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살 행각승이 되어야겠다고 마음먹다’
“세상에서 출세하는 사람이야 많지만, 출가하여 부처가 되고 조사가 되는 사람은 아주 드물거든.” 어머니의 이 한마디에 스님이 될 것을 결심한다.
‘19살 출가 참선하여 자기 마음자리 깨닫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다’
역대 전등 조사와 고승들의 수행과 깨달음에 관한 이야기를 읽으며 매우 통쾌함을 느끼고 탄식하면서 스님은 말한다.
“이것이 바로 내 마음이 즐거운 일이구나.” 그리고 바로 출가하여, 마음을 가다듬어 오직 한 가지 일을 참구했다.
‘20살 청년 승려로서 참선 수행을 하다’
“운곡대사가 천계사에서 선기(禪期)를 정하고, ‘염불하는 것은 누구인가?’하는 공안(念佛公案)을 받아 참선 수행을 시작했다.”
‘27살 행각을 떠나 선사들을 만나다’
“어디서 왔는가?” “남방에서 왔습니다.” “온 길을 알고 있는가(記得來時路否)?” “한 번 지나온 길은 놓아버립니다(一過便休).” “자네가 온 곳이 이미 분명하네(子거來處分明).”
‘31살 고요한 경지를 체득하다’
“고요함이 지극하면 빛이 일체에 두루하고, 적연한 비춤이 허공을 머금는다. 알고보면 관세음보살도 꿈속의 일일뿐이다 라더니 부처님 말씀이 참으로 나를 속이는 것이 아니었구나.”
‘40살 동해 지방을 교화하다’
“삼보(佛法僧)가 있다는 것을 모르는 동해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불법을 전파했다.”
‘50살 관재를 당하여 유배되다’
“부처님께서는 한 중생이라도 건지기 위해 삼악도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지금 동해 지방은 궁벽한 시골이라 이제껏 삼보라는 말을 들어보지도 못했으나 내가 여기 와서 12년 동안 교화한 뒤로 세살 먹은 아이들까지 모두 염불을 할 줄 알게 되었으니, 마을마다 집집마다 사람들이 모두 ‘그릇됨을 버리고 올바름으로 돌아간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으니, 죽어도 유감이 없습니다. 다만 본사를 중수하겠다고 한 뜻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 가슴 아플 뿐입니다.”
‘53살 법화경을 강의하다 현보탑품에 이르러 그 뜻을 환희 깨닫다’
“사바세계 모든 사람들의 목전에 화장세계가 있으며, 그것을 보려면 세 가지 변화가 필요하지만, 가장 근기가 하열한 사람들도 능히 해낼 수 있다.”
‘56살 조계 도량을 회복하다’
“육조(혜능)의 도량을 복구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사람 다니는 길과 물길을 새로 내고, 스님들을 선별하여 계를 주었으며, 학당을 설립하여 사미들을 길러냈다. 또한 고사청규를 제정했으며, 전답의 지세를 징수하고, 사중의 재산을 다시 사서 되찾았고, 침탈되었던 땅을 회복했다. 그리하여 1년도 되지 않아서, 백년이나 내려오던 폐습을 일거에 제거할 수 있었다.”
‘61살 유배에서 풀려나다’
“화제의 장손이 태어나자 황제는 은사를 베풀어 유배당한 사람들 중 늙고 병든 사람들과 억울하게 유배당한 사람들은 그 사유를 설명하면 석방하게 했다. 나도 그 범주에 들어, 군문에 가서 신고하고, 다시 심사한 뒤에 드디어 석방되었다.”
‘78살 조계에서 입적하다’
“너희들은 마땅히 생사의 문제가 크고, 죽음이 금방 닥쳐온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간절하고 실답게 염불을 해라”
“내가 보건대 범과 이리를 업신여기는 사람도, 업신여기기는 하면서도 늘 겁을 낸다. 잡아먹힐까 두렵기 때문에 늘 겁을 내는 것이다. 색욕이 사람에게 끼치는 해악이 어찌 범이나 이리만 못하겠는가. 사람들은 그것을 업신여기면서도 즐기고, 다 잡아 먹히고 나서도 즐거워하며, 태평스럽게 그것을 겁낼 줄 모르니 큰 잘못이다. 범이나 이리는 몸뚱이만 잡아먹지만, 색욕은 성품을 잡아 먹는다.”(199쪽)
<감산자전>은 운서 주굉, 자백 진가, 우익 지욱과 더불어 명대의 4대 고승으로 일컬어지는 감산 스님(1546~1623)이 자신의 평생사를 기술한 일종의 자서전이다.
