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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5. 11.
누가 믿었느뇨
사53:1-6
1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목사가 설교 할 때나 교인들이 전도를 할 때 크게 오해하는 것이 있다면
설교나 전도가 누군가를 믿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즉 더욱 잘 믿도록 하고 큰 믿음을 가지도록 하기 위해서 설교가 필요하고,
안 믿는 사람을 믿게 하기 위해서 전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목적으로 설교하고 전도할 때
그 언어는 상대방의 이해를 촉구하기 위해서 구사되어지고
반발을 가져올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스스로 삼가게 되어지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의 상식적인 생각에 앞서서
과연 성경에서는 무엇을 말하는지 살펴야합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선지자와 사도들의 외침,
그리고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과연 우리 앞에서 등장하셨던 그분들은
어떤 의도로 설교하고 복음을 전파하셨는지를 살펴보고
그에 대한 정확한 진단아래 설교하고 전도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사람들을 믿게 해서 자기 백성이 되도록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이것이 예수님의 목적이었다면
세상에 오셔서 복음을 전파하신 예수님의 활동은
대 실패작이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전도에는 능력도 소질도 없는 예수라는 비판을 받아야 마땅할 것입니다.
예수님뿐만 아니라
구약의 선지자들 역시 이스라엘백성을 믿도록 하겠다는 의도로
하나님의 말씀을 외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마 믿도록 하겠다는 의도였다면
백성의 전체로부터 반발을 받고 화를 일으키는 말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것은 신약의 사도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렇다면 믿게 하기 위한 말이 아니라면 어떤 의도로 하는 말이었습니까?
그것은 한마디로 구별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의 뜻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뜻입니다.
즉 예수님이 오심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이지
자기 백성이 아닌 자를 자기 백성 되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전도는 역시 안 믿는 사람을 믿게 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백성과 백성 아닌 자를 구별하는 것이 곧 전도입니다.
구별함으로서 자기 백성 된 자가
확연하게 드러나게 하는 것을 가리켜 전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믿게 하는 것은 인간의 일이 아니라 성령의 일입니다.
그런데 내가 믿게 하겠다는 것은
결국 성령의 일을 인간이 가로채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믿음은 성령이 오셔야 가능한 일입니다.
따라서 자기백성이란 성령 받은 자로 인침 받은 자를 의미하는 것이고,
믿음이란 성령이 오시지 않고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것을 믿게 되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때문에 설교는 인간의 지식과 상식으로서는
결코 믿을 수 없는 말을 선포함으로서
믿음 있는 자와 믿음 없는 자,
즉 성령 받은 자와 성령 받지 못한 자가 구별되어지도록 하는 시간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도록 하기 위해서 남겨진 말씀이 아니라
성경을 통해서 누가 심판 받을 자이고 누가 하나님의 택한 백성으로서
구원받을 자인가를 구별하기 위해서 남겨진 계시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성령이 함께 하지 않는 자는
들어도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는 말로만 가득 차 있는 것이 성경입니다.
어둠의 시대에서는 행동과 성격, 성품 등 외형적인 것을 통해서 믿음을 구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만 이해할 수 있는 계시를 이 땅에 남겨놓으신 것입니다.
그것으로 내 백성을 구별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교회 역시 그 목적은 많은 사람들을 믿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누가 참된 하나님의 백성인가를 구별하기 위해서 존재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눈에 보이는 교회를 초월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이 눈에 보이는 교회를 초월하지 못하고 집착해 버릴 때
결국 사람숫자 늘어가는 것에만 재미와 보람을 느끼게 될 것이고
한 사람이라도 더 붙들어 놓기 위해서는
듣기에 거북한 말은 삼가야 하는 것이 당연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어둠의 세상 속에서 구별의 기능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1절에서도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합니다.
누가 '믿었느뇨' 라는 말은 아무도 믿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는 믿도록 하기 위한 마음으로 전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도 이 말을 누가 믿겠는가?
아무도 믿을 사람이 없다는 마음으로 전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무리 전해도 믿을 사람이 없다는 마음이라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전하는 것입니까?
설교하면서 이것은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고 이해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마음으로 전한다면
참으로 맥빠진 설교가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구별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처음부터 '믿을 사람이 없다'고 간주하고 주어집니다.
계시를 전해도 믿을 사람이 없는데 왜 계시가 주어집니까?
그것은 계시를 믿을 자는 오직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계시를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이해되고 믿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백성이기 때문에 믿음이라는 자질이 주어졌다는 것이 아니라
백성이기 때문에 성령이 오셔서 믿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말씀이 아무도 '믿을 사람이 없다'고 전제하고 주어진 말씀이라면
우리는 '예수 믿는다'는 말을 쉽게 생각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믿음이란
교회 다니면서 예배에 충실하고 세례 받고
직분 맡으면서 교회의 충실한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많은 자들은 믿음의 본질을 잘못 이해한 가운데
믿음 아닌 것을 믿음으로 여기면서 천국의 꿈을 꾸고 있습니다.
1절에서 누가 믿었느뇨? 라고 말씀한 뒤에
우리의 전한 것의 실체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과연 그분은 어떤 모습으로 오셨습니까?
즉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전한 언약의 실체이신 예수님이
많은 사람들이 기대하고 믿을만한 그러한 분이었나 하는 것입니다.
전혀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실망할 수밖에 없고 사람들이 거부할 수밖에 없는 그러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2절의 말씀입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은 참으로 참담한 모습으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 그 무엇보다 그 누구보다 천하고 약하고 비참한 모습이었습니다.
사람들로서는 흠모할 만한 그 무엇도 없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그러한 분이었습니다.
