여 마련되어 있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활화산처럼 터져 나오는 열정적인 사랑이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다른 하나는 복음화의 4가지 요소입니다. 첫 번째는 ‘말씀’입니다. 말씀이 중심이 되지 않으면 소공동체의 모임은 그저 독서 토론회가 될 수 있습니다. 말씀이 중심이 되지 않는 강론은 진정한 강론이 아니라 사제 개인의 넋두리가 될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씀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두 번째는 ‘기도’입니다. 기도가 중심이 되지 않으면 소공동체의 모임은 곧 활력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기도는 샘이 깊은 물과 같고, 기도는 뿌리 깊은 나무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겟세마니 동산에서 밤을 새워 피땀 흘리면서 기도하셨습니다. 세 번째는 ‘지역’입니다. 지역이 중심이 되지 않으면 소공동체의 모임은 그저 신심단체 중에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구원되기를 바라셨습니다. 지역이 활성화 되면 본당은 더욱 활성화되기 마련입니다. 네 번째는 ‘활동’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실천이 없는 믿음은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은 하지만 실천하지 않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을 비난하셨습니다. 실천이 없는 소동동체 모임은 그저 친목단체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부터 우리는 성주간을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을 묵상하며 복음화의 4가지 요소를 삶으로 실천하는 성주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사랑>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요한 12,8)
나 있는
지금 사랑
언제든 사랑
나 머문
여기 사랑
어디든 사랑
내 앞에
당신 사랑
누구든 사랑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도둑이었기 때문이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파스카 축제 엿새 전에 라자로와 마르타와 마리아가 사는 베타니아로 가셔서 잔치에 참여하셨습니다. 그 때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리자 유다 이스카리옷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 복음서의 저자는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도둑이었기 때문이라고 전합니다.
유다 이스카리옷의 경우엔 마리아가 향유를 주님이신 예수님의 발에 붓고 닦아드리는 숭고한 의미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향유의 가격만을 수치적으로 계산하였습니다.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하느님의 일을 함께한다는 것은 수치적으로 계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를 들어 우리의 목숨이 수치적으로 계산될 수 없는 고귀한 것과도 같은 맥락입니다. 곧 우리가 하는 하느님의 일은 그렇게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나의 존재에 대해서 감사드리며 다시 주인이신 하느님께 내가 가진 것을 돌려드리는 봉헌의 의미를 지닌 고귀한 행위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고귀한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그것을 세상의 가치로 계산하려고 한다면 참 어리석은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인간적으로 계산이 들어갈 때 하느님의 일은 할 수 없어집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하느님의 일은 그저 마냥 손해 보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인간적인 계산만을 튕기는 이에게 하느님 나라의 행복은 존재하지 않고 그저 장사판의 돈놀이만 존재할 뿐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추구하고 있는지 아니면 장사판의 돈놀이를 하고 있는지 스스로 성찰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도둑이었기 때문이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온 집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였습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파스카 축제 엿새 전에, 배타니아의 라자로와 마리아와 마르타 집에서 벌어졌던 잔치 중에 있었던 일을 전해줍니다.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드렸다.
그러자 온 집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였다.'(요한 12,3)
그렇습니다.
오늘도 내가 있는 우리 집, 우리 공동체 안에는 내 형제들이 부은 사랑의 향유가 가득합니다.
그런데 나는 왜 그 사랑의 향기를 맡지 못하는 것일까요?
내 온몸을 적시고 흐르는 그 사랑의 향기를 왜 알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아직도 나를 치장하기 위한 향유를 필요로 하고 있는 까닭은 아닐까요?
아직도 자신을 감추어 둔 채, 다 부수지 않은 까닭이 아닐까요?
값비싼 것을 소모하고 낭비할 수 없다면서, 오히려 물질에 애착하고 있는 까닭은 아닐까요?
나는 왜 아직도 형제들의 땀과 눈물을 닦아주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결코 닦아드릴 머리카락이 없어서가 아니라, 머리를 수구려 발까지 자신을 낮출 줄 모르는 까닭이 아닐까요?
혹 사랑이 없어, 사랑의 마음을 듣지 못하는 까닭이 아닐까요?
오늘도 옥함을 깨뜨려 향유를 쏟아 붓듯 내 발에 우리 주님과 형제들의 사랑이 쏟아지는데 나는 왜 이 사랑을 보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재치기로 코를 풀어내야만하듯, 내 영혼의 옥함에 불순물이 너무도 많은 까닭이 아닐까요?
아직도 구린내를 담고 있는 나를 깨부수지 못한 까닭이 아닐까요?
아직도 자신을 깨부수지 못한 나는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 까닭이 아닐까요?
왜 나는 이 숨 가쁜 사랑의 숨결을 듣지 못하는 것일까요?
형제들 가슴속 깊게 흐르는 사랑의 마음을 듣지 못하는 것일까요?
이토록 눈멀고 귀먹고 마음마저 굳어져버린 나는, 오늘도 자신과 물질을 버려서 예수님을 차지하는 마리아가 되기보다, 자신과 물질을 차지하여서 예수님을 버려버리는 유다가 되곤 합니다.
그러니 정신 똑바로 차리고 깨어 있어야 할 일입니다.
진정 우리 삶의 가치는 무엇인가?
우리 삶의 잣대는 무엇인가?
사부 성 베네딕도는 말합니다.
“그리스도보다 아무 것도 앞세우지 말라!”
그렇습니다.
신앙인에게는 세상의 그 어떤 것도 하느님을 섬기는 것에 앞세울 수는 없는 일입니다.
따라서 어떤 처신을 할 때에는 “내가 어떻게 해야 하나?” 하고 스스로에게 자문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주님께서는 제가 어떻게 하길 원하십니까?” 하고 물어야 할 일입니다.
사실 오늘도 우리 주님께서는 온 집안, 온 공동체를 사랑의 향유로 가득 채워주십니다.
온 집안에 가득 퍼진 이 감미로운 사랑의 향기에 종일토록 취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내내 찬미해야 할 일입니다.
그 향기 온 몸에 묻혀 바다소라처럼 향 내음 되어 날릴 일입니다.
그 향내 온통 베인, 이 집안을 사랑할 일입니다.
그렇게 그리스도의 향기가 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드렸다.'(요한 12,3)
주님!
옥함을 깨뜨리듯 제 자신을 부수고, 부서질수록 사랑의 향기 짙어가게 하소서.
향유를 쏟아 붓듯, 내 발에 쏟아지는 사랑을 보게 하소서.
제 영혼에 새겨진, 사랑의 숨 가쁜 소리를 듣게 하소서.
온 집안에 가득한, 감미로운 사랑의 향기에 내내 취하게 하소서.
온통 당신의 숨결이 베인, 이 집안을 사랑하게 하소서.
그 사랑의 향기 뿜어대는 당신 마음 닮아가게 하소서.
아멘.
김준수 신부님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12,7)
예전 어느 잡지의 신간을 소개하는 코너에서, 「환대받을 권리와 환대할 용기」라는 책 제목이 신선해서 기억하게 되었는데, 책 저자가 ‘이라영’ 이더군요. 그녀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혁명이나 미움받을 용기가 아니라 사람 대접받지 못한 사람들의 사람 될 권리를 회복하려는 의도에서 ‘환대받을 권리와 환대할 용기’라는 책을 집필했다고 하네요. 저의 관심사는 책의 내용이 아니라 책 제목이 가져다주는 영감입니다.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그는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을 감방에서 풀어 주기 위함이다.” (이42,3.6) 예수님께서 죽은 라자로를 살리신 것은 그 가족과의 친밀하고 돈독한 관계에서 그들의 슬픔과 고통을 함께 나누려는 자비와 사랑의 행위였습니다. 무슨 칭찬이나 대접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사랑하는 마음의 발로였습니다. 그래서 그 가족들은 다시 살아난 것에 감사하면서 기쁨과 환희에 넘친 잔치를 베풀었던 것입니다. 기쁨으로 넘친 잔치 가운데 특히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는 것은 비싼 향유보다 더 귀하고 귀하신 주님께 대한 사랑의 표현이자 환대의 표시였던 것입니다. 그녀가 자기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닦음은 그들 가족의 생명의 ‘빛이요 구원이신’ (시27,1참조) 예수님께 대한 애절한 감사와 報恩의 의미를 품고 있다고 봅니다. 어쩌면 예수님은 충분히 ‘환대받을 권리’가 있으며, 마리아는 소극적이고 방어적인 ‘미움받을 용기’를 감내하려는 의도보다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환대할 용기’를 지닌 여성임이 드러납니다.
아니나 다를까 제자들 가운데 유다가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12,5)하고 빈정댑니다. 어쩜 “온 집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였다.” (12,3) 는 표현은 단지 나르드 향유 냄새라기보다는 마리아의 주님께 대한 사랑의 마음 씀씀이와 영혼의 향기였을 것입니다. 이에 반해 유다에게서는 돈 썩는 냄새와 함께 썩어가는 영혼의 냄새가 풍겼지 않았을까 상상해 봅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어떤 냄새를 맡았을 것 같습니까? 예수님께서 평소와 달리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12,7) 하고 옹호합니다. 어떤 누구도 예수님의 장례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자신의 관심사에만 집중하고 연연했으나, 오직 한 사람 마리아만이 그날을 알고 예수님의 장례를 미리 준비했다고 하니 가슴이 미어집니다. 만일 사랑하는 부모나 자녀가 엿새 후에 죽는다는 것을 감지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때론 우리에게도 사랑의 거룩한 낭비도 필요합니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아낌없이 내주는 것 곧 사랑의 낭비임을 마리아는 알고 실천한 것입니다. 사실 라자로를 다시 살리신 일로 믿는 사람이 늘어났고 적대자들이 호시탐탐 노리던 그날이 이미 임박했음을 감지한 예수님은 마리아의 행위를 바로 당신의 장례를 준비하는 것으로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 않을 것이다.” (12,8) 하고 그 의미를 부여하신 것입니다. 성주간 동안, 또 사랑의 분별 차원에서 지금 우리의 사랑을 먼저 우선해서 받아야 할 분은 예수님입니다. 살아있는 사람은 다음에 사랑하면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말을 아전인수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예수님의 의도를 곡해하는 것이며, 이를 빙자해서 이웃을 돌보는 일을 미루어서는 아니 됩니다.
“주님, 비싼 나르드 향유를 당신 발에 붓지는 못하지만, 당신의 장례를 애통해하고 슬퍼하는 저희 마음을 받아 주십시오. 아멘.”
왜 자비로운 사람에게만 은총을 주시는가?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전능하신 능력자 하느님으로 등장하십니다. 예수님은 방금 죽은 라자로를 살리셨습니다. 라자로의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께 수천만 원에 해당하는 향유를 발에 붓고 머리를 닦습니다. 가리옷 유다는 그걸 가난한 자에게 주면 더 좋았을 것이라 말합니다. 그러나 부모에게 아끼는 사람이 형제를 사랑할 수 있을까요? 부모 때문에 형제를 사랑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에겐 은총입니다. 은총을 주시는데 전혀 반응이 없다면 그분도 더는 바보가 되려 하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자비를 입으려면 먼저 자비로워야 합니다. 그 순서도 있습니다. 하느님, 부모, 형제, 이웃들입니다.
SBS TV 동물농장, 애니멀봐에서 같은 날 태어난 풍산개 남매가 서로 밥 먹을 때만 싸우는 내용이 나왔습니다. 평소에는 매우 친하지만, 밥만 나오면 유독 오빠 개는 자기 먹을 것은 먹지도 않으면서 동생 개가 밥을 먹지 못하고 뭅니다. 전문가들은 이것이 서열 정리라고 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주인이라면 형제에게 자비롭지 못한 개에게 밥을 더 주겠습니까? 주인은 그 오빠 개를 묶어놓고 동생 개에게만 음식을 편히 먹을 수 있도록 줍니다. 그다음에 오빠 개도 주기는 합니다. 음식은 주는 일은 자비입니다. 자비로운 사람은 자기가 음식을 주는 대상도 자비롭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대상에게 자기가 자비를 행하는 것이 아니라 강탈당하는 느낌을 받기 때문입니다. 하느님도 마찬가지이십니다.
어린이를 사랑하여 ‘어린이날’을 제정한 아동 문학가 소파 방정환 선생의 일화입니다. 어느 날 밤, 방정환 선생의 집에 강도가 들었습니다. 칼을 든 강도를 만난 선생은 차분히 말했습니다. “돈이 필요하면 그냥 달라고 하면 되지, 무슨 칼까지 들이대고 그러시오. 돈이 필요하다면 내가 주겠소.”
너무도 부드럽고 친절한 방정환 선생의 말에 강도가 더 당황했습니다. 선생이 준 뭉칫돈을 주섬주섬 챙겨 나가려 하는 강도에게 방정환 선생이 다시 말했습니다. “이보시오. 달라고 해서 줬으면 고맙다는 인사는 해야 하지 않소.” “고... 고맙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근처를 지나가던 경찰에게 강도가 붙잡힌 것입니다. 방정환 선생 집으로 들어온 경찰과 강도를 본 선생은 태연하게 말했습니다.
“허허. 또 오셨네! 방금 준 돈을 벌써 다 쓰셨단 말이오.” 그러자 경찰이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이 자가 여기서 강도질을 했다고 자백했습니다.” 경찰의 말을 들은 방정환 선생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사람은 강도가 아닙니다. 사정이 딱한 것 같아 내가 그에게 돈을 주었습니다. 내가 준 돈을 받고 고맙다고 인사까지 한 사람인데, 어떻게 저자가 강도입니까.”
방정환 선생의 말에 경찰은 의아했지만 어쩔 수 없이 강도를 풀어주었습니다. 경찰이 가고 나서 강도는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빌었습니다. “제가 정말 잘못했습니다. 앞으로는 절대 나쁜 짓을 하지 않겠습니다.”
소파 방정환 선생은 강도에게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를 받아내려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강도가 되기 때문입니다. 감사하면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우리에게 억지로라도 선악과, 혹은 십일조, 혹은 작은 감사의 기도라도 받으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은총으로 악해지기를 원치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자비로운 사람만이 자비를 입습니다.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다."
함승수 신부님
베타니아에서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벌어집니다. 요한 복음사가는 그 잔치가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무엇을 위한 것인지를 밝히고 있지 않지만, 마리아가 예수님께 하는 행동을 통해 간접적으로 그 잔치의 의미가 무엇인지가 드러나게 됩니다. 하지만 그 잔치에 참여한 마을 사람들은 그 숨은 의미까지는 알지 못했을 겁니다. 그저 예수님 덕분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라자로를 축하하기 위한 잔치 정도로 생각했겠지요.
잔치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어갈 무렵, 마리아는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립니다. 순 나르드 향유는 삼백 데나리온, 오늘날 우리 화폐 가치로 약 3천만원에 달하는 고가의 물품입니다. 그 귀한걸 예수님 발에 아낌없이 쏟아붓는 모습을 못마땅하게 여긴 유다 이스카리옷이 왜 그 비싼 향유를 가난한 이들을 구제하는 더 가치있는 일에 사용하지 않고 그런 식으로 ‘낭비’하느냐고 마리아에게 핀잔을 주지요.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이 가난한 이들을 그만큼 많이 생각하는 의로운 사람임을 드러내려고 했겠지만, 그 진짜 의도는 다른 데에 있었습니다. 마리아가 그 향유를 온전한 상태로 예수님께 드리면 그것을 처분하여 자기 주머니를 채울 속셈이었던 겁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결코 비싼 향유를 그냥 ‘낭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께 대한 존경과 사랑, 자기 오빠를 살려주신데 대한 감사의 마음을 담아 자신이 가진 가장 귀한 것을 기꺼이 ‘봉헌’한 것이었지요. 또한 온 백성을 구원하시려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따라 수난당하시고 죽으시기 위해 비장한 각오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려는 예수님의 마지막 길을 배웅해드리기 위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머리에 기름을 붓는 것은 왕을 추대하거나 중요한 임무를 맡은 사람을 파견하는 의미가 있다면, 발에 기름을 붓는 것은 시신에 향유를 발라 ‘염’을 하는, 즉 장례를 치르는 의미가 있기에, 마리아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죽음이 임박한 예수님의 장례를 먼저 치뤄드리려 했던 겁니다. 소중한 사람의 마지막 순간을 기념하고 간직하기 위한 중요한 ‘의식’이었으니 돈이 얼마가 드는지는 중요하지 않았지요. 마리아는 더 비싼 것이었다고 해도 기꺼이 바쳤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마리아의 깊고 순수한 사랑이 죽음을 앞두고 마음이 심란해졌던 주님께 더할 나위 없이 큰 위로와 힘이 되었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이것저것 재거나 계산하지 않고 아낌없이 주님께 대한 사랑을 적극적으로 표현합니다. 효율성과 경제성이라는 세상의 가치에 휘둘리지 않고, 주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라면 고통과 시련, 손해와 희생까지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사랑은 숫자로 판단할 수 있는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자기가 사랑하는 이를 위해 자기 자신까지 내어주는 희생과 헌신으로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성주간을 지내고 있는 지금 나는 어떤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고 있는지 돌아봐야겠습니다. 유다처럼 돈과 효율을 먼저 따지며 주님을 앞세워 제 몫을 챙길 생각만 하는지, 아니면 마리아처럼 주님과 그분 뜻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며 그분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할 각오로 사는지. 우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습니다. 유다처럼 재물 먼저 챙기면 주님을 잃게될 것이고, 마리아처럼 주님을 먼저 챙기면 그분을 통해 ‘전부’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송진욱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은 성주간의 월요일입니다. 성주간이 주는 큰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부활에 있습니다. 부활이 있으려면 먼저 죽어야 합니다. 죽지 않으면 부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주간에 우리는 예수님의 수난을 보고 또 십자가의 희생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 예수님의 수난과 고통 그리고 죽음이 마냥 슬픈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기쁜 마음으로 수난을 받았습니다. 물론 육체적으로 아프셨겠지요.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죽음까지도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희생을 통해서 우리가 앞으로 받을 부활에 대해 그리고 그 후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궁금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 복음에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의 수난을 통해서 우리는 삶의 희망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 희망은 바로 부활입니다. 복음에서 라자로는 세상에서 마지막 날 부활을 할 자녀들을 대표합니다. 그리고 잔치는 종말의 어린양의 혼인 잔치라고 보시면 맞습니다. 그리고 라자로는 예수님 곁에서 잔치에 참여를 합니다. 바로 우리가 부활 후 맞이할 찬치를 미리 예수님께서는 보여주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악한 세상에서 살아가야 할 희망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여기에서 질문이 있겠지요. 예수님의 혼인 잔치에 참석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 혼인 잔치에 참석하기 위해 할 일은 마리아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먼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었습니다. 그리고 머리카락으로 닦아 드렸습니다. 발을 닦아 드린다는 것은 스스로 낮추고 자신은 종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는 마리아처럼 주님 앞에 스스로 낮추고 종임을 겸손하게 고백해야 합니다. 바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지요. 이 마음으로 우리는 부활을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사순절, 그리고 성주간을 지내는 것이 마냥 슬픈 것만은 아니라고 저는 말하고 싶습니다. 이 기간은 저에게 있어 기쁨이요. 그리고 새로운 희망의 시작임을 예수님을 통해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이 성주간이 어떤 의미로 다가오십니까. 아멘!
예수님을 위한 잔치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라자로와 그 동생 마르타와 마리아의 집에 예수님이 방문가셨습니다.
오빠 라자로를 되살리신 예수님을 초대해 잔치를 여는 참이었습니다.
마리아는 나르드 향유를 가져다 예수님 발에 바르고 닦아드렸습니다.
방에는 향유 냄새로 비싼 향유라서 주변 사람들 말도 많았나 봅니다.
예수님보다 죽었는데 부활한 라자로를 보고 믿는 사람들도 많았겠죠.
그러나 수석 사제들은 예수님과 함께 라자로도 죽여야한다고 그랬죠.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과 부활이 가능하다는 걸 예고해주셨던 겁니다.
부활한 라자로 때문이 아니더라도 예수님이 뉘신지 우리는 믿읍시다.
가톨릭알림 말: 죽음과 부활을 신앙으로 믿는 사람들 하늘가족입니다.
다시 피어난 꽃
배우석 리노 신부님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모르겠다.” 알베르 카뮈의 소설 『이방인』의 첫 문장입니다. 짙은 색으로 칠해진 세상은 나이가 들면서 점점 물 빠진 수채화 같은 무미건조함으로, 생생했던 초침은 점차 분간할 수 없는 부조리극처럼 우리에게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십사 년 전, 어머니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가 쓰러지셨다는 소식을 들은 뒤 밤을 꼬박 새우고 뒤늦게 휴가를 얻어 도착한 병원에서 저는 평안하지 않은, 하지만 평온한 기계음 소리를 들었습니다. 곧 어머니의 장례식을 준비해야 했고 그렇게 저는 공간을 가득 채우지 못한 꽃송이들을 제 가슴 한구석에 묻었습니다. 오늘 복음 속 예수님의 발을 향유로 닦는 마리아의 모습에 가만히 머물러봅니다. 가난한 이들과 부유한 이들, 여전히 전쟁으로 신음하는 사람들, 단 한 번도 온전한 평화가 없던 부조리 가득한 세상 안에서 하느님의 존재에 대해 질문합니다. 어쩌면 우리의 삶은 부조리 위에 새긴 발자국 같은 것입니다. 흔들리며 피지 않은 꽃이 없듯, 우리는 흔들리고 또 흔들리며 살아갈 것입니다. 하느님과 인간, 존재와 비존재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결국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하나로 이어지는 그 순간을 체험할 것입니다. 피지 않았던 꽃이 어느새 만개하여 우리 삶을 달래주는 눈부신 빛으로 존재하고 있는 순간을 보게 될 것입니다.
심흥보 베드로 신부님
오늘 라자로의 식구들을 생각합니다. 복음서 곳곳에 나타나는 이 식구들의 이름들이 다 한 사람을 가리키거나 꼭 들어맞는 것은 아니지만, 라자로는 나병환자 내지는 훗날 나병환자를 돌보는 수도회의 이름이 됩니다. 그런가 하면 예수님의 비유에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루카 16) 라고도 나옵니다. 그런데 그런 라자로가 죽자 사람들은 차라리 죽는 것도 좋겠다고 여겼는지 모르지만, 예수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요한 11,35)시며,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요한 11,43) 라시며 그를 다시 살려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손님을 초대해 놓고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 동생 마리아를 탓하는 마르타에게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카 10,41-42) 라고 하시면서 정작 손님대접이 먹는 것을 만들어 주는 것만이 아니라고, 예수님이 원하는 만남이 무엇인지 일깨워주십니다. 그리고 한 많은 인생을 뒤로 하고 떠난 오빠를 그리워하며,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요한 11,21.24) 라고 애통해하는 마르타에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요한 11,25-26) 라고 가르쳐주시며 오빠를 다시 살려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저 사람이 예언자라면, 자기에게 손을 대는 여자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 곧 죄인인 줄 알 터인데.’(루카 7,39) 라며 사람들로부터 죄인으로 비난받던 마리아를, 어쩌면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혀 사람들에게 끌려온 여인(요한 8,4)에게처럼 자비를 베푸시어 죄를 용서해 주시고 자기 곁에 있도록 허락하십니다.
