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하는 박종인, 그녀를 만나러 갔다
나는 지금 그녀를 만나러 가는 길입니다.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저도 가슴이 헛헛해 가만히 앉아 있기 어렵습니다. 너무나도 황망하게 하늘로 가버린 최진실, 그녀가 그리워 그녀를 따라 길을 떠납니다.
북한강변에는 곳곳에 그녀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그녀가 잠들어 있는 갑산공원 묘역이 양수리를 내려다봅니다. 북한강 건너에는 그녀가 땀을 흘렸던 남양주종합촬영소가 있습니다. 뿐인가요. 온국민 애간장을 태웠던 드라마 ‘장밋빛 인생’의 마지막 장면, 맹순이 가족이 평화롭게 산보하던 갈대숲도 있습니다. 너무나도 찰나적인 행복을 누렸던 영화 ‘편지’의 애잔한 장면들이 이 강변에서 그녀를 그리워합니다. 이 찬란한 가을을 그녀가 보고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출발은 서울입니다. 서울을 벗어나 6번국도를 타니 팔당호반까지 금방입니다. ‘양수리’ 이정표를 보고 내려와 양수리로 가니 양수교 초입에 삼거리가 나타납니다. 꽤 복잡한 읍내를 지나고, 공사 한창인 건널목을 우회해 강변길로 올라섰습니다. 가을바람에 강변은 낭만적이기 짝이 없는데, 라디오 음악은 우울했습니다. 나는 지금 그녀를 만나러 가는 길입니다.
- ▲ 최진실이 잠든 곳, 갑산으로 가는 길
그녀가 잠든 곳, 갑산 가는 길
오른편으로 갑산공원이라는 이정표가 나타납니다. 그녀가 잠든 공원묘역입니다. 서울 근교라고는 믿을 수 없는 한적한 가을 풍경이 펼쳐집니다. 노릇노릇 익어가고 있는 논과 황톳길, 그리고 시끄럽기까지 한 풀벌레 울음소리…. 그 처연함을 스치며 산길을 오릅니다.
그녀가 마지막 간 길은 아늑합니다. 고개를 돌아 반쯤 포장된 오르막은 하늘이 뵈지 않을 정도로 숲이 우거져 있습니다. 멀리 다람쥐 꼬리만한 하늘이 보이는 곳에서 길을 멈추고 생각에 잠깁니다. 저 산모롱이만 돌면 그녀가 있습니다. 하늘로 떠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이 아늑하고 평화로운 공간에 그녀가 쉬고 있습니다.
산모롱이를 돌자 눈 앞에 묘역이 보입니다. 그녀는 이 묘역 맨꼭대기, 맨 오른쪽 ‘마므레동산’에 안식하고 있습니다. 그녀가 다니던 교회의 안식처입니다. 마므레는 기독교 구약에서 아브라함이 세 천사를 영접한 곳입니다. 천사 같았던 그녀, 참으로 천사를 만나 웃고 있기를 바랍니다. 멀리 마므레동산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제 가슴은 진한 물기로 가득 차오르기 시작했습니다. 한번도 만나지 못한 사람임에도, 이제는 영영 보지 못한다는 생각이 물기로 변해 가슴을 채웁니다. 그녀는 거기에서 꽃이 되어 있었습니다.
- ▲ 그녀는 꽃이 되었습니다.
제가 도착한 그 날, 아직 고인의 이름도, 사진도 새겨지지 않은 쓸쓸한 납골묘가 저를 맞이합니다. 앞에는 지인들이 가져다놓은 꽃들이 쌓여 있습니다. 햇살 따사로운, 양지바른 곳에서 그녀가 평화롭게 안식합니다. 그녀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앞으로도 오래도록 그녀를 찾아와 말을 걸겠지요. 새소리와 벌레소리밖에 들리지 않는 이 산중에 그녀가 외롭지 않도록 친구들이 찾아올 겁니다.
- ▲ 그녀의 친구들이 꽃을 선물했습니다.
그녀와 이별하고 내려오는 길, 아까 멈췄던 산모롱이에서 뒤를 돌아봅니다. 그 모습, 오래도록 기억하도록 한참을 쳐다봤습니다.
찰나의 행복, ‘장밋빛 인생’
갑산에서 내려와 오른쪽으로 계속 차를 몹니다. 방향은 가평쪽입니다. 화려한 카페와 먹음직한 식당이 즐비합니다. 그 복잡함을 애써 무시하고 길을 잇습니다. 끊어지지 않는 카페군(群)과 고개마루 끝에 신청평대교가 나옵니다. 좌회전을 하여 다리를 건넙니다. 그리고 서울쪽으로 잠시 좌회전해 강변으로 내려갑니다. 거기에 그녀의 찰나적 행복, ‘장밋빛 인생’ 마지막회 촬영지가 숨어 있습니다. 기억하는지요. 남편과 두 남매랑 떠난 마지막 소풍. 아이들 손을 잡고 갈대숲을 거닐고, 돗자리 펴놓고 소풍을 즐기고 햇살을 즐기던 병색 완연한 맹순이를. 그 장면을 이 다리 아래에서 찍었습니다. 대한민국 아줌마의 힘과 슬픔을 보여준 드라마였고, 그랬기에 마지막 소풍은 더욱 슬펐습니다.