명색이 하나님의 아들로 오시고 구세주라는 메시야로 오신 분이
구태여 이렇게 참담한 모습으로 오셔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이 기대하는 구세주, 메시야는 영웅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영웅이란 사람들이 흠모할만한 많은 것을 소유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이 흠모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행운과 복이 아니면 소유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신의 도움이 아니면 가질 수 없다고 여기는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
그들은 타인에게는 영웅으로 보여질 수밖에 없고 흠모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영웅의 주위로 모여들면서 자신의 소망과 꿈을 이루어 주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영웅을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국가는 언제나 영웅적인 인물을 중심으로 탄생되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나의 국가와 나의 가정과 나의 행복한 삶이 이 영웅의 능력에 달려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렇게 볼 때 종교단체도 예외가 아닙니다.
흠모할만한 영웅적인 모습을 갖춘 목사를 찾고
그 목사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고 있다고 믿는 가운데
자신의 복이 그를 통해서 주어지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흠모할만한 조건이 없는 목사는 목사로서의 자질이나 능력을 구비하지 못한 자로서
종교인들로부터 거부를 당하고 배척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세상에 예수님께서 흠모할 만한 모습이 전혀 없이 오셨다면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와 반응은 뻔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요구하는 것을 전혀 제공해줄 수 없는 무능력한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사람들은 자칭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예수님께 몰려들었다가
전혀 기대할 것이 없다고 판단되자 모두 물러가고 말았습니다.
모두가 실망하였고 모두가 분하여 하였고 모두가 배척하고 거부한 것입니다.
이들의 배척과 거부는 단순한 배척이 아니라 인간 최악의 분노이고 잔인함의 극치였습니다.
인간의 악함을 드러내고 반증하기 위해서 철저하게 분노를 쏟아 부은 행동으로 나태 낸 것입니다.
그것이 3절의 내용입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라고 하십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라고 합니다.
이 말은 범죄자, 전염병자, 실패자, 문둥병자라는 말입니다.
즉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주어
두 번 다시 보고싶지 않은 범죄자와 같고 전염병자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워 외면하고 그분을 버리고
그분에게 온갖 인간의 악함을 인간의 분노를 다 쏟아 낸 것입니다.
더 더욱이 예수님이 멸시를 받고 버림을 받은 것은
흠모할만한 모습도 없이 오셨으면서 흠모하지 않고 배척한 것을
믿음 없는 것으로 책망하는 것,
이것이 영원히 하나님께 심판 받을 무서운 죄라고 정 죄 하신 것,
이것이 자기 백성이 아닌 자들의 더욱 분노하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자기 백성은 이러한 예수님을 받아 드리고
이러한 예수님을 흠모하는데 자기 백성이 아닌 자들은 분하여
자신의 악함을 그대로 폭로한 것입니다.
이것이 구별입니다.
흠모할만한 모습이 있는 자를 흠모하는 것은
사람에게 있어서 누구나 할 수 있는 자연스런 반응입니다.
그러나 흠모할만한 모습이 없는 자를 흠모한다면
그것은 결국 외형을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외형을 보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고 하나님의 세계입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고
하나님의 세계에 합당한 자로서
외형적으로 흠모할만한 모습이 전혀 없는 예수님을 의지하고 따를 것입니다.
4-6절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이 풍채도 없고 고운 모양도 없고 아름다워 흠모할만한 모습이 없이 오셔서
무시와 멸시를 받은 것은 사실은 우리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참혹하고도 비참한 모습으로 버림을 받는 것은
그 자리가 본래는 나의 자리입니다.
내가 멸시를 받고 버려져야할 더럽고 혐오감을 주는 죄인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 일으키고 철저히 심판 받아야 할 더럽고 흉한 죄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거룩하신 분이 이러한 죄인들을 대신해서
죄인들의 죄를 담당하시고 죄인의 자리에 서신 것입니다.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가 당해야 할 슬픔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고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해서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이러한 예수님에게서 자기 자신의 흉악한 죄의 모습을 보고
자신의 죄를 애통하면서 자신이 의지하고 붙들어야할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 뿐이심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자기 백성이 아닌 자는
외형적인 조건을 가지고 흠모할만한 것이 없다고 해서
오히려 예수님을 버리고 배척하게 됩니다.
이러한 자들은 선지자들이나 사도들이 전한 하늘의 메시지를 믿지 않고 거부합니다.
이들은 추구하는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에
자신들의 눈으로 바라본 예수님은 흠모할만한 것이 전혀 없었고
그분의 말씀은 들려지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배척하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누가 믿었느뇨?
아담 이후로 지금까지 수많은 역사 속에서
하나님께서 자기의 종들을 보내서 전한 그 말씀을
'누가 받아드리고 믿었느냐'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답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인간들은 눈에 보이는 가시적이고 외형적인 것에 가치를 두고 의미를 두고 사는 자들입니다.
육신의 욕망을 채우기를 원하고 그 육신이 번창해져서
세상에서 큰 자가 되고 영웅이 되기를 바라는 자들이기 때문에
이들이 찾는 자는 이 세상에서의 영웅을 찾을 뿐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시고
우리의 자리 저주의 자리에 서신 예수님을 믿을 수도 없고 인정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은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믿고
이 세상의 썩어질 것이 아니라
영원한 하늘의 보물의 가치 때문에 감격하고 감사해서 살게 됩니다.
너무나 다릅니다. 이는 하늘과 땅 차입니다.
인간의 지식과 상식으로는 거부할 수밖에 없는 예수님을
자신의 의요 생명이라고 고백하고 자랑하면서
그분으로 만족하고 기뻐한다는 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기적입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은 누구도 믿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 한국 교회는 십자가의 예수님은 실종된 상태입니다.
인간들이 꿈꾸는 번창케 하는 이 세상의 영웅적인 예수만 있을 뿐입니다.
십자가의 예수를 누가 믿었느뇨?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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