그래서 그런지 오늘 복음에서 라자로의 식구들은 자신들에게 베풀어주신 주님의 사랑에 크게 감동하여 예수님을 초대하여 잔치를 베풉니다. 나름대로 자신들의 온 정성을 다 기울여 예수님을 접대하고자 합니다. 심지어 마리아는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립니다.(요한 12,3; 마태 26,6-13; 루카 7,37)
우리가 오늘 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사랑이 얼마나 크고 좋은 것인지 잘 안다면, 주 예수님께서 나를 살리기 위해 십자가에서 생명을 내주셨다는 것을 피부로 가슴 깊이 느낀다면, 주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올려드리고 주 하느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맡기신 우리 주변의 형제자매들에게 관심과 애정을 나누며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할 것입니다.
직업적 판단은 진실과 반대 입장이 되기도 한다.<요한 12/1-12> 3/25.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누구나 자기 전문적 지식을 지니고 살면서 어떤일에 전문가가 되지만 자기 일에 모든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일에 한 부분일 뿐입니다. 영적 전문가가 모든 일의 전체적 해결사가 되지못합니다. 다만 영적 관점이지 우리는 자기 지식의 범위 안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합니다. 경제학자가 정치의 모든 것을 판단하고 해결하는 것이 아니고 과학자가 인류의 모든 법질서를 바로 알아내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전문가는 자기 전문지식을 가지고 대화의장에 나와서 진실을 토론하거나 검색해야 합니다. 요사이는 주된 메스컴의 소식보다 한 부분의 전문적 지식인의 유티브를 통해 세상의 돌아가는 사정을 알려고 하지만 그앎이 전부가 진실이 아닙니다.
엣말에 부엌에서 메누리 말을 들으면 메누리 말이 옳고 안방에서 산랑말을 들으면 그말도 맞는다고 합니다. 야당 말들으면 그말도 맞지만 여야가 하나되어 하는밀을 듣고 종합적 판단이 있어야 합니다. 나라드는 소문이나 역사를 편견으로 해석하는 사람들 말을 듣고 따라가면 알지못하는 길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는 선동이나 편견에 쉽게 넘어갑니다. 책을 보거나 심지어 성격을 보면서 성서전문가라 해서 늘 진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보통은 편견에 솔리게 됩니다. 성서박사가 한부분에 관하여 전문적 지식을 논문으로 연구발표로 된 것이지 성격을 전부를 알고 깨우쳐서가 아닙니다. 주님이 많은진실을 비유로 설면하신 이유는 참고하여 알아듣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어떤 이야기를 하면서 예를 드는 것은 절음바리입니다.
그러나 한번 내어 놓은 말을 역사는 여러 각도에서 보고 느끼며 올마른 판단이 나와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선행에 자기방식대로 판단하면 오류가 나옵니다. 오늘 복음에 사도들의 돈주머니를 관리하는 유다스는 사랑과 즌경의 자세로 주님을 대하는 모습을 돈을 낭비 한다고 걱정하며 말하는 것에 주님은 여인의 행위를 주님의 장례식까지 걱정하는 것이라 말씀하시며 정당성을 이야기 하십니다. 이같이 어떤 일이 다른 일에 어긋나는 일이 있어도 그 일이 다른 일에 적합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행위를 내 편에서만 자기 생각대로만 보고 판단하여 서로 상처를 받고 주는 경위를 벗어나 진실과 사랑이 살아남도록 살아야 합니다. 자기생각에 노에가 되고 자기 판단에 매어 살면 우리는 사랑이 불가능해 집니다.
자기를 알고 남을 판단하는 너그러움과 긍정적 사고와 다른 이의 행위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 때 모든 이의 모든 이가 되어 서로 불편 없이 이해와 도움을 주며 살게 됩니다.
나의 행위가 모든 이에게 행복 기쁨이 되도록 살기를 기도합니다.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요한 12, 7)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이
향유처럼
우리에게
쏟아져내립니다.
향유는
사랑을 깊이
체험한
사람들의
이름처럼 더욱
향기롭습니다.
향기가 지나가듯
예수님께서도
수난의 이 여정을
떠나시려 하십니다.
붙잡을 수 없는
사랑의 여정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향기는
마음의
향기입니다.
사람만이
간직해야할
마음의 향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 어떤 것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우리의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으로 가는
세상을
만드시는 것이
아니라 생명으로
가는 세상을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더 무겁고
더 무서운 것은
우리들의
무관심입니다.
생명의 문이
환하게 활짝
열리는 길을
알려주시는
주님을 통해
우리가
간직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뜨겁게
깨닫습니다.
사랑이 사라지면
향기도 사라집니다.
삶이 그냥
삶이 아니듯
사랑이 그냥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아름답고
소중하고
향기로운 것은
간직해야 할
이유를
일깨워줍니다.
하느님의 것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따라야 할
삶이 있고
사랑이
있습니다.
사랑이 밀고
당기며 우리를
여기까지
이끌어 왔습니다.
이 성주간이
하느님 사랑에
감사하는
성주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깊이 간직하신
사랑이
십자가의 수난과
십자가의 부활로
드러나는
은총의 향기입니다.
향기와 사랑으로
깊어지는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언어 박탈 실험’이 과거에 있었습니다. 7세기경 이집트의 파라오 프삼티크 황제는 어떤 언어에도 노출되지 않은 아기가 내뱉는 말이 최초의 언어일 것이라면서, 갓난아기 둘을 산속 오두막에 가두어 키운 것입니다. 모든 언어로부터 고립된 채 자란 아기가 처음 내뱉은 말은 ‘베코스’였다고 합니다. 이는 당시 프리기아어로 ‘빵’을 뜻합니다. 그래서 프삼티크 황제는 프리기아어가 최초의 언어라고 발표했습니다.
솔직히 말이 안 되는 실험이었습니다. 사회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아기를 전혀 존중하지 않은 끔찍한 실험이었지요. 그리고 두 아기라는 표본만으로 최초의 언어가 프리기아어라고 주장하는 것도 너무 근거 없습니다. 그로부터 거의 500년 뒤,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 역시 비슷한 실험을 했습니다. 단, 이번에는 아주 많은 갓난아기를 한 방에 가둬서 키웠지요. 마찬가지로 모든 언어와도 접촉하지 못하게 하면서, 보모와 간호사들이 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으로 아기들을 돌보게 했습니다. 황제는 아기들의 첫 언어가 구약성경이 쓰인 히브리어일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그러나 이 아이들은 모두 죽고 말았습니다. 사람은 사회로부터 분리되면 살 수 없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사실 첫 번째 언어를 찾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함께 사는 방법을 찾는 방법이 더 중요했습니다. 함께 잘 사는 것이 하느님 창조 사업에 부합한 모습이며, 생명을 지키면서 하느님의 뜻을 세상에 펼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세상을 보면, ‘함께’ 보다 ‘나’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세상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끔찍한 말과 행동을 하는 사람도 늘어납니다. 함께해야 사랑할 수 있으며, 이 사랑의 세상이 될 때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은 세상이 될 수 있습니다.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립니다. 최고 존경의 표시입니다. 예수님 사랑에 감사하면서 존경과 사랑을 담아서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하고자 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 이스카리옷입니다. 그는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300일치 노동자 품삯으로 현재 약 3,000만 원의 가치)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라면서 자기 혼자 옳은 것처럼 말합니다. 그런데 유다는 예수님을 은전 30냥에 팝니다. 이 액수는 당시 노예의 가격으로, 노동자 120일치 품삯에 해당합니다. 예수님을 노예 취급하고 있으니, 이런 말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자기의 생각만을 옳다고 생각했기에 주님을 팔아넘기는 큰 죄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마음을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과 과연 ‘함께’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을까요? 주님께 사랑과 존경을 드리는 마음을 가지고 있을까요? 주님과 함께해야 진정한 기쁨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자신의 생각을 바꾸고 세상을 바꿔라(노먼 빈센트 필).
오늘 우리가 주님께 드리는 봉헌은 과연 어떤 것입니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베타니아는 예수님께 아주 친밀하고 각별한 장소였습니다. 그곳에는 예수님의 절친 라자로와 마르타, 마리아의 집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인간인지라 이런저런 스트레스에 시달릴 때가 있었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과의 힘겨운 신경전을 치를 때면 더욱 그랬습니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 즐겨 찾으셨던 곳이 베타니아였습니다. 라자로와 마르타, 마리아의 집은 예수님께 일종의 편안한 쉼터 내지는 포근한 오아시스 같은 곳이었습니다. 아마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밤늦도록 포도주 잔을 기울이며 회포를 푸셨을 것입니다.
특히 라자로와 마르타와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방문하실 때마다 지극정성을 환대하였고, 예수님께서 세상 편안히 쉬실 수 있도록 극진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을 것입니다.
항상 예수님을 환대하고 그분의 쉼터가 되어 드린 라자로와 마르타, 마리아의 모습을 바라보며, 제 개인적으로 큰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언제나 주님께 이것 해주세요. 저것 해주세요. 집요하게 졸라대기만 했던 모습이 부끄러웠습니다. 틈만 나면 주님, 어떻게 제게 이러실 수 있냐며, 따지고 대들기만 했던 지난 시절이 송구스러웠습니다.
앞으로는 라자로와 마르타, 마리아처럼 주님께서 제 집, 곧 제 영혼의 집에 오셔서 편히 머무쉬고 쉬실 수 있는 안식처가 되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주님을 기쁘게 내 집에 영접하고 환대하고 배려해드릴 수 있도록 몸과 마음의 준비를 아끼지 말아야겠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변장하고 찾아오시는 주님이신, 가난하고 고통당하는 이웃을 기꺼이 환영하고 배려해야겠습니다.
수난의 때를 목전에 두신 예수님께서는 결전의 장소인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기 전, 절친 라자로와 마르타, 마리아의 집을 마지막으로 방문하십니다.
그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극진히 사랑하고 존경했던 마리아는 여성 특유의 섬세함과 민감함으로 한 가지 사실을 직감하고 있었습니다. 이번 방문이 지상에서 맞이하는 마지막 예수님의 방문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세 남매는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해 예수님을 위한 송별 만찬을 준비했습니다. 식사가 무르익어 가고 있던 어느 순간, 마리아는 자신이 지니고 있던 것 중에서 가장 소중하고 값진 물건인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왔습니다.
마리아는 그 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왕창 부었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긴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정성껏 닦아드렸습니다.
마리아가 가져왔던 향유가 얼마나 값나가는 것이었던지, 배반자 유다 이스카리옷은 탄식을 터트리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니라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지 않는가?”
예수님을 향한 마리아의 사심 없는 사랑과 철저하게도 세속적인 유다 이스카리옷의 음흉한 마음이 극단적으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과연 어느 쪽 인물에 더 가까이 서 있는지 돌아볼 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께 드리는 봉헌은 과연 어떤 것입니까?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들이실 정성이 담긴 예물입니까? 그저 마지 못해, 아까워하면서 툭 던져버리는 영혼 없는 봉헌입니까?
부모에게 아끼는 자녀가 형제에게 아끼지 않을까?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영화 ‘라이언 킹’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무파사는 프라이드 랜드의 왕으로, 아들 심바와 함께 평화롭게 지내고 있습니다. 어린 심바는 세상을 발견하며 성장하고 있고, 아버지 무파사는 그에게 왕의 역할과 책임에 대해 가르칩니다. 하지만, 무파사의 동생 스카는 왕위를 탐내며 음모를 꾸미게 됩니다. 스카는 하이에나들과 결탁하여 무파사를 살해하고, 심바를 쫓아내어 왕위를 차지합니다. 심바는 삼촌 스카가 아버지를 살해한 것을 알지 못하고 삼촌 스카의 말대로 자신 때문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생각하여 프라이드 랜드를 떠납니다. 스카는 심바까지 죽이려고 했지만 실패합니다.
심바는 목숨을 건진 덕분에 멀리 떨어진 곳에서 새로운 친구 품바와 티몬을 만나게 됩니다. 그들과 함께 성장하며, ‘하쿠나 마타타’라는 철학에 따라 걱정 없이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성장한 심바는 운명적으로 그의 과거와 마주하게 되고 어린 시절의 친구 나라를 만납니다. 나라는 프라이드 랜드의 현재 상황을 알려주며, 심바에게 왕의 자리에 서야 한다고 호소합니다. 스카가 하이에나와 결탁하여 프라이드 랜드가 황폐해졌기 때문에 모두가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심바는 처음에는 자신의 과거를 회피하려 하지만, 무파사의 영혼과의 만남을 통해 용기를 얻게 됩니다. 아버지의 뜻을 물려받기로 한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죄책감과 삼촌, 그리고 하이에나들과 대결을 해야 합니다. 결국 심바는 나라, 품바, 티몬과 함께 프라이드 랜드로 돌아와 스카와 전투를 벌입니다. 스카는 패배하고, 심바는 왕의 자리에 다시 오르게 됩니다. 영화는 새로운 왕실의 탄생과 함께 평화롭게 회복된 프라이드 랜드를 보여주며 끝납니다.
심바가 프라이드 랜드의 형제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아버지의 뜻에 자신을 바치는 것입니다. 자신이 아버지를 죽였다는 부끄러움도 무릅써야 하고 목숨까지 내어 놓아야 합니다. 하지만 결국 아버지께 대한 효성이 자기 친구들에게 행복을 주는 길이었습니다. 만약 아버지의 뜻에 자기를 바치지 않았다면 그의 친구는 품바와 티몬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게 되는 길은 부모를 먼저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그 대상에게 자신을 봉헌합니다. 부모의 뜻에 자신을 봉헌하지 않는 사람은 형제들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타니아의 마리아는 예수님께 300데나리온이나 되는 향유를 발라 드립니다. 2~3천만 원 상당의 상당히 고가인 향유입니다. 이것을 본 유다 이스카리옷이 말합니다.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
예수님께 아끼는 자가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을까요? 이 때문에 요한은 이렇게 주석을 답니다.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도둑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돈주머니를 맡고 있으면서 거기에 든 돈을 가로채곤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봉헌하는 의미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성경에서는 베타니아의 마리아와 막달라의 마리아가 다른 인물처럼 나오지만,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 책에는 동일 인물로 나옵니다. 곧 마지막까지 예수님의 무덤을 지키다 예수님의 부활을 처음으로 목격한 여인이 된 것입니다. 봉헌이 곧 사랑입니다. 얼마만큼 줄 수 있느냐가 그 대상에 대한 사랑의 정도로 여겨질 수밖에 없습니다.
부모에게 아끼는 자녀는 당연히 형제들에게도 아낄 수밖에 없습니다. 형제는 부모에 대한 사랑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부모를 사랑하지 않으면 형제의 의미도 사라집니다. 따라서 부모에게 아끼지 않는 자녀가 형제 간에도 아끼지 않습니다. 결국 그리스도께 봉헌함이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시작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스카리옷 유다처럼 예수님에게까지 질투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부모에게 아끼는 사람은 형제에게도 아낍니다. 하느님께 아끼는 사람은 그분의 모든 피조물에도 아낄 수밖에 없고 그래서 어떤 피조물에게도 좋은 일을 하지 못하고 어떤 피조물에게도 사랑 받지 못합니다. 하느님께 아끼는 사람은 누구에게도 사랑 받을 수 없는 길로 가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세상 모든 것을 사랑하기 위해 세상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느님께 아끼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미주가톨릭평화신문에서 주관하는 ‘줌으로 하는 신앙 특강’이 있습니다. 지난 3월 12일에는 김희중 히지노 대주교님의 강의가 있었습니다. 주교님의 강의는 미주지역의 교우들에게 영적인 갈증을 풀어주는 ‘단비’와 같았습니다. 주교님께서는 예정된 시간을 넘어서 강의를 해 주셨고, 교우들의 질문에도 자상하게 답변해 주셨습니다. 주교님은 ‘숨’으로 강의를 시작하였습니다. 숨이 고르면 건강하지만 숨이 차거나, 불규칙하면 건강에 이상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마침내 숨이 멎으면 세상을 떠난다고 하였습니다. 흙에서 온 사람이 생명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께서 ‘숨’을 넣어 주셨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숨에 의지하면, 하느님의 숨과 함께하면 세상의 유혹을 이겨낼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집트에서 종살이 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고통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불러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이끌도록 하셨습니다. 모세가 하느님의 이름을 물으니 하느님께서는 ‘나는 있는 나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나는 너희와 함께 있겠다.’라고 하셨습니다. 모세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심을 믿고 파라오에게 하느님의 뜻을 전하였습니다.
‘임마누엘’은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인이 아이를 가질 것인데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사야 예언자의 예언은 마리아의 잉태로 현실이 되었고,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셨습니다. 강아지를 사랑한다고 강아지가 되려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몸소 사람이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와서 보아라.’라고 하셨습니다. 첫 번째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머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보았던 제자들은 다른 제자들을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예수님의 공생활은 제자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활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활은 이방인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활은 죄인들과 함께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둘이나 셋이서 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나도 함께 있겠다고 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세상 끝까지 함께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두려움 없이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사제는 미사 때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라고 인도합니다. 그러면 교우들은 ‘또한 사제의 영과 함께’라고 응답합니다. 미사는 주님께서 함께 하는 제사입니다. 미사는 주님께서 함께 하는 축제입니다. 물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베드로 사도는 ‘주님 나도 걷게 해 주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렇게 하여라.’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었던 베드로 사도는 물 위를 걸었습니다. 그러나 두려움 때문에 주님을 바라보지 못했던 베드로 사도는 이내 물속으로 빠졌습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지 못하면 우리들 역시 유혹의 바다에 빠지게 됩니다. 욕망의 바다에 빠지게 됩니다. 두려움의 바다에 빠지게 됩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부르자, 베드로가 주님만을 바라보자 주님께서는 물속에 빠진 베드로를 구해 주셨습니다. 빛이 9개 있고, 어둠이 1개 있을 때 어둠만을 바라보면 빛에 있음을 알지 못합니다. 어둠이 9개 있고, 빛이 1개 있을 때라도 빛을 바라보면 능이 어둠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주님만을 바라보며, 주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는다면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어둠은 주님께로 가까이 가는 디딤돌이 될 것입니다. 빛은 생명에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심을 강하게 느끼기 위해서는 3가지가 필요합니다. 첫째는 ‘기도’입니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대화입니다. 대화는 독백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동전을 넣으면 커피가 나오는 자판기가 아닙니다. 하느님은 내가 원하는 것은 모두 들어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어린아이가 ‘독’을 만지려고 하면 어머니는 못 만지게 합니다. 아이가 독에 감염되어서 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가 예방주사가 무서워서 맞지 않으려고 하여도 어머니는 아이를 달래서 예방주사를 맞게 합니다. 이처럼 기도는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하여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청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성사생활’입니다. 고백성사를 보기 전에 미리 죄를 성찰하고,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도록 굳게 다짐하며 고백성사를 보면 좋습니다. 미사에 참례하기 전에 그날의 독서와 복음을 묵상하면 좋습니다. 미사 시간 전에 미리 성당에 와서 성체조배를 하면 좋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은총을 성사를 통해서 드러내 보이셨으니, 성사 생활에 충실한 사람은 하느님의 은총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느끼는 사람은 범사에 감사하게 됩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기쁨이 넘쳐납니다. 감사와 기쁨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셋째는 ‘성경읽기’입니다. 하느님 구원의 역사는 성서에 있습니다. 성서를 읽고, 쓰는 것은 신앙생활에 큰 도움이 됩니다. 자동차는 기름이 있어야 움직일 수 있습니다. 성서읽기는 내 신앙의 여정에 기름을 채우는 것입니다.
주교님께서는 강의를 마치면서 로마의 카타콤베(지하묘지)에 있는 벽화를 보여주었습니다. 원래 묘지는 죽은 자들의 도시로 불렀는데 신앙인들은 묘지를 천국으로 가기 위해서 머무는 곳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벽화들에는 순교자들의 뜨거운 신앙이 있었고, 그 벽화들에는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에로 나아간다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믿음과 희망은 사랑으로 열매 맺는다고 했습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우리의 신앙이 사랑으로 열매를 맺도록 신앙생활에 충실하기를 당부하였습니다. 오늘 독서의 말씀은 마치 주교님께 하는 말씀과 같았습니다.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이, 내가 선택한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그는 민족들에게 공정을 펴리라.”
<두 사람>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목숨마저
스스로 바치러
먼 길 떠나는
이 땅에서
가장 가난한
사랑하는 벗과
헤어져야하는
가슴 미어지는
고통스러운 순간에
한 사람은
모든 것을 바쳐
함께 가난하게 되었고
다른 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들을 들먹이며
가난한 벗들을 모욕했다네
향기나는 가정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봄의 향기는 생명의 향기이다. 흙내음, 꽃향기가 어울어져 좋은 기운을 갖게한다. 실개천 흐르는 물소리, 골짜기에서 불어대는 청정한 산바람 소리, 둥지에 알을 품고 분주해진 새소리, 새 생명 터지며 그려낸 연두색 산 나무의 향연이 어우러져 향기를 낸다.
가난한 가정에서 순수한 마음, 하느님 마음을 한 가족들의 향기를 맡는다. 방안 가득 좋은 기운의 향기로 넘쳐난 마리아의 가정이다. 많은 손님들을 초대하고 예수님과 함께 잔치를 벌렸다. 이는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가정에 베풀어 주신 은혜에 대한 보답이다. 마리아는 가장 비싼 나르드 향유를 꺼내와 예수님의 발에 붓고 머리카락으로 닦아드렸다. 이는 최대의 예의였다.
사랑받고 사랑드리고 이는 마리아의 가정이 지극한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보답이다. 집 안에서 보관했던 전재산 같은 그 향유를 가지고 나와 예수님께 베풀었다. 죽음에서 살려준 생명의 보답이고, 은혜갚품이 잔치였다. 죽었던 자들, 생명이 다시 소생되고 부활을 맛본다. 부활을 예견한 축제가 향유를 예수님께 발라드린 행동에서 부활이 시작된다. 가난한 사람들이 마련한 향연은 예수님이 감동하고 축제는 부활이 될 것이다.
이스카리웃 유다, 가난한 자들을 엄청나게 생각하고 배려하는 것처럼 평소의 사랑이 많은 사람으로 행동한다. 그러나 근본부터 부패한 냄새가 난다. 살아가며 그의 머리 속에 산수적 계산이 바빠지며 돈 돈 돈 한다. 방안 가득 채운 것은 머리 누일 장소도 없이 재물로 가득찬다. 썩은 부패한 냄새만이 집 안에 가득하다.
냄새가 난다. 봄의 향연에서 향기가 가득차 좋은 기운을 갖게하는 냄세이다. 마리아에서 맡을 수 있는 냄새는 예수님께 드리는 순 나르드 향유의 향기이다. 이런 가족들이 모인 가정이면 좋겠습니다. 봄내음, 꽃내음 어우러진 봄의 생명들, 모두 죽음에서 생명이 되어 예수님께 드린 봄 향기, 부활 날 각 가정에서 부활의 향기가 가득 찼으면 한다.