- ▲ 드라마 ‘장밋빛 인생’에서 주인공 맹순이 가족이 마지막으로 떠난 소풍길이었습니다.
길을 찾기는 쉽지가 않습니다. 서울쪽으로 거슬러 갔다가 다시 내려와야 하니까요. ‘수상레저’ ‘견지낚시’ ‘놀이배 타는 곳’ 등의 간판이 보이는 강변으로 가세요. 다리가 왼편에 보이면 제대로 찾은 겁니다. 너른 자갈밭이 나오고 그 뒤로 교각들이, 갈대숲이 보입니다. 자갈밭 초입에 차를 세웁니다. 그 뒤로는 승용차가 들어가기 힘듭니다.
자갈밭을 따라 다리 아래를 지나 갈대숲으로 걸어갑니다. 드라마는 북한강과 갈대숲이 만느는 곳에서 찍었습니다. 맹순이가 남편 무릎을 베고 누운 곳은 갈대숲에서 북쪽에 있는 너른 터입니다. 갈대숲은 미로처럼 산책로가 나 있습니다. 나는 갈대숲 한가운데에서 한참을 서 있습니다. 이렇게 팍팍한 곳에서 그런 감동적인 장면이 나왔음도 그랬고, 현실세계에서 그녀가 경험한 많은 일들이 드라마에서도 유사하게 벌어졌음이 그랬습니다. 그녀가 다시 그립습니다.
그는 갔으되, 우리의 사랑은 - 경강역
강을 따라 춘천쪽으로 가면 영화 ‘편지’의 흔적을 만납니다. 가슴이 미어집니다. 대학원 강사인 정인(최진실)과 식물학자 환유(박신양)는 한 시골역에서 우연하게 만나며 사랑을 하게 되지요. 두 사람은 아늑한 수목원에서 사랑을 나누다 그 수목원에서 결혼을 합니다. 그 시골 역 이름은 경강역이고, 수목원 이름은 아침고요수목원입니다.
경강역에서 만난 두 사람은 수목원에 있는 ‘환유 나무’라 이름 붙인 소나무 아래에서 결혼식을 올립니다. 그리고 환유에게 찾아온 불치병. 환유는 죽습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환유를 나무 아래 뿌리고서 정인은 경강역 역무원이 건넨 비디오테이프를 틀어봅니다. 머리를 붕대로 칭칭 감은 암환자 남편 환유가 이리 말합니다.
우리의 기억이 남아 있는 동안까지는 이별하지 않는 거라 생각하자
그리고 나중에…나중에 이 다음에 이 다음에
시간이 많이 흐른 다음에… 다시 만나자. 꼭 다시 만나자.
더 많은 이야기는 않겠습니다. 정인은 그리 흐느껴 울었고, 나중에 아이와 함께 수목원으로 가서 그 옛날을 추억합니다. 영화가 그렇게 끝이 납니다.
- ▲ 정인과 환유의 사랑이 싹튼 경강역.
경강역은 경기도와 강원도계를 지나 춘천쪽으로 가다가 ‘경강역’ 이정표를 따라가면 나옵니다. 경강교라는 다리를 지나 바로 나옵니다. 경기도 너머 강원도 초입에 있다 하여 경강역(京江驛)입니다. 너무도 작기에 얼핏 그냥 스쳐버릴 수 있는 역입니다. 이 땅에서 드물게 보는 붉은 벽돌 역사입니다. 편지를 찍었다는 나무 팻말이 있지만, 무시해도 좋습니다. 눈을 돌려 역사 건물을 보는 순간, 나는 바로 그녀가 떠올랐으니까요.
- ▲ 경강역에 붙어 있는 최진실의 사진입니다.
작은 대합실로 들어가시면, 매표소 오른편에 붙어 있는 핸드프린트 복사본을 보십시오. 거기에 그녀가 있습니다. 어디에서 찍은 프린트인지는 모르겠지만, 가냘픈 그녀의 손바닥 흔적이 벽에 붙어 있고, 아래에 이리 적혀 있습니다. 영화 편지를 찍기 전에 만든 프린트겠지요. 앞으로 그녀가 그리우면 나는 이 작은 역으로 와서 그녀의 손바닥을 바라보며 추억에 잠길 터입니다.
최진실 1996
- ▲ 경강역에는 그녀의 흔적이 진하게 남아 있습니다.
마침 서울로 향하는 열차가 플랫폼으로 들어왔습니다. 영화 한 장면을 보듯, 뛰어가는 그녀, 열차에 황급히 올라가는 그녀가 환영(幻影)처럼 제 곁을 지나갔습니다. 다시 그녀가 그립습니다.
- ▲ 영화처럼, 경강역 플랫폼에 열차가 도착했습니다.
