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말모이"의 모티브 >
ㅡ 1945년 9월 8일 만세소리와 총소리
( 영화 말모이는 1945년 9월 8일 벌어졌던 이 사건을 모티브로 만들었다 싶다. 사실 영화 줄거리는 짐작이 가고, 선악구도는 너무 평면적이지만 소재 자체가 감동의 원천인지라 몰입도가 높다. 국뽕을 진저리치게 싫어하는 편이지만, 사실 우리 말과 우리 글은 자긍심을 드러내도 전혀 꿀릴 것이 없는 적절한 국뽕 아이템이라고 생각한다. 영화 감상은 나중으로 미루고 영화의 모티브가 된 사건을 되짚어 본다 )
"역장님 이런 화물이 있습니다. 좀 보시지요." 서울역에 위치한 조선통운 운송부 창고에는 화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패전하자마자 본국으로 내빼버린 일본인들도 상당수였고, 빈틈없이 조선 땅을 얽어매고 있던 행정 조직이 부치고 받을 화물도 엄청났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 와중에 노동자들이 들춰내서 찾아온 화물은 역장의 눈을 번쩍 뜨이게 했다. "아 이거 며칠 전에 그 사람들이 그렇게 찾으려 했던......"
며칠 전 각지의 사투리를 쓰는 일군의 사람들이 조선통운으로 몰려 왔었다. 그들은 해방 뒤 감옥에서 풀려났다는 학자들과 경성제대 학생들이었다. 감옥에서 갓 풀려나 콩밥 내음이 가시지도 않은 몸으로 그들은 뭔가를 애타게 찾고 있었다.
그들이 찾고 있는 것은 1929년 8월 조선어사전편찬회가 결성되면서 본격적으로 작업이 시작됐던 조선말 큰사전의 원고였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 때 10년을 쌓아올린 원고가 일경에게 증거물로 압수되었으며 항소 와중에 함흥에서 경성으로 실려 왔을 것이라는 것이 그들의 얘기였다.
하지만 남산만큼 쌓인 화물 더미에서 뭘 어떻게 찾을 것인가. 그들이 어깨를 늘어뜨린 뒤 돌아가야 했다. 역장은 대번에 인부들이 찾은 화물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아 이것이구나.
소식을 듣고 득달같이 달려온 학생들과 학자들은 원고를 확인한 후 만세를 부르며 환호했다. 그들이 애타게 찾던 바로 그 화물이었다. 그 일원이었던 김병제의 표현에 따르면 "원고를 담은 원고상자를 여는 이의 손은 떨렸고, 원고를 손에 드는 이의 눈에는 눈물이 어렸다." 그것 무려 원고지 2만 5천 5백장의 분량의 조선말 큰사전의 원고였다.
1894년 “법률칙령은 모두 국문으로 본을 삼고 한문 번역을 붙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국한문을 섞어 쓴다”고 고종이 칙령을 내리면서 한글이 공식 문자로 채택된 이후 ' 조선어 사전'은 커다란 숙제이자 염원이었다. 그 움직임의 중요한 새암이자 원천이었던 주시경이 단명한 이후로도 그 후학들은 끈질기게 이 작업에 몰두했고 그 결실을 맺으려던 것이 조선말 큰사전이었다. 하지만 1942년 문제는 엉뚱한데서 불거진다.
함경남도 홍원경찰서의 악명 높은 사찰 형사 중에 야스다라는 녀석이 있었다. 그는 원래 안정묵이라는 조선인이었다. 역전을 사찰하던 그의 귀에 한 여학생의 조선말이 걸렸다. 1938년 제3차 조선교육령을 공포해 조선어를 필수과목에서 제외하고 "가능한 교과 과정에서 제거하도록" 하고, 관공서에서의 조선어 사용을 금지하는 등의 '국어상용령'이 내려진 이후, 공공연한 조선어 사용을 불령선인의 조짐으로 보아 왔던 터라 이 창씨개명한 조선인 형사는 신경을 곤두세웠고, 여학생을 조사하던 중 그 일기장에서 "국어를 쓰는 학생에게 벌을 주었다."는 대목을 발견한다.
이 국어가 일본어라고 여긴 야스다는 벌을 준 선생이 누구인가를 추궁했고, 그 와중에 조선어학회 회원이었던 정태진이 걸려든다. 그 뒤로는 줄줄이 소시지였다. 이윤재, 한징, 이극로, 정인승 등 수십 명이 엮여 들어갔고 한때 울산이나 마창처럼 "공안 수요가 많은 지역"으로 통했던 함경도 경찰의 새디스트들은 환호를 부르며 그들을 맞았다. 그 지독한 심문 과정에서 이윤재와 한징은 옥사하고 만다.
이들에게 적용된 법은 치안유지법이었다. 치안 유지법 1조는 이러하다. "국체의 변혁 또는 사유재산제도의 부인을 목적으로 하는 결사의 조직 및 가입 그리고 목적 수행을 위한 행위자를 처벌할 수 있다." 즉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법이었다. 그 법을 집행하는 자의 의지와 기호에 따라 "국체의 변혁"을 기도하였다고 하면 그만이었고, 조선어학회의 조선어 연구는 그 자체로 '국체의 변혁'을 기도하는 중대한 사상범이었고 '조선말 큰 사전'은 중요한 압수물이었다.
이쯤 되면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얘기가 된다. 그들은 일제판 '국가보안법'의 희생자들이었고, 조선말 큰사전은 일제판 '국가보안법' 상의 중대한 증거물이었던 것이다. 일제 법정의 판결문은 이렇게 못박고 있다.
"고유언어는 민족의식을 양성하는 것이므로 조선어학회의 사전 편찬은 조선민족 정신을 유지하려는 민족운동의 형태다."
이렇듯 고유언어 연구 = 민족의식 양성 = 민족 운동이라는 해괴한 3단논법은 해방 후로도 '국가보안법'의 이름으로 오랫 동안 한국인들을 괴롭히게 된다. 이를테면 정부 비판 = 북한에 이익 = 국가안보에 위협 식으로.
각설하고 잃어버린 줄로만 알았던 조선말 큰사전 원고를 손에 쥔 국어학자들과 학생들은 만세를 부르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1945년 9월 8일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만세를 부르던 바로 그 날, 인천 부두에서는 일본 경찰의 총소리가 울린다.
이 날은 한반도 남부를 점령할 예정이던 미군 24군단의 선발대 제 7사단이 상륙하는 날이었다. 해방군 미군을 환영하려고 몰려든 군중들에게 그때껏 치안을 장악하고 있던 일본군 경찰이 총을 쏘았고 노조 지도자 권병권과 이석구 등 2명이 죽는다. 상륙한 미군은 일본 경찰의 행동을 치안 유지를 위해 필요했던 행위로 인정하고 아무런 책임 추궁을 하지 않는다. 새로운 역사의 어이없는 서막이었다.
조선어 큰사전도 빛을 보았지만 조선어 큰사전을 지하에 묻어 버리려 했던 치안유지법도 그 사망 직전에서 화려하게 되살아난 것이다.
ㅡ From 후배 김형민P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