이스카리웃 유다, 냄새가 난다. 썩은 냄새, 골아 버려 악취가 난다. 산수적 계산이 가정을 물욕으로 가득 채운다. 부활 때, 물질적 재산은 모두 다 부패되고 생명은 죽음 되고 평생 후회할 것이다.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도둑이었기 때문이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파스카 축제 엿새 전에 베타니아로 가셔서 잔치에 함께하셨습니다. 거기에서 마리아가 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리자 유다 이스카리옷이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도둑이었기 때문이라고 복음은 전합니다. 그는 돈주머니를 맡고 있으면서 거기에 든 돈을 가로채곤 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유다의 말만 들으면 유다는 정말 가난한 이들을 위한 배려를 많이 하는 사람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서 잘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은 그 당시 그 순간에 마리아가 누구의 발을 닦아 드리는가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 드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살아가면서도 자칫 잘못하면 그저 인간적으로 내가 무엇을 열심히 잘하는 것에 초점을 맞출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봉사를 열심히 하고, 내가 나눔을 열심히 하고, 내가 기도를 열심히 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히려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 것은 주님이 도와주시고, 주님이 사랑과 자비를 베풀어 주시고, 주님이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시고 희생하심에 대해서 먼저 깊이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내가 그렇게 주님의 일하심에 초점을 맞추고 주님의 뜻을 따르게 될 때 그때 비로소 구원의 역사는 시작이 됩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도둑이었기 때문이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라자로부활은 예수부활의 예고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수석사제들은 예수님 죽일 때 라자로도 같이 죽여야겠다고 생각했었죠.
오빠를 다시 부활시키신 예수님께 마르타와 마리아는 너무 감사했겠죠.
세상 어떤 보물도 아깝지 않아할 마리아는 향유로 주님 발에 발랐네요.
미래를 잘 아시는 예수님은 자신의 장례에 쓰도록 보관해 놓으라 했죠.
감사잔치에는 예수님과 라자로 이들을 죽이려는 사제들 참 다양했네요.
예수님께 너무 감사해서 벌린 마르타와 마리아에게 동참하고 싶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해야할 세상의 나날들인데 별별 사람들이 많아요.
오늘도 하느님의 말씀보다 잘났다거나 순수한 사람 불만인들 많습니다.
가톨릭알림 말: 삶의 끈을 예수님 뜻에 매고 사는 사람들은 가족입니다.
송진욱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베타니아로 가서 라자로를 만나십니다. 이 라자로는 죽은 자였지만 예수님을 통해서 부활한 이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집에서 예수님을 위한 큰 잔치가 베풀어졌습니다. 이러한 와중에 마리아는 비싼 나르드 향유를 가지고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발을 닦아주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은 성주간 월요일입니다. 그리고 이 주간의 마지막 예수님의 부활을 맞이하게 되지요. 부활절을 맞이하면서 오늘의 복음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먼저 재림의 때 모든 이들이 죽음에서의 부활을 라자로를 통해서 알게 되었고 또 잔치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재림의 때 혼인 잔치를 예표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세상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세상은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 놓습니다. 세상의 안락함, 편안함을 제공하지만 동시에 우리를 무너뜨리는 어둠이지요. 이러한 어두운 세상 속에서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간다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의 행위를 보고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지요.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을 닦아 주었습니다. 이는 스스로 주님의 종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주님의 종임을 고백하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또한 마리아는 주님께 소중한 것을 봉헌하였지요. 이처럼 우리도 소중한 것을 주님께 봉헌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님을 온전히 맞이하는 것입니다. 라자로의 집은 죽음의 냄새, 슬픔이 가득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통해서 이 집은 슬픔에서 기쁨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그리고 향유 냄새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부활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주님께 자신에게 있어서 봉헌할 가장 귀한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 묻고 준비하는 시간을 가져봅시다. 아멘!
이 막시밀리안 수녀님
예수님께서 베타니아의 마르타, 마리아, 라자로의 집에 가셨을 때의 일입니다.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베풀어졌는데, 마르타는 어느때처럼 예수님과 제자들을 잘 대접하려고 분주하게 움직이고 라자로는 손님들과 더불어 식탁에 앉아 음식을 들며 환담을 나누고 있습니다.
그때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드립니다.
그러자 집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게 되지요.
이스카리옷 유다는 바로 향유 값을 환산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는 듯한 발언을 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죠.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발라드리며 어떤 생각을 하였을까요?
그분이 걸어오신 길, 또 앞으로 걸어가실 길을 감지하고 최대의 사랑을 표현하고 싶어한게 아닐까요.
온 존재로 사랑하는 주님께 향유를 발라드리는 마리아에게서 극진한 사랑을 봅니다.
나는 예수님을 위해서 정말 아낌없이 드렸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내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무엇을 주어도 아깝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시간, 예수님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아낌없는 베품. 예수님이 사랑하는 모든 창조물들을 향한 돌봄.
이것저것 재지 않고 주는 것입니다.
사랑이신 그분이 우리를 위해 아낌없이 주셨으니 조금이나마 그분 흉내를 내며 살고 싶습니다.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요한 12,8)
알타반의 말씀사랑
여러분의 소비패턴은
어떠한가요?
전통시장에 가서
콩나물, 두부 등 생필품을 사면서
천원 깎아달라고 하면서
몇 십만원, 몇 백만원 짜리
옷이나 명품, 해외여행 등은
겁내지 않나요?
사람마다 돈을 아끼지 않고
비이성적으로 소비하는
특별한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소위 매니아들이지요.
여러분은 어떤 매니아인가요?
우리 그리스도인은
예수님께 투자하는
돈이나 시간을 아까워하지 않는
예수 매니아들이 아닐까요?
남들이 보면 미쳤다고 할 정도로
사이비 종교에 빠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은 사실 당신 매니아가 되라기
하시지 않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매니아가 되라고
하십니다.
가난한 사람을 보고 만날 때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보고 만나는
것이니까요.
그러니 가난한 사람에 대한 투자를
아깝지 않게 여기고 살아가는 것이
사비이가 아닌
정상 종교인들이 매니아로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예수님은 늘 우리 곁에
옛 모습 그대로
계실 수는 없습니다.
이제 곧 십자가의 수난을 받고
죽게 되실 겁니다.
그러나 그분은 가난한 이들의 모습으로
늘 새롭게 부활하실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 부활신앙입니다.
오늘 내가 만나게 되는
가난한 사람을 눈여겨 봅시다
그가 바로 예수님이라 생각하며
바라보고 대해 봅시다.
성주간을 거룩한 주간이 되게 하는 것은
성당에서건 길거리에서건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아마도 길거리에서 그분을
만나뵙기가 더 쉬울지도 모릅니다.
다 주어도 아깝지 않은 사랑으로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파스카 축제 엿새 전에 베타니아로 가십니다(12,1).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 입성을 준비하시기 위해 발길을 멈추신 것입니다. 거기에서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베풀어집니다. 이 고을은 예수님께서 방문하시어 정담을 나누시고(루카 10,38-42), 죽은 라자로를 살리신(11,1-44) 곳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벌어진 것은, 그분께서 자신들에게 보여준 관심과 사랑에 대한 감사를 표시하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립니다. 그러자 온 집 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였습니다.”(요한 12,3)
마리아는 오빠를 살려 주신 예수님의 은혜를, 결코 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분의 발에 향유를 부은 것은, 예수님의 헤아릴 수 없는 사랑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었습니다. 죽음으로 갈라지게 된 오빠와의 생명의 고리를 다시 이어주신 예수님의 큰 사랑에 비하면, 값비싼 향유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사랑은 사랑을 부릅니다. 사랑에 대한 가장 합당한 보답은 사랑 외에는 없습니다. 사랑이 진실하고 클수록 세상 그 어떤 것도 아깝지 않습니다. 진실한 사랑은 현세의 물질로 살 수 없습니다. 사랑한다면, 사랑하는 대상에게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까지도 기꺼이 다 내어줍니다. 그보다 더한 기쁨은 없습니다.
한편 유다 이스카리옷은 마리아의 행동을 보자,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12,5) 하고 따집니다. 그가 가난한 이들을 사랑해서 불만을 제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돈을 가로채곤 했던 도둑’이었던(12,6) 그의 눈에는, 물질만 보였던 것입니다.
돈과 물질에 애착을 두는 이들은 삶의 중심과 판단 기준을 물질에 두고 살아갑니다. 그러니 사랑과 선과 정의, 공생과 공유의 삶과 같은 보이지 않는 소중한 것을 보지 못합니다. 유다는 예수님 가까이에서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듣고 보면서도, 끝내 은전 서른 닢에 스승을 팔아넘기고, 스스로 목매달아 죽는 비극을 자초합니다.
나는 마리아와 유다 중 어떤 얼굴을 지니고 있습니까? 혹시 눈에 보이는 현세적 가치나 물질에 매여, 보이지 않는 소중한 가치들을 보지 못하고, 나누지 못한 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랑하고 믿는다 하면서도, 유다처럼 이해득실을 따지고, 가난한 이들을 이용해 자신의 이득을 챙기거나 권력과 명예욕을 충족시키지는 않습니까?
성주간을 시작하면서 유다와 같은 도둑의 마음과 태도를 버려야겠습니다. 이제 나를 향한 하느님의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을 기억하고 그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을 지니도록 마음을 추슬러야 할 때입니다. 더는 계산하거나 따지지 말고, 그 무엇도 아까워 말고 사랑을 위해 사랑으로 되돌리는 오늘의 마리아가 되었으면 합니다.
오늘 고통과 슬픔에 함께 하고, 아낌없이 되돌리는 사랑을 실천하여, 이 세상에 사랑의 나르드 향기를 가득 채워야겠습니다. 마리아처럼 허리를 굽혀 예수님의 발에 사랑의 향유를 발라드림으로써, 부활을 향한 예수님의 장례 준비에 참여하는 복된 우리이길 희망합니다.
김성 신부님
찬미 예수님!
성경에 관심이 많으신 어떤 본당 신부님이 신자들에게 늘 성경을 열심히 읽도록 강조하셨습니다.
어느 날 본당 신부님이 한 교우의 가정 방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부엌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 댁 자매는 신부님의ㄱ 방문을 대비해서 반드시 점검해야 할 것을 부엌 벽 소형 칠판에 적어두고 있었습니다.
그 자매는 신부님이 방문하시기 전에 칠판에서 지워야 할 것이 있었지만, 그것을 미처 지우지 못했고, 신부님이 어쩌다가 부엌에 들어가서 그것을 보고 쓴 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내일 신부님 방문, 성경의 먼지를 필히 털 것”이라는 메모였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베타니아로 가서 마르타와 마리아 그리고 라자로를 만나십니다. 11장에서 라자로의 소생 이야기가 보도되고 오늘은 그 라자로와 식사를 하고 마르타는 언제나처럼 시중을 듭니다.
이때 마리아가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아드립니다. 한 리트라는 지금으로 치면 약 330그람 정도 나가는 것으로 유다가 말한 것처럼 삼백 데나리온 그러니까 삼백 일치 임금으로써 하루 5만원 일당으로 셈한다면 천 오백만원이라는 엄청나게 비싼 향유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대비되는 두 인물은 유다와 마리아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죽음을 예견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공경을 드립니다. 외간 남자의 발을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닦아준다는 것은 지금도 흔히 볼 수 없는 파격적인 공경이며, 당시에도 손가락질 받거나 단죄를 받을만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이러한 행동을 한 것은, 그녀의 믿음이 얼마나 깊고 주님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대단한지 보여주는 행동입니다.
반대로 유다의 말은 참 그럴 듯합니다. 그 천 오백만원에 달하는 향유를 팔아서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자는 주장은 언뜻 일리가 있고 매우 좋아 보입니다. 그러나 복음사가의 기술대로 그는 그 돈을 가로채고 싶은 욕심이 있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마리아의 행동이 그 의미를 알지 못하면 참 이해할 수 없는 낭비요 비례로 비쳐질 수도 있고. 유다의 언행은 그 진의를 모른다면 참 그럴 듯한 선한 말로 비춰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찬찬히 보고 오래 보아야 합니다. 냉철하게 듣고 세세하게 검증해야 합니다.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선한지, 어떠한 과정에서 어떠한 결말이 맺혀질지 예상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지막으로 들여다보아야 할 인물은 수석 사제들입니다. 그들은 소생한 라자로를 다시 죽이려고 합니다. 죽음에서 되살아난 하느님의 영과 기적의 표징인 라자로를 죽이려고 합니다.
자신들의 기득권과 주장을 위해서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믿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서 하느님의 기적을 부정합니다.
참 무서운 일입니다. 자기 주관과 주장에 눈이 멀면 이러한 행동도 서슴지 않게 되는가 봅니다.
전례 시기 중 가장 중요하고 거룩하고 핵심적인 신비가 드러나는 시기가 바로 성주간입니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시어, 왜 죽임을 당하셔야 했는지. 그것이 지금의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한번 돌아보는 시간이 되시면 좋겠습니다.
이 시기에 나의 삶은 마르타인지, 마리아인지, 라자로인지, 유다 이스카리옷인지, 아니면 수석 사제들인지. 그들의 어떤 면을 닮아 있고, 살고 있는지 한번 성찰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다. 그러자 온 집 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였다.”
김종오신부님
주님께서는 우리와 특별한 시간을 가지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지내는 시간은 주님을 위해서라기보다 우리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우리 자신을 위해 주님께서는 우리가 당신께 시간을 내시기를 원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찬미가 필요하지 않으나 우리가 주님께 드리는 찬미는 우리 구원에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장례 날을 위하여’ 마리아에게 ‘기름’을 준비시키시는 것은 주님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마리아를 위함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수난과 죽음을 맞이하시는 주님께서는 마리아가 준비한 기름을 마다하시지 않습니다. 마리아가 주님을 위하여 무엇인가 할 수 있는 것은 마리아 자신을 위하여 할 수 있는 그 무엇이기 때문입니다.
성주간이 시작되는 오늘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하는 일들은 우리 자신의 구원을 위해 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위하여 하는 가난한 삶과 봉사와 나눔은 이웃을 위한 일을 넘어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주님의 계획입니다.
죽음을 앞둔 예수님과 함께 지낼 시간은 그렇게 많이 남지 않았지만 여전히 우리는 유다처럼 현실의 이익을 추구합니다. 주님을 위한 마리아의 비싼 기름마저도 현실적 가치로 판단하며 바라보는 유다처럼, 주님과 이웃과 자신을 위한 나눔과 사랑에 인색합니다.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어앉아 향유로 주님의 발을 닦아 드리는 마리아처럼, 성주간은 우리도 예수님의 발을 향유로 닦아드리는 시간입니다. 성주간에 하는 아무리 작은 사랑과 나눔과 봉사라도 그것은 우리가 주님의 발을 닦아드리는 향유가 됩니다.
베타니아에서 예수께 향유를 발라드리다.
곽승룡 비오 신부님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다.”(요한12,3)
자연스러운 질서인 죽음이 성경에 따르면 자연스럽지 않게 보인다. 성경은 죽음이 죄로부터 왔다고 기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느님의 이미지인 인격person을 가진 우리는 자연법을 이겨낼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
베타니아에서 예수께 향유를 발라드린 이 사건은 하나의 ‘신심행위’로서, 예수님의 죽음이 현실이 되었다는 의미를 전한다. 신비가들에게 인간 몸에 아로마 기름을 바르는 것은 죽음을 준비하는 상징이며,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는 표징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거룩함의 향기”를 말하고 있다.
성경에 따라, 죄가 죽음의 원인이라면, “거룩하게 된다”는 노력 역시 인간의 ‘불사불멸’을 준비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일까 어떤 모양에서는 우리가 죄에서 벗어나고, 자연법의 의무감에서 몸이 해방되는 것을 뜻하기 한다. 하느님의 어머니 마리아께서도 ‘몸의 죄 없이’ 하늘로 오르셨다.
“덕의 상징” 아로마 향유
성덕(聖德)은 성령과 은총의 첫 장소다. 수덕(修德)생활과 인간의 협동은 이 같은 은총에 일치하는 훈련이다. 신비차원에서 좋은 수덕의 향기를 말한다. 오리게네스는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는 신원(身元)이 확정되는 일종의 시험을 치른다고 말한다. 그리스도는 진리와 정의 그리고 사랑이시다. 주님께서는 우리도 이 같은 덕을 수련하여 획득할 수 있다고 초대하신다.
우리는 진리와 의로움 그리고 사랑을 지니고 태어났다. 그것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 안에서 우리도 영적기름부음이 이루어지고, 그와 함께 우리는 영생과 죽음을 준비하게 된다. 이것이 그리스도교의 성사들 안에서 이루지는 기름받음 곧 기름부음을 받게 되는 은혜의 상징이 된다.
가장 거룩한 성주간, 주님 부활의 기름을 가득 받기를 기도합니다.
'사랑하면 계산이 없어집니다'(요한 12장 1~11)
김연희마리아 수녀님
비싼 순 나르드 향유를 사서 예수님 발을 씻어 드리는 마리아 ~
사랑을 부우며 온 마음으로 씻어드립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아니었다면 구제받을 수 없었기에 전 재산을 다 팔아서라도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고 싶은 심정이었겠지요.
이 광경을 지켜보던 유다는 그 돈을 가난한 이들을 위해 쓰면 가치가 있었을 것을 예수님 발 씻는데 다 써버리는 향유가 아깝다고 합니다.
사랑하면 계산이 없어집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십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사랑 덕분에 살게 되었기에 그 은덕을 갚고 싶은 심정이고 유다는 이익만을 따지니 이미 예수님에게서 마음이 멀어진 상태,
가난한 이들을 생각하는 마음 그들을 위한 나눔의 실천 중요합니다,
하지만 가난한 이들의 우선적 선택이 자기 과신과 속셈을 지닌 처사라면 그는 이미 배신의 길을 가는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사랑 덩어리 예수 그분을 알고 받아들이고 변화한 마리아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우리도 마리아처럼 예수님을 깊이 사랑하는 모습으로 살아가길 청합시다.
"거기에서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베풀어졌는데, 마르타는 시중을 들고 라자로는 예수님과 더불어 식탁에 앉은 이들 가운데 끼어 있었다. 그런데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다." (요한 12, 2~3)
김웅태 신부님
+찬미예수님!
주님의 축복 함께 하십시오.
오늘 복음(요한 12, 1~11)에서는 예수님께서 죽었던 이들 가운데서 다시 일으켰던 라자로가 살고 있는 베타니야로 가신 내용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 일은 예수님께서 수난과 죽음으로 이어지는 파스카 축제를 1주일 앞두고 일어났던 일입니다.
오늘 복음(요한 12, 1~11)에서는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베풀어졌다고 나오고 있습니다. (요한 12, 2) 성경에서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베풀어졌다는 내용은 아마 이 대목이 처음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여러 사람들에게 초대받아 그 집에 가서 음식을 드시고 함께 어울리신 적은 있지만, 예수님 자신을 위한 잔치는 아마 이 대목이 처음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소생시키어 은혜를 많이 입었던 라자로, 그리고 그의 동생 마르타와 마리아 자매가 살고 있는 집에서, 또 평소에 마르타와 마리아는 예수님을 충실히 흠모하며 따르던 자매였습니다.
죽음에서 소생된 라자로는 예수님께 얼마나 큰 은혜를 입었던가요? 그것에 대해서 얼마나 크게 감사하고 있었을까요? 바로 이 형제 자매들이 예수님을 위한 잔치를 베풀었다는 것이 참으로 정겹고 예수님을 위해서 우리 인간들이 베풀어 드렸던 대접이 아닌가 생각을 합니다.
역시 이 잔치에서도 마르타는 시중을 드는데 여념이 없었고, 라자로는 죽음에서 소생되어 감사하는 마음으로 예수님과 더불어 식탁에 앉은 이들을 가운데에 끼어 있었습니다.
바로 그 때 예수님의 말씀을 항상 다소곳이 들었던 마리아는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 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습니다. 그러자 온 집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였습니다 (요한 12, 23)
참으로 좋은 분위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잔치는 정성과 마음으로부터 예수님을 얼마나 편하게 해 드리는 자리였을까요? 그래서 마리아는 비싼 순 나르드 향유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발에 적신 향유를 수건이 아니라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아드렸다는 것은 얼마나 큰 존경의 마음을 표시한 것이었을까요? 마리아는 향유값과는 상관없이 예수님께 가장 좋은 것을 드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행위를 지켜보던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유다 이스카리옷은 그것을 보고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 (요한 12, 5) 요한복음은 유다의 이 말은 유다가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 있어서가 아니라, 도둑이였기 때문에, 그리고 그가 돈 주머니를 맡고 있어서 거기서 돈을 가로채곤 하였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 12, 6)
그때 예수님께서는 유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요한 12, 7~8)
예수님께서 파스카 축제 희생양으로 돌아가시기 일주일 전 당신을 위해서 베풀어 드린 잔치에서 마리아는 가장 값진 것을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그런데 유다는 그것을 예수님께 드리지 말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면 좋겠다고 얘기했지만, 그것은 진심이 아니라 도둑이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리아의 행위를 의롭게 생각하고, 유다의 생각은 좀 수정되어야 되는 것으로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파스카 축제에 희생되는 어린양으로 우리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의 길을 가실 때, 머리에는 가시관을 쓰시고 온 몸에 채찍질과 사람들의 조롱과 침뱉음과 무거운 십자가에 짓눌려 그것을 감당할 예수님의 육신은 얼마나 고통스러울까요? 우리를 위해서 당하셔야 할 예수님의 거룩한 몸에 우리가 값진 향유를 발라 드리면 안될 정도로 그것이 그렇게 예수님께 그 정도도 못해드릴만큼 예수님의 희생이 그렇게 값싼 것일까요?
마리아가 예수님께 발라 드린 향유값은 300데나리온어치가 된다고 했습니다. 1데나리온이 당시 일꾼을 하루 품삯이었으므로, 300데나리온은 대략 1년 연봉되는 되는 것으로서, 요즘 시세로 3,000만원 정도되는 값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향유 바른 예수님의 몸은 온갖 채찍질과 조롱, 침뱉음과 모멸감과 멸시로 만신창이가 될 그 거룩한 육신을 위해 우리 인간들이 어루만져 드리고 위로해 드려야 할 만큼 예수님께서 우리 인간을 위해서 당하신 일은 헤어질 수 없을만큼, 비교할 수 없을만큼, 더 큰 일이 아니겠습니까?
돈으로만 계산적으로 생각하는 것 보다는 마리아처럼 값을 생각하지 않고 우리를 위해서 수난당하시고 돌아가실 예수님의 몸에 가장 값진 향유를 발라드린 이야기는 같은 인간으로서 마리아께 감사드려야 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잔치를 베풀고 온갖 음식으로 정성껏 대접했던 마르타의 행위도 또한 우리 인간을 대신해서 감사드려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라자로는 예수님께서 베푼 큰 표징의 증표로서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증거하는 그 자체가 될 것입니다.
오늘 성주간 월요일에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베풀어 주신 그 크신 사랑에 우리 인간은 얼마나 보답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를 생각하는 시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아멘.
[생각해 봅시다]
•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온갖 수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구원받았다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예수님께 무엇을 드릴 수 있겠습니까?
• 이에 대한 나의 느낌은 무엇입니까?
심흥보 베드로 신부님
요즘 경제적으로 어렵다고 합니다. 어떤 분들은 저축은커녕 매일 하루 한 끼를 먹기 위해 고생스럽게 일하며 겨우 살아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공항에 나가보면 비행기가 늘 만석으로 꽉꽉 차서 붐비는 것도 보입니다. 빈부의 격차가 심해졌다고도 하는가 하면, 소비문화나 생활양식이 바뀐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다.”(요한 12,3) 라고 나옵니다. 그 향유가 얼마나 비싼 것인지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5절) 라는 비아냥거림마저 들립니다.