감산 스님은 화엄경 법화경 능가경 능엄경 금강경 기신론 등 주요한 대승경전과 노자 장자 대학 중용 등 중국 고전들에 대한 탁월한 주석서들을 저술하여, 사상적으로 비교적 침체기에 있던 후기 중국 불교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특히 감산 스님은 달마에서 육조로 이어지는 선(禪)의 명맥을 복원한 당대 최고의 선승으로 평가받는다. 또 온갖 시련을 겪으면서도 한시도 전법과 수행을 놓지 않았던 스님은, 오늘의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진정한 스승이었다.
이 책의 원제는 <감산노인자서연보실록(감산노인자서연보실록)>으로, 문학적 전기라기보다는 년 단위로 주요 사건을 기록한 개인적인 행적의 기록에 가깝다. 매우 간략하게, 주로 자신의 직접 체험을 중심으로 기술되어 있으며, 당시의 상황에 대한 충분한 배경 설명이 없는 대목이 많다. 그러나 중요한 시기의 이야기들은 주변 인물들과의 구체적인 대화나 사건 전개를 상세히 묘사함으로써 당시의 정황을 생동감 있게 전해 주고 있다. 특히 젊은 시절 도처로 행각을 다니며, 깨달음을 열어가는 이야기는 경이롭기까지 하다.
감산 스님의 일생은 관재를 당하기 전인 50세 이전과 그 이후의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26세에 행각에 나선 스님은 남경의 보은사에서 출발하여 북경을 거쳐 오대산에서 수행했다. 그 뒤 산동성의 뇌산에서 오래 교화하다 50세에 광동성의 뇌주로 유배 되었는데, 유배 기간 중에는 광주와 조계에서도 머물렀다. 유배에서 풀려난 뒤에는 조계를 비롯한 광동성 일대를 옮겨 다니다가 68세에 호남성의 남악, 그리고 72세에 강서성의 여산에 정착했다.
부록으로 <감산서언>과 <동유집 법어 3칙>을 실었는데, 본고에서 스님의 행장을 눈으로 보며 감화를 받았다면, 여기서는 스님의 핵심적인 가르침을 정리하고 다시금 마음에 새기기에 충분하다.
<감산서언>은 감산 스님이 30대 초반에 쓴 최초의 저작으로, 불교 용어를 거의 쓰지 않으면서 삶의 교훈을 설하는 경구집이다.
이 저작은 노자의 <도덕경>을 본뜬 옛 문체로 되어 있는데, 비유와 대구를 통한 간결한 표현 속에 삶에 대한 근원적 성찰을 담았다.
<동유집 법어 3칙>은 참선, 염불, 지주라고 하는 불교의 주요한 세 가지 수행법에 대한 스님의 관점을 밝혀주고 있다. 특히 참선에 있어서 화두를 참구하는 요체는 연구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근저에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이러한 가르침은 훗날 허운(虛雲) 스님에게로 계승된다.
“불조는 일일이 지침을 주어 여러분으로 하여금 자기를 참구하라고 했지만, 이는 그 현묘한 언구의 의미를 찾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요즘 사람들은 참선 공부를 한다면서 누구나 화두를 보고 의정을 일으킨다고 말은 하지만, 뿌리를 추구하는 법은 모르고 화두 상에서만 추구하여 오나가나 그런 식으로만 공부합니다. 그러다가 홀연히 마음에 어떤 광경이 일어나면, 자기가 깨쳤다고 하면서 게송을 읊고, 기이한 것을 만들어 내고는 자기가 그것을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바로 자기가 망상지견의 그물에 떨어진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참선 수행의 핵심’중>
이 책은 순천 송광사에서 출가한 대성스님이 번역했다. 스님은 <참선요지>와 <방편개시>(여시아문)를 우리말로 옮겼으며, 최근에는 라마나 마하르쉬 관련 서적들을 ‘아루나찰라 총서’(탐구사)라는 이름으로 번역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