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 50주년 기념행사 후기
-아름다운 인연, 영원한 우정의 잔치-
졸업 50 주년 행사의 참가 여부를 결정할 시기 한반도의 정세는 험악하였다. 북한은 핵실험을 강행하고 연일 대륙간 탄도탄을 쏘아 올리며 위협을했다. 실지로 하와이에서는 담당관의 실수로 공습경보 까지 내려 북한이 핵공격을 감행하는줄 알고 우왕좌왕 피할곳을 찾으며 가족들과 저승에서 만나자는 작별 인사 까지 하는 해프닝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고국을 방문한다는것은 용기를 지나 만용에 가까운듯 했다. 꼭 가고는 싶었으나 포기할까 생각하다가 좀 더 상황을 보고 결정하자고 마지막 마감일까지 확답을 하지 못했다. 이런 이유로 참가를 포기한 동문들이 많이 있었을 줄로 생각한다.
이런 상황에서도 미주 동기 동문 17명이 부부동반으로 참석했다. 김경인, 김명원, 김희주, 노영일, 송창호, 서윤석, 신규호, 신용계, 신홍식, 안세현, 유우영, 윤병인, 이건일, 이병순, 임공세, 차재철, 최철 등이다.
고국 동기들은 강조웅, 강조자, 김명석, 김상우, 김승일, 김윤, 김태기, 문난모, 신순철, 신애라, 박용현, 오찬규, 이석현, 이영, 이호성, 이홍규, 임윤명, 전병두, 조승열, 한덕호, 등 20명이 참석했다. 작고 하신 동문들도 14명이나 된다.
우리가 모교의 품을 떠난지도 반세기가 지났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 다는데 50년이면 다섯번은 변했을 것이다. 산천도 변하고 사람도 변하고 말까지도 변하였다. 민둥산은 푸른산이 되었고, 양철 스레이트 지붕은 하늘을 찌를 듯안 고층건물로 바뀌었다. 무슨 뜻인지 모를 단어들도 많이 생기고, 우리가 하는 말을 듣고는 미국에서 온 동포라는것을 쉽게 알아 차린다. 우리가 쓰는 한국말은 50년전 표준 말이다. 우리가 평생 지켜온 이념과 신념도 많이 바뀌었다.
우리는 미국에 살면서도 늘 고국의 놀라운 발전에 자부심을 가졌다. 고국이 잘 되어야 미국에 사는 우리도 위상이 올라가고 대우도 받게 되는 것이다. 거리마다 현대, 기아 차들이 달리고, 삼성폰, 삼성 컴퓨터, LG 전자제품들은 미국인 생활의 필수품이 되었다. 여자골퍼는 LPGA를 휩쓸고, 방탄 소년단은 틴에져들의 우상이 되었다.
우리는 이런 자랑 스러운 고국에서 가장 좋은 의과 대학을 졸업했다. 세계 어디를 가나 늘 자부심을 가지고, 또 그 자부심에 비례하여 모교를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국적은 바뀌어도 모교는 바뀌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마치 출가한 여인이 자랑스런 친정집을 다니러 오듯 먼길을 기쁜 마음으로 달려온 것이다.
10월 9일. 전야제 처럼 골프를 즐기는 동문들이 춘천 라데나 골프클럽에서 골프를 치며 오랜만의 만남을 워밍엎 했다. 마침 한글날 휴일이라 티타임 잡기도 힘들텐테 박용현 회장 덕으로 행운의 골프를 칠수 있었다. 아침 일찍 깨서 춘천으로 달렸다. 죽 죽 뻗은 고속도로와 주위의 풍경, 휴게실의 시설등은 세계 일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회장 친구들이라 VIP 대우를 하는지 직원들이 가는 곳마다 허리 굽혀 인사하는데 이런것에 익숙치 못한 우리들은 도리혀 거북하게 까지 느껴졌다. 이른 아침 식사도 잘 차려진 한식으로, 토스트 한조각으로 때우는 우리의 습관에는 과분하였다.
골프 카트는 희한하게 생겨 뒤에 골프 가방을 네개를 나란히 싣고, 앞에 네명의 골퍼들이 앉게 되어 있었다. 캐디가 직접 운전을 하거나 멀리서 리모트 컨트럴로 희한하게 정확히 카트를 움직인다. 미국에서는 이런 카트를 본적이 없다. 그래서 미국 촌놈이라 하는 것인가. 캐디들은 젊은 아가씨 들인데 거리를 아르켜 주는것은 물론 치는 요령등 약간의 코치까지 해준다. 프로 골퍼의 꿈을 접은 아가씨들이 캐디를 한다고 한다.