오늘 복음을 들으면서, 돈이 많으면서도 한 푼을 마음대로 쓰지 못하는 이들보다도, 돈이 많지 않으면서도 가끔 큰돈을 기부하는 분들을 겪으며 새삼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깨닫게 됩니다. 그런가 하면 요즘 내 재물을 어디에다 어떻게 쓰고 있는지 되돌아보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은총으로 내게 맡겨주신 것을 사용하는 기준과 우선순위는 무엇인가?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어떤 가치를 우선으로 삼아? 그리고 주님께는 무엇을 봉헌하는지도.
‘옳고 그름’을 뛰어넘는 자비
김우중 스테파노 신부님
아마도 유다는 자신의 논리가 옳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사실 그의 말만 두고 보면 틀렸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 옳고 그름만을 가르는 시선의 한계를 알려주십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자비가 없는 정의는 잔인하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부분을 지적하십니다. 사실 우리도 복음서의 맥락을 알지 못했다면 비싼 순 나르드 향유를 예수님 발에 붓는 행위를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비의 마음으로 마리아를 바라본다면 그 행위는 다르게 보입니다. 적어도 ‘저 여인은 무슨 사연이 있길래 저렇게 하는 것일까?’라고 생각했겠지요. 하지만 유다는 복음서에서 표현한 대로 도둑이었고, 돈에 대한 욕심을 정당화시키려 옳고 그름의 명분을 내세웁니다. 물론 옳고 그름을 가르는 일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랑이나 자비와 동떨어지면 오히려 폭력이 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옳고 그름을 기준으로 죄인들을 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죄인으로 몰릴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보셨습니다. 그들과 함께 식사를 나누며 그들의 친구가 되어주셨습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우리 모두 자비로운 사람이 될 수 있는 은총을 청합시다.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다.“
함승수 신부님
오늘날 전 세계를 움직이는 근본원리인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요소는 효율성과 경제성입니다. 내가 생산하는 재화 혹은 서비스가 얼마나 ‘돈’이 되는가, 어떻게 하면 작업을 보다 효율적으로 진행하여 생산 단가를 줄이고 보다 많은 ‘이윤’을 남길 수 있는가에 중점을 두는 겁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그런 경제논리에 익숙해져서 사람을 대할 때에도 그런 방식을 적용하려 들지요. 하지만 그런 경제논리를 내세우지 않는 때가 있습니다. 바로 참된 ‘사랑’에 빠졌을 때 입니다. 사랑은 원래 비효율적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받는 것보다 주는 것에서 더 큰 행복을 느끼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상대방으로부터 돈으로는 환산할 수 없는 더 큰 기쁨을 얻는다고 느낍니다. 그렇기에 아낌없이 자신을 내어주고 또 내어줍니다. 사랑이라는 가치가 우리를 ‘행복한 바보’로 만들어버리는 겁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그런 ‘행복한 바보’를 만나게 됩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소생시키신 라자로의 여동생 ‘마리아’입니다. 그녀는 예수님께서 오빠를 되살려주신 것에 보답하고자, 그분이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해주셔서 삶을 바라보는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시고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 알게 해주신데 대한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자 자신이 소유한 가장 귀한 것을 예수님께 기꺼이 내어드립니다. ‘나르드’ 향유는 인도에서 생산되는 값비싼 향유로써, 사랑하는 사람을 매혹하는 용도로도 쓰인다고 합니다. 그녀는 그토록 귀한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전부 부어드림으로써 자신이 그분을 생각하는 마음이 얼마나 큰지를 드러냅니다. 또한 사람들 앞에서 자기 머리칼을 풀어 헤치고 그것으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 드립니다. 이는 아주 가까운 연인 사이에서, 그것도 단 둘이 있을 때나 할 법한 아주 파격적인 애정표현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이들에게 큰 오해를 살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남들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보여주신 그 큰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자신 역시 최선을 다해 예수님께 대한 사랑을 표현합니다. 주님께서 가르치신 사랑의 계명대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이신 예수님을 사랑한 것이지요.
하지만 이스카리옷 유다에게는 마리아의 진심과 사랑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의 눈에는 그녀가 쏟아버린 아까운 향유만, 그 향유를 팔았으면 손에 쥐었을 돈의 가치만 보였습니다. 그 무엇에도 한 눈 팔지 않고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았던 마리아와 달리, 그는 예수님 곁에 있으면서도 돈에, 세속적인 가치들에 한 눈을 팔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면서도 자기의 시커먼 속내를 들키지 않기 위해 위선을 떱니다. 자신이 가난한 이웃들을 엄청 생각하고 위해주는 척 하며, 귀한 재물을 가난한 형제들을 돕는 의미있는 일에 쓰지 않고 ‘쓸 데 없는’ 일에 낭비해버린 마리아를 비난하고 질책합니다. 그런 식으로 사람들 앞에서 자기 의로움을 과시하고, 그들이 ‘좋은 일에 써 달라’며 봉헌한 예물로 자기 배를 채워왔던 그 입니다. 참으로 가증스럽습니다.
우리도 효율성과 경제성의 논리에 휘둘리면 유다처럼 돈의 노예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돈’이 아니라 ‘사람’을, 그리고 ‘사랑’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현실’이라는 높은 장벽에도 불구하고 꿈과 희망을 쫓는 사람들, 쉽고 편한 길을 마다하고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기 위해 기꺼이 가시밭길을 걷는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이 밥 먹여주느냐’는, ‘그런 일을 해봐야 누가 알아주냐’는 가시 돋힌 말을 하여 그들의 마음을 꺾어놓아서는 안됩니다.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입니다. 주님은 당신께서 가르쳐주신 복음이라는 참된 가치를 지키기 위해, 어떤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올바른 길을 걷는 이들과 함께 걸으시며 힘을 주십니다.
죽음을 생명으로 이끄시는 주님의 자비 <요한 12, 1-11> 4월 3일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이 세상은 죽음의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한 가정에서 사랑받지 못하고 상처받고 사는 사람, 생명처럼 아끼는 사람에게 배신당하고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 그래서 자살하는 사람이 많아집니다. 오늘 복음은 병으로 죽은 나자로의 집에서 일어난 일 중에 “죄녀”라 불렸던 막달라 마리아의 행동을 비난하는 사람도 있고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사람도 있었지만, 주님은 모두를 살리고 원만한 해결을 보여주셨습니다.
죄인 취급을 받는 주님은 당신의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 죽음에 있는 모든 사람을 영원한 생명으로 초대하는 뜻을 세우시려고 성주간 첫날 아름다운 복음을 묵상하게 하였습니다. 죽음에서 살아난 나자로의 집에서 잔치가 열리고 주님이 사랑받는 현상은 십자가의 죽음에서 부활을 기다리는 우리에게 큰 기쁨을 선물합니다. 얼마 있으면 죽음의 고통에 들어가실 주님의 찬미 받고 존경스러운 장면은 최후 만찬석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는 사랑의 행위입니다.
모든 병은 사랑의 힘으로 치유할 수 있으며 사랑 없이는 죽음의 고통에서 일어날 수 없습니다. 오늘 성주간 둘째 날, 모든 병은 사랑으로 치유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오늘을 사랑의 날로 정하고 서로 사랑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실천하는 날이 되어 희망이 없는 사람에게 희망을 주고 죽음에 처한 사람을 죽음의 구렁텅이에서 구하는 날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랑으로 죽은 나자로를 살리시고 여동생 막달라 마리아가 사랑의 보답으로 은혜를 갚은 일은 우리 안에서도 있어야 할 일이며 사랑의 실천입니다.
“왜 사는가? 행복하기 위하여 행복은 어디서 오는가?” 사랑함으로써 행복해집니다. 어려움을 극복하고 한 가정이 사랑의 여행을 새로운 시작이란 이름으로 서로 격려하고, 축하하고, 주님의 힘을 얻고 희망에 살려는 아름다운 모습을 봅니다. 절망에서 쓰러지는 사람과 절망에서 일어나 새로운 삶을 사는 사람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삶입니다.
희망에 찬 시작에 시기, 질투, 이기심을 버리고 오로지 주님에게 희망 두고 부활의 희망 품고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 하느님 일의 결과까지 미움을 가지고 나자로까지 죽이려고 한 사람들처럼 살지 않고, 앞만 보고 살지 않고, 하늘 땅, 우와 좌를 보고 균형 잡힌 날을 살아가야 합니다.
주님 말씀 가운데 가난한 사람 행복, 우는 사람 행복, 배고픈 사람 행복, 외로운 사람 행복, 박해를 받는 사람 행복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하느님이 다 채워주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슬프지만 기쁨이 있고, 지금 병들었으나 깨끗하게 치유되고, 지금 십자가가 구원의 도구가 되어 역사를 움직입니다.
일주일의 성주간은 일 년을 주님과 함께 사는 힘의 원천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다.'(요한 12, 3)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마음의 가치를
만나는 아름다운
시간입니다.
간절한 향유처럼
간절한 마음이
있습니다.
간절한 마음은
가장 중요한 것을
간직하는 사랑의
마음입니다.
마리아의 향유가
유다 이스카리옷의
욕심을
일깨워 줍니다.
목숨을 내어놓으시는
예수님의 발을
향유로 닦아드리는
마리아의 마음이
성주간의 마음입니다.
영원할 거라
믿었던 것들이
실은 영원한 것들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잠깐 피었다
떨어지는 봄꽃처럼
우리의 시간은
참으로 빠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되는 영원한
마음의 시작입니다.
영원한 사랑에
동참하듯 우리
마음의 사랑을
이제 꺼내어
예수님의
발을 닦아드려야 할
시간과 사람은 바로
우리자신입니다.
마음을
씻어주는 것은
마음이고
향기를 더욱
향기롭게 하는
것 또한
마음입니다.
씻어야
찾을 수 있고
씻어 주어야
흠뻑
젖을 수 있는
마음의 이치입니다.
소중히
간직해야 할
마음의 길
그 길을
사랑이라
부릅니다.
사랑도
마음인지라
씻어주고
닦아주어야
더욱
향기롭습니다.
십자가의 길을
걸으려 하시는
예수님의 발을
닦아드리는
마리아의 사랑은
이미 부활의
향기로운
마음입니다.
사랑은
마음을 만나는
마음의 일치입니다.
마음의 길을
예수님과 함께
걸어갑니다.
아는 지인의 집에 초대받은 적이 있습니다. 처음 이 집을 방문한 것이라, 지인의 안내를 받으며 집을 구경했습니다. 그런데 방 하나가 완전히 클래식 음반으로 가득한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워낙 클래식 음악을 좋아해서 클래식 음반을 사들이는데 돈을 아끼지 않다 보니 이렇게 음반이 많아졌다고 하십니다.
저는 “많은 음반이 있으니 매일 다른 음악을 들으시겠어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의외의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음반수가 너무 많아서 늘 선택에 어려움을 느낍니다.”
결국 다양한 음악을 듣는 것이 아니라, 듣는 음악만 듣게 된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몇 년째 자리만 지키는 음반이 대부분이라고 하십니다.
선택지가 많으면 그만큼 다양한 것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 인간이 수용할 수 있는 선택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몇 개를 제외한 나머지는 욕심일 따름입니다.
세상을 살면서 너무 많은 선택을 하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지만, 실제로 그 용도를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있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사랑하라.”라고 하신 이유를 묵상합니다. 우리의 선택을 단순화시켜서 이 사랑 하나에 집중하라는 것입니다.
성주간 월요일인 오늘, 사랑에만 집중하고 있는 한 여인을 봅니다. 마리아는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립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 시체를 향유로 발라 염한 일의 예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녀는 성령에 이끌려 주님의 죽음을 맞이하는 예비 행사를 한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 중에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 이스카리옷이 못마땅해하는 말을 합니다.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요한 12,5)
향유의 가격 삼백 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 하루 품삯이 한 데나리온이라고 할 때, 삼백일 치의 품삯에 해당하는 거금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주님께 대한 사랑의 표시로 이 돈을 쓴 것입니다. 그에 반해 유다는 세속적인 관점으로 부정적인 말을 한 것이지요.
실제로 유다는 예수님을 은 30냥에 팔아넘깁니다. 은 1냥에 4데나리온에 해당하니, 거의 120일 치의 품삯에 판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은 30냥은 당시 노예를 팔 때 받는 가격이었습니다. 즉, 예수님을 노예 취급했던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마음이었으니, 마리아의 행동을 옳게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사랑에만 집중하면 세상의 기준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집중하다 보면 사랑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누구나 세상을 바꾸려고 생각하지만, 스스로 변하려고 생각하는 이는 없다(레프 톨스토이).
진심으로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 사랑이 반드시 표현되어야겠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혹시 첫사랑 때의 기억이 떠오르십니까? 그를 만나러 가기 전에 어떻게 준비했습니까? 그야말로 난리 났을 것입니다. 옷장을 다 뒤져 이 옷도 입어보고 저 옷도 입어보고, 도무지 방법이 없자, 언니 옷도 몰래 허락도 없이 빌려 입었을 것입니다.
혹시라도 그가 우리 집을 찾아온다면 어떠했을까요? 먼저 집 안팎을 깨끗이 청소하겠지요. 평소 잘하지 않던 행동도 할 것입니다. 화사한 꽃을 한 다발 화병에 꽂고 식탁을 장식하겠지요. 뿐만 아닙니다. 자신이 가장 자신 있는 18번 요리를 지극 정성으로 준비할 것입니다.
이윽고 그분이 오실 시간이 되면 제일 품위 있거나 예쁜 옷으로 갈아입어야겠지요. 그리고 지을 수 있는 제일 예쁜 미소를 지으며 그분을 맞이할 것입니다. 너무 아까워 진열장에 넣어두고 구경만 해온 최고급 양주나 포도주도 한 병 딸 것입니다.
오늘 파스카 축제 엿새 전에 예수님께서는 ‘절친’ 라자로의 집을 방문하셨는데, 그 집에는 예수님을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마음속 깊이 흠모하고 있던 라자로의 여동생 마리아가 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본격적인 수난 시기로 들어가기 전 각별히 아끼고 사랑했던 가족을 방문하신 것입니다.
끔찍이도 예수님을 사랑했던 마리아였기에 그녀는 이번 예수님의 방문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직감했을 것입니다. 때로 여성들 직감이나 눈치가 남성들보다 빠르지 않습니까? 이제 더이상 보지 못하게 될 예수님을 향해 무엇을 해드릴까 엄청 골몰했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온 집안을 샅샅이 뒤졌을 것입니다. 자신의 재산 목록을 다 훑어봤을 것입니다. 그리고 소유하고 있는 것들 가운데 가장 값진 것, 가장 자신이 아끼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했을 것입니다. 드디어 찾았습니다. 순 나르드 향유!!! 당시 여성들이 가장 지니고 싶던 소장품 No1 이었습니다.
양을 많게 하려고 물을 탄 다른 향유와는 비교가 안 될 순 나르드 향유 1리트라입니다. 너무나 값비싸고 가치 있는 것이어서 아주 조금씩 꺼내 사용하던 명품 향수였습니다.
평생을 두고 쓸 수 있는 양의 향유였는데, 마리아는 이 향유를 예수님 발에 사정없이 다 부었습니다. 그것을 옆에서 지켜본 유다는 얼마나 깜짝 놀랐던지 이렇게 외쳤습니다. “저런! 저런! 저게 대체 얼마짜린데!”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긴 머리를 풀었습니다. 그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드렸습니다. 이는 당시 그야말로 ‘내밀한’ 관계가 아니라면 할 수 없는 가장 극진한 애정의 표현이었습니다.
주변 사람들 오해 사기 딱 좋을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개의치 않습니다. 이제 곧 떠나가실 예수님, 그리도 흠모했던 주님, 참사랑이 무엇인지 깨우쳐주신 예수님의 큰 사랑 앞에 자신이 기울일 수 있는 모든 정성을 다합니다.
돌아보니 저 역시 하느님으로부터 참으로 많은 사랑을 받아왔습니다. 그런데 오늘 보여준 마리아의 행동을 바라보니 참으로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떠나가실 예수님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 재산, 마음, 정신, 목숨, 에너지, 삶 전체를 다 바치는 마리아입니다.
진심으로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 사랑이 반드시 표현되겠지요. 정성과 진심이 담긴 행동으로 말입니다.
성주간은 다른 무엇에 앞서 우리 죄인들을 향한 크신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하는 시기입니다. 이제 골고타 언덕을 향해 올라가실 예수님을 향해 우리의 정성과 마음을 표현하는 시기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교구 사제로 있다가, 지금은 수도회 사제가 된 신부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교구 사제로 열심히 살았다고 합니다. 주어진 직책에 성실했고, 사람들과 원만한 관계를 맺었고, 늘 바쁘게 지냈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딘가 채워지지 않는 목마름이 있었다고 합니다. 연극이 끝나고 텅 빈 객석에 앉아 있는 배우처럼 허전함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 어느 날 꿈을 꾸었다고 합니다. “절벽 위에 있었고, 뒤로는 갈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차가 날아와서 태우고 갔습니다. 내려 보니 넓은 잔디가 있었고, 집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모여 있었는데 모두 같은 곳을 보고 있었습니다. 바라보니 성모님이 계셨습니다.” 그 뒤로 성지순례를 갔고, 그곳에서 성모님을 보았는데 꿈에서 본 그 모습이었습니다. 후원자들도 있었고, 꿈에서 본 것처럼 집을 지어서 어머니의 마을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제법 큰 땅도 마련되었습니다. 성지순례를 다녀온 분들이 계속 기도할 수 있도록, 성지순례를 가지 못한 사람들은 성모님을 느낄 수 있도록 마을을 만들려고 했습니다. 열심히 홍보를 하였고, 많은 독지가들의 도움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호사다마라고 하듯이 어머니 마을의 꿈은 욕심에 물든 사람들에 의해서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원망도 있었고, 꿈이 틀린 것도 같았습니다. 하지만 기도 중에 성모님이 원한 집은 세상에 마련되는 집이 아님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성모님의 원하는 집은 ‘기도의 집’이었다. 예수님께서 프란치스코 성인에게 ‘무너져가는 나의 집을 세워다오.’라고 하셨던 것도 눈에 보이는 집이 아니었습니다. 영성과 기도의 집을 세우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교황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수도회의 인준을 받았습니다. 가난과 나눔의 영성으로 프란치스코 성인은 무너져가는 하느님의 집을 다시 세울 수 있었습니다.
교회의 위기는 기도하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사제가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제, 기도하지 않는 신자들이 세운 집은 세상의 유혹에, 마귀의 공격에 쉽게 무너지기 마련입니다. 예전에는 묵주기도를 거의 하지 않았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사제들의 성화를 위해서, 수도자들의 성화를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세상의 평화를 위해서 매일 묵주기도 100단을 바친다고 합니다. 예전에는 혼자서 미사 준비를 하고, 혼자 미사를 할 때면 하고 싶지 않을 때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혼자서 드리는 미사도 감사하다고 합니다. 온 세상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니 천상의 모든 성인 성녀들도 함께 하심을 믿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눈에 보이는 어머니의 집을 마련하려고 할 때는 분란도 많고, 걱정도 많았다고 합니다. 지금은 기도의 집에 성모 어머니를 모시려 하니 기쁨이 충만하다고 합니다. 생각을 바꾸니 꿈은 이루어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연이 바람을 타고 자유롭게 하늘을 날 수 있는 것은 연을 움직이게 하는 줄이 있기 때문입니다. 줄이 끊어진 연은 곧 땅으로 추락하게 됩니다. 우리를 절망에서 희망으로 이끌어 주시는 분, 슬픔에서 기쁨으로 변화시켜 주시는 분, 어둠에서 빛으로 향하게 하시는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신앙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와 맺어주는 줄입니다. 그 줄을 놓지 않는다면 우리는 구원을 향해서 자유롭게 날아갈 수 있습니다. 마음이 순수한 사람은 자신을 돌아볼 때, 하느님이 보입니다. 하느님께서 삶의 중심이 되는 사람은 지금 여기에서 부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삶의 중심에 자신의 욕심과 야망이 보이면 그는 지금 살아있지만 죽음을 사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온 마리아는 순수해져서 자신을 돌아볼 때 예수님이 보였습니다. 이제 그녀는 모든 것이 우선순위가 예수님이 되었습니다.
주님의 수난을 기억하는 성주간 월요일입니다. 예수님의 크신 사랑을 잊지 않고 초대했던 라자로처럼,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발라드린 마리아처럼 주님을 우리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가르멜 수도원의 사랑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양업고가 세상에 시작을 알리던 날, '충주가르멜수도원'은 학교 설립을 위해 첫 번째로 후원금으로 내어 놓았다. 나의 길에 사랑이 담긴 후원금이었기에 힘이 되었다. IMF가 한국의 외환위기를 도와주고 있을 1998년 일이었으니 이 후원은 나에게 큰 사랑이 아닐 수가 없었다. 더구나 수녀님들의 기도가 얼마나 큰 힘이 되었던지 그때의 감사함을 결코 잊을 수가 없다.
오늘도 '주님 수난 성지 주일' 미사를 충주 가르멜 수도원에서 봉헌하며 또 수도원은 우리 '놀체인 양업'에 후원으로 사랑을 베풀고 계셨다. 수도원 경당 가득 하느님의 향기가 수도자들에게서 사랑으로 넘쳐남을 본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전 '마르타, 나자로, 마리아' 일가족이 보여준 예수님께 드린 사랑이 방안 가득 향기가 그윽하다. 마리아는 순나르드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머리칼로 닦아드린다. 예수님은 십자가 길에 사용할 향유를 남겨두라 이르신다. 든든한 구원사업의 후원자들이다.
나는 살아오며 은인들로 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 사랑으로 사람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여전히 많은 후원자들로 부터 도움을 받고 있다. 그래서 오늘도 '그리스도 예수님과 한 몸이 되어 하느님을 향하여 일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긴다.'(로마15,17)는 나의 서품성구를 이어가고 있다.
여기서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인 '유다 이스카리옷'에 대해 길게는 말하지 않겠다, 인류 구원사는 그 어느 누구도 엑스트라가 아니다. 드라마가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그를 두고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하고 안타깝다는 말씀을 하셨겠는가? 그는 인생 헛 살았다. 얼마나 가련한 신세인가?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파스카 축제 엿새 전에 베타니아로 가셔서 라자로의 집에 머무셨는데 그곳에서 마리아가 나르드 향유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습니다. 그러자 유다는 그것을 보고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
여기서 유다의 말만 들으면 유다는 참으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인 선택을 하는 의로운 성자의 모습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향유가 다른 어느 누구도 아닌 예수님을 위해서 쓰여졌다는 사실입니다. 어쩌면 유다는 결정적으로 무엇이 진정 선택의 기본이되고 우선이 되는가에 대한 오류를 범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인간적인 정의를 추구하면서도 하느님의 정의에 대해서는 깨어있지 못하곤 합니다. 진정한 신앙은 단순히 인간적인 정의로움을 이루어가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의 사랑을 살아가는 것이고, 하느님을 위한 우선적인 선택을 이루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하시지 않을 때 우리가 원하는 정의도 없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위한 우선적인 선택의 삶을 이루어 갈 때, 바로 그 하느님께서 일하시면서 그 하느님께서 당신의 나라를 이루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때 우리는 모두가 하느님 안에 참된 평화를 이루어가게 될 것을 믿습니다.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최광희 마태오 신부님
마리아는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립니다.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예수님의 수난과 돌아가심을 온전히 이해했던 유일한 여인!
