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락방
이명희
서너 바퀴를 돌았는데도 이십 여 년 전 거의 매일이다시피 드나
들던 곳을 찾을 수가 없었다.
적당한 곳에 차를 세우고 기억을 더듬어 본다.
“문디 가스 나들아, 고마 떨어져 다녀라. 누가 보믄 동성 연애
한다 하긋다.”
학교가 끝나면 자연스레 버스를 타고 친구의 집으로 향했다. 친
구의 어머니께서는 남편과 사별하고 서 너평 남짓한 곳에 작은
식당을 하고 계셨다. 억센 경상도 사투리가 사납게도 들리지만
친구 어머니의 아구찜 솜씨는 일품이었고, 마음씨 또한 정이 많
으신 분이었다. 어쩌다 비싼 아구가 몇 첨 들어 있을 때도 있었
지만 콩나물에 미더덕을 넣고 찜을 해주시면 아삭 아삭 씹히는
콩나물과 입안에서 톡 터지면서 알싸한 향기를 내며 오도독거리
는 미더덕은 바다가 없는 곳에서 자란 내겐 큰 별미였다.
산중턱에 길이 나있어 도로 이름이 산복도로라 일컫는 곳에 자
리한 친구 집을 자주 가는 이유중 하나는 그곳에 바다가 훤히 내
려다보이는 다락방이 있기 때문이었다. 큰 키의 나는 구부정하게
허리를 굽히고 들어가야만 하는 불편한 곳이었다.
창문을 열면 크고 작은 화물선들이 정박해 있는 우리나라의 가
장 큰 부두들이 있고, 화려하고 멋진 여객선들이 선착장에 줄지
어있는 정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밤이 되어 내려다보면 바다에
온갖 불 빛 들이 꽃밭을 이룬다. 내겐 그 야경이 마치 이국 땅에
와 있는 것만 같아 황홀했다. 사진으로만 보았던 홍콩의 야경이
저리 아름다울까? 이태리의 나포리 항이 저리도 아름다울까? 저
배만 타면 나의 꿈을 이룰 수 있는 곳으로 갈 수 있을 텐데, 상
상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수평선 너머 고깃배의 작은
불빛은 고향집의 호롱불을 생각게 하고 어머니를 더욱 그립게 만
들었다.
당시 나는 현실에 안주하지 못하고 꿈과 이상을 오가던 여고 시
절이었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채울 수 없는 지적 갈
망으로 고민하고 방황하던 때에 '전혜린'란 작가를 책을 통하여
접하게 되었다. 사진 속의 불꽃과 같은 광채를 가진 검은 눈동자
는 나를 강하게 이끌었고, 자유스런 그의 사고와 정열은 나를 잡
아끌기에 충분했었다. 그녀는 끊임없는 예술 창조에 열정을 바치
며 일하였지만 31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그녀는 나의 우
상이 되어 있었다. 그녀의 영향이었는지 나는 나이 먹어 추한 모
습을 보이기 싫어 삼십세가 되면 죽으리라고 입버릇처럼 · 주절대
던 때도 있었고, 갑갑한 현실로 인하여 내부의 분열이 들끓던 때
도 버겁기만 했던 삶을 당장이라도 버리고 싶었다. 나의 이유 없
는 반항과 방황은 주위 사람들을 힘들게 하곤 했다. 내 몸 속에
서 숨죽이고 있던 나의 기질들이 불쑥 불쑥 튀어나와 나조차도
감당하기 이 들었다. 이룰 수 없는 이상 때문에 고민하고 좌절
했던 그 시절 친구 집의 다락방은 나의 안식처 였고 교화의 장소
였다.
다락방에서 내려다보이는 시커먼 바다가 나를 오라 유혹도 했지
만, 아침 햇살에 눈이 시리도록 푸른 바다는 희망과 그리움과 설
레임이 있는 곳이었다.
그 다락방에서 보는 바다는 단념하는 것을 가르쳤다. 겸손을
배우며 침묵으로 세상의 이치를 깨달으며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
주었고, 편협해진 마음을 넓히고 얌보하며 사랑하는 법을 심어주
었다. 내가 아닌 우리를 배우고 어울림과 감싸는 법을 알게 되었
다. 혼란스럽고 답답했던 여고시절은 큰 태풍이 지나간 은빛 모
래사장과 반짝이는 잔잔한 바다처럼 고요함으로 평정을 되찾았
다.
친구와의 지냈던 삼일간의 꿈같은 날들, 우리들의 이상을 꿈꾸
던 곳, 둘만의 간직한 비밀스런 이야기, 짝사랑하는 선생님의 이
야기로 날이 새는 줄도 모르고 이어졌고 어느 한쪽이 조용해져야
잠이 들곤 했었다.
갈래머리에 하얀 칼라 검은 주름치마의 우리 둘의 모습은 바래
지지 않는 사진이 되어 아직도 생생하다.
잘못하면 나쁜 길로 접어들었을 지도 모를 때에 친구어머니는
다정하게 맞아 주시고 나를 이해시키며 집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하여 주셨다.
이제 세월이 많이도 지나고 보니 지나간 것들이 자꾸 아쉽고 그
리워만 진다.
그 당시 무던히도 마음고생을 시켰던 오빠를 보면 미안한 마음
이 앞서고, 아이 엄마가 되어버린 지금도 그 시절로 돌아 간 듯
이 어리광이 부려지곤 한다.
지금 우리 아이들이 자기의 주장을 내세우며 마찰이 생기고 마
땅치 않은 모습들을 볼 때면 예전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이
해를 많이 해 주곤 한다.
몇 번이나 그 자리를 돌고서야 다락방이 있던 창문을 알아 볼
수 있었다. 급한 마음에 뛰어들어간 곳에는 젊은 아낙네가 있었
고 친구의 동향을 전혀 알 지 못했다. 주위의 할머니께 물어본즉
십여 년 전에 이사를 갔다고 했다.
연락도 전혀 되질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설렘으로 두근거렸
던 마음이 맥이 풀리고 말았다.
꼭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아 한숨에 달려 왔건만, 꿈꾸던 다락방
의 창문은 쇠창살이 쳐져있고 주위에 들어선 고층 아파트에게 나
의 여고 시절을 몽땅 빼앗겨 버린 것 같아 차라리 오지 말았으면
좋았을 것을 하는 후회가 되었다.
요즈음 같이 마음 고생이 심하고 외로울 때 그 친구의 다락방과
바다가 더욱 그립다.
난 그 다락방이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바르게 살아갈 수 있게
된 것 같다.
지치고 외로울 때 내 마음속의 다락방에 어느 누가 와서 삶의
고단함을 풀어놓고 이야기로 밤을 지새며 함께 보낼 수 있을까?
다시 올 수 없는 나의 영원한 다락방이여!
2002년 12집
첫댓글 이명희 작가는 안타깝게도 몇년 전에 故人이 되셨습니다.
아직도 지난날 고인의 모습, 그 목소리가 귓가에 쟁쟁이 울려 옵니다.
요즈음 같이 마음 고생이 심하고 외로울 때 그 친구의 다락방과
바다가 더욱 그립다.
난 그 다락방이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바르게 살아갈 수 있게
된 것 같다.
지치고 외로울 때 내 마음속의 다락방에 어느 누가 와서 삶의
고단함을 풀어놓고 이야기로 밤을 지새며 함께 보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