한 여성팀은 골프공이 분명 벙커에 들어 갔는데 가보니 깜족같이 없어져서 이상하다 했는데 다음 사람이 오다보니 여우새끼가 날름 골프공을 물고 숲으로 도망가는것을 보았다고 하여 한참 웃었다.
풀은 금잔디여서 이에 익숙하지 못한 우리는 좀 어려움을 느꼈으나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를 구경하느라 개의할 여유조차 없었다. 골프가 끝나고 목욕을 하고 또 거한 점심식사 까지 대접 받았다. 아마도 로마 귀족들이 이와 비슷하게 하루를 즐기지 않았을가 생각해 보았다. 돌아 오는 길의 교통정체는 시카고를 뺨칠정도 였다.
10월 10일. 모교 본관 현관에서 모였다. 반가운 오랜만의 해후였다. 서로 손을 잡고 얼싸 안으며 그동안의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본건물의 일부만 남아있고 생화학교실, 기초교실, 해부학실험실은 자취도 않보인다. 우리가 늘 모이고 가끔 시험도 치던 대강당도 모두 새로 꾸며 완전히 다른 공간이 되었다.
식순에 따라 국민의례에 이어 신찬수 학장, 서창석 병원장, 홍정용 동창회장, 김상우 동기회장, 신용계 미주 동기회장, 등의 인사말이 있었다. 22회 박용현 명예회장이 의대 발전기금을 전달하고, 신찬수 학장이 감사장을 전달했다. 신용계 미주 동기회장이 동창회 발전기금을 전달하고 홍정용 동창회장의 감사장 및 기념품 증정이 있었다. 이어 모교 홍보영상을 시청하고 축하 기념 단체사진을 찍는 것으로 기념식을 끝냈다.
모교의 이곳 저곳을 다니며 투어를 했다. 교육관 지석영 센터, 임상수기센터등 새로운 시설들을 돌아 보았다. 함춘원도 없어지고 건물들이 빽빽이 들어섰다. 시계탑은 보존되었으나, 내과 교실자리는 박물관이 되었고 우리가 청춘을 불사르던 임상강의실, 외래 진료실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서운한 생각이 들었다. 구미의 명문대학들은 몇십년 후에 돌아가도 옛 건물들을 보존해 추억을 되살릴수 있는데 너무나 빠른 발전의 후유증이 아닌가 하여 아쉬웠다. 구내 가든뷰 식당에서 창경원을 내려다 보며 점심을 먹었다.
식사후 남산 타워에 올라가 서울 시내를 내려다 보았다. 이곳이 내가 나고 살던 서울인가. 마치 외국에 온 느낌이다. 촘촘이 들어선 고층건물들, 특히 강남은 마치 신기루를 보는듯 했다. 호텔에서 잠시 쉬고 롯데호텔 만찬장으로 향했다.
칵테일을 들며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환담을 나눴다. 프로그람에 따라 이석현의 사회로 박용현 명예회장의 환영사, 신용계 미주 회장의 인사말, 김상우 회장의 업무보고, 문란모 재무의 결산보고둥이 있었다. 강조웅, 윤병인, 신애라의 선도로 축배를 들었다. 식사후 조승열의 22회 동문들의 역사, 노영일의 미주 동창 경험담, 현황, 업적, 친목등 슬라이드 쇼가 있었다. 음악대학 후배들의 사중창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단체 사진을 찍고, 시간제한 때문에 아쉬운 마음으로 모임을 끝내고 다음날 단체 일본 여행을 준비 하여야 했다.
10월 11일. 인천 제2 터미널에 모여 KAL 비행기를 타고 일본 나고야 국제공항으로 갔다. 인천공항은 초 현대식인데 이에 비해 나고야 공항은 초라해 보였다. 버스 두대에 나누어 타고 나고야 시내로 들어갔다. 본래 계획은 일본의 3대 명성인 나고야성을 관광할 예정이었으나 천수각 복원작업으로 입장 불가하다 하여 취소 되었다. 아쉬운 마음을 금할길 없었다. 나고야 TV 타워, 오아시스 21 옥상공원, 사카에 거리 등을 둘러보고 일본 3대 신궁의 하나인 아츠다 신궁으로 갔다. 날은 이미 어둑어둑하여 등불 밑에서 낭만적(?)인 관광을 하였다.