사도들도 이해하지 못했던 당신의 길을
준비하고 동참했던 마리아의 믿음과
순간의 마음들을 머물러 봅니다
파스카 축제 엿새 전
Six days before Passover
송진욱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 복음의 내용은 모처럼 예수님께서 자신이 사랑하는 나자로의 집으로 가서 편히 쉬시는 장면입니다. 다 아시겠지만 라자로는 죽었다가 다시 부활한 이지요. 바로 이 라자로의 집에 생명이신 예수님께서 방문하여 예수님을 위한 큰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죽음의 어둠이 있던 곳에서 생명의 빛이 비추는 장소로 바뀐 장소에서 벌어진 이 잔치는 예수님께서 다시 재림하여 벌어진 혼인잔치를 미리 보는 것이기에 큰 의미가 있는 잔치라 볼 수 있습니다.
이어서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행한 것을 보면서 우리들이 어떤 마음으로 예수님을 섬겨야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정말 비싼 나르드 향유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닦아 드립니다. 먼저 누군가의 발을 닦는 것은 낮은 자의 모습 혹은 종으로써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발을 닦아드렸는데 여자에게 있어서 현재도 마찬가지겠지만 여자에게 머리카락은 아주 소중한 것이지요. 자신의 소중한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 드린다는 것은 바로 자신의 소중한 것을 예수님에게 바쳐야 한다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죽었다가 예수님에 의해 부활한 나자로는 미래의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죽은 이들을 부활시키는 것에 대한 표징인 것이며 예수님을 위해 벌어지고 있는 잔치는 재림의 날 벌어질 혼인잔치에 대한 표징인 것입니다. 죽은 이가 부활 후 생명이신 예수님과 함께 한다는 것을 우리들은 복음을 통해서 보았던 것이며 또한 마리아의 모습을 통해서 예수님을 섬기는 자녀로써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지도 알 수 있었습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소중한 것을 주님께 바치는 것이 바로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지요.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직장으로 인해서 주일 미사를 참석할 수 없는 것은 상관은 없지만 그렇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일을 먼저 생각하여 미사에 빠지는 경우는 없는지 생각해봅시다. 가족들을 위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에게 우선순위는 무엇인지 생각해보자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바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도 예수님을 위해서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신앙인이 되어야 맞습니다. 이런 마음이 없다면 우리들의 신앙을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아멘!
온 집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였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예수님께서 “파스카 축제 엿새 전에”(1절) 베타니아로 가셔서 라자로의 집에서 식사하신다. 그 식사는 유대인들의 관습이었다. 파스카 양을 준비하기 전에 잠시 흥겨운 시간을 가졌는데, 양을 마련한 후에는 축제 때까지 단식이나 정화하는 데 마음을 쏟았기 때문이다. 마르타는 식사 준비를 하고 그리스도께 시중을 들었다. 라자로는 예수님과 함께 앉아 식사하는 영예를 갖는다. 그리고 마리아는 비싼 나르드 향유를 가져와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다. 예수님께서는 그들 가족의 시중드는 것을 흐뭇해하시면서 받아주신다. 마리아는 여기서도 시중을 들지 않고 제자로서의 모습을 보인다. 마리아는 주님의 발에 향유를 부었다. “그러자 온 집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였다.”(3절) 이렇게 향유를 부어 그 향기가 가득 차게 하는 것은 그 행위가 하느님 때문에 그리고 그분이 원하시는 것을 행하는 것이다. 이러한 선행은 좋은 냄새를 풍기는 향유이다. 자선을 베풀고, 병자를 찾아가고, 낯선 이들을 맞아들이는 일과 겸손, 친절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은 주님의 발에 향유를 붓는 것이다. 이 향유가 온 집안 즉 그리스도의 교회를 향내로 가득 채우는 값진 향유가 될 것이다.
유다 이스카리옷은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5절) 유다는 열두 사도 중의 하나였고, 돈주머니를 관리하며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는 책임을 맡고 있었다. 믿음이 없고 사악한 유다는 자신을 믿어준 사람들을 잊어버리고, 자신이 맡고 있던 돈주머니에서 훔치는 것은 물론 자신을 믿어준 주님을 배반하고 만다.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7절) 여기서 보면 유다가 순수하게 말하고 주님께서는 마리아의 행동에 당신 신비를 설명해 주는 것 같다. 즉, 당신이 곧 돌아가실 것이며 향료와 향유로 당신의 장례가 치러질 것이라고 하신다.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8절)
많은 사람이 예수님과 그분이 살려주신 라자로를 보려고 몰려왔다. 그러니까 수석 사제들은 라자로도 죽이려고 결의한다. 다시 살아난 사람을 죽이려 하는 것은 바로 눈먼 자의 눈먼 생각이 아닐까? 라자로를 다시 살리신 분이 당신을 죽이더라도 당신은 다시 살아나시는 분이심을 보여주셨다. 죽은 이들이 생명으로 돌아오고 죄를 용서받아 되살아나는 것을 보고 그들을 시샘하며 그들이 다시 죽기를 바라고 죽이고 싶어 하는지도 우리 자신을 살펴야 한다. 예수님께로 가는 것을 무엇으로 막을 수 있겠는가? 유대 지도자들은 사람들이 떨어져 나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막으려고 살해에 또 살해를 저지를 생각을 한다. 라자로를 죽이면 그 기적의 힘도 지울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그러면 나는 선행으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뿜는 삶을 살며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며 부활을 준비하고 있는지 성찰하면서 주님을 따르는 신앙인의 삶을 살아가도록 기도하면서 이 성주간을 지내야 하겠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다.』
송영진 모세 신부님
성주간 월요일의 복음은, 오늘날의 우리 입장에서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예고하신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의 바로 앞에는, “수석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누구든지 예수님께서 계신 곳을 알면 신고하라는 명령을 내려 두었다(요한 11,57).” 라는 말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을 체포하려고 공개적으로 ‘지명 수배’를 한 상황입니다. 사도들과 신자들도 그 지명 수배를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11장 53절에는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 라는 말이 있고, 또 12장 10절에는 “라자로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이 시시각각 다가오는 상황이었습니다. 사도들과 신자들이 그런 상황을 제대로 의식하고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은데, 어떻든 마리아는 예수님의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파스카 축제 엿새 전에 베타니아로 가셨다. 그곳에는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라자로가 살고 있었다. 거기에서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베풀어졌는데, 마르타는 시중을 들고 라자로는 예수님과 더불어 식탁에 앉은 이들 가운데 끼여 있었다(요한 12,1-2).”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가시게 되면, 베타니아에 있는 라자로, 마르타, 마리아 남매의 집을 숙소로 삼으셨습니다(마르 11,11).
그러나 지금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베풀어진 집은 그들의 집이 아닙니다.
<마태오복음과 마르코복음에는 ‘베타니아에 있는 나병 환자 시몬의 집’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마태 26,6; 마르 14,3). 그 잔치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오신 것을 환영하고, 시몬이 자신의 병을 예수님께서 고쳐 주신 것을 감사드리고, 라자로가 다시 살아난 일을 축하하는 잔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다. 그러자 온 집 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였다(요한 12,3).”
마리아의 행동은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고,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새겨 준 일입니다.
“온 집 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였다.” 라는 말은, 참석자들이 그 일을 오랫동안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예수님의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더라도, 예수님의 장례를 미리 거행하려고 그런 행동을 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습니다.(마리아의 행동이 장례라는 것은 예수님의 해석입니다.)
아마도 마리아는 예수님께 깊은 감사와 존경을 표현하기 위해서 그런 행동을 했을 것입니다.(마리아의 생각으로는, 그것이 최상의 표현이었을 것입니다.)
“제자들 가운데 하나로서 나중에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 이스카리옷이 말하였다.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도둑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돈주머니를 맡고 있으면서 거기에 든 돈을 가로채곤 하였다(요한 12,4-6).”
여기서 유다의 말은, 마리아의 순수한 신앙심을 부각시키는 배경 같은 역할을 하고 있고, 또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행동을 설명하는 말씀을 하시게 된 계기로도 작용하고 있습니다. 유다는 마리아의 신심과 존경심은 보지 않고, 오직 돈만 보았습니다. 반대로 말하면, 마리아는 ‘향유 값’을 생각하지 않고, 오직 예수님만 생각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유다는 마리아가 쓸데없이 돈을 낭비했다고 비난하는데, 어쩌면 그는 ‘예수님을 위한 잔치’ 자체를 ‘낭비’ 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마리아가 부자여서, 비싼 향유를 아무 거리낌 없이 살 수 있었던 것은 아닐 것입니다.(라자로, 마르타, 마리아 남매는 ‘부유한 사람들’이 아니라, ‘신심 깊은 사람들’입니다.)
또 마리아가 예수님만 생각하고 가난한 이들을 외면한 사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을 ‘도움을 받는 사람들’로만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 생각은 고정관념이고 편견일 뿐입니다. 가난한 사람들도 예수님을 위해서, 또 이웃을 위해서 나름대로 무엇인가를 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도 ‘가난한 이들’ 가운데 하나일 수 있고, 예수님을 위해서 뭔가를 하려고 오랫동안 돈을 모았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요한 12,7-8)”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마리아도 아니고, 유다도 아니고, 예수님입니다.(마리아는 사람들이 자신이 아니라 예수님만 바라보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아니라 마리아만 바라본 사람들이 많았고, 오늘날에도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라는 말씀은, 마리아를 비난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하고, 마리아 말고 당신을 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라는 말씀은, “너희는 내 장례를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고 있었던 마리아의 신심을 기억하여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향유를 이미 모두 부어버렸기 때문에 간직할 수는 없는 상황입니다.)
이 말씀은, 정상적인 장례식을 거행할 수 없을 정도로 당신의 죽음이 긴박하고 비참한 상황이 될 것이라고 예고하는 말씀이기도 하고, 당신의 부활을 암시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죽음으로 끝난다면, 무엇인가를 기억한다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이라는 말씀은, “가난한 이들을 돕는 일은 너희가 평소에 늘 해야 하는 일이다.” 라는 뜻입니다.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은 특별한 상황이라는 뜻입니다.
(물론 가난한 이들을 잠시 잊어버려도 된다는 뜻은 아니고, 가난한 이들을 포함해서,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당신 사업이 절정에 도달하는 때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초대한 라자로의 마음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죽어 3일만에 살아난 라자로 마르타 마리아가 예수님을 초대했습니다.
마리아는 고마워 예수님 발에 향유바르고 머리카락으로 닦아드렸지요.
여기서 유다스의 표정과 사제들의 표정을 생각하면 묘한 기분 듭니다.
예수님께 대한 감사의 초대 분위기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표현들이죠.
예수님 초대한 라자로의 마음을 우선 헤아리며 모두 하나였으면 해요.
십인십색이라는 사람들의 표현이 어쩜 이리도 제각각 나름인지 원 참!
이 성경구절을 지금 읽으면서도 오늘과 별 다를 바 없는 세상 같네요.
죽은 라자로를 살리신 예수님께 초점 두고 다시 읽어보시면 어떨까요.
우리는 주님의 종이다. - 사랑의 관상가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과거에 아무리 잘 살았어도 지금 못살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내일 잘 산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지금 여기의 지상에서 천상의 삶을, 하늘 나라 천국을 살아야 합니다. 이런 이들이 진정 사랑의 관상가입니다. 오늘 이사야서의 ‘주님의 종의 첫째 노래’에서 말하는 주님의 종입니다.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이, 내가 선택한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그는 민족들에게 공정을 펴리라.”
여기서 주님의 종은 이스라엘을 지칭하지만 초대 교회 신자들은 예수님으로 이해했습니다. 바로 예수님을 통해 주님의 종이 모습이 완전히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뿐이 아니라, 세례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 역시 이런 주님의 종이니 주님의 종처럼 품위있고 아름답게 살아야 합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사랑의 관상가 마리아가 그 모범입니다. 성주간 월요일 복음의 주인공은 단연코 마리아입니다. 마리아를 묵상하는 순간 떠오른 21년전 이맘때 쯤의 민들레꽃이라는 시가 생각납니다. 지금도 여전히 봄철되면 피고 지는 샛노란 민들레꽃들이지만 그동안 얼마나 많은 형제자매들이 세상을 떠나 저 세상으로 갔는지 무수히 떠오르는 그리운 얼굴들입니다.
“어!
땅도 하늘이네
구원은 바로 앞에 있네
뒤뜰 마당
가득 떠오른
샛노란 별무리
민들레꽃들!
땅에서도
하늘의 별처럼
살 수 있겠네”-2001.4.16.
이때는 본원 숙소 건물이 신축이전이라 숙소 창밖 뒷마당에는 봄철되면 민들레꽃들이 땅을 덮었습니다. 미국에서의 연수시 영역한 이 시를 보고 격찬한 영어 교수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바로 오늘 지금 여기 땅에서도 하늘의 별처럼 살아가는 이들이 진정 주님의 종이며 사랑의 관상가입니다. 구체적으로 오늘 제1독서의 이사야가, 복음의 예수님이, 마리아가 그러합니다. 이사야가 이런 매력적인 사랑의 관상가 모습을 잘 묘사합니다.
“그는 외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며, 그 소리가 거리에서 들리게 하지 않으리라.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그는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
그대로 섬세하고 자상하며 자비로운 관상적 활동가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이심전심, 유유상종입니다. 이런 주님을 직감적으로 알아보고 내심 따르며 흠모하고 사랑과 신뢰를 다했을 사랑의 관상가 마리아입니다. 마리아를 생각할 때 즉시 떠오르는 “늘 당신의 무엇이 되고 싶다”라는 시입니다.
“당신이 꽃을 좋아하면
당신의 꽃이
당신이 별을 좋아하면
당신의 별이
당신이 하늘을 좋아하면
당신의 하늘이
되고싶다
늘 당신의 무엇이 되고싶다”-1998.12.25.
24년전 성탄절 수녀님으로로부터 빨간 칸나 한묶음을 선물 받았을 때 즉흥적으로 읊었던 시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예수님의 죽음을 직감한 마리아가 예수님께 아낌없이 사랑의 봉헌을 한 행위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 었습니다. 다음 장면은 한폭의 그림처럼 아름답고 거룩합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다. 그러자 온 집 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였다.’
이런 사랑의 봉헌에 감격하지 않을 자 누구이겠습니까? 향유의 향기는 그대로 마리아의 존재의 향기, 영혼의 향기, 사랑의 향기를 상징합니다. 참으로 이런 마음으로 미사를 봉헌한다면 얼마나 큰 축복이겠는지요. 예수님도 마리아도, 여기 참석한 이들은 물론 시공을 초월한 오늘 우리에게도 참 신선한 충격입니다.
이런 사랑의 추억이 살게 하는 힘입니다. 예수님도 죽음을 앞두고 큰 위로와 격려를 받았을 것이며 마리아 또한 평생 이날의 주님을 마음에 모시고 살았을 것입니다. 이를 탓하는 현실적 물질주의자 유다의 반응이 참 실망스럽습니다. 일면 타당한 듯 하지만 사랑 없음을 반영합니다. 예수님의 직제자이면서 예수님의 심정을 너무 몰랐습니다. 유다의 반응에 이어 마리아를 두둔하는 예수님입니다.
“어찌하여 저 향유을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 않을 것이다.”
과연 여러분은 어느 쪽에 손을 들어 주겠는지요? 과연 내 견해는 어느쪽에 속하겠는지요? 바로 우리 마음을 들여다 보게 합니다. 회개하게 합니다. 사랑의 분별이요, 분별의 잣대는 사랑입니다. 마리아와 유다의 주님을 향한 사랑이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사실 주님 장례 날을 배려한 사랑이라면 마지막 사랑의 봉헌, 향유의 봉헌이 맞는 것입니다.
평생 한 번 있을까 말까한 결정적 봉헌의 때입니다. 사랑은 계산하지 않습니다. 참으로 주님의 종만이 주님의 종을 알아봅니다. 그 많은 이들중 예수님과 깊은 일치의 사랑을 지닌 이는 마리아뿐이었습니다. 참으로 평생 한 번뿐인 봉헌의 때를 알아 향유를, 자기의 전 존재를 사랑으로 봉헌한 사랑의 관상가, 주님의 종 마리아입니다.
우리의 모습을 거울처럼 비춰주는, 우리의 주님 사랑을 부끄럽게 하는 마리아의 사랑의 봉헌입니다. 봉헌의 축복, 봉헌의 사랑, 봉헌의 기쁨입니다. 우리 모두 사랑의 관상가, 주님의 종 마리아처럼 우리의 전존재를 봉헌하는 마음으로 이 거룩한 미사에 참여합시다. 오늘 시편 화답송은 주님의 종 마리아는 물론 우리의 고백입니다.
“주님의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은 내 생명의 요새. 나 누구를 무서워하랴? 힘내어 마음을 굳게 가져라. 주님께 바라라.”(시편27,1.14ㄴ). 아멘.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이기우 신부님
성주간 월요일인 오늘, 교회의 전례는 이사야의 예언과 라자로의 동생 마리아 이야기를 하느님의 말씀으로 선포합니다. 이사야는 이스라엘 민족이 바빌론으로 끌려가서 유배생활을 해야 했던 민족사의 암흑기에 활약했던 예언자입니다. 70년에 걸친 유배생활의 직전과 직후까지 모두 3세대에 걸쳐 학파를 형성하며 예언활동을 수행하였습니다. 동족이 처한 상황이 암울했던 만큼 이사야는 당대의 민중인 아나빔들과 기도로 통공하며 그 어둠을 몰아낼 희망을 하느님께 탄원하여 추구하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예언의 백미는 장차 오실 메시아를 기다리자는 메시아 대망 사상이었고, 이 사상이 ‘고난받는 종의 노래’ 네 편으로 나타났습니다.
오늘은 그 첫째 노래로서, 이사야는 장차 오실 메시아가 하느님의 영을 받아 이룩하실 새로운 미래를 아주 선명하게 내다보았습니다. 그분은 민족들에게 공정을 펼 것이며, 사회적 약자들을 돌볼 것이라 하였습니다. 세상의 진실을 보는 눈을 뜨게 해 줄 것이며, 억눌려 갇힌 이들을 풀어줄 것이라고도 하였습니다. 메시아의 이런 활약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는 새 역사를 펼치시는 것이라는 엄청난 의미가 담겨 있었습니다. 이렇게 창조적인 전망에서 이사야는 메시아의 출현을 예고하였습니다. 이사야가 활약한 시기는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 5백 년이나 이른 때였는데도, 마치 눈 앞에서 펼쳐지는 현실을 알려주듯이 이사야는 예언한 것입니다. 그도 역시 하느님의 영을 받아 말씀을 전해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과연 세상에 오신 메시아로서 예수님께서는 이사야의 예언을 공생활 동안에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선포로써 실현하셨고, 십자가 수난과 죽음 이후에는 부활과 발현으로써 실현하셨습니다. 부활하신 메시아께서는 믿는 이들에게 성령으로 발현하시어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온 세상에 선포하도록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교회는 메시아의 이름으로 세례 받아 새로 태어난 그리스도인들을 통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룩해야 하는 사명을 받았고, 그래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새로운 인류로서 세상을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도록 거룩하게 변화시키라는 책임을 부여받았습니다.
이런 복음화의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서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새 인간이신 예수님을 닮는 것이고, 이를 부활이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이들이 부활 신앙으로 성령을 따르면, 당신이 공생활 중에 이룩하신 일보다 더 큰 일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증하셨습니다. 당신이 믿는 이들 안에서 함께 하실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토록 부활 신앙이 중요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절친했던 벗 라자로가 죽었을 때 그를 다시 살리심으로써 부활 신앙의 성사적 예표로 삼으셨습니다.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리는 일은 오직 하느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일인데, 예수님께서 죽었던 라자로를 소생시키심으로써 하느님의 부활 권능을 일깨우신 것입니다. 소생은 육신이 되살아나는 일이라서 수명이 다하면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지만, 부활은 영혼이 되살아나는 일이라서 하느님 안에서 영원히 산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하지만 마침 그때가 파스카 축제가 임박한 때였고, 또 라자로의 집은 예루살렘 근처인 베타니아에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라자로를 다시 살리셨다는 소문은 급속도로 파스카 축제를 지내러 예루살렘에 모인 군중에게로 퍼져나갔고, 그 덕분에 예수님의 명성은 높아질 수 있었지만 그로 인한 민중봉기를 염려하는 로마 총독이나 사두가이들은 예수님은 물론 라자로까지도 죽이려 들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이럴 가능성을 미리 내다보시고도 감행하셨습니다. 그럴 만큼 부활 신앙을 일깨워주시려는 예수님의 뜻과 각오는 엄중한 바가 있었습니다.
라자로의 소생을 기뻐하는 잔치는 그래서 열렸고, 동생 마리아는 귀한 나르드 향유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 드림으로써 임박한 그분의 장례를 미리 치루고자 하였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죽기를 무릅쓰고 자신의 오빠를 살려주신 데 대한 고마움을 그렇게 자신만의 방식으로 표하고 싶었던 것이고, 예수님으로서는 복음선포로 일관한 공생활 3년 중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받아보시는 예우였습니다. 그분으로부터 복음을 듣거나, 기적으로 병을 치유받았거나, 마귀를 쫓아내어 주시거나 등 혜택을 받으려 하는 사람들은 숱하게 많았어도, 그분께 감사를 드리거나 예우를 갖춘 사람은 그만큼 드물었습니다.
그래서 이스카리옷 유다는 3백 데나리온이나 하는 값비싼 향유를 아까워했지만, 예수님께서는 말리지 않고 마리아의 행동을 고맙게 받으셨습니다. 교회의 전례는 마리아가 행한 이 ‘거룩한 낭비’를 계승하는 예절입니다. 그래서도 전례를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이 기억해야 할 바는 부활 신앙의 의미와 중요성입니다. 말씀과 성찬을 통해서 우리가 예수님을 기억하고 기념하며 계승하기로 다짐하는 일이 우리로 하여금 부활 신앙으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고 말씀하신 하느님께서 우리들 각자를 향해서도 말씀하실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가 메시아 백성입니다.
<그분처럼 나 또한>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목숨마저
오롯이 홀로
누리실 수 없는
가장 가난하신 분과
살아생전
마지막 만남에서
드리고 싶은
단 하나의 사랑은
나의 모든 것을
남김없이 부어드려
그분처럼 나 또한
가난하게 되는 것
우리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으로 여깁시다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의 강론에서 (Sermo Guelferbytanus 3: PLS 2,545-546)
우리의 주님이시고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은 영광에 대한 확실한 보증이고 인내에 대한 교훈입니다.
성부와 함께 영원하신 독생 성자께서 사람 중에 한 사람으로 태어나시는 것만으로도 만족하지 않으시고, 당신이 창조하신 그 사람들의 손에서 죽기까지 하셨다면, 신자들의 마음은 하느님의 은총에서 무엇인들 기대할 수 없겠습니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여 주신 미래는 위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이미 해주신 것, 지금 우리가 기념하는 그것은 더욱 위대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악인들을 위해 죽으셨을 때 그들은 어떤 상태에 놓여 있었고 또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주님이 먼저 악인들을 위해 죽기까지 하셨다면, 성도들에게 당신 생명을 주시리라는 것을 누가 의심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의 나약함이여!
왜 너는 우리가 언젠가는 하느님과 함께 살게 되리라는 것을 믿는 데 망설이는가?