그녀의 영원한 안식을 위하여 - 환유 나무
경강역과 작별하고 서울로 향했습니다. 젊은이들의 피난처 대성리를 지나 현리 삼거리에서 우회전합니다. 11km를 가면 ‘아침고요수목원’이 나옵니다. ‘편지’에서 환유와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고, 그와 작별한 곳입니다. 이른 아침 서울을 떠나 갈수록 헛헛해져온 가슴, 수목원에서 위안을 얻습니다.
- ▲ 그녀를 보았습니다.
지금 수목원에서는 꽃들이 난리법석을 떨고 있습니다. 빨주노초파남보에 이르는 온갖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아침 광장’에 환유 나무가 서 있습니다. 영화에 나왔던 환유 나무는 사라지고, 거기에 늠름하게 잘생긴 소나무 하나가 고고히 서 있습니다. 앞에 팻말이 이르길, “환유나무 서 있던 곳”이라 합니다.
환유나무를 둘러싼 너른 잔디밭에서 두 사람이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그 아래 꽃밭 사잇길로 두 사람이 자전거를 타며 지나갔고 옆 잔디밭에서 두 사람이 즐거이 하루를 즐겼습니다. 보이시나요, 저 나무 아래에 찬란하게 빛났던 사랑과 행복이.
- ▲ 영화 ‘편지’의 환유 나무가 있던 곳에는 늠름한 소나무가 서 있습니다.
청천벽력 같은 환유의 암 발병 소식도 잠깐. 환유는 영원히 그녀 곁을 떠납니다. 혼자 남은 정인은 환유 나무 아래를 수시로 찾아와 추억을 살리지요. 영화 마지막 장면은 이렇습니다. 정인이 잉태한 환유의 아이와 환유 나무 아래에서 행·복·하·기. 그래요 하늘로 간 그녀, 부디 행복하길 빕니다. 그리고 살아남은 모든 사람들도 행복하길 바라고 또 바랍니다. 애틋한 사랑을 담은 영화가 이 수목원에서 탄생했지만, 지금 이 수목원에는 행복이 가득합니다.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 그녀를 그리워하는 모오든 분들. 행복하십시오.
이 찬란한 가을날, 그녀를 그리며 여행을 다녀온 박종인 드림.
- ▲ 환유 나무가 있는 아침고요수목원입니다. 부디 행복하시기를.
■ 매우 간단한 여행수첩
▲ 최진실의 흔적이 남은 곳들 (가는 방법은 각 홈페이지에 자세하게 있습니다)
1.갑산공원(www.chumo.net):경기도 양수리에서 가평으로 가는 강변도로에 있다. 양수리에서 택시로 가도 된다.
2.‘장밋빛 인생’ 찍은 곳:신청평대교 아래다. 찾기가 쉽지 않지만, 45번국도로 서울에서 춘천으로 가면 더 찾기 쉽다. 신청평대교로 올라가는 인터체인지 직전에 오른쪽으로 빠지는 길이 있다. 이후 주차하기 쉬운 곳에 차를 대놓고 다리쪽으로 도보로 이동할 것. 강변으로 갈대숲이 보인다. 길을 찾기 어려우면 청평대교 아래에서 ‘현대배견지 낚시’를 운영하는 송승호씨에게 연락할 것. 자세한 위치와 함께 시간당 5000원~1만원선인 나룻배를 빌려준다. (011)745-9498
3.경강역:서울 청량리역에서 경춘선을 타면 닿을 수 있지만 승용차가 훨씬 편하다. 갑산공원에서 가평으로 가다가 신청평대교를 건넌 뒤 춘천쪽으로 가면 경강교라는 다리를 건넌다. 1~2분 뒤에 ‘강촌’ ‘경강역’ 이정표 보이면 오른쪽 깜빡이. 2분 거리. 역사 안으로 들어가려면 입장료 500원.
4.아침고요수목원(www.morningcalm.co.kr):경강역에서 서울로 돌아오면서 대성리 지나 현리 삼거리가 나오면 현리쪽으로 우회전. 이후 길이 애매하더라도 다음 이정표가 나올 때까지 계속 차를 몰 것. 수목원 앞에 식당, 펜션들이 굉장히 많다. 입장료 평일 6000원, 주말 8000원. 현재 환유나무 주변 잔디밭은 양생중이라 출입금지다. 대중교통은 홈페이지 참조.
5.남양주종합촬영소(studio.kofic.or.kr):최진실이 잠든 갑산공원에서 강 건너 직선으로 있다. 각종 영화 촬영세트장을 볼 수 있다. 촬영소 앞에 식당, 카페 많다. 입장료 3000원.
▲ 먹을 곳:퓨전일식당 사각하늘(www.sagakhanul.com). 갑산공원에서 나와 서종면쪽으로 가다가 나온다. 서종중학교를 지나 아무도 볼 필요 없다는 식으로 걸어놓은 작은 간판을 보고 골목으로 들어가면 길 끝에 있다. 음식도 음식이지만, 그 인테리어를 자세히 볼 것. 인테리어 구경만으로도 발품 값은 충분히 나온다. 나베 정식코스 2만5000원부터. 예약 필수. 화요일 휴일.
- ▲ 최진실의 흔적이 남은 곳들. 지도