10월 12일. 호텔에서 조식후 시라카와 (白川)로 갔다. 이곳에는 일본 전통가옥인 합장촌 (合掌村) 마을이 있다. 지붕모양이 두손을 모아 합장한것 같이 보인다고 합장촌이라 한다. 초가지붕의 두께가 약 1 미터나 되는데 십년에 한번씩 갈아 주어야 된다고 한다. 이 지방은 산간지방으로 겨울에 눈이 엄청오는데, 눈이 쌓이지 않게 하기위하여 지붕을 급경사로 만든다. 4층집이 많은데 마루 바닥에 틈을 내어 온기가 윗층으로 올라가도록 설계가 되어 있다. 맨 아래 층에서 이로리 라는 화덕에 불을 때면 4 층 까지 열기가 올라 간다고 한다. 굴둑도 없고 그래서 호흡기 질환이 많다는데 내가 보기는 일산화탄소 중독이 더 큰 문제일것 같았다.
여기서 우나츠키역 (宇奈月驛) 으로 이동하여 쿠로베 (黑部) 협곡 도롯코 열차를 탔다. 본래 댐건설을 위한 자재운반용으로 만든 작은 화물차 인데 지금은 개조하여 관광열차로 사용하고 있다. 지붕이 있는 열차와 오픈카가 반반씩 있다. 쿠로베 협곡은 일본 최대의 협곡으로 46개의 터널과 27개의 다리를 지나며 절경을 감상한다. 만년설 이라고 코딱지만한 빙하도 보았다. 저녘에 다떼야마 고꾸사이 (立山國際) 호텔에 여장을 풀고 온천욕을 즐긴후 저녁식사를 했다.
식사후 서윤석이 졸업 50주년 기념 자작시 “우리가 걸어온길”을 낭독했다. 그리고 재담과 재치로 넘치는 이석현의 사회로 각자 한마디씩 소감, 덕담, 인생관등 즉흥 연설을 했다. 임윤명은 “본의 아니게 살아온 삶”을 유머러스하게 이야기 했다. 김경인은 긍정적인 사고의 중요성을 이야기 했고, 김명원은 동기들의 초상화를 그려 주겠다고 약속했다. 서상준은 노년기 운동의 중요성을 말했고, 신홍식, 안세현 장로님들은 인생의 종점에 다다른 우리들이 내세에 어디에 있을가를 생각해 보라고도 했다. 유일하게 남녀 혼탕을 다녀온 유우영은 감격하여 말도 잘 못했고, 그 부인은 소감을 물으니 그저 남편의 뜻을 따랐을 뿐이라고 했다.
10월 13일. 조식후 다테야마 (立山) 역으로 향했다. 여기서 소위 일본의 알프스라는 알펜루트 (Alpine Route) 를 관광했다. 케이블 카로 2450m 다테야마 (立山) 까지 끌려 올라가고, 트롤리를 타고 다테야마 터널을 지나, 로프웨이에 매달려 쿠로베 댐까지 가서 발전소를 구경했다. 다시 트롤리 버스를 타고 오오기사와 (扉澤) 까지 가며 단풍구경을 하였다.
저녁에 호다카소 상케쯔 (穗高莊山月) 호텔에 여장을 풀고 온천욕을 했다. 저녁 식사후 회장 인사말, 재무보고 등 간단한 순서를 마치고 단체사진을 찍었다. 다음 55주년 행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하기로 결정했다. 전 행사 기간동안 날씨가 매일 좋았다. 이번 행사를 위하여 희생적으로 애를 써준 박용현, 김상우, 이석현, 문란모, 임윤명, 조승열 동문들께 감사를 전한다.
10월 14일. 조식후 나고야 공항으로 이동, 항공로로 인천 공항에 도착하여 작별의 인사를 나누었다. 서울의대 22회 동기라는 우리의 아름다운 인연을 잊지말고 끈끈한 우정을 영원히 간직 할것을 무언으로 마음속에 새기고 섭섭한 마음으로 헤어졌다.
2018년 10월 시카고에서 노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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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사진은 기본 앨범에 더 있으니 참조 하십시요.
시차로 힘들었을 터인데도 이처럼 사진과 글을 만들어 주신 노영일 박사! 감사합니다. 두고두고 읽고 생각하겠습니다. 곧 발행되는 10월호 시계탑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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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찍느라고 먹는 것도 제대로 찾아 먹지 못하고 다니시더니 이런 훌륭한 기록물을 남기시는 군요. 기억력을 보니 앞으로 백수는 문제 없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예상대로 노영일선생님이 그 특유의 섬세한 솜씨를 발휘하셨습니다!
여기 Cafe에 들어오지 못하시어 이런 훌륭한 Posting을 못 보시는 분이 적지 않을터인데요 !
여기 한국에 계신 어떤 분이 제가 기념식 전에 여러 동기들과 인사를 나누던 중, 절 보고 누구냐고 물으시니 아무리 생각해도
참 기가막힐 노릇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