이보다 훨씬 더 믿기 어려운 일이 벌써 일어났습니다. 즉 하느님께서 사람들을 위해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바로 말씀이 아니시겠습니까?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다.” 그런데 이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습니다.”
그분이 우리에게서 육신을 취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를 위하여 죽으실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육신을 취하셨기에, 불사불멸이신 분께서 죽으실 수도 있었고 멸하고야 말 것에다 생명을 주실 수 있었습니다.
그분은 먼저 멸하고야 말 인간의 것을 취하셨으므로 인간이 당신의 생명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우리는 본질상 생명을 얻을 능력이 없고 그분께는 본질상 죽음의 가능성이 없습니다.
따라서 그분은 우리와 놀라운 상호 교환을 이루셨습니다. 우리의 죽음은 그분의 것이 되었고, 그분의 생명은 우리의 것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하느님이신 주님의 죽음을 보고 수치심을 갖기는커녕 거기에 모든 신뢰심을 두고 그 죽음을 크게 자랑해야 합니다.
그분은 우리 안에서 찾으신 죽음을 취하심으로써 우리 스스로 가질 수 없는 그 생명을 당신 안에서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지극히 충실한 약속을 하셨습니다.
죄로 인해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죄 없으신 그분께서 죄인들을 위하여 겪으실 만큼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셨다면, 우리를 의화시키신 그분이 우리에게 의로움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약속하신 분이 진실하다면, 아무 죄 없이 악인들로부터 형벌을 견디어 내신 그분은 우리에게 성인들이 받는 상급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형제들이여,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셨다는 것을 용감하게 또 분명히 고백합시다. 망설이는 마음이 아닌 즐거운 마음으로, 수치심을 지니고서가 아니라 자랑스럽게 고백합시다.
이 점을 잘 이해했던 사도 바오로는 이것을 자랑의 근거로 삼았습니다. 실상 바오로는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와 함께 계실 때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 또는 우리처럼 사람이 되셨을 때 만물의 주인이 되셨다는 것과 같은 그리스도의 위대하고 신적인 많은 업적들을 회상하면서 자랑할 수 있었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바오로가 말한 것은 이것뿐입니다. “나에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는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우리는 늘 약하기 때문에 그런지, 혹시 주님께로부터 ‘벌을 받지나 않을까?’ 하고 가슴 졸이며 걱정합니다. 그런데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들려주시는 구세주는 우리 죄인들을 심판하시고 혼내시며 벌하시는 분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주 하느님의 말씀을 외칩니다.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이, 내가 선택한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그는 민족들에게 공정을 펴리라. 그는 외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며 그 소리가 거리에서 들리게 하지도 않으리라.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그는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 그는 지치지 않고 기가 꺾이는 일 없이 마침내 세상에 공정을 세우리니 섬들도 그의 가르침을 고대하리라.”(이사 42,1-4)
어릴 때 어머님이 해주셨던 말씀이 생각납니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하든 무슨 말을 하든 너는 네가 할 바를 다 하여라.” 우리가 매 순간 주 예수님께서 일러주시는 말씀 그대로 살지는 못하지만, 성령께 의지하여 주 에수님께서 비춰주시는 진리의 빛으로 겸허하게 걸어갑시다.
마리아의 향유
김정일 안드레아 신부님
오늘 요한 복음은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사건을 전하고 있는데, 이 기록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내용 바로 앞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예루살렘 입성은 주님 수난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기에, 흐름상 마리아의 발씻김 사건이 곧 일어날 주님의 수난과 관련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즉 예수님을 위한 잔치에서 라자로의 동생 마리아가 예수님 발에 향유를 부어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드린 것이 주님 수난을 예고한다는 겁니다. 주님을 위한 ‘잔치’는 ‘최후의 만찬’을 암시하고, 마리아의 ‘발씻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베푸실 ‘세족례’의 예형으로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마리아의 향유는 예수님의 발을 닦은 단순한 기름이 아니라 앞으로 우리 죄를 씻어낼 구원의 기름입니다. 바로 ‘마리아의 향유’를 통해 우리 구원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요한 12,7)고 하신 이유입니다. 우리는 저마다 ‘마리아의 향유’를 간직해야 합니다. 마리아의 향유가 ‘구원의 발씻김’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향유를 간직한다는 건 주님의 수난을 거룩하게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동시에 우리의 구원을 애타게 기다린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믿음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 영의 세상을 보고 듣는다. <요한 12, 1-11> 4월 10일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는 하느님을 믿고 따라 살 수 있는가?”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고 듣는 것이 다가 아닌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으며 보이는 것 이상을 보고, 듣는 것 이상을 듣고 살아야 더 드높은 이상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오늘 한 여인이 사랑하는 주님에게 존경과 사랑을 표현하는 것을 보고 듣는 것이 전부가 아닌데 반대파 사람은 주님 가까이 온 사람이 하는 행위만 보고 이상하게 여겼고 가까이 있는 제자는 값나가는 향유를 주님 발에 붓는 모습만 보고 “팔면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인데” 하며 보는 것만 보고 판단하고 말하는 사람에게 더 먼 데를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보이는 것만 보고 듣는 것만 듣고 판단하면 오류가 생깁니다. 보이는 것 듣는 것 이상의 것이 그 행위 속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오늘 여인의 행위만 보면 주님을 인간적으로 사랑하는 모습으로 보이지만, 그 행위 안에는 봉헌의 뜻이 감추어져 있으며 그 행위를 통해 “나의 주님, 나의 희망, 나의 전부”인 것을 깨닫게 합니다. 인간의 행위는 손짓, 발짓, 눈짓, 말 한마디, 몸놀림 안에 온갖 표현을 다 할 수 있으나, 그 행위 이전에 더 깊은 의미가 숨어 있습니다. 그래서 행위 하나만 보고 소리 하나만 듣고 이러니저러니 판단하는 것은 오류를 만들어냅니다.
제가 신학교 입학하고 시골에 살다가 서울에 가니 여학생들의 모습이 세련되고 아름답게 느껴져 길을 가다가 버스 안에서 여자를 쳐다보게 되어 고백성사 때 “여인을 바라보았습니다.” 첫 번째 말이었는데 몇 개월 지나서 ‘이래서 일생 독신으로 사는 사제가 되겠나?’ 생각하고 고백 신부에게 조용히 찾아가 상담하면서 “이래서 사제가 될 수 있습니까?” 하고 물으니 웃으시며 “아니, 하느님의 창조물이 아름답게 느껴져 보는 것이 무슨 죄냐?” 하시며 보면서 하느님을 찬미하는 마음 가지면 더 좋다고 하셔서 보는 것이 죄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아름다움 뒤에 주님의 손길을 보고 마음껏 보고 또 보았습니다.
지금도 아름다운 여자를 보면서 “당신은 아름답다고 서슴없이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지속적 거룩함이 내 안에 살아 있어야 합니다.
그 지도교수 신부님은 몇 년 후 결혼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기도 속에서 보고 듣고 하는 사람은 유혹에 빠지지 않고 견뎌낼 수 있으며 언제나 더 좋은 것을 향하여 나갈 수 있습니다. 저는 사제이면서 사랑받기를 원합니다. 하느님의 더 큰 사랑을 내 안에 느끼기 위해 사랑받기를 원합니다.
어제 부산에서 사목하시던 신부님이 수도원 원장 신부로 부임하셨는데 떠날 때 그곳에서 열렬히 신부님을 사랑하시던 사람들이 울면서 떠나보내셨다고 합니다. 이런 것은 지나가면 없어지지만, 신부님에게는 하느님 사랑에 더 열정을 낼 기회입니다.
보좌 생활하면서 임시 본당 신부로 6개월 있던 본당을 정식으로 본당 신부 발령받고 떠나는데 낙동강 변의 수많은 신자가 밤새껏 울었다는 소문을 듣고 떠나면서 저의 마음속에는 어디를 가든지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며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겠다고 결심하며 지금껏 살아왔습니다.
눈으로, 귀로, 마음으로 사랑하면서 하느님의 사랑이 각자 안에 성장하고 완성되도록 기도합니다. 제8처, 예루살렘 부인들이 울면서 주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주님을 보는 것을 묵상하면서 성주간 둘째 날을 지냅시다.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요한 12, 7)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소중한
마음의 기름을
간직하는
마음과 실천의
성주간이다.
사람에 대한
진심어린
예의가 필요한
마음의
시간이다.
사람은
사람을 통해
간직해야 할
마음이 된다.
마음 뒤에
또한 마음이
기다리고
있다.
기꺼이
마음의 중심을
우리에게
내어주시는
마음의
주님이시다.
사랑의 마음이
없다면
모든 것은
무의미할 것이다.
예수님은
무의미에
갇혀있지
않으시며
마음의
향유(香油)를
깨뜨리시고
나누신다.
마음은
나눌수록
향기롭다.
유다 이스카리옷의
삼백 데나리온의
돈과 바꿀 수 없는
향기로운 마음이다.
우리 마음을
되찾는
시간이다.
마음을
따라야 할
시간이다.
낮아지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참된 마음의
향기이다.
예수님의
향기로운 인격은
우리 인격을
살리기위해
십자가의 죽음을
택하신다.
삶이 향기로운
것은 깊이
깊숙이 간직한
참된 사랑의
마음을 나누기
때문이다.
마음과 마음이
합쳐지는
마음의 잔치
향기로운
향기의 잔치이다.
부활을 준비하는
가장 거룩한
마음의 성주간이다.
‘참 신기하죠. 내 고민엔 갈피를 못 잡고 허우적대면서 남의 고민을 들으면 해답이 너무도 선명히 보이고, 내 집 대청소를 할 땐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한데 남의 집 정리하는 거 도와주러 가면 너는 어떻게 그렇게 정리를 잘하냐는 소리를 들으니 말이에요.’(이석원, ‘우리가 보낸 가장 긴 밤’ 중에서)
언젠가 읽은 책의 한 구절입니다. 이 책의 내용처럼, 우리는 자기 자신을 잘 보지 못하면서 남은 너무나 잘 보는 것 같습니다. 내 눈이 나를 향해 있지 않고 남을 향해 있어서 그럴까요? 그래서 얼마나 많은 비판을 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자신의 비판을 가지고 남을 설득하려고도 합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전 분야에서 전문가들이 예측을 쏟아냅니다. 이 말대로 하면 모든 것이 잘 될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이 전문가의 예측은 실제로 50%도 맞지 않는다는 조사 결과가 있습니다. 전문가의 말도 정확한 예측은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전문가도 이런데 하물며 비전문가인 나의 말은 얼마나 맞을까요?
비판적인 시각이 이 세상을 발전시킨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비판적인 시각이 행복하게 만든 것은 아닙니다. 자기를 먼저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이 먼저 필요합니다. 그래야 세상을 향한 부정적인 시각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습니다. 이는 그의 겸손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먼저 머리에 향유를 붓지 않고 겸손하게 시중을 든 다음에야 그렇게 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이런 겸손에서 주님께서 받으실 고통과 시련을 위한 준비가 나오게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향유를 붓는 마리아의 모습에 유다는 신심을 가장하여, 자신이 나중에 예수님을 팔아넘길 때 그분 목숨에 매긴 값보다 향유를 더 값진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비판적인 시각으로 주님과 향유를 붓는 마리아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리아의 사랑 행위는 가난한 이들을 보살피는 일과 대립하는 행동으로 볼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자체로, 곧 그들 곁에 오래 계시지 않을 주님을 영광스럽게 한 행위로 보아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을 보살피는 일을 사랑의 실천으로 매우 중요하게 여기셨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을 섬기는 일이었습니다. 이를 제쳐 놓아서는 절대로 안 되기 때문에 섬기는 마음으로 예수님 앞에 선 마리아에게 당신의 몸을 맡기실 수 있었습니다.
부정적인 시각을 갖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특히 주님의 일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시각보다, 주님을 섬기는 데 최선을 다하는 마음으로 다가서야 합니다. 마리아처럼 주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습니다.
시간은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을 믿고 용기있게 앞으로 전진하며, 식별을 통해 하나가 되고,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꿈을 찾아내 실행해야 합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위해 준비해둔 길을 찾아내고, 그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프란치시코 교황).
넘어진 덕분에….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시인 아이다 미츠오의 ‘넘어진 덕분에’라는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넘어지고 쓰러진 덕분에 사물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실수와 실패를 반복한 덕분에 조금씩이지만 사람이 하는 일을 따뜻한 눈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몇 번이나 궁지에 몰린 덕분에 인간으로서 연약함과 칠칠치 못함을 진저리가 날 만큼 알게 되었습니다.
속고, 배반당한 덕분에 바보처럼 정직하고 친절한 인간의 따뜻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마주할 때마다 인생의 덧없음과 지금 여기 살아 있다는 사실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맛보게 되었습니다.
넘어진 것도, 쓰러진 것도, 속은 것도, 배반당한 것도 절대 유쾌한 일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 부정적으로만 생각한다고 해서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부정적인 상황에서도 긍정적인 측면을 발견하는 사람만이 새로운 삶을 삽니다.
진심으로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 사랑이 반드시 구체적인 행동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공생활 기간 동안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무한 리필 에너지 충전소같은 집이 있었으니, 베타니아에 위치한 절친 라자로의 집이었습니다. 베타니아는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약 15스타디온(약 2.8킬로미터) 떨어진 곳, 올리브산 동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오르내리실 때 마다 자주 라자로의 집에 들르셔서 숙식을 해결하곤 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종종 벌어진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과의 껄끄럽고 날선 대화로 끝내신 예수님께서는 지친 몸을 이끌고 베타니아로 내려오셔서 휴식을 취하셨습니다. 그런 날 밤에는 라자로, 마르타, 마리아와 마주 앉아 밤늦도록 포도주잔도 기울이셨을 것입니다.
손님 맞이의 총 책임자는 언제나 마르타였습니다. 그녀는 엄청나게 먹고 마셔대는 제자들을 위해 빵을 굽고 또 구웠습니다. 하루 온 종일 지지고 볶았습니다. 그들이 떠나고 나면 사흘씩 앓아 누울 정도였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본당 성모회장으로 적격인 인물이었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힘들고 굳은 일은 도맡아 하는 사람, 이웃의 필요성에 언제나 즉각적으로 응하는 사람이 마르타였습니다. 성격은? 착하고 성실했습니다. 그러나 때로 과격하기도 하고 쉽게 흥분도 했습니다.
한번은 예수님과 일행들 식사 준비에 바빠 죽겠는데, 동생 마리아를 아무리 찾아도 없었습니다. 나중에야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있는 마리아를 발견했습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마르타는 주저없이 예수님께 따집니다.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루카 복음 10장 40절)
마르타는 예수님이 두렵지 않았습니다. 힘들 때면 힘들다고 솔직하게 그분께 털어놓을 수 있는 용기를 지녔습니다. 그만큼 그녀는 예수님과 절친했습니다. 친한 오빠처럼 예수님을 각별히 신뢰했습니다.
그럼 마리아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동생을 향한 언니 마르타의 까칠하고 날선 발언을 통해 마리아의 성격을 대충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돌아가는 분위기 파악에 더딘 사람이었습니다. 살짝 ‘공주과’라고나 할까요?
산더미 같은 일감 앞에 언니가 쩔쩔 매고 있으면, 굳이 부탁하지 않아도 알아서 척척 도와주는 것이 당연할텐데, 동생에게는 그런 ‘촉’이 부족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마리아는 종종 존재 자체로 마르타에게 스트레스를 안겨주곤 했습니다.
마리아가 그렇게 된 이유가 있었으니, 바로 예수님 때문이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과의 운명적인 만남 이후 모든 것이 180도 바뀌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아 버리셨습니다. 이제 그녀에게 있어 예수님은 삶의 유일한 의미가 되어버렸습니다.
마리아는 이제나 저제나 예수님을 목빠지게 기다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나타나시기만 하면 만사 제쳐놓고 쪼르르 예수님께로 달려갔습니다. 가장 가까이에서 그분을 바라봤습니다.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수난을 앞둔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방문하셨을 때, 예수님을 향해 보여준 마리아의 흠모의 정은 절정에 도달했습니다.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다. 그러나 온 집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였다.”(요한 복음 12장 3절)
마리아는 자신의 긴 머리를 풀었습니다. 그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드렸습니다. 이는 당시 그야말로 ‘내밀한’ 관계가 아니라면 할 수 없는 가장 극진한 애정의 표현이었습니다.
주변사람들 오해사기 딱 좋을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개의치 않습니다. 이제 곧 떠나가실 예수님, 그리도 흠모했던 주님, 참 사랑이 무엇인지 깨우쳐주신 예수님의 큰 사랑 앞에 자신이 기울일 수 있는 모든 정성을 다합니다.
돌아보니 저 역시 하느님으로부터 참으로 많은 사랑을 받아왔습니다. 그런데 오늘 보여준 마리아의 행동을 바라보니 참으로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떠나가실 예수님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 재산, 마음, 정신, 목숨, 에너지, 삶 전체를 다 바치는 마리아입니다.
진심으로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 사랑이 반드시 구체적인 행동으로 표현되겠지요. 정성과 진심이 담긴 행동으로 말입니다.
성주간은 다른 무엇에 앞서 우리 죄인들을 향한 크신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하는 시기입니다. 이제 골고타 언덕을 향해 올라가실 예수님을 향해 우리의 정성과 마음을 표현하는 시기입니다.
감사 없는 사랑은 기름 없는 자동차, 실이 없는 바늘이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수난을 앞두시고 베타니아의 마리아로부터 비싼 향유로 발씻김을 받으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준 것에 대한 제자들 감사의 마음을 보여줍니다. 비록 제자들이 씻어주는 것은 아니지만 그분께 죄의 씻김을 받은 우리가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는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키우시는 목적은 당신처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기 전까지 제자들은 사랑할 능력을 갖추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감사함 없이는 참다운 사랑이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감사 없이 사랑하려는 시도는 기름 없는 자동차를 운전하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와 같은 어리석은 이를 대표하는 제자가 가리옷 유다입니다. 그는 마리아의 행위를 보고 이렇게 말합니다.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
장정만도 5천 명이나 되는 사람을 다 먹일 수 있는 빵이 2백 데나리온이면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향유 한 병에 3백 데나리온이라면 그 가치가 얼마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감사는 어쨌건 겸손한 봉헌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습니다.
요한은 감사 없이 이웃사랑만 강조하는 가리옷 유다의 정체를 밝힙니다.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도둑이었기 때문이다.”
남들이 들으면 가리옷 유다가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해주는 것처럼 들리지만, 하느님께 받은 사랑에 감사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리 사랑하려 해도 도둑밖에 될 수 없는 것입니다.
혹시 우리 삶 안에서는 이러한 일이 벌어지지 않습니까? 부부 사이에 사랑만 강조하며 감사는 잊고 살지 않습니까?
호랑이 남편과 아내 소의 이야기입니다. 호랑이 남편은 소 아내를 극진히 사랑합니다. 그래서 귀한 고기를 잡아 옵니다. 하지만 채식주의자인 소 아내는 남편이 자신을 무시하는 것처럼 느낍니다. 호랑이 남편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고기를 잡아 와도 식탁에 오르는 것은 항상 채소입니다. 자기를 토끼로 여기는 것 같아 기분이 상합니다.
상대에게 감사를 찾아내려 하기보다는 자신이 생각하는 사랑만 하려 했던 이 둘은 결국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혼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감사 없는 사랑은 실이 없는 바늘과 같습니다. 사랑한다고는 하지만 꿰매는 것은 없고 상처만 남습니다. 감사 없는 사랑은 기름 없는 자동차와 같습니다. 아무리 사랑하려 해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감사가 일어나게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사랑이 충만한 이로부터 사랑을 받아 감사의 마음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감사하면 남편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성당에 나오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께도 내 향유 옥합을 깨뜨릴 수 없다면 누구를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이미 좀 지난 이야기이지만, 요즘 같이 어려울 때 우리에게 잔잔한 감동과 좋은 영향을 미쳤던 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홍대 철인 7호 치킨집 사장’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부모를 여의고 몸이 아픈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던 두 형제는 치킨이 먹고 싶어 5천 원을 들고 서성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여러 치킨집에서 퇴짜를 맞은 상태였습니다.
그날 철인 7호 치킨집 사장도 코로나 여파 때문인지 그날 치킨을 한 마리도 팔지 못했고 그래서 월세도 밀려 시름에 잠겨있던 차였습니다. 바람이라도 쐬려고 뒷문을 열고 나가니 골목에서 이 두 형제가 대화하는 것을 듣습니다. 동생은 연신 “치킨, 치킨!”이라고 외쳐댔고 형은 5천 원을 꼭 쥔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치킨집 사장은 아이들에게 가게에서 가장 잘 팔리는 치킨 요리를 먹도록 해주었고 돈을 받지 않고 오히려 사탕을 주어 돌려보냈습니다. 그리고 배고플 땐 언제라도 찾아오라는 말도 해주었습니다. 동생은 그 이후에도 여러 번 치킨집을 찾아왔고 사장은 동생을 예뻐해 주며 미용실에서 이발도 시켜주었습니다. 이 사정을 안 미용실 사장님도 돈을 받지 않고 아이 머리를 깎아주었습니다.
거의 1년이 흐른 뒤 고등학생인 형이 이 사연을 편지에 빼곡히 적어 가맹점 대표에게 보냈고 그래서 이 사연이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가맹점 대표는 1년간의 월세와 천만 원의 물품 지원을 약속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돈쭐’을 내줘야 한다며 먹지도 않으면서 치킨을 시켜 돈을 기부하는 등 엄청난 돈 폭격을 가했습니다.
이에 박재휘 사장은 잠시 가게를 닫는다는 말을 하고 그동안 도와주신 것들에 자신도 더 보태서 더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 6백만 원을 기부했습니다. 자신이 한 것에 비해 너무 많이 받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는 “현재 많은 관심으로 인해 주문 폭주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밀려드는 주문을 다 받자니 100% 품질을 보장할 수 없어 영업을 잠시 중단합니다. 이른 시간 안에 다시 돌아오겠습니다.”라고 글을 남겼습니다.
가맹점 대표에게 편지를 보냈던 형은 그 편지에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저도 사장님처럼 어려운 사람들 도와주며 사는 멋있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형은 아무리 사랑을 하려 해도 세상은 불공평한 곳이란 믿음 때문에 사랑할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자아가 강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치킨집 사장님의 사랑을 받고는 그와 같은 사랑을 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는 자신의 향유 옥합을 깨뜨려 편지로 그 감사를 전했습니다. 이렇게 누구에겐가 나의 향유 옥합을 깨뜨릴 사람이 없다면 그런 상태로는 어떤 진정한 사랑도 나올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대표적인 인물은 셋입니다. 이 셋의 사랑의 단계는 이렇습니다.
첫째. 모기인 상태인 가리옷 유다입니다. 그는 사랑이라고 말하지만 사랑에 감사가 필요 없다고 여기는 이입니다. 모기는 항상 배고파서 감사의 마음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누구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야 합니다.
둘째. 아기로 사랑하는 마리아의 단계입니다. 마리아는 그리스도를 위해 향유를 깨뜨립니다. 이런 마음이라면 곧 이웃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마리아처럼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내어놓을 수 있도록 끊임없이 그분의 사랑에 감동하고 감사의 마음을 키워야 합니다.
셋째. 하느님 자녀인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그리스도는 이웃에게 감사의 마음이 솟아나게 만들어서 귀한 향유 옥합을 봉헌하게 만드십니다. 사랑하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사랑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철인 7초 치킨 사장님처럼 감사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느 단계에 있는지요? 감사의 마음이 솟아나지 않는 사람에게는 사랑이 불가능함을 명심하고 나도 이웃도 사랑이 솟아나게 합시다. 이를 위해 십자가를 지셔야 하겠지만 오늘 복음은 십자가를 통해 오는 부활의 행복을 미리 보여주고 있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미얀마에서 군부 쿠데타가 발생했습니다. 군사독재를 바라지 않는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서 시위를 하고 있습니다. 군부는 같은 국민의 가슴에 총을 겨누었고, 많은 사람들이 사망하였습니다. 교황님께서도 폭력사태를 안타까워 하셨습니다. 대화로 문제를 해결 하도록 촉구하였습니다. 국제사회도 한 목소리로 폭력사용 중지를 호소하고 있습니다. 젊은 학생들이 대한민국 대사관 앞에서 무릎을 꿇고 도와달라고 외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대한민국은 군사독재 정권을 국민의 힘으로 끌어내렸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 역시 민주주의의 제단에 희생의 피를 흘렸기 때문입니다. 386세대인 저도 거리에서 최루탄 냄새를 맡았습니다. 백골단에 의해서 매 맞고 잡혀가는 학생들을 보았습니다. 광주의 참혹한 모습을 영상으로 보았습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미얀마에 더 이상의 희생이 생기지 않기를 기원합니다. 국제사회의 도움으로 미얀마에 민주주의의 봄이 오기를 기도합니다.
오늘은 성주간 월요일입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두 개의 깃발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는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무고한 사람을 죽이려는 사탄의 깃발입니다. 수석 사제들은 아무런 잘못이 없는 라자로를 죽이기로 결의합니다. 라자로 때문에 많은 유다인이 떨어져 나가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미얀마의 군사 정권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국민의 힘으로 선출된 국회의원들을 감금했습니다. 비폭력으로 저항하는 시민들에게 총을 겨누었습니다. 41년 전에 한국에서도 무고한 시민들에게 발포명령을 한 집단이 있었습니다. 민주주의를 외친 사람들을 폭도로 몰아 잡아가고 고문한 집단이 있었습니다. 2,000년 전에도 있었습니다. 복음을 선포하였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집단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전체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죽는 것이 예언이라고 말했던 사람도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자리를 보존하기 위해서 무고한 사람의 희생을 강요하였습니다.
다른 하나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희생과 죽음까지도 받아들이는 그리스도의 깃발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그는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이들을 감옥에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을 감방에서 풀어 주기 위함이다.” 얼마 전에 작고하신 고 백기완 선생님은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해서, 민중을 위해서 평생 고난의 길을 걸었습니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민주주의를 위해서 투쟁하였습니다. 그분의 글에 곡을 붙인 노래가 ‘임을 위한 행진곡’입니다. 장소는 달라도 독재와 폭력에 저항하는 곳에서는 ‘임을 위한 행진곡’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던 키레네 사람 시몬도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피와 땀을 닦아드린 베로니카도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에 있었습니다.
오늘부터 우리는 성주간을 시작합니다. 우리는 어느 깃발 아래에 있어야 할까요? 지금 내가 있는 곳은 어느 깃발 아래일까요?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이사야 예언서는 주님의 ‘주님의 종의 노래’가 네 개가 됩니다. (42,1-9; 49,1-7; 50,4-11;52,13-53,12)
오늘 독서는 첫 번 째 노래입니다. 하느님의 종의 소명에 대한 것이 주제이지요.
그의 목소리는 외치지도 않은 낮은 소리이지만 세상을 구원하며, 또한 소외된 이들을 기억하며 정의를 바로 세웁니다.
“그는 외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며 그 소리가 거리에서 들리게 하지도 않으리라.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그는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이사 42,2-3)
예언서 저자는 야훼 종의 소명을 이어서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를 빚어 만들어 백성을 위한 계약이 되고 민족들의 빛이 되게 하였으니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이들을 감옥에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을 감방에서 풀어 주기 위함이다.”(6-7절)
야훼 종의 노래는 메시아에 대한 주제입니다.
셋째 넷째는 수난 받는 메시아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성경을 삶의 가장 큰 바탕으로 여기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누구보다도 그리스도를 알아 봐야 할 것이지만 그들이 오히려 메시아를 박해하고 있지요.
왜 그들은 메시아를 못 알아볼까요?
여기에는 명확한 답이 없습니다. 있다해도 단순한 것이 아니고 복합적이기 때문에 이 또한 답이 아닙니다.
율법의 세계에서 벗어나서 살았던 이방인은 오히려 그리스의 많은 사람들이 보고 믿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으로 선택받았다는 선민사상, 율법 다시 말해서 성경을 정통적인 해석 방법으로 이해할 뿐 아니라 전문 지식이 있다는 특권의식이 오히려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게 하는 것일까요?
그들에게는 겸손함과 자비가 없었고 오히려 완전함과 현실주의만이 남아 있었던 것이겠지요.
파스카 축제 엿새 전에 예수님께서는 베타니아 마을로 가십니다.
그곳은 마르타와 마리아 그리고 그의 오라버니 라자로가 있는 곳입니다.
라자로는 일전에 죽었는데 예수님께서 살리신 것입니다. 예수님뿐만 아니라 죽었다가 부활한 라자로를 보려고 많은 유대인들이 그곳에 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온 유대인들 때문에 주님 뿐 아니라 라자라까지도 죽음의 그늘이 드리워지는 것입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께서 죽은 라자로를 살리신 일 때문에 유대 공동체를 떠나 예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수석 사제들은 유대인 공동체가 걱정이 되었던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뿐만 아니라 라자로까지도 죽이려고 마음을 굳혔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위한 잔치에 참여하고 있었고 마르타는 시중을 들고 라자로는 주님과 함께 식탁에 앉은 이들 사이에 계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를 가지고 와서 예수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닦아 드렸던 것입니다. 향유 향이 온 집안으로 번저 나갔습니다.
유다 이스카리옷은 비싼 향유를 낭비하는 것 같아 아주 못 마땅해 하는 표정을 짓습니다.
주님께서 알아채시고 말씀하십니다.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요한 12,7-8)
이미 주님께서는 당신께서 종교 지도자들에게 손에 넘어가 돌아가시리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요한은 ‘장례 날을 위하여’라고 설명하지만 마태오도 ‘이 여자가 내 몸에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준비하려고 하는 것이다.’(마태 26,12)라고 하였고 마르코 역시 ‘이 여자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였다.
내 장례를 위하여 미리 내 몸에 향유를 바른 것이다.’(마르 14,8)라고 명시하였습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소외된 이들을 가까이하며 베푸시는 대목은 많아도 정작 당신을 위해 받으시는 것은 당신 몸에 향유를 바르는 것과 당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입성을 하실 때 사람들로부터 사람들로부터 환호를 받으신 것이라 하겠습니다.
구약의 대표적인 이사야 예언서의 ‘주님의 종의 노래’와 한 여인이 부은 향유를 통해서 주님의 죽음은 예시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 계획에 따라 주님께서는 준비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준비된 죽음’이 성주간을 지내는 오늘의 주제가 되겠습니다.
받으면 되겠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그는 외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며 그 소리가 거리에서 들리게 하지도 않으리라.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그는 지치지 않고 기가 꺾이는 일 없이 마침내 세상에 공정을 세우리라."
가끔 저에게 갈등이 생기는데 참 별것 아닌 것을 가지고 갈등을 한다고 할 수 있지만 선물로 받은 화분에 말라비틀어졌거나 비실비실한 가지가 있으면 잘라내고 싶은데 그 가지를 보고 어떻게 할까 갈등을 하는 겁니다.
내 눈에 거슬린다고 잘라내는 것이 그 가지에 대단한 폭력인 것 같고, 그 가지가 비록 아무것도 아니라고 할 수 있지만 그것을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저의 무도함이 마음에 걸리고,설사 그것이 아무것도 아닐지라도 제 안에 내 눈에 거슬리면 제거하고픈 폭력성이 있다는 것이 마음에 걸리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얘기했지요. 밭 가장자리의 잡초라고 생각되는 풀조차도 제거하지 말라고.
사실 그것은 잡초가 아니고 엄연한 생명이고 귀한 것인데 내 기호에 따라 또는 내 필요에 따라 내가 잡초라고 여기는 것이지요. 잡놈들도 그 어머니에게는 귀한 자식인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웬만하면 다 잡놈과 잡초로 만드는 인간이 있고, 반대로 온갖 잡초를 다 연구하여 그것의 이름을 알고, 알뿐 아니라 그것을 잘 가꾸고 키우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은 던지는 것 자체가 너무도 우습겠지만 그들 중에 누가 더 사랑의 사람이고 누가 오늘 이사야서가 얘기하는 주님의 종의 사랑에 가깝겠습니까? 잡초가 아니라 소중한 풀로 여기고 가꾸는 사랑이 주님 사랑에 가깝지요.
그러니 이런 사랑에 가깝도록 저의 사랑도 한걸음 다가갔으면 좋겠습니다. 비록 지금은 가깝지 않지만 점차 주님 사랑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 말입니다.
그런데 착각인지 모르지만 제 생각에 나이를 먹을수록 제가 이 사랑에 점점 가까이 다가가는 것 같습니다.
옛날에는 제 눈이 도끼눈이라고 했는데 조금은 부드러워지고, 주님의 종은 "외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며 그 소리가 거리에서 들리게 하지도 않으리라"고 하는데 저도 이제는 소리치지 않으며 분노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지치거나 기가 꺽이지 않는 주님의 종과 달리 제가 지친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제 눈이 부드러워지고 큰 소리 치지 않고 분노하지 않음이 주님 사랑에 가까이 다가갔기 때문이 아니라 기가 꺽이고 힘이 딸려서 그런 것이 아닌지 생각되는 것입니다.
실로 주님 사랑에 가까이 다가간 것이 아니라 노쇄 현상일 뿐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하겠습니까?
우선 힘을 아껴야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가 한 것처럼 없는 힘을 엉뚱한 곳에 쓰지 말고 오직 주님 사랑에 쏟아야겠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힘을 얻어야겠습니다. 엉뚱한 곳에 힘을 빼지도 말아야겠지만 힘을 얻어야겠다는 말입니다.
이제 육신의 힘이나 인간적인 힘이 전보다 더 있을 수 없지만 그러기에 오히려 하느님으로부터 힘을 받아 영적인 힘이 생겨야겠습니다.
오늘 주님의 종이 지치지도 기가 꺽이지도 않은 것은 하느님께서 당신 영을 주셨기 때문이니 저도 이제는 더더욱 주님의 영을 받으면 되겠습니다.
주님의 종. - 종servant과 섬김service의 영성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의 종’이란 말이 참 친근하게 와닿습니다. 무엇보다 감동적인 고백은 마리아의 다음 고백일 것입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마리아뿐 아니라 참으로 믿는 이들의 신원은 ‘주님의 종’입니다. 주님의 종의 원조는, 전형적 모범은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종하면 연관되어 떠오르는 단어가 섬김입니다. 종servant과 섬김service은 같은 어원이라 섬김의 종으로 정의할 수도 있겠습니다.
종과 섬김하면 떠오르는 생생한 일화가 있습니다. 수십년이 지나도 여전히 기억에 생생한, 강론에도 누차 인용했던 일화입니다. 수도원 초창기 90년대 초반쯤될 것입니다. 한밤중에 피정신청 전화를 받았다가 퉁명스런 제 전화 답변에 분노한 신자분에게 사과하며 무마한 후 순간 깨달았던 진리입니다.
“아, 나는 서비스업에 종사하고 있는 수도자구나! 섬김의 직무, 서비스업이다. 서비스업은 3개 요건을 갖춰야 되겠구나. 첫째, 사람이 좋고 친절해야 하고, 둘째, 실력이 있어 유능해야 하고, 셋째, 내외적 환경이 좋아야 하겠구나!”
하는 자각에 우리의 영성이 있다면, 종servant과 섬김service의 영성이 있을 뿐이라고 강조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러니 넓고 깊게 보면 우리 믿는 이들은 모두 섬김의 직무인 서비스업에 종사하고 있다해야 할 것입니다. 음식점, 병원의 서비스업을 보면 담박 드러나는 서비스업의 세개 요건, ‘좋은 사람, 좋은 실력, 좋은 환경’이요, 저는 이런 세개의 잣대로 우리 수도원을 점검해보곤 했습니다.
참으로 주님의 종의 모범은, 종과 섬김의 영성의 모범은 예수님이십니다. 복음에서도 누차 강조되는 이런 주님의 면모입니다. 마르코 복음중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종과 섬김의 영성이 요약된 고백입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로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르10,44-45)
이런 예수님의 ‘종과 섬김의 영성’의 모범이 결정적으로 드러나는 장면은 성목요일 만차미사때 보게 될 무릎을 꿇고 엎드려 제자들의 발을 씻겨 드리는 장면일 것입니다. 아마 예수님의 주님의 종으로서 신원의식에 오늘 제1독서의 이사야서의 주님의 종의 첫째 노래가 결정적 영향을 주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예수님뿐 아니라 예수님을 닮아 주님의 종으로 살고자 하는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이, 내가 선택한 이, 내 마음에 드는 이, 나의 영을 준 이다. 그는 외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며, 그 소리가 거리에서 들리게 하지도 않으리라.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꺽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그는 지치지도 않고 기가 꺾이는 일이 없이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
얼마나 매력적인 주님의 종인지요, 섬세하고 자비로우며 겸손하고 온유하며 존중과 배려, 공감의 인물이며 한결같이 성실한, 결코 약한 모습이 아닌 외유내강의 모습입니다. 그대로 본받고 싶은 예수님에 대한 묘사처럼 생각됩니다. 당신의 종들을 파견하시는 하느님의 모습도 우리에게는 감동적입니다.
“하늘을 창조하시고 그것을 펼치신 분, 땅과 거기에서 자라는 온갖 것들을 펴신 분, 그곳에 사는 백성에게 목숨을, 그 위를 걸어다니는 사람들에게 숨을 불어 넣어 주신 분,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참으로 이런 하느님을 몰라 무지와 교만에 눈먼 사람들이요, 이런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참된 용기와 힘의 원천임을 깨닫습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종의 묘사도 고무적이고 감동적입니다. 예수님은 물론 주님의 종들인 우리 모두에 대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주님인 내가 의로움으로 너를 부르고 네 손을 붙잡어 주었다. 내가 너를 빚어 만들어 백성을 위한 계약이 되고 빛이 되게 하였으니,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이들을 감옥에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을 감방에서 풀어주기 위함이다.”
주님의 빛과 해방의 일꾼으로 세상에 파견되는 주님의 종들인 우리의 신원을 새롭게 확인하게 됩니다. 누구보다 이런 주님의 종의 결정적 실현이자 모범은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이런 예수님께 감격한 오늘 복음의 마리아의 처신이 우리에게 끝없는 영감과 감동을 줍니다. 파스카 축제를 앞두고 예수님을 위한 잔치를 베풀고 예수님을 환대하는 베타니아의 라자로, 마르타, 마리아 삼남매의 모습도 참 아름답습니다.
여기서 극단적 대조를 이루는 마리아와 유다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깊이 사랑했던 주님의 종, 환대와 섬김의 사랑의 관상가 마리아요, 영적으로 눈먼 물질주의자 유다입니다. 누가 진정 주님의 종인지 담박 드러납니다. 다음 마리아에 대한 묘사는 한폭의 그림처럼 아름답고 향기롭습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다. 그러자 온 집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였다.’
그대로 마리아의 사랑의 향기를 상징합니다. 사랑은 계산하지 않습니다. 온몸과 온맘으로 사랑의 환대, 사랑의 섬김에 올인하는 마리아입니다. 이 또한 우리에게 기막힌 회개의 표지가 됩니다. 문득 여기에서 영감을 받아 제자들의 발을 씻겨 드린 예수님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다음 유다와는 얼마나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지요!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대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
이에 대한 예수님의 마리아에 대한 변호가 참 기민하고 지혜롭습니다.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 않을 것이다.”
새삼 사랑은 분별의 잣대임을 깨닫습니다. 결정적 사랑과 섬김의 순간에 예수님을 온몸과 온맘으로 환대한 주님의 종, 마리아요 이를 인정하신 주님입니다. 참으로 우리가 주님의 종으로 섬김의 삶에 항구하고 충실할 때 외로움이나 그리움은 흔적없이 사라지고 주님의 현존감에서 오는 편안함, 충만함이 우리를 가득 채울 것입니다.
새삼 외로움이나 그리움에 대한 근원적이며 본질적 대책은 주님의 종으로서 섬김의 삶뿐임을 깨닫습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종, 마리아처럼 예수님을 온몸과 온맘으로 환대하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의 종이 되어 한결같이 섬김의 삶에 충실하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물질 중심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가치의 변화는 물질적 가치에 집중되고 있다. 정신적 가치가 쇠퇴될 때, 인간성은 급속도로 피폐해진다. 눈만 뜨면 사람은 사랑보다 미움과 증오를 선택해 그릇에 넣고 비빈다. 거기다 뒷담화로 음해하고 조롱과 비난하는 양념을 친다. 얼굴 표정은 그럴싸 한데 하늘의 표징을 입은 사람까지 죽이기로 작정한다. 라자로를 죽이기로 결의하였다. 인기가 자기에게서 그 사람에게 수평이동하여 존재감은 잃을까 두렵기 때문이다.
‘수석 사제들은 라자로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 라자로 때문에 많은 유다인이 떨어져 나가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이다”(요한12,10-11). 수석사제들은 예수님께서 쓰신 선의의 도구 마저도 용납하지 않는다. 하느님에게서 인간으로,인간은 금수가 되어 인간으로의 플레이가 더티 플레이로 하락했다. 일찍이 그런 것은 없었다. 위로 신분 상승이 되면 될수록 금수에서 인간으로 그리고 인간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야 하는데 사람도 아닌 구더기가 되어갔다. 정신적 가치는 순수성을 잃고 점점 더 물질적 가치로 옮겨가 인간이 추잡해졌다.
인성이란 품성이 인자해지고 믿음과 덕이 넘치고 사랑이 넘치는 인간으로의 품격이 되어야 했다. 그런데 어떤가? 신분상승으로 거짓말만 늘고 남 잘되는 꼴 보기 싫어 음해하여 철저히 죽이는 일만 한다. 윗물이 맑아야 하는데 오염된 물이 흘러 내리며 전체를 썩게 만든다. 유다 이스카리웃은 물질적 가치의 대표적 중심 인물이다. 본심을 철저히 왜곡했다. 마리아가 지닌 순 나르다 향유 때문에 그의 마음을 적나라하게 보게 된다. 예수님은 이스카리웃에게 이 값진 나르드 향유는 내 장례날 사용할 값진 향유라고 하시며 내버려 두라 이르신다. 유다 이스카리웃은 예수님의 본심과 마리아의 갸륵한 마음을 읽고 마음을 곱게 써야했다. 그런데 그는 자기 이익을 걱정했다. 이것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준다면? 그랬으면 좋으련만 마음에도 없는 음흉의 헛소리가 아니던가? 은전 30량을 탐하고 있었다.
연일 공무원, 땅투기로 폐가, 흉가로 전락한다. 귀가 있으면 알아 들어라.
마리아의 지극정성 자세가 갸륵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향유 이름과 현장상황이 아주 잘 표현된 점에서 믿음이 절로 생깁니다.
라자로의 부활소문에 찾아온 많은 친구들과 수석 사제들이 모였습니다.
나흘 전 죽은 오빠 되살리신 예수님께 너무 감사해서 최고대접 했겠죠.
예루살렘 수석 사제들과 유다스는 예수제거로 이미 내통돼 있었다네요.
사람들의 속 모르면 몰라도 훤희 아시는 예수님의 태도는 참 의젓했죠.
예수님 소문에 놀라 베타니아에 축하하러온 라자로 친구들이 멋집니다.
예수님의 무덤까지 연장되는 동생 마리아의 지극정성 마음이 기특하죠.
예수님 다 아시는 재물 밝히는 정신 버리고 향유든 마리아 닮아갑시다.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도둑이었기 때문이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파스카 축제 엿새 전에 라자로와 마르타와 마리아가 사는 베타니아로 가셔서 잔치에 참여하셨습니다. 그 때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리자 유다 이스카리옷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 복음서의 저자는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도둑이었기 때문이라고 전합니다.
유다 이스카리옷의 경우엔 마리아가 향유를 주님이신 예수님의 발에 붓고 닦아드리는 숭고한 의미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향유의 가격만을 수치적으로 계산하였습니다.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하느님의 일을 함께한다는 것은 수치적으로 계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를 들어 우리의 목숨이 수치적으로 계산될 수 없는 고귀한 것과도 같은 맥락입니다. 곧 우리가 하는 하느님의 일은 그렇게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나의 존재에 대해서 감사드리며 다시 주인이신 하느님께 내가 가진 것을 돌려드리는 봉헌의 의미를 지닌 고귀한 행위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고귀한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그것을 세상의 가치로 계산하려고 한다면 참 어리석은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인간적으로 계산이 들어갈 때 하느님의 일은 할 수 없어집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하느님의 일은 그저 마냥 손해 보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인간적인 계산만을 튕기는 이에게 하느님 나라의 행복은 존재하지 않고 그저 장사판의 돈놀이만 존재할 뿐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추구하고 있는지 아니면 장사판의 돈놀이를 하고 있는지 스스로 성찰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도둑이었기 때문이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밥은 먹고 가렴>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랑하는 아들이
주섬주섬 짐을 챙깁니다
군경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유혈이 낭자한 시위현장으로
떠나기 위함입니다
다소 어두운 표정으로
말없이 짐을 싸고 있는
아들 곁에 엄마가 있습니다
아들을 말리지 않습니다 다만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를
따뜻한 집밥을 차리며 말합니다
밥은 먹고 가렴
많이 먹고 힘내렴
네가 돌아오든 돌아오지 않든
엄마는 네가 자랑스럽단다
언젠가 반드시
어느 누구도 어느 무엇도
결코 갈라놓을 수 없는
감격스러운 만남으로 이어질
가슴 미어지게 아름다운 헤어짐입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나르드 향유로 도유되신 일화에 담긴 다양한 의미를 전달하십니다.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다."(요한 12,3)어제 우리가 들은 마르코 복음사가의 도유 기사를 기억해 보면, 어제의 복음에서는 어떤 여자가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지요.(마르 14,3) 그런데 오늘 베타니아의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습니다. 둘 다 매우 값비싼 순 나르드 향유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지요.
두 도유 사건 모두 당신의 장례를 준비하는 예식이라고 예수님께서 친히 밝히셨습니다. 마르코 복음의 여인은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었고, 요한 복음의 마리아는 발에 부음으로써 본래 시신의 온 몸에 바르는 향유 예식을 저마다의 신학 안에서 상징하고 있지요.
베타니아의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아드리면서, 이로써 자신의 겸손과 사랑의 심정을 극대화해 드러낸 것이 아닐까 추측해 봅니다.
"임금님이 잔칫상에 계시는 동안나의 나르드는 향기를 피우네."(아가 2,12)나르드는 인도에서 나는 값비싼 향유로서 사랑의 매혹제로도 쓰인다고 합니다. 그토록 값진 향유를 고른 마리아에게서 예수님께 최고의 예를 갖추려는 애틋한 마음과 함께, 아가 신부의 뜨거운 사랑의 심경까지 느껴집니다.
제1독서는 주님의 종의 첫째 노래를 들려 줍니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이사 42,1)하느님께서 주님의 종인 메시아, 곧 그리스도에게 영을 부어 주십니다. 영은 기름부음으로 주어지지요. "사무엘은 ... 그에게 기름을 부었다. 그러자 주님의 영이 다윗에게 들이닥쳐 그날부터 줄곧 그에게 머물렀다."(1사무 16,13)는 다윗의 도유 기사에서 보여지듯, 예수님도 주님께서 움직이신 한 여인의 행위를 통해 메시아의 결정적 사명에 한층 더 가까이 다가가신 것입니다.
"백성을 위한 계약이 되고, 민족들의 빛이 되게 하였으니"(이사 42,6)주님의 종은 하느님의 영을 받아 구원자로서의 사명을 펼칩니다. 예수님도 백성을 위한 "새 계약"이 되셨으며, 모든 민족을 비추는 "빛"이 되십니다.
다시 복음으로 돌아옵니다.
"온 집 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였다."(요한 12,3)향기가 풍겨내는 냄새는 공기를 타고 경계를 넘어 집 안의 온 공간마다 스며듭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맺으신 "새 계약"도 세상이 구획 지어 놓은 모든 구분의 경계를 넘어서지요. 민족과 인종과 성별과 문화를 넘어 그리스도의 향기로 퍼져 나갑니다.
그리고 "빛" 또한 독점하거나 꽁꽁 감추어 둘 수 없는 특성을 지닙니다. 빛은 어느 틈엔가로 새어들어 와서 결국 모든 이에게 보여집니다. 점점 전달되고 퍼져나가 어둠을 물리치지요. 우리가 고대하는 부활의 빛 또한 그러합니다.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해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요한 12,7)예수님은 사랑 앞에서는, 사랑을 가로막는 인간의 이성과 논리와 합리성을 유예하라고 명하십니다. 다만 장례날까지라도 말이죠.
예수님이 잘 나가고 명성을 떨치며 승승장구할 때 곁을 지키며 과시하던 애정은 진정한 사랑에 못 미치는 수준이었음을 우리는 수난기를 통해 절감했지요. 예수님을 향한 뜨겁고 애절한 진짜 사랑은, 처절한 실패와 죽음의 현장에 이르기까지, 또 맥없이 숨을 놓아버린 가련하게 창백한 시신에게까지 간직되고 베풀어져야 하는 진정성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동반하는 이 성주간에 더욱 뜨겁게 그분께 사랑을 바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행여라도 사랑 아닌 것을 사랑인 척 포장하지 않기를, 사랑이 시키는 일을 가로막지 말기를, 사랑이 원하시는 일에 충심을 다할 수 있기를, 그리하여 이 무겁고 어둡고 슬픈 시간이 사랑으로 위로받을 수 있기를 빌어 봅니다.
성주간 월요일, 오늘은 그동안 간직해 온 벗님만의 귀한 사랑의 향유를 주님께 아낌없이 부어드리는 낭비의 날이 되시길 바랍니다. 주님께라면 여러분의 사랑을 그분만 아시도록 살짝 '플렉스(flex,과시)'해도 된답니다! 베타니아의 마리아처럼...
남는 것은 가난한 이들에게 주라.
-아우구스티누스-
이 일에 담겨 있는 신비를 살펴봅시다. 여러분 가운데 진정으로 충실한 이가 되고 싶은 사람은 누구든, 마리아가 그랬듯이 값진 향유를 주님의 발에 부으십시오. 그 향유는 의로움이며, 따라서 그것은 [정확히] 한 리트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비싼 순나르드 향유입니다. 요한이 그것을 ‘순’(pistici)이라고 표현한 데서 우리는 그것이 값진 이유가 산지에 따른 것임을 추론해야 하지만,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것은 성사적 상징과 아주 잘 맞아떨어집니다. 이 그리스 낱말의 어원(pistis)]은 ‘믿음’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의로움을 행하고자 합니다. “의로운 이는 믿음으로 살 것이다”(로마 1,17)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발에 기름을 부으십시오. 선한 삶을 삶으로써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십시오.
여러분의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으십시오. 여러분에게 남는 것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주님의 발을 닦은 것입니다. 머리카락은 몸에서 남는 부분이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풍족한 여러분에게는 사용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에게는 남는 것이지만 주님의 발에는 필요합니다. 아마 이 지상에서 주님의 발은 지금도 궁핍 속에 있을 것입니다.
그분께서 하신 또 다른 말씀,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는 당신의 지체에 관한 말씀 아니겠습니까? ‘너희는 너희에게 남는 것을 주었지만, 내 발에 아주 고마운 일을 하였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다.>
송영진 모세 신부님
<성주간 월요일>(2021. 3. 29. 월)(요한 12,1-11)
“예수님께서는 파스카 축제 엿새 전에 베타니아로 가셨다. 그곳에는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라자로가 살고 있었다. 거기에서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베풀어졌는데, 마르타는 시중을 들고 라자로는 예수님과 더불어 식탁에 앉은 이들 가운데 끼여 있었다. 그런데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다. 그러자 온 집 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였다(요한 12,1-3).”
이 이야기 앞에는 예수님께서 죽은 라자로를 다시 살리신 이야기가 있습니다(요한 11,38-44).
그래서 베타니아에서 베풀어진 잔치는, 예수님께서 라자로를 다시 살리신 것에 대해서 감사드리고, 동시에 라자로가 다시 살아난 것을 축하하기 위한 잔치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다면, 마리아가 향유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머리카락으로 닦아 드린 일은, 오빠를 다시 살려 주신 것에 대한 감사의 뜻일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죽은 라자로를 다시 살리신 일 때문에 최고의회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했고, 수배했다는 이야기도 앞에 있습니다.
“그날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요한 11,53).”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누구든지 예수님께서 계신 곳을 알면 신고하라는 명령을 내려 두었다(요한 11,57).”(최고의회는 예수님을 체포하려고 공개적으로 지명수배 했습니다.)
<마리아도 최고의회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했다는 것과 또 예수님을 체포하려고 공개적으로 지명수배 했음을 전해 들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죽음의 시간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음을 예감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마리아는 그런 상황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또는 자기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어떻든 비싼 향유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은 일은 자기 나름대로 예수님에 대한 자신의 존경심과 사랑을 최대한으로 표시한 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 가운데 하나로서 나중에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 이스카리옷이 말하였다.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도둑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돈주머니를 맡고 있으면서 거기에 든 돈을 가로채곤 하였다(요한 12,4-6).”
복음서 저자는 유다가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도둑이었기 때문에” 마리아의 행동을 비난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설명은 유다가 ‘돈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설명입니다. 유다는 마리아의 행동을 ‘쓸데없는 일에 돈을 낭비하는 행동’으로 생각했습니다.(오늘날에도 안 믿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신앙인들의 신심 행위를 “쓸데없는 일에 돈과 시간을 낭비하는 일”로 생각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유다가 돈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은, 돈 외에는 관심이 없었다는 뜻인데, 아마도 그는 예수님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는 최고의회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한 일에 대해서도, 또 예수님을 체포하려고 공개적으로 지명수배한 일에 대해서도 관심 갖지 않고 돈에만 관심을 가졌을 것입니다.
반면에 마리아는 오직 예수님만 생각하고 있었고, 예수님에게만 온 마음을 쏟았습니다.그렇다고 해서 마리아가 예수님 외에는 그 어떤 것에도, 가난한 이들에 대해서도 관심 갖지 않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만일에 마리아가 가난한 사람들을 외면하고 자기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었다면,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옹호해 주시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여기서 복음서 저자의 설명은, “마리아가 한 일은 향유 가격으로 판단할 일이 아니다. 그 일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라는 것을 강조하는 설명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요한 12,7-8)”
마리아가 예수님의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더라도, 예수님의 장례를 의식하고서 향유를 준비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즉 장례를 미리 치른다는 생각을 하고서 그런 행동을 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리아의 행동을 예수님께서 당신의 장례에 연결해서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 입장에서 ‘해석’하신 것입니다.(마리아의 의도를 대신 설명하신 것이 아니라.)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는 “마리아를 비난하지 마라.”입니다.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라는 말씀에는, “마리아의 행동은 내 장례를 상징한다.” 라는 뜻과 “내 장례 때에 마리아의 행동을 기억하여라.” 라는 뜻이 모두 들어 있습니다.
마리아는 향유를 이미 전부 다 예수님의 발에 부었기 때문에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라는 말씀은, 글자 그대로 기름을 간직하라는 뜻이 아니라, 마리아의 행동을 기억하라는 뜻으로 해석됩니다.(유다는 마리아의 행동을 ‘쓸데없는 일에 돈을 낭비하는 행동’으로 생각하고 비난했지만, 예수님께서는 ‘훌륭하고 거룩한 행동’이라고 옹호하셨습니다.)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이라는 말씀은, 가난한 이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일은 평소에 늘 해야 하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가난한 이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일’을 마리아가 평소에 늘 잘하고 있었음을 암시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신앙인의 ‘하느님 사랑 실천’과 ‘이웃 사랑 실천’은 하나로 일치되어 있어야 합니다.
마리아는 그렇게 두 사랑의 실천이 일치되어 있는 참된 신앙인이었을 것입니다.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특별한 상황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불우이웃 돕기’를 중단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또 특별하고 예외적인 비상 상황이니까 특별한 지출이 필요하다는 뜻도 아닙니다.
이 말씀은, “지금은 나의 수난과 죽음에 더욱 집중해야 할 때이고, 동참해야 할 때이다.” 라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나를’, 또 ‘우리 모두를’ 살리기 위한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의미를 더욱 깊이 묵상하고, 그 일에 동참하는 것은 ‘내가’, 또 ‘우리 모두가’ 생명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함께’ 해야 하는 일입니다.
‘가난한 이들’과 ‘가난하지 않은 이들’을 구분하는 것은 불필요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목숨을 바치신 것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살기
남창현 T,아퀴나스 신부님
중년이 되니 겪게 되는 일 중 하나가 주변 사람들의 부모님이 하나 둘씩 세상을 떠남을 목격하는 것입니다. 동기 신부들 중에도 부모님이 이미 세상을 떴거나 병환 중에 계시는 분들이 적잖이 계십니다. 투병 중인 어머님을 둔 동기 신부가 지난 성탄절에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번이 어머님과 보내는 마지막 성탄이 될 수도 있겠어. 그래서 어머니와 함께 미사를 봉헌하기로 했다’라며 본가를 갔습니다. 그 신부가 얼마나 정성스럽게 어머니와 함께 미사를 봉헌했을지 머리 속에 생생히 그려졌습니다. 사실 우리들 모두 그렇습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마지막 시간을 함께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대화를, 포옹을 할 것입니다. 다만 그것을 인지하지 못한 채, 지나고 나서야 지난번의 그 만남이 마지막이었음을 깨닫고 깊은 후회를 할 것입니다. 나의 일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나의 마지막 미사일 수 있고, 나의 마지막 여행일 수 있고, 나의 마지막 식사, 산책이 될 수 있습니다. 늘 당연하던 나의 호흡도 마지막엔 마지막 들숨에, 날숨에 가 닿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잊지 않고 매일을 살아간다면, 우리는 보다 더 깊이 ‘지금’에 감사하며 삶을 향유할 수 있습니다.
사랑받는 사람이 되자 <요한 12, 1-11> 3월 29일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하느님은 만인의 사랑 받으셔야 합니다. 사랑받기 위해서는 사랑해야 합니다. 오늘 주님은 나자로의 집 마리아에게 최대의 사랑을 받으시는 광경은 이미 나자로를 죽음에서 살리시고 서로 사랑하는 관계로 만남이 있었기에 그 값나가는 향유를 깨버리고 주님의 발에 붓고 여인의 귀한 머리카락으로 씻어드리는 광경은 참으로 주님이 사랑받는 광경이었습니다. 다만, 시기와 욕심을 가진 사람은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어야 한다고 하지만 주님은 사랑해서 사랑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하십니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으셔야 합니다. 천지가 생기기 전에 하늘과 땅을 만드시어 세상에 생명을 지니고 사는 모든 피조물에게 생명을 보존하도록 태양을 주시고, 하늘에 공기를 주시어 태양의 힘을 받고 숨을 쉬면서 생명을 보존하도록 하셨습니다. 땅에서 생산되는 온갖 먹거리는 살아가기에 넉넉하게 주셨으니 감사와 사랑을 주어야 합니다.
성주간 이제 본격적으로 주님의 십자가를 묵상하며 이 사랑의 도구를 통해 우리가 모든 죄에서 해방되고 영원한 생명을 받게 되었으니 항상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시간에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지 못하고 내 일, 내 생활에 몰두하여 성주간을 지내려고 하면 사랑받기 힘이 들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크거나 작거나 사랑해야 합니다. 나폴레옹이 코르시카섬에서 가난하게 자라면서 다른 아이들은 맛있는 사과를 사 먹는데 저 멀리서 구경만 하던 학생 나폴레옹에게 과일 가게 주인이 찾아가 사과를 하나씩 주었는데, 나중에 황제가 되어 과일 가게 찾아온 이야기는 감동이었습니다.
이같이 사랑의 기회는 많이 있으나, 관심과 배려가 없어 사랑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세상에 사람들의 큰 성장은 사랑이 모여 힘이 되어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됩니다. 구원의 역사는 지금 가까이 있는 사람을 사랑하면서 만들어집니다. 각자는 사랑의 역사가가 되어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나가야 합니다.
저는 아침이면 행복한 시간을 만나게 됩니다. 10년 이상 병석에 누워계신 수사님을 봉성체 해주면서 성체를 드리고, 안수하고, 안부를 묻고, 어려운 점을 말해주고, 복음 말씀의 중심을 전해주면서 내가 행복한데 하루는 “저는 신부님을 보고 만나며 행복합니다.” 하는 말을 듣고 “수사님으로 인해 내가 더 행복합니다.” 합니다.
오늘 우리는 나로 인해 내 주변의 사람이 행복해지도록 사랑을 찾아야 합니다. 하루는 대구 북부에서 안동으로 가려고 버스를 탔는데 버스 차장과 손님이 큰 소리로 싸우면서 차비가 없으면 내리라고 하고 한 번만 봐달라고 합니다. 그리 멀리 가지도 않는 사람은 돈이 없다고 하고, 차장은 달라고 하고 버스 안에 시끄러워 제가 차비를 주어 조용해졌습니다. 한 사람의 희생은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합니다. 사순절 나의 겸손과 희생심이 많은 이를 행복하게 하면서 사랑하고 사랑받는 분위기를 만들어나갑시다. 나는 눈곱만큼도 손해 보지 않으려면 “사랑은 인제 그만” 입니다. 몸을 낮추고 나를 내주면서 사랑하는 사람은 죽어서도 보상을 받게 됩니다.
성삼일에 보여주는 하느님의 사랑에 집중하여 부활의 영광과 기쁨에 참여하도록 기도합니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우리 모두는 지난 날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실수였든 잘못이었든, 의무였든 애덕이었든, 양보였든 배려였든지, 드러내고 자랑할만하지 않은 그림자들이 있습니다. 각자 정도 차이가 있겠지만 자신의 고의로나 작위나 부작위로 그리고 의식으로나 무의식으로 저지른 부끄럽기도 하고 두렵기도 한 과거가 있습니다. 심지어는 자신이 기억하지도 못하는 것도 있습니다. 어떤 때는 언뜻 언뜻 그 기억의 부분들이 떠올라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합니다. 그것들이 크고 작든 간에 ‘드러나지 않고 용서받았으면 좋겠다.’ ‘드러나더라도 심하게 벌을 받지 않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마음속으로 졸이며 살아가기도 합니다.
그러한 우리의 처지를 너무나 잘 아시는 주 하느님께서는 오늘 독서에서 우리를 위로해 주십니다.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이, 내가 선택한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그는 민족들에게 공정을 펴리라. 그는 외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며 그 소리가 거리에서 들리게 하지도 않으리라.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그는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 그는 지치지 않고 기가 꺾이는 일 없이 마침내 세상에 공정을 세우리니 섬들도 그의 가르침을 고대하리라.”(이사 42,1-4)
왜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로해 주실까?
왜 주님께서는 우리의 부족한 점과 잘못을 일일이 나열하고 탓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위로해 주실까?
물론 이 위로는 우리가 잘못한 사실을 가려주고, 우리 때문에 알게 모르게 직간접적으로 피해입은 이들의 상처를 외면하거나 보상과 배상을 면제시켜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분은 세상에 공정을 세울 분이십니다. 그러시면서도 우리를 위로해 주십니다. 물론 나만이 아니라 나에게 피해를 입은 이 그리고 나에게 피해를 입힌 이들 모두를 위로해 주십니다. 그러나 공정을 펼치는 과정에서 우리를 위로해 주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잘못을 드러내놓고 외치거나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시고 공개적으로 비난하거나 망신을 주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잘못하여 넘어지고 부서진 우리 마음을 자비로이 헤아려주시려고,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며 용서해주십니다. 그러시면서도 우리의 양심이 흩어지지 않고 느슨해지지 않도록 일깨우시면서, 우리가 회개하여 배상과 보상을 통해 되돌이키고 다시 새 삶을 살 때까지 기다려주시며, 세상에 공정을 세우십니다.
“주님인 내가 의로움으로 너를 부르고 네 손을 붙잡아 주었다. 내가 너를 빚어 만들어 백성을 위한 계약이 되고 민족들의 빛이 되게 하였으니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이들을 감옥에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을 감방에서 풀어 주기 위함이다.”(6-7절)
주님,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시어 주님을 향한 새로운 마음을 넣어주시고, 우리가 잘못과 부족하고 미진하였던 순간들을 깨닫고 주님 사랑 안에서 회개하여 다 되돌이킬 수 있도록 해 주소서. 비록 지금 이 현세에서 되돌이킬 수 없는 것이라면 주님을 따른 봉사와 희생, 그리고 희사와 자선으로 갈음하게 해 주시고, 이 땅에서 가능한한 다 되갚고 주님께 돌아갈 수 있는 은총을 허락하소서. 아멘.
눈물의 향유
인영균 클레멘스 신부님
어제 저녁식사 때 보름달이 창문 밖에 환히 떠있었습니다. 달을 보며 정녕 파스카가 가까이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파스카는 춘분이 지난 다음 보름달이 뜨고 제일 먼저 오는 주일에 경축하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예수님도 보름달을 보며 당신이 곧 수난에 들어간다는 것을 깊이 예감하셨고 마음의 준비를 하셨을 것입니다.
진정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은 주님 수난을 준비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좋은 예를 보여줍니다. 베타니아의 마르타 마리아 라자로 집에서 마리아는 주님 발에 값비싼 향유를 붓고 머리카락으로 닦아 드렸습니다. 주님은 놀라운 이 행위를 칭찬하며 말씀하십니다.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요한 12,7).
성목요일 저녁부터 부활 날까지 거룩한 삼일을 복되게 보내기 위하여 우리도 마음의 향유를 준비합시다. 향유는 사랑의 상징, 헌신의 상징, 기도의 상징입니다. 머리카락으로 발을 씻는 행위은 우리 죄를 고백하는 행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진정 자신의 가슴을 치는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참회의 눈물이 향유가 되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오늘 미사 본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됩니다. 이 기도를 통해 겸손되이 우리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며 눈물의 향유를 바릅시다. 향유의 향기가 우리 주변에 퍼져나갑니다.
“전능하신 하느님, 저희가 나약하여 힘겨워하는 모습을 굽어보시고 외아드님의 수난으로 다시 생기를 얻게 하소서.”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다.”(요한12,3)
이민락 라우렌시오 신부님
+찬미예수님
해석의 다양함이 있습니다. 어떤 일과 행위를 두고 해석의 차이를 보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해석이 다양한 것은 보는 사람의 마음과 관점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특히 정치적인 사건의 경우 여야가 완전히 다른 견해를 주고받으면서 해석을 달리합니다. 사람의 생각이 다 똑같다면 얼마나 지루한 세상이 되겠습니까? 다양한 생각과 해석이 많으면 좋겠지만 의견이 다르다는 것으로 상대방을 틀린 것으로 단정하고 공격하는 것은 삼가 했으면 합니다. 해석의 다양성을 수용할 때 성장과 발전을 가져옵니다. 다양한 견해에 열린 마음이 사람에게 성장 발전을 가져옵니다. 자기만의 해석으로 아전인수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베타니아로 가십니다. 라자로의 동생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드립니다. 그러자 온 집 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 찼습니다.
그 광경을 본 제자들의 다양한 해석이 있었을 것입니다. 성경은 유다 이스카리옷의 생각을 적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도둑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돈주머니를 맡고 있으면서 거기에 든 돈을 가로채곤 하였다.”(요한12,5-6)
생각과 해석의 다양성은 존중받지만 이율배반적인 행위는 존중받지 못합니다. 성경은 평상시 유다의 행위를 지적하여 적어 놓았습니다.
좋은 행위를 좋게 보지 못하는 마음은, 자기의 이익을 우선시하고 삐뚤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또 이렇게 이율배반적이고 아전인수 격의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자신의 생각과 행위를 들키지 않게 숨길 수 있고, 남은 자신의 속마음을 모른다는 마음이 깔려있습니다.
하지만 숨길래야 숨길 수 없는 것은 하느님께서는 보고 아신다는 것입니다. 죄를 짓는 검은 마음과 타락한 마음은 하느님이 없음을 전제로 하는 마음들에서 생겨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마태6,4)
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 안에서 바른 생각과 좋은 마음을 가지도록 합시다. 다양성을 수용할 수 있는 마음으로 틀림이 아니라 다름을 받아들이고, 좋은 면을 먼저 볼 수 있는 넓은 마음으로 이끌어 주시길 기도합시다. 아멘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요한 12, 7)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사랑으로
빚어진
우리들이다.
가장 힘든
순간이
가장 큰
은총의
순간이 된다.
어둠을
향기롭게 하는
빛같은 향유가
있다.
사랑은
고통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에
함께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사랑이
있는지를
다시금 묻는
십자가의
시간이다.
사랑은
사라지지
않는다.
사랑은
우리의
약함까지
기쁘게
나누는
것이다.
슬픔과
약함을
함께 나누는
은총의
성주간이다.
만남과
헤어짐 사이에
우리가
살고있다.
삶의 진정한
의미는 바로
사랑이다.
사람의
존재이유또한
사랑에 있다.
모든 것은
때가 있다.
소중한 향유를
부어야 할
때가 있고
머리카락으로
발을
닦아드려야 할
때가 있다.
사랑하기에
슬프고
사랑하기에
아픈 것이다.
고통 속에서도
함께하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은
우리를
살게 해주는
모든 것이다.
사랑은
끝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다.
인생을
향기롭게
하는 것은
주님을 향한
사랑의 실천이다.
사랑은
이론이 아닌
실천이다.
하느님의
고통에
동참하는
사랑이다.
사랑과 고통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이다.
사랑을 위한
최선의 길은
고통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논쟁을 멈추고
사랑하는
예수님과
함께하려는
마음이 더더욱
필요한
성주간이다.
참된 사랑은
향기롭고
참된 사랑은
허물까지
닦아준다.
회개의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